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리산은 1967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320여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智異山)을 글자 그대로 풀면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 이라 한다.
이 때문인지 지리산은 여느 산보다 많은 은자(隱者)들이 도를 닦으며 정진하여 왔으며
지리산 골짜기에 꼭꼭 숨어든 은자는 그 수를 추정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과 서, 영남과 호남이 서로 만나는 지리산은
단순히 크다, 깊다, 넓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인 칠선계곡은
천왕봉에서부터 북쪽의 함양군 쪽으로 16㎞쯤 뻗어내린 물줄기를 말한다.
국립공원공단은 전체 탐방로 9.7㎞ 중 비선담에서 천왕봉까지 5.4㎞는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루 60명씩만 예약받아 탐방가이드제를 시행하고 있다.
잠실산악회에서는 함양군 휴천면 추성리에서 비선담까지 전면 개방한 4.3㎞를 왕복하였다.
하늘을 뒤덮을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沼)가 연출해 내는 선녀탕과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이름없는 폭포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벼랑으로 조심스럽게 오르다 보면 비선담이 색다른 모습으로 반긴다.
2
며칠 전에 큰비가 내려서일까, 계곡의 물이 차고 넘친다.
곳곳에 출렁다리가 있고, 움푹 패인 웅덩이들이 있는데,
붙인 이름이 칠선교(七仙橋), 선녀탕(仙女湯), 옥녀탕(玉女湯), 비선담(飛仙潭)이다.
모두가 선녀와 관련된 표현들이구나.
일곱 선녀가 이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 때
사향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 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를 칠선계곡(추성계곡)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는 전설이다. 믿거나 말거나 .......
그러다 보니 나뭇꾼과 선녀에 관한 농담이 이어졌다.
남자회원들은 목욕하는 선녀가 없나 담(潭)을 기웃거리고,
여자회원들은 나무꾼 눈에 띄도록 밝은 색상의 옷으로 한껏 차려 입고 왔다고 했다.
외국인 선녀는 angel인데, 그럼 외국인 신선은 뭐라고 해야 하나 궁금해하기도 하고.
골짜기를 오르니 멀리 (가상의) 한 무리 아이들이 보이는데,
㉠, ㉧, ㉨, ㉩ 성씨를 가졌다고 농을 건넨다.
그러자 K 씨 누구는 “나는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하면서 뒤로 내뺀다.
㉠ 씨가 어디 K 씨만 있나? 강 씨, 권 씨, 김 씨도 다 해당될진대 누가 뭐랬다고.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을 의미한다고 몰아갔고,
한 술 더 떠서 “(가상의) 아이들 생일이 같은 날이네.” 하는 데에서는
모두들 웃음이 빵 터졌다.
인생을 농담처럼 가볍게 살 수는 없지만
농담이 희석된 삶의 고통은 옅어지고 견딜 만 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체념이 아니라 삶의 달관이 만든 또 하나의 흔적이려니…
젊은 날 헤쳐 온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고
그래서 이제는 허물을 주고받는 한국 중장년의 여유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풍경 사진 3점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문자를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지리산 칠선계곡, 역시 산이 높으니 골도 깊다. 어차피 내 선녀는 집에 있고,
며느리감 선녀를 찾으니, ‘지리산 닮은’ 젊은 사내가 직접 오십사 하더라.‘
3
오르막 산행 길에 숨차 오르는데도 많은 말들을 나눴다.
“모든 인간은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인데, 그 실수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게 바로 정치였다.”
라는 명제로 시작된 대화가 한국 현실 문제로 첨예하게 촉발되려는 무렵이었다.
고개를 막 넘으니
삐익~ 이름 모를 새가 큰 소리 내며 날고, 계곡물이 우렁차게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이제는 그만하라는 호루라기처럼, 여기까지 와서 정치 운운 할꺼냐면서 꾸짖는 듯 했다.
방점을 찍듯 내 모자 위에는 뜨끈한 새똥 하나가 내려 앉았다.
그래서
“인간은 아버지가 살해된 것은 곧 잊어버리지만 유산을 잃은 것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는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였다.
세상의 대부분 이치가 그렇듯
정치도 자신이 처한 입장, 이해 득실이 철저하게 반영된 해석이라는 뜻이지.
영국 서정시인인 워즈워스(W. Wordsworth)는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했지만,
19세기 인도 시인 갈리브(Ghálib)는 "비구름이 벌판 위로 밀려오면 내 가슴은 뛴다." 고 했다.
나는 후자에 공감한다.
매니큐어 바른 고운 손보다 손마디 굵은 투박한 손이,
잘 가꾸어진 봄날 꽃밭보다 식량으로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이치다.
책도 그렇다.
책상 위에서 펜대 굴린 언론인이나 문학인의 직업적인 글보다,
평생동안 하나에 전념했고 그래서 중장년 이후 이런 경험을 소재로 풀어낸 글들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이미 30년 전에 뜻을 세워 낯설었던 터키, 인도, 실크로드 등을 연구했던 전공학자들의 저술,
10년 이상 현지에서 근무한 외교관이나 주재원들이 쓴 남미와 아프리카의 현실이 그렇다.
(인종, 종교를 초월하여) 인류가 가장 많이 먹는 육류는? 닭고기 /
전세계 인구가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는? 커피 아닌 차(茶)/
그럼 차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는? 중국, 일본도 아닌 영국 등등 /
커피, 설탕, 소금, 향신료(후추, 계피, 강황) 등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방대한 세계사를 설명하고,
변소, 기생충, 질병, 도박, 소비 등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민낯을 파악하는 작업도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요즈음 도서관을 들락날락 거리며 이런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드는 여름날에 빗방울을 선물로 데리고 오는 비구름의 출현처럼
오늘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그 무엇을 찾아 집을 나선다.
4
오늘은 추성리에서 시작하여 출렁다리,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까지 걸었다.
지리산은 아고산대(亞高山帶) 식물들이 자라는 원시림이 장관이기에,
생각 같아서는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를 지나 천왕봉에 오르고 싶다.
장터목 - 세석평전 – 벽소령 – 연하천 –반야봉 –노루목 –임걸령 –노고단 – 성삼재까지
내처 걷고 싶지만, 이제는 마음 접어야 할 목록 중에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그만큼 놀랄 만한 일도 줄어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백세인생’,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노래 부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합리화이고, 분수에 넘친 객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버릴 건 버리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즐길 건 철저하게 즐기리라.
탐방가이드제를 시행하고 있기에
비선담 부근에는 천왕봉로 이어지는 길목에 설치된 문은 잠겨져 있다.
문득 이 정도에서 욕심 버리고 만족하며, 이제는 내려가라는 메시지로 다가 오는구나.
카르페 디엠(carpe diem)!! 나는 지리산 중턱 칠선계곡에서 오늘의 삶을 한껏 즐기고 있다.
첫댓글 역시 글에 쏙 빠져들게 하는 솜씨가 재미있게 엮어 있어 저도 모르게 물에 들어가게
되네요. 정신을 차려보니 콤퓨터 앞에 손이 놓여 있고요. 그 날 밤에 갔으면 보름달이 떠서
이쁜 선녀를 데려와서 아들 장가를 보냈을텐데 아쉽네요. 칠선 계곡을 걷는 길이 아름다워 천왕봉을
가게끔 욕심을 내게 하는 길이 었습니다. 아침부터 부자가 되어 갑니다. 감사합니다.*^_^*
모임에서 한 사람이 득(得) 손녀소식을 전하니,
모두들 약속했다는 듯 손자, 손녀 사진 저장된 핸드폰을 꺼내면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더군요
(이른바 '손자바보').
남의 자식 주례도 몇 번 섰는데 막상 제 자식은 짝이 없으니, 아! 이 지극한 모순을 어찌 할까요?
좋은 소식이 곧 있겠지요.^^*
좋은 정보 받아갑니다.감사합니다~아들에겐 조은소식이 곧 있기를....ㅎ
아,반갑습니다. 건축 설계하시는 분 아닌가요?
이전에 함께 다닌 <잠실 산악회> 산행 후기들도 적지 않으니,
시간 나는대로 읽어 봐 주시면 더없이 고맙지요.
박 선생님,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