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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9일 (경자) | |||||||||||||
비국 낭청 성익(成釴)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몽고(蒙古)에 들어갔다. 심양에서 서북쪽으로 16일을 가서 오환 왕국(烏桓王國)에 도달했고, 3일 만에 내만 왕국(乃蠻王國)에 도달했다. 또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도달한 곳이 삭도 왕국(朔道王國)이었고, 북쪽으로 가서 3일 만에 몽호달 왕국(蒙胡達王國)에 도달했고, 또 동쪽으로 가서 투사토 왕국(投謝土王國)·소토을 왕국(所土乙王國)·빈토 왕국(賓土王國)에 도달했다. 소 1백 81두를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평안도 열읍(列邑)에 나눠주어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35 집 23 면 【분류】 *외교-중앙아(中央亞) / *무역(貿易) / *농업-축산(畜産) ○庚子/備局郞廳成釴以貿牛事入蒙古。 自瀋陽西北行十六日到烏桓王國, 三日到乃蠻王國, 又東北行四日到者朔道王國, 又北行三日到蒙胡達王國, 又東行到投謝土王、所土乙王、賓土王等國, 貿牛一百八十一頭而還, 命分給平安道列邑, 以資耕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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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만 [ 발음 :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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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고유 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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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조선과 달단의 위치관계와 몽고와의 위치 관계...
제가 수도없이 주절거렸지만... 아직도 존경하는 문무님께서는... 고려와 대륙조선이 몽고같은 오랑케들의 속령으로 그들을 천자로 받들며 살았단걸 인정하기 어려우신지... 의식적으로 역사원전의 부분적 편린들만의 일괄적 대입으로... 몽골의 발원점인 북원(北元)지역의 동쪽이란 징기스칸의 알란하유역 몽골을...서역 멀리....러시아쪽에 두시고 싶으신가 보다.
역시, 대륙조선 연구자들은 수십번을 탐독했을 평범한 송사 몽고열전을 다시 복기해 보면... 맨 마지막 글에...결정적으로 몽골은 중국의 동북방에서부터 서남방의 중국을 처 들어간게 나오고... 현제의 중아아와 동유럽은 서역제국들이라 칭한다. 특히 서역 흠찰국은...중국으로부터 3만리란다.
만일 몽골의 시작이 현중국의 서북방 알타이 서부였었다면... 그 서남방에 있단 중국은 우즈벡 정도인것이고...우즈벡부터 서역 3만리의 흠찰국을 몽골이 정복했다면... 흠찰국은 프랑스나 영국등의 극서유럽국가를 넘어 대서양 바닷속의 나라란 것이다.
고로, 냉정히 객관적이고 전체적으로 모든걸 대입해 보면... 몽골의 발원점은 몽골인들 주장대로 현 외몽골 울란바타르인근 헨티산이 맞는 것이며... 내만부 방향의 서쪽 화림(和林)은...현재의 하라호름이 맞는 것이다.
단지, 전에도 거론했듯...현재의 하라호름은 가짜고...원 이름은 화림(호름)으로 성터란 얘기고... 카라코름(하라호름)이라 할 땐 객라곤륜이란 말로...파미르산맥 k2봉이 있는 아프간 넘는 현재의 카라코름 고갯길을 뜻한다. 검은돌성이란 객라호름(하라호름)이고...오늘날 케쉬일대로 전 봅니다.
징기스칸 몽골국은 현 외몽골에서 달단의 속령으로 초라하게 발원했으나... 심기일전 타타르로부터 독립하고...음산(고비알타이) 넘어 ..중국의 동북땅이란 연경(투르판일대)을 친 것이며... 다시 그 서남쪽의 넓은 지역을 친게...중국을 친 것이라니....중국은 현 타클라마칸 서남부와 티벳...파키와 아프칸 등지란 겁니다. 밑에 확실하게 나오는데...
각자의 연구가들 입맞에 맞는 부분들만 집중해 편취해석하는 바람에... 정작, 명백하고 뻔한 증거들을 해석의 오류들로 놓치신 겁니다.
또 얘기하지만... 구한말기 연행사들이 몽고를 논할땐...원 발상지인 외몽골엔 몽고란 나라가 없고...조선 함경도 6진등이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영고탑지가 있었습니다.
엄연히 구한말기의 외몽골은 청나라와 조선에 편입됀 청과 조선의 영토이기에... 그 종족과 부족 말할땐 몽고족이라 하더라도...대개의 서역오랑케 킾착크몽골같이 이민족으로 치지 않았던 겁니다. 연행사들이 이를때의 그 몽골오랑케는...징기스칸의 원몽골이 서역만리에 정복해 만든 깊착크몽골을 이른 겁니다.
달단족도 거기 많았는데... 대개가 서양인과 튀기같은 형상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허나 달단이 거기만 있던게 아님은...몽고열전 보면 다 나옵니다.
간단한 말로...달단족이 무조건 몽골족이고...모두가 다 한결같이 분명한 서양인같은 벽안의 빨간머리들이라면... 달단동출신 이성계에 대한 기록도 그리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서양인들의 제국이니 서역에 있는게 맞게 됍니다. 그러나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물론 살짝이 튀기는 맞겠지만여...현 몽골인들이 그렇게 보이듯이여...
한반도인들은...몽골인과 우리가 똑같이 생겼다 우기는데... 전 동대문가서 몽골인들 정확히는 아녀도 80%는 찝어낼 수 있습니다. 일단 몸이 크고...살지고...피부가 더 흽니다...가장 확실한게 광대뼈가 유난히 큽니다. 연행사가 말한 악라인들과 달자들의 그 광대뼈를 외몽골인들이 젤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들은...한국거리 다니면서...자기나라 사람은 금방 알아봅니다.
세계 어느나라 어느지역이 연행사가 말한 달단과 몽골의 그 큰 광대뼈를 가졌답니까...? 단연 현 외몽골입니다....개중 몽골족과 혼혈백인인 러시아와 북유럽인들이 광대뼈가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현 몽골인들에게 쨉도 않되십니다.
연행사들이 본 그 몽골인들과 달단인들은여... 이미 망해 알타이로 숨어든 북원이...외몽골에서 조선 함경도에 흡수됀 연훈...다시 청나라에 흡수됀 연훈... 알타이 서부 아라사(깊차크한국)뿐인 겁니다. 당연 몽골의 서역만리 정복지 튀기들이니...당연 눈이 푸르고 머릿칼이 뻘것고...라 기록한 것이고... 그러면서도 외몽골인들의 튀기니...광대뼈는 큼직하다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송사 몽고열전 자세히 보십시오... 몽골의 발원점인 화림(和林)은...송림천리라 합니다. 고지도엔 알타이 동쪽줄기를 송림천리라 명기했습니다.
또한 문무님 인용하신 해국도지에도... 징기스칸이 서쪽 태양칸의 나라를 치고 몽고를 통일했단 그 내만(乃蠻)부가... 정확히 현 외몽골 서부로 표기됐습니다.
또 이건 왜곡지도고...외곡사서다 한다면... 뭘 기준으로 역사왜곡을 바롭잡는단 걸까요...? 약깐...시대에 따라 차츰 한칸씩 동쪽으로 왜곡됀 것 뿐...대부분의 시대별 고지도들은 대충은 맞는 부분도 많다 봅니다.
물론 한반도에 떡허니 써 있는 조선이나 고려.백제, 신라 같은 문구는 일제나 친일파들의 조잡하면서도 과감한 왜곡이지만여...
그리고 맨 밑의 송사 몽고열전 전문을 잘 보면... 음산(陰山)은...중국이나 조선과의 경계를 이를땐 현 고비알타이산맥을... 음산 전체를 이를땐 더 서북의 러시아알타이로 나옵니다...몽고제국의 최대 관경이 북으로 음산 넘어까지라는데... 현 고비알타이 넘어나 천산 넘어가 남부영토였던 몽고 발흥점이 북쪽의 넘어일 수 없는 이치니...그 더 북쪽 러시아알타이가 원조 음산의 본맥이라 하겠습니다. 그게 정확힌 장백산맥과 음산(고비알타이)의 발원인 선비산인 것이겠고여...
이미 다 나온 뻔 한 내용들인데... 다시 복기해보니...진실의 키가 등잔밑에 있었던걸 모른 겁니다.
자기들식으로 오랑케들을 깔아 뭉개며 왜곡해 썼을 송사의 몽고열전만으로도...
당대 대원제국은...중국의 동북 사막 만리북역에서 부터 출발해... 그 서남부인 원래의 중국인 천산과 타클라마칸, 티벳,아랍을 정복했고... 남으론 탐라(티벳)의 대양까지 정복했고... 동남으론 현 중원인 대륙고려를 외가의 나라이자 제후국로 뒀고... 서쪽으론 3만리의 흠찰국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 제압하고...카톨릭교황이 다스린 비잔틴도 조공하게 만들었고... 이집트만 진출하다가 국내 황제다툼전으로 보류돼고... 일본(동남아제도& 현 일본열도)도 마찬가지 이유로 점령이 보류됐을 뿐인...
실로 유라시아 전체를 다 복속시킨 전무후무한 세계 대제국이였을을... 송사는 자존심 상함 무릅쓰고 인정할 수 밖엔 없었음이 보인다. 기존의 역사보다도...더 엄청났던 영토와 국력였을 가능성이 많단 겁니다.
대륙고려가 이 대제국을 서역 제후국으로 뒀다...?..그건 유리의 깜찍한 상상입니다.
송사가 얘기하지 않습니까... 거란이나 금나라에 처 발리고...조공한게 송나라인데도... 그걸 오랑케가 천자가돼어 중국을 다스린게 아니라 우깁니다. 그러나 몽골제국에 대해선...두 말 할 것 없이..최초로 중국을 오랑케들이 천자로서 다스린 유일무이한 변고라 합니다. 그런 송나라를 고려는 천자국으로 계속 모시다가...원나라를 다시 천자국으로 모신 겁니다.
원나라가 고려의 서북제후란건... 말도 않돼는 망상입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게...역사찾기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그 유라시아를 다 정복하고 지배한 몽골제국이...격렬한 몇차례의 전쟁을 치루고도... 유일하게 확실히 굴복시키지 못하고 대충 제후로 항복받은게 고려가 유일합니다.
몽골제국이 색목인(서양인튀기)를 너무 대우해서 명나라(무굴)인들이 삐졌다져...? 그러나 색목인들은 그저 원 제국의 서방 사한국인들로서 대우받은것 뿐... 징기스칸의 황금씨족들만 참가한다는 대 쿠릴타이"에... 유일하게 고려왕들만 황금씨족 아니면서도 참가함을 원사는 기록했습니다. 쿠쿠티무르로 보이는 명태조의 반란에 의한 북원의 멸망도... 실은 기황후와 대립한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힘을 얻은 수확물입니다.
세계의 전무후무한 대제국 몽골제국의 시원은... 거란족에게 동북으로 밀린 발해의 유민들이 말갈과 재 부흥운동을 한 것이고... 세계 대제국 원나라의 패망도...내부에선 고려인 기황후의 황위다툼...외부에선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척에 기인했던 겁니다.
크게 보면...바이칼 유역... 고구려유민국 발해말갈의 재 부흥이 몽골제국의 시작이고... 홍다구등의 고려 배신자들의 향도역할로 길을 티워...중원진출의 서막을 손쉽게 이루고... 고려 배신자 홍다구등이 고려를 실질통치했고...일본도 헤집어놨다 황위계승전땜에 중단됏을 뿐이고... 고려인 황태후와 고려 공민왕에게 망한게 대원국인 겁니다.
나름 큰 자부심 가져도 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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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 몽고열전 >
중간생략....
다음과 같이 논한다. 몽고가 북적(北狄)으로서 처음 일어날 당시에는 너무 하찮았기 때문에 달단(韃靼)에 부속되었는데, 철목진이 저 멀리 사막 밖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하(夏)를 무찌르고, 금(金)을 내치고, 서역(西域)을 소탕하였고 와활태(窩闊台)가 10로에 사명을 펴 부세를 정하고 선비를 높여 주었으며, 관후한 정치와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마진씨(乃馬眞氏)가 귀유(貴由)의 명을 따르지 않음으로 해서 야율초재(耶律楚材)는 분통이 터져 죽기까지 하였으며, 귀유가 일찍 죽고 나서는 사뙨 아내가 칭제(稱制)하여 그 계통이 끊어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뭇 신하들이 몽가(蒙哥)를 추대하여 서남(西南)으로 넓은 국경을 개척하여 중국의 영토까지 침입하였으며, 그 뒤 홀필렬이 큰 포부를 가지고 온 천하를 통일하였다.
아! 삼대(三代) 이래로 이적(夷狄)이 중국을 침략은 하였어도 중국에 들어와서 제 노릇을 한 자는 없었으나, 호원(胡元)은 비로소 제 노릇을 하였다. 예로부터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지만 그래도 중국의 정통만은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오제(五帝)ㆍ삼왕(三王)께서 물려준 중국이 끝내 제유(諸儒)의 도학(道學)이 크게 발전되던 그 시대에 멸망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었던 일대 변혁이다. 슬프다!
論曰。蒙古起北狄。微細甚故。服屬于韃靼。鉄木眞奮振沙漠萬里外。芟夏䠞金。電掃西域。窩濶台十路命使。定賦崇儒。寬厚儉約。肰而乃馬直氏。不遵貴命。楚材憤終。至若貴由短祚。邪妻稱制。幾墜厥緖。衆戴蒙哥。遐闢西南。深入中土。忽必烈䧺啚大略。統合區宇。嗚呼。三代而下。夷狄雖軼中國。未或有帝中國者。自胡元而始焉。自古雖無不亡之國。而中國則無絶統之理。然五帝三王所傳之中國。乃滅於諸儒道學大明之時。此亘萬古之一大變也。悲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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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악온철목진(奇渥溫鐵木眞)은 야속해(也速該)의 하들이요, 어머니는 월륜(月倫)이며, 몽고부(蒙古部)출생이다. 11대조는 탈분미묵건(脫奔咩嘿犍)이고 그 아내는 아란과화(阿蘭果火)이다. 아란과화가 2명의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어떤 흰 빛이 금빛 신인(神人)으로 변화하여 침상에 들어와 눕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발단차아(孛端叉兒)이다. 그리고 4대를 내려와서 해도(海都)가 비로소 군장(君長)이 되었다. 그가 팔라합흑하(八刺合黑河) 가에서 장막을 치고 있을 적에 인근 부족들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 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저마다 부족을 이루어 오환(烏桓) 이북 내만(乃蠻)ㆍ외라(畏羅)ㆍ구성(九姓)ㆍ회골(回鶻)의 고성(故城) 화림(和林) 부근에 흩어져 살며, 대마다 요(遼)ㆍ금(金)에게 조공(朝貢)하다가 다시 달단(韃靼)에게 붙었다. 5대를 내려와서 야속해(也速該)가 모든 군소 나라를 병합하고 탑탑아(塔塔兒) 부족을 쳐서 추장 철목진(鐵木眞)을 잡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질리온 반타산(跌里溫盤陀山)에서 아내 월륜(月倫)이 아들을 낳았는데, 포로의 이름을 따서 철목진(鐵木眞)이라 부르니, 이는 무공(武功)을 기념함이다. 야속해가 죽으니, 열조신원황제(烈祖神元皇帝)라 추시하였다. 철목진은 침착하고 도량이 크며 많은 사람들에게 관대한 인정을 베풀었다. 겨레붙이 태적오(泰赤烏)가 일곱의 부족을 연합하여 침공해왔는데, 철목진이 태적오를 패주시키자,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모두 철목진에게로 붙었다. 이때에 탑탑아 부족이 금(金)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철목진이 금군(金軍)과 합세하여 그 추장을 죽이니, 금주(金主)가 그 공로로 찰올독로(察兀禿魯)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의 초토사(招討使)와 같은 벼슬이다. 내만(乃蠻)의 태양가한(太陽可罕)이 여러 부족과 함께 침공해 왔는데 철목진이 대전을 벌여 태양 가한을 죽이고 드디어 서하(西夏)를 공격해서 크게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개회(開禧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2년(1206, 몽고 태조(蒙古太祖) 1), 알난하(斡難河)에서 모든 부장을 모아놓고 구유백기(九游白旗)를 세우고 황제에 즉위하니, 여러 신하들이 성길사가한(成吉思可汗)이란 존호를 올렸다. 이에 앞서 금제가 위왕(衛王) 영제(永濟)를 정주(靖州)에 보내어 철목진(鐵木眞)의 공물을 받아오게 하였더니, 영제가 철목진의 모습이 기이함을 보고 돌아와서 일을 꾸며서 그를 제거하자고 청하였으나 금주가 허락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철목진이 이 소문을 듣고 늘 감정을 품어오던 중 이때에 이르러서 금을 치기로 결의하고 목화려(木華黎)ㆍ박이출(博爾朮)로 좌우 만호(左右萬戶)를 삼아 내만부(乃蠻部)를 격멸하였다. 3년(1207, 태조 2), 서하(西夏)를 침공하여 알라해성(斡羅孩城)을 함락하였다. 가정(嘉定 송 영종의 개호) 2년(1209, 태조 4), 외오아국(畏吾兒國)이 귀속해왔다. 철목진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서하(西夏)를 치니, 하주(夏主) 이안전(李安全)이 딸을 들이고 화친을 청하였다. 3년(1210, 태조 5), 과거에 금주 영제(永濟)가 철목진(鐵木眞)이 조공하러 올 때에 해치려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드디어 금과 외교를 끊고 여러 차례 서북 변방을 침략하였다. 4년(1211, 태조 6),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금을 치니, 금주가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그 길로 연경(燕京)까지 육박하였다가 얼마 후 돌아왔다. 황자 출적(朮赤)ㆍ찰합태(察合台)ㆍ와활태(窩闊台)를 시켜 운내(雲內)ㆍ동승(東勝) 등의 주를 돌며 항복을 받았다. 5년(1212, 태조 7),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금(金)의 서경(西京)을 포위하였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포위를 풀었다. 고리고 차별(遮別)을 시켜 금의 동경(東京)을 탈취하였다. 6년(1213, 태조 8), 오회령(五回嶺)에서 금군을 격퇴하고 탁()ㆍ역(易) 2주를 탈취하였다. 다시 군사를 3도로 배치시켜 중도(中都)를 핍박하였다. 7년(1214, 태조 9), 중도를 포위하고 그들이 버티다 지치게 하기 위해서"왜 아군을 호궤(犒饋)하여 화친을 맺으려 하지 않는가?” 꾸짖으니, 금주 순(珣)이 영제(永濟)의 딸로 혼인을 맺자고 청하므로 철목진이 드디어 북으로 돌아왔다. 금주가 변경(汴京)으로 천도를 하고 아들 수충(守忠)을 중도(中都)에 머물러 두었는데, 철목진이 금주가 화친을 맺자마자 천도하였다 하여 석말명안(石抹明安) 등을 보내어 중도를 포위하자 다시 수충을 변경으로 불러 들였다. 철목진이 목화려(木華黎)를 보내어 요동(遼東)을 쳤다. 8년(1215, 태조 10), 명안(明安)이 중도(中都)를 탈취하니 금주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했는데, 철목진(鐵木眞)이 살몰갈(撒沒喝)을 보고"비유하자면 울타리 안의 노루ㆍ토끼를 내가 벌써 다 잡았는데 그까짓 토끼 한 마리야 남겨둔들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하니, 살몰갈은 제가 공로가 없음이 부끄러워서 금주에게 사람을 보내어"네가 만약 화친을 맺고 싶다면 제호(帝號)를 제거하고 모든 성을 바치라. 그렇게 한다면 너를 왕으로 봉해주리라.” 달래었으나 금주가 듣지 않았다. 철목진이 패주(覇州)의 항장(降將) 사천예(史天倪)에게 우부도원수(右副都元帥)를 주고 금에 침입시켜 평주(平州)를 빼앗았다. 10년(1217, 태조 12), 목화려(木華黎)로 태사(太師)를 삼아 노국왕(魯國王)에 봉하고 번(藩)ㆍ한(漢) 제군을 통령하게 하였다. 그리고 연경(燕京)ㆍ운중(雲中)에다 행성(行省)을 설치하고 하유하기를"태항(太行) 이북은 내가 스스로 경략할 것이니 이남은 경이 노력하라.” 하였다. 11년(1218, 태조 13), 군대를 보내어 서하(西夏)를 치니 하주 이준욱(李遵頊)이 서경(西京)으로 달아났다. 철목진(鐵木眞)이 연경(燕京)을 차지하고 요(遼)의 종실(宗室) 야율초재(耶律楚材)를 얻어 좌우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거란의 육가(六哥)가 고려의 강동성(江東城)을 점거하였으므로 합진(哈眞)ㆍ찰라(札刺)를 보내어 평정시켰다. 왕철(王㬚)이 세공(歲貢)할 방물(方物)의 품목을 물었다. 12년(1219, 태조 14), 서역(西域)이 사신을 살해하므로 철목진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여 추장 합지아(哈只兒)를 사로잡았다. 13년(1220, 태조 15), 철목진이 알탈라아성(斡脫羅兒城)을 함락하였다. 목화려(木華黎)가 포성(蒲城)까지 점령해 들어가자 금의 환산공(桓山公) 무선(武仙)이 진정(眞定)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사천예(史天倪)가 목화려에게"큰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한없이 노략질하니 백성을 보호하고 죄인을 토벌하는 왕자의 뜻이 아니옵니다.” 달래니 목화려는 좋은 말이라 하고 영을 내려 노략질을 금지시켰다. 14년(1221, 태조 16), 철목진이 복합아(卜哈兒)ㆍ설미사간(薛迷思干) 등의 성을 함락하고 군사를 철문관(鐵門關)에 주둔시키니, 철문관은 살마아국(撒馬兒國)에 있다. 금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는데 원제(元帝)를 형으로 일컬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제(帝 송 영종을 말한다)가 순몽옥(荀夢玉)을 철문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목화려가 부주(鄜州)를 탈취하였다. 야율초재(耶律楚材)가 경오원력(庚午元曆)을 바쳤다. 야율초재가 천인학(天人學)에 조예가 깊다 하여, 철목진이 황자 와활태에게 소개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나에게 준 사람이다. 이 뒤로는 군국(軍國) 서정을 다 맡기되 이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15년(1222, 태조 17), 철목진이 탑리한채(塔里寒寨)를 함락하고 멸리가한(滅里可汗)을 사로잡았다. 금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는데 회골국(回鶻國)까지 가서 철목진을 만나보았다. 16년(1223, 태조 18), 철목진이 서역 제국을 평정하고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설치하였는데 중국말로 장인관(掌印官)이다. 17년(1224, 태조 19), 철목진이 동인도국(東印度國)에 이르렀을 때, 어떤 외뿔 짐승이 나타났는데 털빛은 푸르고 사슴 몸뚱이에 말꼬리를 가졌다. 그 짐승이 사람처럼 말을 하면서 “일찍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철목진이 놀라며 야율초재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 짐승의 이름은 각단(角端)이온데 온갖 말을 다 할 수 있고 성품이 죽이는 것을 싫어하고 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자못 하늘이 폐하에게 알려주는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천심(天心)을 받들어 민생을 보전하옵소서.” 하므로 철목진이 즉시 반사(班師)하였다. 보경(寶慶 송 이종(宋理宗)의 연호) 1년(1225, 태조 20), 철목진(鐵木眞)이 행궁(行宮)으로 돌아오니 떠난 지 무려 7년 만이었다. 무선(武仙)이 진정(眞定)에서 반란을 일으켜 도원수(都元帥) 사천예(史天倪)를 죽이매 그의 아우 천택(天澤)이 무선을 토벌하여 쫓았는데, 얼마 후 무선이 다시 진정을 점거하였다. 2년(1226, 태조 21), 철목진이 하국(夏國)에서 원수는 받아들이며 볼모는 보내지 않는다 하여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군사를 감주(監州)에 주둔시켰다. 사천택(史天澤)이 무선(武仙)을 격퇴시키니, 무선이 다시 금(金)에 항복하였다가 나중에 수졸(戍卒)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와활태가 금의 변경(汴京)을 포위하였다. 3년(1227, 태조 22), 철목진이 육반산(六盤山)에 피서를 하고 있는데 금주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자 철목진이 뭇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난 겨울부터 살략(殺掠)을 불허하였는데 벌써 그 하조(下詔)를 잊으라는 말인가? 이제 내 뜻을 중외(中外)에 포고하고 저 사신에게도 알려주라.” 하였다. 하주 이현(李晛)이 항복하니, 하가 드디어 멸망되었다. 철목진이 살리천(薩里川)에서 죽었는데, 임종(臨終)할 때 좌우들에게 “금의 정병이 동관(潼關)에 있는데 남으로는 연산(連山)을 지고 북으로는 대하(大河)가 가로질러서 당장 함락하기는 어렵다. 만약 송(宋)에 길을 빈다면 송과 금은 역대의 원수이므로 반드시 허락해 줄 것이요, 즉시 당(唐)ㆍ등(鄧)으로 군사를 투입시켜 대량(大梁)을 쳐부수면 금이 다급해져서 반드시 동관 군사를 더 징발해 올 것이다. 그러나 천리길에서 구원해 오자면 사람과 말이 다같이 피폐할 테니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다.” 하고 일러주니 나중에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나이 66에 22년을 참위(僭位)하였다. 시호는 성무황제(聖武皇帝),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기련곡(起連谷)에 장사하였다. 넷째 아들 타뢰(拖雷)가 1년 간 감국(監國)하였다. 와활태(窩闊台)는 철목진의 셋째 악들이며 어머니는 홍길라씨(弘吉刺氏)인데, 철목진이 와활태의 공이 많았다 하여 죽을 때에 그를 세우라고 유언하였다. 소정(紹定 송 이종(宋理宗)의 개원(改元)) 3년(1230, 몽고 태종(太宗) 2), 비로소 곽박(霍博) 땅에서 분상(奔喪)을 오니 이때 타뢰(拖雷)가 감국(監國)한 지 벌써 1년이 넘었었다.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종사(宗社)의 대계는 빨리 결정해야 됩니다.” 하였더니, 타뢰는 택일을 하라고 명하므로, 초재가 다시 “날은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이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제왕 백관을 불러 와활태를 화림(和林)으로 받들어다 즉위시켰다. 이어서 조의(朝儀)를 세우고 법령을 반포하였다. 금주가 사신을 시켜 부의(賻儀)를 보냈는데, 와활태는 이를 물리치며 “너희 임금이 오랜 세월을 두고 항복하지 않아 선제로 하여금 싸움에서 늙게 하였다.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금을 정벌하기로 결의 하였다. 와활태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금을 공격하여 한성(韓城)ㆍ포성(蒲城)을 함락하였다. 과거 철목진이 서성(西城)을 정벌하고 식량을 비축하려 하는데, 뭇신하들이 다같이 중국 사람은 쓸 데가 없으므로 모두 죽여서 초목이나 무성하게 하여 목지(牧地)로 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으나, 야율초재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넓은 천하에 무엇인들 못 구하겠소? 참으로 중원의 지세(地稅)ㆍ상세(商稅)와 주초(酒醋)ㆍ염철(鹽鐵)ㆍ산택(山澤)의 이익을 균정한다면 어찌 창고의 비축이 없겠습니까?” 이때 야율초재가 10로(路)에 과세소(課稅所)를 설립하여 선비 출신으로 2명의 과세사(課稅使) 및 부사를 두고 이어서 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교(敎)를 설명하니, 이로 말미암아 문신들이 점차 진용되었다. 4년(1231, 태종 3), 와활태(窩闊台)가 남북의 군대를 연합하여 변경(汴京)을 공격하는데, 타뢰(拖雷)를 시켜 먼저 보계(寶鷄)로 달려가게 하고 한편 사신 삭불한(搠不罕)을 조정(朝廷 송을 말함)에 보내와 길을 빎과 동시에 원병을 청하였다. 그런데 면주(沔州)에 이르렀을 때 통제(統制) 장선(張宣)이 그를 유인해 죽이니, 타뢰가 이 소식을 듣고 “송 나라가 스스로 맹약을 저버렸으니 곡직(曲直)은 뻔하다.”고 노하였다. 비로소 중서성(中書省)을 세우고 야율초재로 중서령(中書令)을 삼았다. 타뢰가 대산관(大散關)으로 침임하여 서수현(西水縣)까지 땅을 점령한 다음, 군대를 흥원(興元)ㆍ양주(洋州) 사이로 철수하였다가 다시 요풍관(饒風關)으로 달려갔다. 고려가 사신간 사람을 죽이매 드디어 살례탑(撒禮塔)을 시켜 고려를 치고 40여 성을 빼앗으니 고려왕 철(㬚)이 항복을 청하였다. 그래서 관(官)을 설치하여 그 땅을 나누어 진압하고 돌아갔다. 와활태가 하중(河中)울 탈취하였다. 5년(1232, 태종 4), 와활태(窩闊台)는 숭(嵩)ㆍ여(汝) 등의 주를 공격해 내려가고 속불태(速不台)는 변경을 포위하니, 금주가 아우 와가(訛可)를 볼모로 보내며 화친을 청하였다. 와활태가 북으로 돌아오니, 고려가 설치해 놓은 관리를 죽이고 도읍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겼다. 사신 당경(唐慶)을 금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더니 금에서 그를 죽였다. 살례탑(撒禮塔)이 다시 고려를 치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6년(1233, 태종 5), 금주가 귀덕(歸德)으로 달아나니 최립(崔立)이 변경(汴京)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채(蔡)로 달아난 금주를 탑찰아(塔察兒)가 포위하였다. 공자(孔子)의 11대손 원조(元措)를 연성공(淵聖公)에 습봉(襲封)하였다. 제(帝 송 이종을 말한다)가 형악 도총(荊鄂都摠) 맹공(孟珙)을 시켜 군사와 군량을 원조하였다. 단평(端平 송 이종(宋理宗)의 개원) 1년(1234, 태종 6), 금주 수서(守緖)가 승린(承麟)에게 전위하고 자신은 목 매어 죽었다. 승린이 또한 난병에 의해 죽으니 금은 멸망되었다. 드디어 진(陳)ㆍ채(蔡) 동남땅을 조정에 돌려주었다. 제(帝 송 이종(宋理宗))가 삼경(三京)을 되찾을 계획으로 회동제치사(淮東制置使) 조규(趙葵) 등을 시켜 변경으로 진격케 하였는데, 속불태(速不台)가 황하(黃河)를 터서 대니 규 등이 변경을 버리고 달아났다. 2년(1235, 태종 7), 아들 귀유(貴由)는 서역(西域)으로, 활단(闊端)은 진공(秦鞏)으로, 제왕(諸王) 구온불화(口溫不花)는 강회(江淮)로, 당고(唐古)는 고려로 각각 침입시켰다. 3년(1236, 태종 8),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말을 따라 부세법(賦稅法)을 정하였는데, 두 집에서 실 1근을 내어 관용에 제공하고, 다시 다섯 집에서 실 1근을 내어 제왕 및 귀척가에게 준다. 그리고, 상전(上田)은 1묘(畝)당 3승(升) 반, 중전은 3승, 하전은 2승 반을 매기고, 논은 1묘 당 5승을 매기고, 상세(商稅)는 30분의 1을 받게 하였다. 이름난 선비 양척(梁陟)을 불러 장관에 보직하고 왕만경(王萬慶)ㆍ조저(趙著)를 부(副)로 삼아 구경(九經)을 바로 풀이하여 동궁(東宮)에게 진강(進講)케 하였는데 대신의 자손들까지도 청강을 명하였다. 활단(闊端)이 촉(蜀)을 탈취하였다. 과거에 철목진(鐵木眞)이 금의 군자고사(軍資庫使) 요추(姚樞)를 포획해간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요추가 종군하게 되었다. 그래서 특목대(忒木䚟)가 조양(棗陽)을 함락하고 선비들을 갱살(坑殺)하려 할 적에 요추가 극력 만류하였고, 또 덕안(德安)을 함락시키고 이름난 선비 조복(趙復)을 요추가 함께 데리고 왔다. 이로 말미암아 북방에서도 비로소 경학(經學)을 알게 되었다. 가희(嘉熙 송 이종의 개원) 1년(1237, 태종 9), 몽가(蒙哥)가 흠찰(欽察) 제부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흠찰은 중국에서 3만여 리가 된다. 유중(劉中)ㆍ양환(楊奐)에게 명하여 제로의 유생을 시취(試取)케 하였는데, 포로로 잡혀와서 종이 된 자도 응시를 허락하였다. 경의(經義)ㆍ사부(詞賦)ㆍ논(論) 3과로 나누어 무려 4천 30명의 선비를 뽑아서 그 집을 복호(復戶)하였다. 온불화(溫不花)가 황주(黃州)로 침입하자 맹공(孟珙)이 쳐서 물리쳤다. 다시 안풍(安豐)으로 공격해 온 것을 두과(杜果)가 힘껏 싸워 물리쳤다. 제(帝 이종을 말한다)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므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비로소 병부와 옥새를 만들었다. 2년(1238, 태종 10), 왕사(王師 송군(宋軍)을 말한다)가 다시 양(襄)ㆍ번(樊)을 빼앗았다. 와활태(窩闊台)가 사신을 보내와 세폐(歲幣)를 요구하였다. 여주(廬州)를 포위한 찰한(察罕)을 여문덕(呂文德)이 쳐서 물리쳤다. 종행성(從行省) 양유중(楊惟中)이 태극서원(太極書院) 및 주돈이(周敦頤) 사당을 연경(燕京)에 세워 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장재(張載)ㆍ양시(楊時)ㆍ유초(游酢)ㆍ주희(朱熹)를 배향시키자고 청하였다. 4년(1240, 태종 12), 장유(張柔) 등을 두 길로 나누어 침입시켰다. 순우(淳祐 이종의 개호) 1년(1241, 태종 13) 와활태(窩闊台)가 와철고호란산(鈋鐵胡蘭山)에서 죽었다. 와활태가 시기를 요량하고 힘을 헤아리는 데 있어 실수하는 일이 없고 화하(華夏)가 부흥하여 당시 태평세대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성품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만년에는 더욱 심하였다. 나이 56에 13년을 참위하였으며, 시호는 영문황제(英文皇帝),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기련곡(起輦谷)에 장사하였다. 여섯째 황후 탈렬가나내마진씨(脫列哥那乃馬眞氏)가 제라 일컬었다. 당초에 와활태 넷째 아들 곡출(曲出)의 아들 실렬문(失烈門)을 세우라고 유명을 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황후가 초재(楚材)를 불러 대책을 물으니 “이는 외성(外姓)으로서 감히 알 바도 아니거니와 유조(遺詔)가 있는 한 그대로 따르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나 황후는 따르지 않고 드디어 화림(和林)에서 제라 일컬었다. 2년(1242, 탈렬가나(脫列哥那) 1), 장유가 회수(淮水)를 건너 통주(通州)를 무찔렀다. 3년(1243, 탈렬가나 2), 오도라합만(奧都刺合蠻)이 용사(用事)하여 대내 대외의 권력을 다 장악하므로 초재(楚材)가 울분을 못 이겨 병이 나서 죽었는데, 어떤 이가 후에게 “초재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천하의 공부(貢賦)를 반은 자기 집으로 들여갔다.” 참소하여, 후가 사람을 시켜 집안을 뒤져 보았더니 거문고 및 완품(玩品) 10여 점과 서화ㆍ금석문(金石文) 수천 권뿐이었다. 5년(1245, 탈렬가나 3), 찰한(察罕)이 양주(楊洲)로 침입하였다가, 제치사(制置使) 조규(趙葵)가 화친을 청하자 그만 물러갔다. 아모한(阿母罕)을 고려에 침입시켜 위주(威州)ㆍ평로성(平鹵城)을 함락하였다. 6년(1246, 몽고 정종(蒙古定宗) 1), 황후가 임조(臨朝)한 지 5년에 제왕 백관을 답란답팔사(答蘭答八思)에 모아놓고 귀유(貴由)의 옹립을 상의하였는데 오래도록 결정을 내리지 않아서 제왕들이 반란을 꾀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비가 쏟아져서 각자 해산하고 말았다. 후가 함순(咸淳 송 도종(宋度宗)의 연호) 2년(1265, 세조(世祖) 지원(至元) 2)에 죽었는데, 4년을 칭제(稱制)하였으며 시호는 자혜황후(慈惠皇后)이다. 귀유(貴由)는 와활태(窩闊台)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내마진씨(乃馬眞氏)이다. 늘 제왕을 따라 전쟁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공을 세웠다. 왕길속멸독리(汪吉速滅禿里)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모든 정치는 모후(母后)에게서 나왔다. 7년(1247, 정종 2), 고려가 세공(歲貢)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8년(1248, 정종 3), 귀유(貴由)가 횡상을아(橫相乙兒)에서 죽었다. 이때에 국내가 크게 가물어 사람이 살 수가 없는데도 제왕ㆍ각부가 제군에 사람을 보내어 터무니없는 징수를 요구하므로 민력은 더욱 피폐하였다. 나이 40에 3년간 참위하였으며, 시호는 간평황제(簡平皇帝), 묘호는 정종(定宗)이다. 기련곡(起輦谷)에 장사하였다. 귀유의 후(后) 알올립해미실씨(斡兀立海迷失氏)가 와활태(窩闊台)의 구명(舊命)이라 해서 태손(太孫) 실렬문(失烈門)을 안고 청정(聽政)했는데, 제상 대신이 다들 복종하지 않았다. 나중에 압양(厭禳) 사건이 발각되어 몽가(蒙哥)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3년을 칭제(稱制)하였으며, 시호는 흠숙황후(欽淑皇后)이다. 몽가(蒙哥)는 철목진(鐵木眞)의 넷째 아들 타뢰(拖雷)의 맏아들인데 어머니는 겁렬씨(㥘烈氏)이며, 와활태(窩闊台)가 길러서 아들로 삼았다. 여러 차례 정벌에 따라나가서 신기한 공을 세웠다. 귀유(貴由)가 죽고 오래도록 임금을 세우지 않았는데 중외(中外)의 인심이 모두 몽가에게로 쏠리자 제왕 발도(拔都)ㆍ대장 올량합태(兀良合台)가 결정을 내려 활첩올아란(闊帖兀阿蘭)에서 몽가를 옹립하였다. 11년(1251, 몽고 헌종(蒙古憲宗) 1), 황제(皇弟) 홀필렬(忽必烈)에게 명하여 몽고와 한(漢)의 민호(民戶) 사무를 다스리게 하고 금련천(金蓮川)에다 관사(官舍)를 세웠다. 과거에 요추(姚樞)가 벼슬을 버리고 소문산(蘇門山)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홀필렬이 불러 객례(客禮)로 대접하였다. 요추가 제왕의 도(道)에 관한 글 수천 언을 써 올렸다. 그리고 능천(陵川) 학경(郝經)을 불러 경국(經國) 안민(安民)의 도를 자문하였다. 찰한(察罕) 등을 두 길로 나누어 회(淮)ㆍ촉(蜀)에 침입시켰다. 홀필렬이 변경에다 경략사(經略司)를 설치하고 군대를 나누어 둔전(屯田)을 두었다. 12년(1252, 헌종 2), 제왕들이 실렬문(失烈門)을 옹립한다 하여 그들을 먼 곳으로 분천(分遷)하고, 귀유(貴由)의 후를 사사(賜死)하고, 실렬문을 몰탈적(沒脫赤)으로 금고(禁錮)시켰다. 제왕을 시켜 서역(西域) 제국을 정벌하고 홀필렬(忽必烈)을 시켜 대리(大理)를 정벌하였다. 일용산(日用山)에서 제천(祭天)하고 비로소 면류관과 가악(歌樂)을 썼다. 서역(西域)의 승(僧) 나마(那摩)를 국사(國師)로 삼아 천하의 석교(釋敎)를 총관케 하였다. 왕덕신(汪德臣)이 성도(成都)에 침입하였다가 여개(余玠)에게 패전하였다. 제왕 야고(也古)를 시켜 고려를 침략하였다. 보우(寶祐 송 이종의 개원) 1년(1253, 헌종 3), 종왕(宗王) 야호(耶虎)가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고려의 화산(禾山)ㆍ동주(東州)ㆍ춘주(春州)ㆍ삼각산(三角山)ㆍ양근(楊根)ㆍ천룡(天龍) 등의 성을 함락하였다. 홀필렬(忽必烈)이 대리(大理)를 평정하고 토번(吐蕃)을 항복받았다. 2년(1254, 헌종 4), 홀필렬이 염희헌(廉希憲)을 경조 선무사(京兆宣撫使)로 삼고 장유(張柔)를 시켜 박주(亳州)에 성을 쌓았다. 3년(1255, 헌종 5), 차라대(箚刺䚟)를 시켜 고려를 침략하였다. 홀필렬이 허형(許衡)을 불러다 경조 제학(京兆提學)을 시켰다. 형이 요추(姚樞)와 함께 정주(程朱)의 학을 받아들여 깊은 조예가 있어 강개히 도학으로써 자임(自任)하였다. 올량합태(兀良合台)가 서이(西夷)ㆍ남이(南夷)를 쳐서 모두 평정하였다. 4년(1256, 헌종 6), 유병충(劉秉忠)을 시켜, 환주(桓州) 동쪽 난수(灤水) 북쪽 용강(龍岡)에 성시(城市)와 궁실(宮室)을 영건하고 ‘개평(開平)’이라 하였다. 5년(1257, 헌종 7), 제왕들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송 나라를 침공하라 하였다. 원수(元帥) 복린길대(卜隣吉䚟)는 한강 건너까지 점령하였고, 몽가(蒙哥)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추산관(趨散關)에 침입하였다. 6년(1258, 헌종 8), 원수 유인(紐璘)이 성도(成都) 및 팽(彭)ㆍ한(漢) 등의 주를 빼앗았다. 홍다구(洪茶丘) 등을 시켜 고려를 침입하였다. 종왕(宗王) 욱렬(旭烈)이 서역(西域) 제국을 평정하였다. 몽가(蒙哥)가 낭주(閬州) 대획산(大獲山)까지 밀고 들어와서 수장(守將) 양대연(楊大淵)을 잡아다 도원수(都元帥)를 삼았다. 개경(開慶 송 이종의 개원) 1년(1259, 헌종 9), 홀필렬(忽必烈)이 강을 건너와서 악주(鄂州)를 포위하매 제가 우승상(右丞相) 가사도(賈似道)를 시켜 군사를 한양(漢陽)에 배치하여 악주를 원조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황주(黃州)로 옮겨가자 몰래 송경(宋京)을 흘필렬의 군문에 보내어 ‘신’이라 일컬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때에 몽가는 벌써 합주(合州) 조어산(釣魚山)에서 죽었으나 흘필렬은 이제야 부음을 받았다. 가사도가 다시 송경을 보내어 국경 및 세폐 문제를 논의했는데, 학경(郝經)의 권유로 화친을 수락하였다. 홀필렬이 장걸(張傑) 등을 머물러두고 드디어 채(砦)를 함락시킨 다음 돌아갔다. 몽가(蒙哥)는 침착하며 판단력이 좋고 말이 적었으며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통솔함에 있어 매우 엄격하였다. 언젠가 이런 유시를 내렸다. “너희들은 내가 유시하는 말을 알았는가? 즉 지기(志氣)가 교일(驕逸)함에 대한 말이다. 지기가 교일하고도 재앙이 뒤따르지 않는 자를 보았는가? 너희들은 경계하라.” 그러나 성품이 사냥을 좋아하고 무복(巫卜)을 너무 믿었다. 어떤이는, 합주(合州)를 포위하였을 적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한다. 나이 52에 9년을 참위하였고, 시호는 환숙황제(桓肅皇帝),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홀필렬(忽必烈)이 뒤를 이었다. 홀필렬은 몽가(蒙哥)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인명(仁明) 영예(英睿)하고 항상 천하에 뜻을 품고 있어서 몽가가 군국 서무를 다 맡기다시피하고 관중(關中)ㆍ남하(南河)의 땅을 다 차지하게 하였다. 때마침 그를 참소한 자가 있어서 몽가가 의심을 품고 구고국(鉤考局)을 설치하여 사실을 캐내려 하였는데, 홀필렬이 요추(姚樞)의 계책을 써서 비빈과 공주를 먼저 떠나보낸 다음 조정에 돌아와서 스스로 몽가를 만나보고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마침내 의심을 풀고 구고국을 파하였다. 이때에 홀필렬은 악주(鄂州)를 침공하고 있다가 몽가가 죽고 아람답아(阿藍答兒)ㆍ혼해도(渾海都) 등이 그의 아우 아리불가(阿里不哥)의 옹립을 꾀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길로 가사도(賈似道)와 화친을 맺고 북으로 돌아오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경정(景定 송 이종의 개원) 1년(1260, 원 세조(元世祖) 중통(中統) 1), 친왕(親王) 합단막가(合丹莫哥)ㆍ탑찰아(塔察兒) 등이 제대신과 함께 흘필렬을 권진(勸進)하였는데 세 번을 사양한 다음에야 즉위하였다. 섬서 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이 “고려 국왕이 일찍이 그의 세자 전(倎)을 조근(朝覲)차 들여보냈는데, 마침 헌종께서 군대를 이끌고 송을 치러 나가서 3년이나 억류된 채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들으니 그의 아버지 철(㬚)이 벌써 죽었다고 하는데 만약 전을 왕으로 세워 돌려보낸다면 그가 반드시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면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한 나라를 얻는 결과가 됩니다.” 하고 진언하니, 홀필렬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전(倎)을 호위하여 보내고 경내에 중서성(中書省)을 세우라 명하여 왕문통(王文統)을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장문겸(張文謙)을 좌승(左丞)으로 삼았다. 장문겸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주무를 삼았다. 학경(郝經)을 국신사(國信使)로 삼아 화친을 제의하였다. 처음으로 관제(官制)를 제정하였다. 아리불가(阿里不哥)가 아람답아(阿藍答兒)를 시켜 막북(漠北) 제부의 군대를 동원하고 화림(和林)에서 제라 칭하였다. 가사도(賈似道)가 학경을 진주(眞州) 충용군(忠勇軍) 영(營)에 구금하였다. 교초법(交鈔法 다른 나라끼리 화폐를 같이 쓰는 법)을 시행하고 10로(路)에 선무사(宣撫使)를 두었다. 아리불가(阿里不哥)의 사명을 받고 경조(京兆)에 들어와서 변란을 획책하던 유태평(劉太平)ㆍ곽노회(霍魯懷)를 염희헌(廉希憲)이 잡아 베었다. 홀필렬(忽必烈)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아리불가를 토벌하였다. 합단합필적(合丹哈必赤)을 시켜, 혼도해(渾都海)와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킨 섬서행성승상(陝西行省丞相) 아람아(阿藍兒)를 사로잡아 베었다. 홀필렬이 화림(和林)에서 돌아와 서역 승 팔사파(八思巴)로 제사(帝師)를 삼았다. 2년(1261, 중통 2), 군중에 사로잡혀 있는 선비들을 모두 평민으로 풀어 주었다. 노주(瀘州) 15성(城)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항복한 동주 안무부사(潼州安撫副使) 유정(劉整)에게 흘필렬이 기로행성(夔路行省)을 주었다. 이로써 조정의 허실을 다 알게 되었다. 고려 국왕 전(倎)이 진(禛)으로 개명하고 아들 심(諶)을 조빙차 보내왔다. 홀필렬(忽必烈)이, 장사(將士)들은 남침시키고 자신은 아리불가(阿里不哥)를 쳤다. 아리불가가 북으로 도망가자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돌아섰다. 3년(1262, 중통 3), 연해(連海) 3성을 가지고 항복해온 이전(李全)의 아들 강회 대도독(江淮大都督) 이단(李璮)에게 제(帝)가 절도사(節度使)를 제수하고 제군왕(齊郡王)에 봉하였다. 왕문통(王文統)이 단과 내통한 죄에 연좌되어 베임을 당하고 단은 사천택(史天澤)에게 죽었다. 4년(1263, 중통 4), 국신사(國信使) 왕덕소(王德素)를 보내와서 학경(郝經)을 억류한 까닭을 캐물었다. 비로소 태묘(太廟)를 건립하였다. 이해에는 사형을 받은 죄수가 7명뿐이었다. 5년(1264, 원 세조 지원(至元) 1), 고려 왕진(王禛)이 조빙가서 세견례(世見禮)를 닦았다. 아리불가(阿里不哥)가 친왕(親王) 옥룡답실(玉龍答失) 등 및 모신(謀臣) 불로화(不魯花) 등과 함께 귀순해 왔다. 홀필렬은, 제왕(諸王)은 모두 태조의 후예라 해서 석방하고 죄를 묻지 않았으며 다만 불로화 등만 베었다. 유병충(劉秉忠)이 연경(燕京) 천도를 청하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중도(中都)로 개칭하였다. 아합마(阿合馬)가 주철(鑄鐵)의 이익을 일으키자고 청하여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초배(超拜)되었다. 함순(咸淳 송 도종(宋度宗)의 연호) 1년(1265, 지원 2), 아출(阿朮)이 여주(廬州) 및 안경(安慶) 제로에 침입하였다. 안동(安童)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삼으니 이때 나이가 21이었다. 홀필렬(忽必烈)이 안동은 어리고 경력이 없다 하여 허형(許衡)을 불러 중서성(中書省)의 일을 논의했는데, 허형이 시무에 관한 네 가지 일을 진술하자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2년(1266, 지원 3), 흑적례(黑的禮)를 사신으로 일본에 보내었다. 3년(1267, 지원 4), 흑적례(黑的禮)가 돌아와서 고려 사자 송군비(宋君斐)ㆍ김찬(金贊)이 주선을 잘못하여서 일본까지 못 갔다고 아뢰매, 홀필렬(忽必烈)이 고려왕을 꾸짖고, 이어 해당관에 명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어 반드시 요령을 잘 알아보아서 기한 내에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정(劉整)이 홀필렬에게 “송 나라를 공격하는 방략은 마땅히 양양(襄陽)을 먼저 쳐야 합니다. 양양은 우리의 옛땅인만큼 양양을 되찾고 한강을 따라 들어간다면 송 나라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홀필렬이 아출(阿朮)을 보내어 경략(經略)하고, 드디어 호두산(虎頭山)에 성을 쌓아 양도(糧道)를 끊었다. 4년(1268, 지원 5),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군사 1만 명과 배 1천 척을 준비하였다 하매, 탈타아(脫朶兒)를 보내어 사열하고 흑산(黑山)과 일본의 뱃길을 살펴본 다음 탐라(耽羅)에 명하여 별도로 배 1백 척을 만들라 하였다. 5년(1269, 지원 6), 사천택(史天澤)을 보내어 양양(襄陽)땅을 구획 정리하고 국사(國師) 팔사파(八思巴)를 시켜 몽고 신자(蒙古新字)를 창조, 반포하였다. 경호 도통(京湖都統) 장세걸(張世傑)이 번성(樊城)을 포위한 아출(阿朮)을 맞아 싸우다가 패전하고, 하귀(夏貴)가 다시 신영(新郢)에서 아출을 습격하다가 또 실패하였다. 고려 역신(逆臣) 임연(林衍)이 제 임금 진(禛)을 죽이고 아우 창(淐)을 세우매, 홀필렬이 조벽(趙璧)에게 명하여 그의 일당을 평양(平壤)에 불러모아서 임연의 목만을 베라 하고, 또 고려 세자 심(諶)을 상주국동안공(上柱國東安公)으로 올려주며,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국란을 평정하라 하였다. 그러자 순은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진이 병을 앓고 있는 까닭에 아우 창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한 것이다.” 하고 표소(表訴)하였다. 고려 최탄(崔坦) 등이 서경(西京)의 50여 성을 끌고 항복했다. 홍다구(洪茶丘)에게 군사 3천 명을 주어 고려를 평정하게 하자 진(禛)이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렸는데, 조서를 받고 벌써 복위하였으니 머지않아 입근(入覲)할 것이라고 하였다. 국사(國師)를 시켜 밤낮 7일 동안 태묘(太廟)에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 6년(1270, 지원 7), 상서성(尙書省)을 설립하였다. 과거에 상서성으로써 산동(山東) 이서 하북(河北) 땅을 통괄하게 하여 이 지역을 ‘복리(腹裡)’라 하는 한편 대도인 연경(燕京)이 예속되었다 하여 도성(都省)이라 부르고, 그 밖의 중요한 곳에는 중서성(中書省)을 두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제왕ㆍ부마(駙馬)들과 투항한 자를 아울러 도성에 예속시켰다. 고려 서경(西京)을 내속(內屬)시켜 동녕부(東寧府)로 개칭하고 자비령(慈悲嶺)을 한계로 그었다. 탈타아(脫朶兒)ㆍ초천익(焦天翼)으로 고려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삼아 조빙온 고려왕 진(禛)을 호송해 보내고, 이어서 “임연(林衍)을 잡아 보내는 자에게는 높은 관질을 주리라.” 하는 유지를 내렸다. 허형(許衡) 등이 조의(朝儀)ㆍ관제(官制)를 제정하고, 상문(尙文) 등이 문무(文武)의 의장과 복색을 정하게 하였다. 고려 역신 임연이 죽고 아들 유무(惟茂)가 다시 연의 직위를 이어받았다가 송종례(宋宗禮)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배중손(裵仲孫) 등이 진(禛)의 서족(庶族)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삼아 진도(珍島)와 탐라(耽羅)로 숨어다니다가, 나중에 흔도(忻都)에 의해 평정되었다. 수군을 이끌고 양양(襄陽)에 원병온 범문호(范文虎)를 유정(劉整) 등이 힘껏 싸워 대파했다. 군사를 징발하여 고려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흔도ㆍ사추(史樞) 등을 금주(金州) 등의 경략사(經略使)로 삼아 둔전에 관한 일을 관리하게 하였다. 조양필(趙良弼)을 사신으로 일본에 보내었다. 사천택이 만산(萬山)에 한 일(一) 자 성을 쌓으니 이로부터 양양ㆍ번성(樊城)의 길이 끊겼다. 7년(1271, 지원 8), 새전적섬사정(賽典赤贍思丁) 등을 시켜 수륙 양로로 진군하여 양양을 포위하였다. 허형(許衡)이 소를 올려, 아합마(阿合馬)가 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해치는 여러 가지 일을 논하였으나 회보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병을 칭탁하고 기무(機務)에서 해직하기를 청하매, 지난날처럼 집현태학사 겸좨주(集賢太學士兼祭酒)를 주어서 몽고ㆍ한인(漢人) 관원 및 그 자손들 가운데 준수한 자를 생도로 채워 가르치게 하였다. 아출(阿朮)이 단탄(湍灘)에서 범문호(范文虎)를 격퇴하였다. 유병충(劉秉忠)의 청을 받아들여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니, 이는 《역경(易經)》 건괘(乾卦) 원(元)의 뜻을 취해서이다. 8년(1272, 지원 9), 아출(阿朮)이 용미주(龍尾洲)에서 통제사(統制使) 장순(張順)ㆍ장귀(張貴)를 무찔렀다. 9년(1273, 지원 10), 아리해아(阿里海牙)가 번성(樊城)을 함락하였다. 양양(襄陽)을 가지고 항복한 선무사(宣撫使) 여문환(呂文煥)에게 소용대장군 양양대도독(昭勇大將軍襄陽大都督)을 주었다. 수재학궁(秀才學宮)을 설치하고 집사(執事)들에게 난대(襴帶)ㆍ당건(唐巾)을 착용시켰다. 10년(1274, 지원 11), 흔도(忻都)ㆍ홍다구(洪茶丘)에게 칙령을 내려 전선 9백 척을 거느리고 가서 일본을 치라 하였다. 동궁(東宮)을 건치하였다. 홀필렬(忽必烈)이 창업의 어려움을 되새겨서 사막에 나는 잔디를 단지(丹墀 궁정의 이칭)에 옮겨다 심고 이를 자손들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서검초(誓儉草)’라고 불렀다. 황녀(皇女)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을 고려 세자 심(諶)에게 시집보냈다. 제장(諸將)을 대거 침입시켜 가사도(賈似道)가 조약을 저버리고 학경(郝經)을 억류한 죄상을 수죄(數罪)하였다. 백안(伯顔)에게 이러한 유지를 내렸다. “예부터 강남(江南) 땅을 탈취한 자는 조빈(曹彬) 한 사람뿐인데, 너희가 능히 살육을 안 한다면 이는 바로 나의 조빈이다.” 백안 등이 강을 건너 악주(鄂州)로 달려들자 지주(知州) 장안연(張晏然) 등이 항복하였다. 따라서 모든 주현(州縣)이 바람에 쓸리듯 투항하였다. 아출(阿朮)이 동하(東下)하여 임안(臨安)에 다다랐다. 덕우(德祐 송 공종(宋恭宗)의 연호) 1년(1275, 지원 12), 안경지부(安慶知府) 범문호(范文虎)가 항복하니, 아출(阿朮)이 그에게 절서, 대도독(浙西大都督)을 주었다. 홀필렬(忽必烈)이 항신(降臣) 장안연(張晏然)을 이렇게 타일렀다. “내가 경의 상주(上奏)를 보니 ‘송 나라의 권신(權臣)이 옛 조약을 실천하지 않고 사신을 구류한 것이지, 실로 주상의 잘못은 아니옵니다. 행여 천명(擅命)한 신하에게만 벌을 내리고 조씨(趙氏)로 하여금 종사(宗社)를 보존하게 하여 주신다면……’ 하였으니, 경의 말은 참으로 옳다. 경이 옛 임금을 잊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우리 임금도 잘 보필할 것이기에 그저께 염희현(廉希賢)을 시켜 그 글을 가지고 가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잘못을 뉘우치고 내부(來附)하였다. 권신인 가사도에게도 아직 벌을 내리지 않았거늘 더군다나 조씨의 종사에 있어서랴?” 중도해아(中都海牙 염희현을 말한다)와 학경(郝經)의 아우 용(庸)을 보내와 사신(使臣 학경을 말한다)을 억류한 까닭을 물으니, 가사도가 크게 두려워해서 총관(摠管) 단우(段佑)를 시켜 학경을 예송(禮送)했다. 학경이 귀국할 적에 지나는 곳마다 부로(父老)들이 그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염희현(廉希賢)ㆍ엄충범(嚴忠範)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독송관(獨松關)에 이르렀을 적에 절서 안무사(浙西安撫使) 장유(張濡)의 부곡(部曲)이 충범을 죽이고 희현을 붙잡아 임안(臨安)으로 송치했는데 희현이 상처가 더쳐서 죽었다. 장유는 장준(張俊)의 증손이다. 나중에 독송관이 함락되자 도망을 갔다가 희현의 아들에게 죽고 말았다. 조정(朝廷 송(宋))에서 백안(伯顔)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신을 죽인 사건은 바로 변장(邊將)이 저지른 것이지, 태후와 주상은 실로 알지도 못하였으니, 의당 그 변장을 문책하여 목을 벨 것이라고 해명하고, 폐백을 보내며 철군을 청하니, 백안이 의사관(議事官) 장우(張羽)를 사신과 함께 임안으로 보냈는데, 우(羽)가 평강(平江)에 이르러서 피살되었다. 아출(阿朮)이 양주(楊州)에 육박하였다. 어사(御史) 옥석첩목아(玉昔帖木兒)를 시켜서 강남(江南) 제군의 서판(書板) 및 임안 비서성(秘書省)의 《건곤보전(乾坤寶典)》 등 서적을 몰수해갔다. 백안이 상주(常州)를 무찌르고 통판(通判) 진소(陳炤)를 죽이매, 진의중(陳宜中)은 유악(柳岳)ㆍ육수부(陸秀夫)를 백안의 진영에 보내어 조카[姪]라 일컫고 폐백을 드리되, 듣지 않거든 다시 손(孫)으로 일컬으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문환(呂文煥)을 보내어 우호를 맺어 군사를 후퇴시키도록 하였다. 수부 등이 평강에 이르렀으나 백안이 허락하지 않자, 의중이 태후에게 아뢰어 소국으로 봉해줄 것을 청하는 표를 올리고, 다시 유악을 보냈는데 고우(高郵)에 이르러서 혜용(嵇聳)에게 피살되었다. 고려의 관제가 참람하다 하여 사신에게 유지를 주어보내서 관명 작호가 조정과 같은 것은 모두 개정하게 하였다. 2년(1276, 지원 13), 아리해아(阿里海牙)가 담주(潭州)를 함락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 유절(劉岊)을 백안(伯顔)의 진영에 보내어 ‘신(臣)’이라고 일컬어 표를 올리고 장안진(長安鎭)에 우호를 재다짐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백안이 장안진에 도착하였을 때 진의중(陳宜中)은 약속을 어기고 가지 않았다가, 유기(遊騎)가 임안부(臨安府) 북관(北關)까지 들이닥치자, 태후에게 아뢰어 감찰어사 양응규(楊應奎)를 보내어 항표를 올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그 결과 백안은 호주(湖州)까지 진군하여 여문환(呂文煥)ㆍ범문호(范文虎)로 하여금 태황(太皇)ㆍ태후(太后)를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그래서 진의중 및 장세걸(張世傑)ㆍ유사용(劉師勇)은 익왕(益王) 시(是)와 광왕(廣王) 병(昺)을 옹위하고 절강(浙江) 건너로 달아났다. 한편 조정에서는 유절(劉岊) 등을 기청사(祈請使)로 보냈다. 백안이 문천상(文天祥)을 명인사(明因寺)로 불러들였는데, 천상이 백안을 보고 신의를 저버렸다고 꾸짖자, 드디어 기청사 일행과 함께 북으로 데려다 구류하였다. 제치사(制置使) 하귀(夏貴)가 회서(淮西)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천상이 진강(鎭江)을 지나다 도망쳐와 온주(溫州)에 이르러 시ㆍ병 두 왕(王)을 찾았다. 백안이 아라한(阿刺罕)ㆍ동문병(董文炳)을 머물러두어 두 왕을 추격하게 하고 자신은 북으로 돌아갔다. 육수부(陸秀夫)ㆍ장세걸 등이 드디어 익왕을 대원수(大元帥)로, 광왕을 부원수로 삼아 민(閩)으로 들어갔다. 익왕이 복주(福州)에서 즉위하여 ‘경염(景炎)’으로 개원하고 광왕을 위왕(衛王)으로 삼으니, 즉 이해 5월이었다. 경염(景炎 송 단종(宋端宗)의 연호) 1년(1276, 지원 13), 제(帝 익왕(益王)을 말한다)가 대도(大都)에 이르자 홀필렬이 제를 폐위하여 영국공(瀛國公)으로 삼고 모든 항장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어째서 그렇게도 쉽게 항복하였는가?” 물으매, “가사도(賈似道)가 문신만 우대하고 무신을 경멸하므로 신등이 오래도록 불평이 쌓여 왔던 까닭에 소문만 듣고도 친근감을 가졌습니다.” 대답하자, 홀필렬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을 경멸한 것은 다만 가사도 한 사람의 잘못이지 너희 임금이야 언제 너희를 저버렸던가? 진정 너희들의 말과 같다면 사도가 너희를 경멸한 것은 그럴 만하구나!” 전 정승 유몽염(留夢炎)이 항복하였다. 아라한(阿刺罕) 등이 두 길로 민(閩)ㆍ광(廣)을 침공하자 진의중ㆍ장세걸 등이 제 및 익왕(益王)을 옹위하여 배를 타고 조주(潮州)로 달아났다. 홀필렬이 왕순(王恂)ㆍ곽수경(郭守敬)을 시켜 새 달력을 만들게 하고 허형(許 衡)을 불러다 상정(商訂)하였다. 제가 혜주(惠州) 갑자문(甲子門)에 머물면서 예주(倪宙)를 시켜 항표를 받들고 군문에 나아가 항복을 청하매, 준도(唆都)가 그 자질과 종들을 주와 함께 연경(燕京)으로 가게 하였다. 2년(1277, 지원 14), 도사(道士) 장종연(張宗演)을 시켜 강남(江南)의 도교를 통솔케 하고, 서역 중 양련진가(楊璉眞珈)를 시켜 강남의 불교를 총섭케 하였다. 금주령을 내려서 범하는 자는 가산을 적몰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가 정욱(井澳)에 머물다가 유심(劉深)의 추습(追襲)으로 칠리양(七里洋)으로 갔다. 3년, 제가 강주(碙洲)에 머물다 죽었다. 육수부(陸秀夫)가 위왕을 옹립하고 상흥(祥興)으로 개원하니, 즉 이해 5월이었다. 상흥(祥興 위왕(衛王)의 연호) 1년(1278, 지원 15), 제가 애산(崖山)에 머물러 있었다. 장홍범(張弘範)이 조양(潮陽)으로 진군하여 문천상(文天祥)을 붙잡아다 대도(大都)로 송치하였다. 백이(伯夷)를 소의청혜공(昭義淸惠公)으로, 숙제(叔齊)를 숭양인혜공(崇讓仁惠公)으로 추봉하고, 정호(程顥)를 예국공(豫國公)으로 가봉하였다. 양련진가(楊璉眞珈)가 소흥(紹興)ㆍ제제(諸帝)의 능묘 및 대신의 무덤을 무려 1백 1개소나 파헤치고 금은 보석을 취해 갔다. 염희헌(廉希憲)을 불러 중서성(中書省)에 들어오게 하니 병이 위독하다 칭탁하고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천하의 일이 진실로 견제받는 데가 없다면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정치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장홍범이 애산(崖山)에 진군하자 육수부(陸秀夫)가 제(帝)를 업고 바다에 빠지니, 후궁과 제신들 가운데도 따라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양 태후(楊太后)도 다른 배에 있다가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장세걸(張世傑)이 시체를 건져 바닷가에 장사하고 바다에 빠져 죽으니 송(宋)의 국통은 끊어졌다. 홀필렬(忽必烈)이 통일 이전의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개원하니 무릇 4년이다. 지원(至元) 16년 2월에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였다. 철목진(鐵木眞)은 사막 동북 알난하(斡難河)에서 처음 일어나고 와활태(窩闊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본디 당(唐) 나라 때 회골(回鶻)의 비가사한(毗伽司汗)의 옛 성을 회동의 장소로 삼아서, 처음에는 원창로(元昌路)를 세웠고, 나중에 화림사(和林司)로 고쳐 운영하다가, 홀필렬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여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부터는 화림 선위사(和林宣慰司)로 개설하여 늘 훈구 왕공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여기서 북으로 3천 리를 가면 아지리해자(阿只里海子)이고, 또 5백 리를 가면 겸주(謙州)ㆍ익란주(益蘭州)이며, 다시 1천 리를 가면 대택(大澤)에 이른다. 상도(上都)는 환주(桓州) 동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흘필렬이 개평부(開平府)로 일컫다가 이윽고 상도(上都)로 올려 일찍이 그곳에서 피서하였고, 궁궐과 시사(市肆)의 웅장함은 대도와 대등하다. 그리고 동경(東京)은 곧 요양(遼陽)인데, 홀필렬이 요양 등 각 곳에 행성(行省)을 개설하여 통솔한 노(路)가 일곱이었다. 한대(漢代) 이래로 판도(版圖)에 소속된 것이 혼동강(混同江) 이동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요(遼)와 금(金)이 창흥하면서 비로소 널리 땅을 개척하였고, 원(元)에 와서는 더 멀리 북으로 음산(陰山)을 넘고, 서로 유사(流沙)까지 닿고, 동으로 요좌(遼左)를 다 차지하고, 남으로 해표(海表)를 넘어가서 그 도리(道里)는 숫자로 셀 수가 없다. 병제(兵制)는, 1만 부(夫)의 장은 만호(萬戶), 그 다음은 천호(千戶), 백호(百戶)의 순이다. 홀필렬이 내직으로는 오위(五衛)를 세워 숙위(宿衛)를 총괄케 하고, 외직으로는 만호 밑에 총관(總管)을 두고, 천호 밑에 총파(總把)를 두고, 백호 밑에 탄압(彈壓)을 두어 다시 추밀원(樞密院)으로 총괄케 하였다. 한 집안에서 15세 이상 70세 이하의 남자는 중과(衆寡)를 막론하고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10명씩 1패(牌)로 삼았으며, 어린아이가 조금 자라면 다시 입적시켜 점정군(漸丁軍)이라 불렀다. 관제(官制)는 철목진(鐵木眞) 이하 관계(官階)가 매우 간략하다. 단사관(斷事官)이 가장 중임인데 직위는 삼공(三公)의 위이다. 승상(丞相)은 대필도적(大必闍赤)이라고 부르는데 병권을 장악했을 때는 좌우만호(左右萬戶)라 한다. 그 뒤에 금의 제도를 모방하여 행성(行省) 및 원수(元帥)와 선무사(宣撫使)를 두었다. 홀필렬이 관제를 제정할 때 중서성(中書省)은 정무(政務)를 총괄하고, 추밀원(樞密院)은 병권을 장악하고, 어사대(御史臺)는 출척(黜陟)을 맡게 하였으며, 외직으로는 행성(行省)ㆍ행대(行臺)ㆍ선위사(宣慰司)ㆍ염방사(廉訪司)가 있고, 목민관(牧民官)으로는 노(路)ㆍ부(府)ㆍ주(州)ㆍ현(縣)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이 있는데 몽고 사람에게는 장(長)을, 남쪽 사람에게는 부(副)를 맡겼다. 대(代)마다 배천(拜天)의 예를 행하고, 의관과 제기는 순박함을 숭상했다. 보본반시(報本反始)의 마음은 자연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라, 몽가(蒙哥 헌종의 이름)가 처음 면복(冕腹)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하고 종묘(宗廟)의 제사는 희생을 놓고 말젖을 드리며, 무격(巫覡)이 본국 말로 누대의 제와 후의 휘를 불러 고유한다. 그 후 홀필렬이 비로소 제복과 제기를 마련하고 희생은 말ㆍ소 각 한 마리, 염소ㆍ사슴ㆍ멧돼지ㆍ거위 각 일곱 마리를 썼다. 제왕이 죽으면 널을 황남목(黃楠木)을 쓰고 통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어 주검 모양처럼 판다. 염(殮)에는 초피(貂皮)의 속가죽으로 된 웃옷[襖]과 가죽으로 된 모자ㆍ신ㆍ버선을 쓰고, 또 금으로 된 술병ㆍ술잔ㆍ주발ㆍ쟁반 한 개씩과 수저 각 한 벌을 넣으며, 염이 끝나면 황금으로 네 가닥의 테를 만들어 묶는다. 국초에는 모든 관복을 몽고 풍속대로 따랐고, 홀필렬이 한(漢)ㆍ당(唐)ㆍ송(宋)ㆍ금(金)의 제도를 취했다. 제복(祭服)ㆍ공복(公服)ㆍ질손(質孫)을 만들었다. 질손(質孫)은 한어로 일색복(一色服)인데 궁내의 큰 잔치가 있을 때면 입고, 계절에 따라 똑같지는 않으나 정해진 제도는 없으며, 훈척 대신(勳戚大臣) 및 근시(近侍)들은 하사해야 입는다. 그리고 아래로 악공(樂工)ㆍ위사(衛士)까지도 모두 제 옷이 있어서 상하가 일치하지는 않으나 이를 통틀어 질손이라 한다. 철목진(鐵木眞)은 하악(夏樂)을 쓰고, 와활태(窩闊台)는 금악(金樂)을 썼으며, 홀필렬(忽必烈)이 비로소 대성악(大成樂)을 제정하였다. 국초에는 오로지 금의 법을 썼는데 사람을 많이 다치고 너무 가혹하다 하여, 홀필렬이 번거롭고 가혹한 조항은 제외하고 가벼운 전례만 찾아 썼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몽고가 북적(北狄)으로서 처음 일어날 당시에는 너무 하찮았기 때문에 달단(韃靼)에 부속되었는데, 철목진이 저 멀리 사막 밖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하(夏)를 무찌르고, 금(金)을 내치고, 서역(西域)을 소탕하였고 와활태(窩闊台)가 10로에 사명을 펴 부세를 정하고 선비를 높여 주었으며, 관후한 정치와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마진씨(乃馬眞氏)가 귀유(貴由)의 명을 따르지 않음으로 해서 야율초재(耶律楚材)는 분통이 터져 죽기까지 하였으며, 귀유가 일찍 죽고 나서는 사뙨 아내가 칭제(稱制)하여 그 계통이 끊어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뭇 신하들이 몽가(蒙哥)를 추대하여 서남(西南)으로 넓은 국경을 개척하여 중국의 영토까지 침입하였으며, 그 뒤 홀필렬이 큰 포부를 가지고 온 천하를 통일하였다.
아! 삼대(三代) 이래로 이적(夷狄)이 중국을 침략은 하였어도 중국에 들어와서 제 노릇을 한 자는 없었으나, 호원(胡元)은 비로소 제 노릇을 하였다. 예로부터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지만 그래도 중국의 정통만은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오제(五帝)ㆍ삼왕(三王)께서 물려준 중국이 끝내 제유(諸儒)의 도학(道學)이 크게 발전되던 그 시대에 멸망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었던 일대 변혁이다.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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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만과 조선의 지역 비정"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격려감사합니다...매일매일님.
복받으실겁니다.
글 잘 보았읍니다.
위치를 비정하심에, 요동은 돈황, 요택은 라포박, 의무려산은 동천산, 내만은 알타이 중가리 이르티쉬강 일대, 의주는 감숙성 등등으로 하시나 정작 중요하고 큰 지명이라 할 수 있는 북경(연경)은 어디인지 비정을 안하심니다. 혹시 우루무치쯤으로 생각 하시는지요..
처음엔 우루무치를 생각했는데...
여러 기록들을 보건데 연경북쪽을 기련산(천산)이 두르고...그 이북은 흉노의 땅이라니...그 경계점에 황도를 만들진 않았으리라보여...
투르판지역 어디로 산정해 봅니다.
우루무치는 흉노들의 침입로를 막는 차원이자...
반대로 청나라차원에선 여차하면 남방족들의 난동시 이동할 일차 행궁정도로 보입니다.
또 위의 인용문중에
'6년(1270, 지원 7), 상서성(尙書省)을 설립하였다. 과거에 상서성으로써 산동(山東) 이서 하북(河北) 땅을 통괄하게 하여 이 지역을 ‘복리(腹裡)’라 하는 한편 대도인 연경(燕京)이 예속되었다 하여 도성(都省)이라 부르고, 그 밖의 중요한 곳에는 중서성(中書省)을 두었었는데...' 란 구절이 있는데,,즉 여기서 <산동(山東) 이서 하북(河北) 땅>은 어디 (어떤 산(山)과 하(河))를 말씀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산동(山東) 이서 하북(河北) 땅 > 에서 '이서'는 '에서'인지 '이서(以西)인지도 헷갈리는군요..
저도 그 부분에서 좀 헤깔립니다.
고대 산동과 산서의 분깃점은 화산(華山)이라는 문헌이 있으니...산동은 서안 이동...산서는 서안 이서로 봐야 하는데...
그래봐야 감숙성정도니...제가 조선 평안도라 보는 감숙성에 그 서쪽 3000리 정도에 있어야할 연경이 있단 모순이 생기니...
그 부분에선 솔직히 좀 막힙을 실토합니다.
혹 당대의 몽골족들 개념의 산서 산동의 깃점은...조선이나 중국같은 화산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 동서 분깃점인...신장성과 외ㅏ몽골을 확실히 나누는 현 고비알타이산맥(음산?)이 아닐까란 예상도 좀 해 봅니다.
정확하단 보장은 못 하겠고여...
후고구려를 몽고로 보는 시각이신데 반갑습니다 동지 하나를 얻었습니다
궁예의 후고구려가 아니라...
북방의 실질적 후고구려격인 발해가 신장성과 내외몽골을 영토로했다 보고...
이게 거란에게 밀려 점점 외몽골 동북으로 몰리다가...울란바타르 정도의 황룡부에서 막을 내렸다 봅니다.
궁예의 태봉은...전 토번의 땅으로 보며...철원이란 본거지는 철문관이 있단 포창해서부 기준 타클라마칸 남부부터라 예상합니다.
좀 너무 멀리 간거겠져...?
저도 이 부분은 확신이 아직 없습니다.
단지 토번땅인 티벳의 라마불교 자체와 철저한 신정일치 불교통치 전통....
티벳의 그 전통과 궁예의 신정일치정책이 많이 맞아떨어진단 단순 추리는 해 봅니다.
조선 말기에 코자크 기병이 만주에 러시아군과 함께 휘저었던 기록이 증거사진과 함께 있습니다. 코자크족은 오늘날 흑해와 카스피해 주변에 있는 민족입니다. 그럼 그 때 당시 만주는 어디에 있었을런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