마관조약(馬關條約)과 하관조약(下關條約)
#들어가는 말
네이버 백과에서 마관조약에 관해 찾아보면,
"시모노세키조약 [下關條約(시모노세키 조약)] 청 ·일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해 1895년 4월 17일 청국
과 일본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체결한 강화조약." 이라고 되어있다.
과연 진실은 근세에 있었던, 마관조약이 현재의 일본 열도에서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까?
아래 글은 최찬동 저 "대동방씨족원류사"에서 발췌하였으며, 글 중 "중국역사지리"가 인용되어 있는
데, 책 편집상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인이 책에 나와 있는 원문 전부를 다시 해설하고자 합니다.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 3책≫> 中 778쪽에서,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에서
동남구(東南區)…
청시대에 동남 절浙 일대는 그 부유함이 천하에 으뜸으로, 경제도시로 성장하였으며, 도광제道光帝
시기 강화가 이루어져, 해금海禁으로 대 개방되어서, 전국 상선들의 집합처가 되어, 동남 연해는 전
국 경제의 흡입구가 되었는데, 우욱죽순雨後春筍으로 빠른 성장을 하였다.
(1)강령은 함풍8년(1858), 중.불 조약이 있었으며, 광서21년(1895). 중일 마관조약馬關條約으로 강령
을 상업지역 포구로 개항하였으며, 광서23년(1897) 성북城北의 하관下關에 부두를 열어, 호령로滬寧
路, 진포로津浦路의 종점 포구와 하관下關 사이 마주보는 곳이 되었다.
강령은 손孫씨의 오吳, 동진東晋,, 송宋, 제齊, 량梁, 진陳 남당南唐, 주朱씨의 명明나라로 8대 도읍이
되었는데, 용반호거龍蟠虎踞(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자리)하여, 극구형세極具形로 막부산幕府山
이 북쪽에서 서로 이어지며, 장강이 서쪽에서 고리처럼 둘러치고, 종산이 동에서 우뚝 솟으며, 우화
대가 남에서 가로막아, 가운데는 진 나라 시절 회하(淮河) 와 현무호玄武湖가 좌우로 띠를 두르며, 성
곽이 높게 솟아, 기상이 만천萬千으로 떨치고 있다.
강령 상업 또한 왕성하여, 더욱 이름을 드날려서, 현무호, 막수호, 우화대, 모두 다 눈 운동하며 놀기
엔 좋은 곳이다.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 3책≫> 780 쪽 에서,


첫댓글 <원문> 上元門: 在江蘇江寧縣北. 當長江濱. 東至觀音門十里. 西距下關十里.
[출처=胡毅華·徐鋒, 辛亥革命, 上海書店出版社, 2002년]
<번역문> 상원문은 강소성 강녕현 북쪽에 있다. 장강 가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관음문까지 10리이고, 서쪽으로는 하관까지 10리이다.
예전에 최두환 선생님이 올리신 글에서도 언급되었던 내용이군요... 다시 한 번 읽어보니까 기억이 납니다.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에 따르면, 1897년에 마관(馬關)은 하관(下關)으로 개명되었다고 하는데...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일본열도에 있는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역은 원래 '馬關'(ばかん; 바칸)이라 불리었는데, 1889년(明治 22년) 시제(市制)의 시행에 따라 '赤間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로 변경되었고, 1902년(明治 35년)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로 개칭되었다고 합니다.
[출처=http://homepage3.nifty.com/jpnships/meiji01/meiji01_kokunai_osk01_.htm]
1897년과 1902년.... 그 연대가 서로 다르게 나옵니다.
'赤間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는 1881년 신사유람단 이헌영의 <일사집략(日槎集略)> 지(地) 4월 14일(을사)에도 그 지명(地名)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산구현(山口縣)의 적마관(赤馬關)에 이르러 닻을 내렸는데 박다파(博多波)로부터 3백 50리이다. 이곳은 이른바 일본의 서해도(西海道)의 하관(下關)이라는 곳으로, 민가가 번창하기가 박다파(博多波)보다 낫고, 신당(神堂)의 새로 쌓은 석대(石臺)가 우뚝하게 바라보였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일사집략(日槎集略)>에 따르면, 1881년 무렵에 적마관(赤馬關)과 하관(下關)이라는 두 가지의 지명(地名)이 한 지역에서 같이 사용되었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참고로, '赤間關'는 본래 '赤馬關'라고 표시했으나, 한문풍(漢文風)으로 줄여서 '馬關'이라 표시했다고 합니다.
[출처=http://ja.wikipedia.org/wiki/%E4%B8%8B%E9%96%A2%E6%9D%A1%E7%B4%84]
또한 '下關'이라는 명칭은 1895년(明治 28년) 당시 강화조약을 공포한 문서에 '下ノ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에 유래한다고 합니다.
[출처=http://www.kawashimashin.com/09/essay/bakanjoyaku.html]
따라서, 1895년에 이미 '下關'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당시의 문서에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下關'의 본래 이름은 '馬關' 또는 '赤馬關'이라는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에 따르면, 광서 21년(1895년)에 청-일(淸-日) 마관조약(馬關條約)으로 강령(江寧)을 상업지역 포구로 개항하였고, 광서 23년(1897년)에는 성북(城北)의 하관(下關)에 부두를 열었다고 합니다.
마관조약(馬關條約) 때문에 결국 청국(淸國)은 강령(江寧)을 일본(日本) 측에 개항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만...
1895년 당시에 청국(淸國)은 '馬關'(마관)이라는 지명으로 그 조약(條約)을 통칭하였고, 일본(日本)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을 공포한 문서에 '下ノ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강령(江寧)=마관(馬關)=적마관(赤馬關)"이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최두환 선생님은 이른바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는 '馬關'(마관)이라는 지명이 강령(江寧) 지역에 나오지 않는다고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따라서, 최두환 선생님은 '馬關'(마관)을 대체할 수 있는 '下關'(하관)이라는 지명을 중국의 문헌에서 찾으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1895년 무렵... 대륙(大陸)의 강령(江寧)에는 '下關'(하관)이 아니라 '馬關'(마관)이라는 지명이 당연히 존재하였고 또한 실제로 사용되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증거를 먼저 찾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 본문에 인용된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의 내용은 그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보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최찬동 선생님의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에서는 1897년에 마관(馬關)은 하관(下關)으로 개명(改名)되었다고 하므로... 또한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에서 그 개명 사실이 직접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므로...
1897년에 청국(淸國)이 부두를 열었던 성북(城北)의 '下關'(하관) 지역은 그 개명 이전에 즉 1895년 마관조약(馬關條約) 당시에 그 공식 지명이 '馬關'(마관)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下關'(하관)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중국(中國) 남경(南京)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한국어)>에 따르면, "천진조약(天津條約)은 1858년, 애로호 사건 이후 청(淸)나라가 서양의 여러 나라와 맺은 여러 불평등 조약이다. 러시아(6월 13일), 미국(6월 18일), 영국(6월 26일), 프랑스(6월 27일)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광범위한 외국의 특권을 규정하고 있어, 이후 불평등 조약의 근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1858년 청국(淸國)과 프랑스(法國) 사이의 조약(條約)은 '강령'(江寧)이 아니라 '천진'(天津)에서 체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진조약(天津條約)과 1860년의 북경조약(北京條約)에 따라 청국(淸國)은 '강령'(江寧) 등 10개 항구를 결국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위에 일부 인용된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의 내용은, 대륙(大陸)의 '강령'(江寧) 즉 지금의 '남경'(南京)은 1858년의 천진조약(天津條約)과 1895년의 마관조약(馬關條約)에 의거하여 청국(淸國)이 외국(外國)에 개항(開港)하게 된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최찬동 선생님은 '강령'(江寧)을 그 조약(條約)들이 '체결된 장소'(체결지)라고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위에 인용된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의 내용에 오류가 있다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