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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창세기 45:1-15 지난 과거에 모두 감사
1. 셀 리더에게 셀 모임을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사람은 셀 시작하면서 항상 나누기 원합니다. 태신자 명단 작성하여 이성훈 전도자에게 전해 주세요 2. 셀 맘에게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이 크듯, 셀에서는 셀 맘의 역할이 큽니다. 셀 원과의 화목과 친교에 관심을 갖아 주시기 바랍니다. 3. 셀 나눔 삶 나누기 :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서 일어난 사건(경험) 나누기 내 가정 삶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 이야기 말씀 나누기 : 오늘 말씀에서 내가 받은 은혜 나누기 오늘 말씀에서 새롭게 안 사실 전도 나누기 : 한 주간 전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
1 2013년 12월 예배위원 만찬:김상열,하수진 헌금:조성민,오윤서 안내:김하영,강문자 애찬: 4셀 청소: 청년 설거지: 학생, 4셀 형제
2 회의 제직회 12월 1일 아침 6시 30분 결산 제직회 포함 예산제직회 12월 15일 오후 3시 공동회의 12월 22일 오후 1시30분 교사회 12월 21일 오후 4시
3 세례식 12월 8일 오후 3시 신청자 : 김명식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4 닛시 축구 12월 1일 오후 4시 화곡교회
5 목동페스티벌 12월25일 제직회
창45장 1-15절 하나님이 보내셨나이다.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실패하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도대체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기업가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성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연예인은 인기가 하늘로 찌를 듯 해야지만 성공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자기가 출전한 경기에서 우승할 때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때 학업에 성공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심지어 목회자 역시 출석 인원, 웅장한 건물, 그리고 헌금액수가 높을수록 목회에 성공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과연 이와 같이 겉보기에 화려한 것만이 성공의 표시일까요?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공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은 성공이 있습니다. 추잡한 성공이 있습니다. 자신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더러운 성공이 있습니다. 아마도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서 온갖 흑색선전과 중상모략, 편법을 동원해서 당선된 사람들의 성공이 바로 이와 같이 아름답지 못한 성공의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는 불나비 같은 성공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1등 하는 것만이 성공은 아닐 것입니다. 1등은 오직 하나 뿐, 최선을 다하고서도 1등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1등한 사람만이 성공했고 나머지는 다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돈과 권력과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인생의 승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이 진정한 성공 역시 돈과 권력과 인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성공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이 되어야지, 못나고 더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성공, 깨끗한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진짜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진정한 성공, 아름다운 성공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의와 부정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고, 남들에게 해를 끼치며 자신의 유익을 얻어 부를 이루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들을 이겨서 1등이 된 것은 진정한 성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 온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심으로 희생된 사람입니다. 자신의 꿈 자랑을 하다가 형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고생과 시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밑바닥부터 기었습니다. 성실함이 인정되어 주인 된 보디발 장군의 재산을 관리하는 가정총무 일을 보게 되었지만 그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이 이 모든 시련을 견디어 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애굽의 국무총리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성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셉이 이국땅에서 이룬 자신의 이 성공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 그래서 부모 슬하를 떠나 외로운 객지에 떠돌게 만들었던 형들 앞에서 요셉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5절과 8절을 봅시다. 먼저 5절을 보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다음에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의 성공이 빛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각본과 거룩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섭리였다는 신념에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청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성공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그리고 돈을 벌든, 무슨 일을 하시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뜻을 붙드십시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사명감에 불탄 삶이 된다면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성공의 삶이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애굽에서 성공을 거둔 요셉이 자기에게 엄청난 상처와 고생을 안겨준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상봉하는 장면입니다. 44장에서 요셉은 유다가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아끼는 마음과,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으로 자신이 인질이 되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들어 내지 않고 형들을 이리저리 시험한 것은 바로 이 마음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셉은 이러한 유다와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주위의 시중드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다음 자기와 형들만 남은 상태에서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리도록 방성대곡을 했다고 했습니다(2절). 특히 14절에 보면 자기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었으며 베냐민 역시 요셉의 목을 안고 함께 울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일일이 입을 맞추고 껴안고 울음을 터뜨림으로서 가슴에 쌓인 모든 섭섭한 감정을 일시에 날려 버렸습니다. 극적 화해를 했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용서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악한 행동을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셉에게는 복수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힘이 없어서 복수를 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만한 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셉은 결코 그가 형들에게 팔렸기 때문에 그 인생이 실패하고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도, 억울하게 감옥에 있을 때도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상처 주는 사람, 자기를 이용해 먹은 사람에 대해서 증오심이나 복수를 품지 않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에 늘 옛날의 상처를 되씹으면서 증오와 복수의 칼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환하게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복수는 미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미래가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본 사람은 과거의 어떤 죄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사용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과거의 억울한 일, 슬픈 일 다 잊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모든 역사를 덮어 두자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은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합니다. 다만 그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과거의 죄를 깨닫고 회개 하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연극을 다 꾸몄습니다. 그런데 형님들이 변했습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하고, 팔아 버렸던 형제들이 차라리 자신을 잡아 두고 베냐민은 풀어 달라고 간곡하게 애걸합니다.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용서를 선포하며, 형들과 화해를 이루기까지는 형제들의 회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즘 일본에 대해서 흥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6년간이나 우리 민족을 짓밟고 학대하고는,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기여했다는 논리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어엿한 한국 땅의 독도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김질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왜곡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 제국주의적 속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도 그렇습니다. 전범들의 위패를 모신 곳에 개인적인 자격으로 참배하는 것 까지 우리가 말릴 수 없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로서 다른 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하는 것은 과거의 침략행위와 전쟁행위를 정당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정신대에 끌려갔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가 생생합니다. “나는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책임 있는 자가 과거의 잘못을 눈물로 참회하는 것을 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게는 자신들의 행한 일들에 대한 반성이 없습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 미운 것입니다.
반면에 독일은 어떻습니까? 히틀러의 잘못된 민족주의로 인해 유대인의 학살과 전쟁으로 인한 아픔에 대해 철저하게 사죄하고,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들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해 놓고 그들이 회개한 모습을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화해와 사랑의 손길로 품어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축복은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그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도 우리 이웃과 형제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앞길을 막고,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그 사람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절대로 용서와 화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복수하고 싶은 원수를 밤낮으로 묵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과 이성으로는 온전한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괴롭히고 마음의 아픔을 준 사람들, 요셉에게 있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팔아버린 형님들 같은 그런 사람이 여러분 인생에 있다면, 말씀에 의지하여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나는 용서하지 못하나, 나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이제 용서하노라.” 어떤 일이 있어도 미워하기 보다는 용서하며 화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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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나서 다시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위의 설교말씀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일 하나님의 말씀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셀리더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기본안이구요 여기에 집사님의 생각과 나눔을 더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