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는 생성의 두 기본 형식을, 즉 성장과 변이를 구분했다. 변이는 개개의 생기가 자신의 생성이 완료된 다음에 그 기본 요소로서 다른 성장과정의 구조에 개입하는 한에서 역시 '건너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생기는 궁극적으로 유일한 실재다. 세계는 여기서 발생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이르기를 원자론적이라고 했다. 비록 그것이 고대 철학에서 말하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나 고전 물리학과 달리 쪼갤 수 없는 최소 물질에 대한 원자론이 아니라 생기에 대한 원자론이지만 말이다.
그에 비해 형식 요소는 (모형, 영원한 대상) 그 어떤 고유한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기에서 발생하는 만큼만 실제적일 뿐이다. 공간적 시간이 연속체가 이에 상응한다.
즉 광범위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잠재력일 뿐이거나 혹은 역으로 구체적인 생기를 추상화함으로써 일어난 결과일 뿐이다. 이 생기에서 실제적인 실체들과 앞서 있는 것들과의 관계가 생산된다.
모든 실재적인 것의 토대인 생기의 수다(數多)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원자론은 개개의 형이상학적 원자론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이 난제들은 플라톤이 쓴 ' 파르메니데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성된 것을 말한다.
일자가 없이는 그 일자와 상이한 것이 하나일 수도 없고 여럿일 수도 없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무(無)가 된다. 많은 하나는 그것과 동일한 것에서 온 (추상적 일자라는 의미에서) 여럿이다.
그러나 잇달아 관계를 맺은 여럿이기도 하며, 또한 전체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하나가 그 어떤 전체를 이루는 게 아니라면 역시 바로 그 일자를 예시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없다. 개개의 경우에 포괄적인 단일성이 전제되는 게 틀림없다. 이로써 원자는 단일성 일반으로 생각될 수 있다.
라이프니쯔의 경우에 단자가 신적인 원단자에서 기초된 우주의 단일성을 반사한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이런 생각에 의해서 우주의 단일성이 개개의 단자에게 주어졌으며, 이로써 그 단일성이 상호간에 조화를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개개의 생기는 자기로부터 벗어나서, 즉 자기 주관성을 통해서 세계의 단일성을 완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더욱이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우주의 단일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보증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자로 우주를 상대해 있는 분이 아니라 원시적인 본성에서 모든 영원한 대상의 장소일 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러한 내재적 관계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관계의 수다를 자발적으로 통합하는 개체적인 생기의 주관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개개 생기에게 자기를 실현하는 데 몹시 중요한 가능성이 생기가 이루어야 할 최초의 목표로서 제공한다.
그러나 이 생기가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현실화하는지는 스스로의 주관성에서 결정해야만 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의미에서만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이지, 개개 생기의 현존을 발생시키는 장본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생기는 오히려 자기의 주관성에서 창조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세계의 창조를 계속적인 창조로서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유와 그 피조물이 세계의 형성에 끼친 창조적 기여를 통합화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시야를 열어준다.
프리드리히 니체Nietzsche(1844-1900)는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포이에르바하의 책을 통해서 첫 번째로 정말 심각한 충격을 경험했다. 그는 본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슈트라우스의 '예수 생애'를 배우면서 아주 신속하게 기독교가 내면적으로 참되지 못하다고 확신하고, 고대 문헌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는 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포이에르바하Fouerbach(1804-1872)는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과 종교의 본질을 소름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규정한다.
인간의 본질은 의식인데 의식의 본질은 무한성이며 종교란 그렇게 무한성을 본질로 하여는 의식을 의식하는 것, 즉 무한자에 대한 경배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란 인간이 이미 희구하고 무한성을 무한자로 간주하고 이를 경배한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의 자기본질적 무한성에 대한 신격화의 산물인 신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종교라는 정의는 그의 투사(投射)론을 위한 대전제가 된다. 그런데 투사는 이미 인간의 본질 안에 그 근거가 있다.
인간이 자기의 무한한 본질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대상과의 관계에서인데 이때 대상이란 결국 주체의 변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로 인간이 그 무엇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을 주체로 확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투사성은 인식의 주-객 구도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속성이며 인간의 종교적 신관에서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것이 그의 통찰이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인간의 자기대상화 산물이면서도 그런 기원을 망각하거나 은폐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대립관계로 설정한다. 그러나 그런 대립은 사실상 인간의 보편적 본질과 개체적 실존 사이의 대립이며 결국 투사와 현실 사이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종교는 그렇더라도 자기 종교(혹은 자기 믿음)는 결코 인간의 자기대상화의 산물이 아니라고 믿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그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교가 적어도 인간적 경험의 차원에서는 자기대상화의 산물일 가능성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차라리 웅변해 줄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에게는 신에 관한 일정한 표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신에 관해 인간적 표상 외에 어떤 표상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에서 인간은 도대체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한편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대상화함으로써 종교가 형성되었으면서도 이를 의식하지도 못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인간적 방식으로만 신에 관한 표상할 수 있고 그러기를 요구한다면 서로 모순인 듯한 이 성향들은 어떻게 읽혀야 하며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제기했을 법한 포이에르바하가 취하는 태도는 소위 '그 자체의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신' 사이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신에 대한 일반적인 종교적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은 사랑이다'라는 명제에서, '신'이라는 주어는 '자체에서의 신'에 해당하고, '사랑'이라'라는 술어는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신 또는 신적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술어가 의인적 표현이라면 그 술어의 주어도 의인적 표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포이에르바하는 '당신은 어찌하여 신에 대한 신앙 일반이 인간적 표상방법의 한계가 아니라 믿는가?'라고 되묻는다.
인간의 감정적 차원에서의 투사가 그려낸 신은 결국 성육신에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용서와 화해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사랑의 신이다. 여기서 사랑은 지성적 차원에서 투사된 필연성이라는 신성이나 의지적 차원에서 투영된 완전성이라는 신성을 포기하도록 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신성을 포기할 만큼의 사랑이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가 라는 점을 따져 봐야 한다. 이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답변은 매우 간명하다. '신은 사랑이라'는 명제에서 신이 자기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신성 자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술어인 사랑에서 일어난 일이다는 것이다.
사랑은 신성보다 높은 위력이고 높은 진리이다. 즉 신이기에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기에 신이라는 주장을 포이에르바하는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오로지 인간적 방식으로만 신적 본질을 표상할 수 있고, 그렇지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의식할 수 없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말하자면 종교와의 관계에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의무(義務)적이다는 말이다.
니체는 그의 선구자이며 모범자인 포이에르바하가 신관을 이론적으로 파괴시킨 것에 대해서 그것이 이미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뒷날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단지 포이에르바하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니체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더욱이 칸트의 이성비판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형이상학은 쓸데없고 증명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하나님의 현존을 용납할 수 없다는 최종적 문제제기는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허용될 수 있다고 했다.
즉 한 하나님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으며, 또한 무엇을 통해서 이러한 신앙이 자신의 비중과 크기를 유지했는가에 대한 사실이 말이다. 이것은 포이에르바하의 논증을 가리킨다.
니체는 1887년 여름에 집필한 한 논문에서 기독교 도덕은 세 가지 관점에서 허무주의로부터 인간을 보호했다고 언급했다. 첫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에게 절대 가치를 주었다. 둘째, 기독교 도덕은 세계에 완전의 성격을 부여했다. 셋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무시하거나 반(反)생명을 입장을 취하거나, 깨달음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도덕은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허무주의를 막아낼 수 있는 확실한 방어순단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도덕에 속하는 정직해야 한다는 의무는 결국 그 토대를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파괴했다고 했다.
니체의 권력을 향한 의지는 결코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다만 생명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생명을 긍정하는 초인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삶을 견뎌냈을 뿐이다. '땅에 충실하라. 너희에게 초지상적 희망을 말하는 이들을 믿지 말라. 무의미는 영원하리!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러한 무제한적인 생명 긍정을 향한 변혁이다.
니체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모든 생명의 순환에 대한 고대적 표상의 반복이다. 그는 말하기를, '만물의 순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자의(恣意)적인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고 했다.
니체는 어떤 철학자보다 서양 근대 철학의 실체화된 '자아'를 비판한다. 사유하는 행위가 있다는 전제로부터 그러한 행위를 수행하는 주체(실체)가 있다는 결론을 추론해내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전제 자체, 곧 사유하는 행위 자체란 사유 주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다.
사유란 서로간의 충동의 관계에 지나지 않고 삶의 전체 과정 가운데서 한 요소를 선별하고 다른 것은 모두 배제한 결과 도달한 인위적인 허근에 불과하다. 의식활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힘들의 상호 연속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경우처럼 단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삶을 증진하고 극대화하는 힘 그 자체에 대한 의지이다.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는 원리가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은 플라톤과 칸트의 이른바 '예지적 세계'의 부정뿐만 아니라 의식(정신)의 우월성에 대한 부정을 함축한다.
의식은 신체의 거울에 불과할 뿐, 신체야말로 의식을 좌우하는 주체이다. 의식이란 신체의 작용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체를 가진 또 다른 주체(정신, 영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니체가 볼 때 사람은 곧 신체이다.
권력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볼 때 신체가 곧 진정한 자아이고 주체이다. 몸은 세포와 유기적 기능의 집합체이고 힘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몸으로 존재하는 자아는 권력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뿐, 그 외 다른 존재 원리가 있을 수 없다.
정신분석학을 통해 순수 의식(순수 자아, 초월적 주체)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무의식의 작용과 인간 존재의 언어적 성격을 통해 인간 존재를 좀더 분명하게 해명할 수 있다는 시도이다. 주체는 존재의 근원 혹은 기원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과 언어를 통해 형성된 결과물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쟈크 라캉 Jacques Lacan(1901-1981)은 언어 발화 행위가 어떤 보편적 법칙에 선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구조 언어학(소쉬르, 뱅베니스트, 야곱슨)에 관심을 가졌고, 언어학을 수단으로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를 해명해보려고 하였다.
언어학은 이제 라캉의 작업을 통해 의식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무의식에까지 그 작용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그의 명제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짜여져 있다'는 것과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은 표상적 의식으로 포착될 수 없는 '무의식적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물 표상은 대치와 압축의 메커니즘을 통해 억압된 사고를 여러 가지 증상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무의식은 모든 가능한 방향으로 분화하고 그것의 자리를 옮기기 때문에 하나의 무의식적 사고가 그것에 대응하는 하나의 증상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증상의 의미가 해독되려면 무의식적 사물 표상이 서로 얽혀 있는 그물이 언어로 옮겨질 수 있어야 한다.
의미는 다른 표상과의 '차이'를 통해 분명해진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압축'과 '대치'를 야콥슨이 말하는 '은유'와 '환유'로 바꾸어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무의식을 언어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나의 용어는 그것이 속한 공통적인 인접 맥락을 따라 다른 용어로 대치될 수 있다. 이 경우 인접 맥락은 수평적인 통합축을 구성한다. 예컨대 "한 잔 들게"라고 말할 경우 '잔'은 '술'에 대한 대치이다.
또한 하나의 용어는 그것과 의미가 유사한 말로 대치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용감해"라는 표현은 "그는 사자야"라는 문장으로 대치될 수 있다. 동일한 인접 맥락을 통한 대치가 곧 환유(metonymie)이고 하나의 의미장(意味場)에서 다른 의미장을 하나로 압축한 것이 은유(metaphore)이다.
따라서 환유가 맥락을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면 은유는 하나의 맥락에 전혀 다른 용어를 임의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라캉은 언어 전체가 곧 은유적이며 공시에 환유적으로 보았다. 그것은 앞선 본래적 의미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차이에 의해서 비로소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욕망 구조 분석에 그대로 적용된다. 라캉은 인간의 주체성의 생성 과정에 관심을 가졌고, 이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하여 첫 단계를 상상적 단계(혹은 거울 단계), 두 번째 단계를 상징적 단계라고 부른다.
두 단계를 거치면서 주체는 각각 다르게 구성되지만 공통적인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주체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두 단계 혹은 두 질서 이론은 주체의 생성론의 측면뿐만 아니라 주체의 존재 구조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여기에 욕망의 의미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라캉은 왈롱(H. Wallon)의 연구를 바탕으로 어린아이의 자기 인식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다시 해석한다. 갓 태어난 아이는 6개월이 되기 전까지 자기 몸을 서로 연관없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끼다가 6개월에 24개월 사이에 이른바'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몸이 하의 전체로 인식하게 된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통해 아이는 비로소 자기 몸의 전체상을 지각하고 그 모습을 어머니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인식함으로써 신체를 하나로 통일된 것으로 체험한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몸을 통일된 전체로 인식하는 과정은 라캉에게서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해방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적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지금까지 파편화된 몸을 하나의 전체(통일성)로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기'를 발견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은 해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은 자기가 아닌, 자기 바깥의 모습을 통해 얻은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외적이다. 아이는 자기 자신이 아닌,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 셈이다.
아이가 확인한 '자기'는 자기 자신 속의 내재적인 자아가 거울에 비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구성된 자아임을 라캉은 강조한다. 거울에 비친 상은 그 이전에 존재하는 자아의 통일성을 단지 복사한 것이 아니다.
자아의 통일성은 거울에 비친 상을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구성된 것이다. 곧 아이는 자신의 '자기'를 '자기가 아닌 것'에서 얻어온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타인들의 언술의 주체가 되었고, 태어날 때 이미 타자의 언술의 그물 속에 놓이게 된다.
이 언술의 그물이란 다름 아닌 언어를 통해 매개되는 금지와 명령, 욕망과 기대, 의무와 가치판단 등의 체계를 뜻한다. 아이는 이 언술의 질서 속에 들어가며 이 질서에 의해 그의 삶과 욕망이 조정된다.
라캉은 '자아' 개념이 자가 자신과의 근원적인 소외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아는 그 자신이 아닌 타자의 자리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자아는 타자가 나에 대해 말하고 나에게 바라는 바를 곧 내 자신으로 확인(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타자가 나에게 상징적 질서 속에 배정해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일정한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자아는 먼저 자기의 내재성에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아를 자아로서 구성하는 것은 곧 타자의 언술이며, 타자가 나의 욕망을 부축이고, 일으키고, 나의 욕망에 일정한 내용을 부여한다. 법이라는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로서 의식된 자아는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의식에 대한 무의식에 우위는 임마누엘 네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에 의해서 새로운 실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새로운 실존의 타인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는 무한자의 보편성을 '초월적 자취'라는 존재론적으로 따져본 철학자이다. 타인에 대한 책임성을 일방적으로 안겨주는 윤리적 초월성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주체성은 존재의 가지성(可知性)과 공개성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되는데 절대적 타자가 주체자의 절대성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피해 당한 피동적인 모습으로 관계 맺어진다.
무에서 창조하신 신의 창조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성을 타인과 함께 나눈는 관계성으로 등장된다.
진정한 의미의 모든 인간 관계들이란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나의 비이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몰아(沒我)는 정의를 움직이는 동력이다.'라고 간결하게 규정한다.
그런데 한 인간이 타인을 옹호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허구가 아니다. 정의란 집단을 다스리기 위한 적법성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첨예화된 세력들의 균형을 잡아서 사회적 균형을 보장할 수 있기 위한 어떤 기술이 아니다.
누군가 '가까움'의 영역에 있지 않고서는 정의를 실행할 수 없다. 정의와 관련해서 법이나, 사회, 국가 또한 국가의 다양한 제도를 자기 교환과 노동의 다양한 방식들 그 어느 것도 책임성의 통제 즉 같은 인간의 '가까움'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정의는 결코 타인에 대한 근원적 의무로서의 책임성을 변질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나의 의무는 나의 권리보다 비교될 수 없게 더 큰 것이다.
주체적 나는 타인을 위해 존재하도록 '현재에로 가져와 질 수 없는' 다른 시간 안에서 '말하자면 탄핵되어 있다'고 레비나스의 주장했다. 그렇다면 누가 혹은 무엇이 나를 탄핵하는가?
타인의 관계에서 내가 이렇게 책임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내가 부자연스럽고 예속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타인과의 관계의 피동성 안에서 주체는 어떻게 '자유와 부자유를 넘어선' 한 위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 왜 주체는 타인에 대한 그의 책임 안에서 비로소 그의 주체적 유일무이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
타자에 의한 결정이 예속이 되기 위해서는 이 결정된 것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과 우선 다른 것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결정된 것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과는 달리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또한 자유로운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결정된 것은 적어도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그것을 결정짓는 순간, 그러니까 결정된 것과 동시적이었던 그 현재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무런 회상도 없는 절대적 피동성이란 자유와 예속을 뛰어넘는 순수 결정론과 같다 하겠다. 그러나 네비나스에 의하면 결정짓는 것이 선(善)일 경우에 자유냐 아니면 예속이냐라는 존재의 양자택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선은 현재화되거나 표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란 시작하고 끝이 있는 존재, 즉 나의 자유 안에서의 시작인 반면에, 선은 내가 그것을 선택하기 전에 나를 선택한 것이다. 선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가 선택에 필요한 시간 즉 간격을 갖기 이전에 주체를 점령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선을 선택할 시간이 주관성에 결여되면서도 그것이 이 선에 의해서 관통되어 있다면 주관성은 또 다른 한편으로 선의 통시태(通時態)적 호의에 의해서 단 하나의 예외적인 것으로서 그의 예속으로부터 재차 풀려난 것이다.
선은 나에게 타인의 모습을 폭로하고, 그것을 나에게 맡김으로써 나를 나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러한 예속적 성경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자면 스스로 자신을 타인의 인질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에 의해서 선택된 무조건적이고 가차없는 희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책임은 그러한 양자택일을 넘어설 수 있다.
여기서 선이란 무한자 또는 종교적 언어로 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네비나스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타인의 모습에서 나를 탄핵하는 이 신의 존재가 그것의 활동과 절대적 현재라는 존재론적 개념으로써 언명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시원(始原)-이전적인 것과의 관계는 이미 재차 만회됨이 아닌가?' 시작과 끝맺음이 있는, 그래서 주제화될 수 있는 존재발생으로서 현재는 유한한 것이다.
현재함은 언제나 활동성과 결부되어 있다. 자기 자신에 현재하는 주체는 활동 중심이다. 따라서 현재화시키는 모든 활동과 분리된 과거는 신의 활동을 감추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거가 더 이상 현재에로 가져와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회상과 기억을 통해서 '지금'으로부터 사라져간 모든 시간적 간격이 재차 만회될 수 있다. 과거지향에서 의한 이러한 시간 발생 안에서 모든 것이 현재하고 표상된다. 즉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실체적으로 응고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초래는 '동일한 것의 차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지금'의 위상차에 의해서 해명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되가져올 수 없는 어떤 시간 경과 일체의 동시적인 것에 저항하는 어떤 통시태(通時態)가 이러한 시간의 초래 안에서 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타인에 대한 근원적 책임 안에서의 접근은 사변적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는, 즉 동시적일 수 없는 통시태이다. 시작과 끝의 연결을 거부하는 통시태는 전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한 것이다.
그것은 '무한의 끝없음'이다. 주제화될 수 있는 그 현재적 존재발생은 무한자에 의해서 이미 언제나 능가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웃에 대해서 의무지워진 주관성은 무한자 와의 절단면이다. 동시에 매듭점이기도 하다.
무한자는 타인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그의 자취에서 결코 추적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주체적 자유에 의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미 다루어질 수 있는 자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타자는 말하자면 현재의 잔재물이 아니다. 나를 타자에 대한 책임 안에서 '탄핵하는' 그것은 현재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무한자에 의해서 남겨진 자취는 '이미 언제 자취 안에서 잃어버린' 그것이다.
무한자 또는 초월자는 모든 회상될 수 있는 현재를 멀리한다. 그가 남긴 자취는 현재의 어떤 자취와 같은 것이 아니다. 무한자는 결코 관계 맺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무한자는 '존재가 대리함이 되는 또는 선물의 그 가능성이 되는' 나의 자아를 근거로 심지어 그것에 의해서 독점되기에 이르기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그 이웃을 나에게 임함으로써 그의 불가능한 '육화'의 자취를 남긴다.
무한자는 나를 이렇게 이웃에 대한 가까움으로 연류시키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한자를 이러한 연류 안에서 포착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간격이 더욱더 증가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즉 '이미 언제나 자취 안에서 잃어버린' 자취로서 무한자는 주체와는 아무런 상관관계 없는 가운데 바로 주체를 독점하는 것이다.
무한자의 자취의 이러한 애매모호함으로 말미암아 타인의 모습은 말자면, 나에게 이웃을 억지로 떠맡기는 감추어진 어떤 신을 가리키는 표상처럼 작용하지는 않는다. 제 3인칭적 타자의 모습은-니체의 도덕적 신의 죽음의 선언이후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신의 절대적 존재를 보증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어떤 경과 즉 모습으로부터 그 역설적 우회를 지칭할 뿐이다. 타인에 대한 한 인간의 시작 없는 무한한 책임에서 드러나는 무한자의 '말소되고 재차 등장하는 스쳐가는 자취'-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이라는 낱말을 발음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지만, 그러나 신성을 말하게 하지는 않는다
숨어있는 이 신성은 이제 관념의 흔적으로 수평화되어 버리고 그 안에 함의한 신성을 대신할 만한 것으로 집단 지성으로 규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의 어떤 관념, 이념 혹은 대상이 아니라 메시지라고 보는 것이다. 신화는 '그것이 메시지를 공표하는 바로 그 방식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의미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의미의 형식의 산물이다.
이데올르기에서는 말해지는 것이 핵심적이며 그것은 은폐한다. 인간의 언어는 관념의 형성에만 기여할 뿐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해서 집단 지성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 집단지성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었다.
디지털 테크놀리지의 사용 가능한 환경은 집단이 보다 신축이며 실제적으로 커뮤니케이션적 방식(웹, 포럼, 전자우편 등)과 아울러 기억(웹, 데이터 베이스), 지각(웹캠, 전화 등등), 상상력(시뮬레이션, 복잡한 현상들의 디지털 모델화) 등을 통해서 보아 더 활발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데 있다.
집단 지성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닌다. 그것을 무엇보다 과학적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실재적 현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프로젝트, 인간의 집단지성의 무한한 완벽을 지향하는 이상형을 취한다.
어떤 의미에서 집단지성은 동물 사회와 더불어 시작하는 것이지만, 언어로 인해 인간 공동체는 다른 군집 동물들에 비해서 집단지성의 도약이 가능해졌다. 그 이유는 언어가 개미와 같은 곤충이나 원숭이들을 결합시키는데 비해서 더 경쟁력이 있고 더 강한 공조 관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분절 언어는 인류로 하여금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 이야기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언어는 동물 사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 숫자, 신, 율법, 달력, 기술적 모험을 비롯하여 문화의 전 우주를 만들어내는 도약을 가능케 했다.
여기서 관념이라는 이름으로 오직 인간 문화의 세계에서만 즉 언어가 열어놓은 의미 작용의 공간에서만 출현하고, 재생산되고, 진화하는 이 같은 복잡한 형식들을 지칭한다.
인간의 공동체는 문화를 유지해야만, 즉 집단 지성을 유지해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다. 도덕적 인간, 기업, 제도, 국가, 종교, 정당, 과학, 가상 공동체 또는 부족은 관념의 생태 시스템을 경작한다.
그 존재가 지속되는 동안 하나의 문화는 자신의 관념을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진화의 방향을 개발한다. 문화의 능력은 우리의 정신이 관념의 세계에 제공하는 번식 기관이자 영양 기관이다.
바로 그 같은 인간의 직능 덕분에 인간의 주된 공생성, 즉 상징들은 재생산되고 유지된다. 문화는 그렇게 인간의 특정 설질 또는 능력을 만들어냈으며, 그 성질 또는 능력은 그 진화를 개발한 관념들과 문화를 맺는 친화성과 친숙성이다.
인간 종과 관념의 생태 시스템 사이의 공생 관계(각자는 다른 것의 삶으로부터 자양분을 제공받는다)는 중요한 파급 결과를 낳는다.
특히 집단지성과 정신 생명의 꽃이 만발하는 것을 도와주는 문자, 커뮤니케이션 및 제조를 비롯하여 높은 가치를 갖는 미디어 덕분에, 몇몇 인간종들의 경우, 관념의 최상의 재상산이 가능하다.
그 같은 인간 종들은 자신들의 강력한 수행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문화적 수단의 이점을 누리게 된다. 그 인간 종들에게 최상의 경쟁적 장점을 제공하는 관념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그 같은 사실 때문에 그들에게, 지속성, 풍요로움, 다양성을 확보해주는 인간적·기술적 재원을 확보한다.
반대로 자신들을 약화시키거나 어떤 방식으로 건 자기 파괴를 하게 만드는 관념들의 생태시스템을 선별하는 인종들은 오랫동안 재생산될 수 없으며 따라서 문제가 되는 관념들의 생태 시스템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다.
요컨대 문화적 진화는 본질적으로, 관념들의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종이라는 두 개의 공생적(또는 상징적) 쌍방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인간 공동체의 구조와 메커니즘(해부학과 생리학)은 무엇인가?
집단지성에 대해서 엄밀한 기술적 모델을 제공하라는 주문을 받는다면, 사람, 기술적 해부 구조, 그리고 상징으로 구성된 기록 자료, 지적 자산을 포함하는 이질적인 망의 역동성으로부터 창발한 행동 양식으로 정의된다.
이 망을 표상하고, 이해하고, 개선시키기 위해서, 개념적으로 그것의 몇 가지 차원을 구별하는 것이 유용하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을 할 때 진정한 살아있는 말은 미세하게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완전히 상호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망은 상호 연계된 사회적 망들에 의한 모델 속에서 표상된다. 사람들의 망은 공동체의 사회적 자산을 구성한다. 한 사회의 자산 가치는 사회적 관계들의 수량과 질에 달려 있다. 어울러 그 자산의 포괄적 표현을 그 공동체를 지배하는 신용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물리적·기술적 하부 구조의 망은 사이버스페이스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뿐만 아니라 도시의 장비, 장치, 교통망, 기간산업의 하부 구조들을 포함한다.
이 물질적 망은 공동체의 기술적 자산을 구성한다. 이 자산의 가치 역시 제반 관계들의 수량과 품질에 달려 있다. 아울러 그 가치는 그것의 유용성과 효율성에 의해서 표명된다.
기록된 자료들의 망은 공동체에 접근할 수 있는 메시지들을 결집시킨다. 거기에는 미디어의 내용, 박물관과 도서관의 내용, 또는 웹의 그랜드 하이퍼텍스트의 내용이 속한다. 이 기호학적 망은 공동체의 문화적 자산을 구성한다.
그 자산의 가치 역시 문서들의 수량과 품질에 달려 있다. 그 가치는 접근 가능한 미디어테크의 수미일관성에 의해서 표현된다.
사람과 관념 사이의 관계망은 궁극적 한 공동체의 지적 자산을 형성한다. 주목할 사항은, 앞서 제시된 관계망과 달리, 지적 자산을 그 본질상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사람과 관념의 공생적 관계를 표상하는 것은 지적 자산이다.
그것은 관념들이 알려지고, 재생되고, 유지되고, 선별되는 추상적 관계이다. 지적 자산은 앞서 세 가지 자산들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반면, 그 세 가지 자산들은 지적 자산의 풍요로움의 가능성의 조건을 성립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지식의 창조와 인터넷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근대 실험 과학은 활자의 발명 이후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 필사(筆寫)로 이루어진 지식의 전달은 그 양이 적고 속도가 완만하여 정보를 퇴락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인쇄술 덕분에 만들어진 지도, 해부학의 도식, 정밀한 산술표 등은 근대 실험 과학을 탄생시킨 집단지성의 기억에 의해서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더구나 교통망의 개선과 학자들이 쓴 학술지와 논문들의 인쇄들에 힘입어 중세에 비해서 훨씬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정신과 정신을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측량 도구 및 관찰 도구의 발달은 과학 공동체가 행한 관찰의 파급 범위 및 정밀성을 제고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관찰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과학 공동체와 사이버 공간에서 구축되는 집단지성의 새로운 형식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친화성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무엇보다도 인터넷을 발명하고 최소로 사용한 이들이 다름 아닌 과학 공동체였다는 점이다. 과학 공동체는 인터넷처럼 보편적이며, 초민족적이며, 반위계적으로 배분되어 있다.
전자우편은 동료들 사이의 안부를 교환하게 하며, 공동체의 목록이 알려지게 해준다. 학회와 학술지에서는 전자 포럼과 가상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터넷과 과학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성의 가장 놀라운 징후는 '그랜드 하이퍼텍스티'이다.
실제로 학술 논문들은 다른 문헌의 형식과 구별된다. 수많은 주석과 서지 문헌이 특징적이다. 학술 논문은 텍스트이기도 하지만 관련 문헌 또는 컨테스트를 지시해주는 포인터이다.
이와 동일한 방식이지만 웹 사이트들은 정보를 포함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랜드 하이퍼텍스트와 학술 논문을 결속시키는 컨텍스트 사이트와의 관계를 착발시킨다.
인쇄술이 교회의 사제들과 학자들의 실천을 변형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은 연구자들의 공동체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러한 심한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변천은 지식의 공유라는 학문적 프로젝트를 연장시키는 것이지 결코 그것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은 이제 불과 30년이 되었고 그랜드 하이퍼텍스트는 고작 10년 정도 밖에 안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어떤 변형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힘든다. 인터넷 망은 어딘가에,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서로 함께 존재한다. 기본적 형식들의 집중화와 조합의 환경은 효율성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단계에서,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미디어 전체는 수렴된다. 모든 문화적 기호들은 디지털화된다. 문화적 기호는 컴퓨터, 더 정확히 말해서 전자 기계와 터미날의 총체성을 결합시키는 팽창 중에 있는 망 속에서 창조되고, 기록되고 상호 연계된다.
이 같은 새로운 환경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그것들이 구성하는 기호와 메시지는 도처에 편재한다. 문화적 기호들이 망 속에서 물리적으로 편재하기 때문에 그 같은 기호들은 잠재적으로 그 망의 모든 점에서 접근될 수 있다.
게다가 사이버 문화의 시대에 언어는 문자가 부요한 자율적 기억만이 아니라 인쇄술이 부여한 자동적 재생 능력과, 전자성으로부터 빌려온 편재성을 갖게 되었다. 언어는 자율적 방향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소프트웨어는 망으로 연결된 컴퓨터들의 세계에 각색된 문자 유형으로서, 스스로 행동할 수 있으며, 다른 프로그램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으며, 모든 종류의 기초 조합을 창조할 수 있는 문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기계를 착발시키며, 로봇을 작동시키고, 인쇄 문자에 비해서 더 자율적으로 복제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컴퓨터 바이러스는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모든 컴퓨터 프로그램에 고유한 특징을 발현한다.
소프트웨어의 세계는 논리적 액체이며, 살아 있는 복잡성의 바다이며, 이제 이미지, 음악, 단어들이 돌출하는 문화의 폭발이다.
플라스틱과 금속 로봇들이 이 같은 활성화된 문자에 의해서 컴퓨터 내부에 장치되어 신호들의 코드를 해독하고 코드들을 발송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문자, 알파벳, 인쇄, 전화,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커뮤니케이션 대부분의 개선된 기계들과 함께 이전에 존재했던 기호들의 모든 미디어와 시스템을 통합시킨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이전까지 알려진 메커니즘을 통합시키고 그것을 넘어서서 기호들을 창조하고 복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아마도 하나의 매체라기보다는 그 이전의 미디어들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자 시장, 파일 교환 사이트, 여러 명이 참여할 수 있는 비디오 게임들, 새로운 가상 미디어들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메타 미디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주된 의미는 총체적 상호연계, 언어적·문화적 형식들이 생존하는 가상 공간의 통일이다.
따라서 마땅히 여기서는 지식의 본질도 변한다. 즉 인간과 지식의 관계가 변한다는 말이다. 거리마다 늘어가는 웹 캠에 포착된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들은 웹 상에서 방영하는 모든 동영상의 이미지들처럼, 새로운 체제의 시각성을 창조한다.
이것은 편재적 시각(omnivision)이다고 부를 수 있다. 그동안의 '원격시각'(텔레비젼)과는 달리 편재적 시각은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이 가능하다. 그리고 편재적 시각은 이 사회에 무한한 다양한 시점의 복수성(覆數)성을 취하도록 한다.
이처럼 새로운 정보 테크놀리지 및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리지는 인간과 지식의 관계를 철저하게 변화시킨다.
그것은 모든 다양성을 허용하는 세계이다. 이 다채로움은 예측 할 수 없는 목표로 인간들의 환심을 산다. 현재 소유하는 지식은 빠른 시간 내에 골동품이 된다. 따라서 정보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일보다 새롭게 생산된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한 공간을 위해 늘 자신의 기억을 제 때에 지워버리고 강제 퇴출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