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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Ⅰ
2. 남북조시대 통일신라의 한문학
시문학
남북조시대 통일신라에는 설총(薛聰)·강수·김대문·최치원(崔致遠) 같은 6두품 출신 문인들이 본격적으로 한문학 작품을 썼다. 신라 귀족사회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骨品制)이다. 골품제는 혈연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이나 심지어는 우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는 제도(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Ⅰ·고대편』, 일조각, 1992, p.211.)”였다. 골품제 있어서 6두품의 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현상의 하나가 관등(官等) 및 관직(官職)에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 육두품은 신라의 17 관등 중에서 제6위인 아찬(阿飡)에까지밖에 오를 수 없게 되어 6두품 출신에게 있어서 큰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 육두품에 속한 신라의 귀족 가문으로는 설씨(薛氏), 최씨(崔氏), 장씨(張氏), 김씨(金氏), 임나가라 후손, 고구려 및 백제계 구귀족 등이 있었다. 설씨 가문 출신으로는 설계두· 원광· 원효· 설총 등이 기록에 보이고, 임나가라 후손으로는 강수가 기록에 보인다. 그리고 최씨 가문 출신으로는 최치원· 최승우· 최은성 등이 있었고, 장씨 가문 출신으로는 장보고· 장유 등이 있었다. 그밖에 성골과 진골이 아닌 김씨 가문 출신으로 김범청·김지성이 관직에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보이고, 고구려 및 백제 계 구 귀족 가문 출신으로는 고구려의 귀족관리들에게 경관(京官)을 주었고, 백제인으로는 충상 ·상영 ·자간에게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육두품 가운데는 아예 관리나 군인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유학자 혹은 승려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원광 ·원효와 같은 위대한 승려나 최치원· 설총과 같은 뛰어난 문학자는 모두 육두품(六頭品) 출신이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pp.34∼64 참조). 특히 설총은 국학 설립에 관여했고, 「화왕계(花王戒)」를 지었다. 최치원은 시와 산문 모두 수준 높은 작품을 써서 그 명성을 드높였다.
신라 사람들 가운데 당나라에 가서 활동한 문인들도 적지 않다. 최치원·최광유·설요(薛瑤)·김지장(金地藏)·김가기(金可紀)·김운경(金雲卿) 등이 당나라에서 활동한 문인들이다. 그밖에 통일신라 시대에 활동한 문인으로는 왕거인·박인범·최승우·최언위 등이 있다.
忿怨詩(분원시)
왕거인(王巨人)
于公慟哭三年早 우공이 통곡을 하니 삼 년이나 가뭄이 들고
鄒衍含悲五月霜 추연이 원한을 품자 오월에 서리가 내렸네.
今我幽愁還似古 오늘 내 이 처지 옛일과 같은데
皇天無語但蒼蒼 하늘도 무심하지, 다만 푸르디푸르기만 하구나.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년∼897년) 때의 은자(隱者) 왕거인(王巨仁, ?∼?)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분원시(忿怨詩)」는 모두 4구로 구성되어 있는 칠언절구이다. 「분원시」는『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신라본기(新羅本紀)」11에 실려 있으며, 『삼국유사』 권2, 기이 하 진성여대왕 거타지조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표현이 약간 다르게 "연나라 태자 단이 피눈물을 흘리니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제 나라 추연이 슬퍼하자 여름에 서리가 내렸네. 지금 내가 길을 잃음이 오히려 옛일과 같거니 하늘은 어이해 상서로운 일을 내려주시지 않는고(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라고 실려 있다. 중국의 『전당시(全唐詩)』에도 「분원시」의 지은이가 왕거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의 「분원시」 모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우공(于公)·추연(鄒衍)이라는 용사(用事)를 사용하여 옛일과 지금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여 푸른 하늘을 원망하며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분원시」의 창작 배경은 다음과 같다.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885년) 봄, 진성여왕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私通)하여 국정(國政)을 어지럽히자, 누군가가 그 당시의 정사(政事)를 비판하는 방(榜)을 길거리에 붙였다. 진성여왕은 왕거인의 짓이라 여겨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에 왕거인이 원통하여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말없는 푸른 하늘에 호소하고 있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한다. 갑자기 벼락이 감옥을 내리쳐서 문짝이 부서졌다는 소식을 들은 진성여왕은 왕거인을 풀어주도록 했다.
우공은 중국 한(漢)나라 시대 사람으로 옥사(獄事)를 잘 처리 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 동해에 사는 주청이라는 여자가 시누이의 고자질로 시어머니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태수에 의해서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우공이 이 송사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우공이 주청의 무덤을 찾아가서 시를 지어 위로하면서 그대의 결백함은 하늘이 알고 있다고 하자 그 후로 3년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연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변방을 다스려서 그 공을 인정받고 소왕(昭王)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왕위에 오르자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하늘도 그 억울함을 알아서 5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한국한시사에서 칠언시의 효시(嚆矢)를 원효(元曉)의 “태어나지를 말아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를 말아라,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라는 시로 보는 견해도 있고, 수로부인(水路夫人)의 「해가(海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근체시(近體詩)의 율격에 가까운 칠언시는 왕거인의 「분원시」가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보고 있다.
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경주용삭사각겸간운서상인)
⎯경주 용삭사각에서 겸하여 운서상인에게 부침
박인범(朴仁範)
翬飛仙閣在靑冥 날아갈 듯한 절간은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
月殿笙歌歷歷聽 월궁의 피리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네.
燈撼螢光明鳥道 등불은 반딧물처럼 흔들려서 새가 다니는 길을 비추고
梯回虹影倒巖扃 사닥다리는 무지개 드리운 듯 돌고 돌아 돌문에 닿았네.
人隨流水何時盡 인생은 흐르는 물을 따라 어느 때에 다할 건가
竹帶寒山萬古靑 대나무는 한산에 띠 둘러 오랜 세월 푸른 것을.
試問是非空色理 시비와 공색의 이치를 물어보니
百年愁醉坐來醒 백 년 동안 쌓인 번뇌 금방 훌쩍 깨어나네.
-『동문선(東文選)』 , 권12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던 박인범(朴仁範, ?∼?)은 「범일국사영찬(梵日國師影贊)」과 「무애지국사영찬(無㝵智國師影贊)」 등 찬문(贊文) 2편과 「송엄상인귀건축국(送儼上人歸乾竺國)」·「강행정장준수재(江行呈張峻秀才)」·「마외회고(馬嵬懷古)」·「기향암산예상인(寄香巖山睿上人)」·「초추서정(初秋書情)」·「경주용삭사각겸간운서상인(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상은원외(上殷員外)」·「증전교서(贈田校書)」·「상풍원외(上馮員外)」·「구성궁회고(九成宮懷古)」 등 칠언율시 10수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현전하고 있다.
박인범의 대표작인 「경주용삭사각겸간운서상인(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은 주(周)나라의 목왕(穆王)이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잔치를 벌였다는 경주(涇州: 지금의 중국 감숙성 경천현)의 요지(瑤池)의 깊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용삭사(龍朔寺)를 대상으로 하여 “경물시(景物詩)는 이렇게 쓰는 것임을 보여 준 전형(典型)이 되기도 한” 작품으로 “먼저 사경(寫景)을 하고 다음 단계에서 작자의 감정(感情)을 불어넣는 수법으로 쓴 초기 경물시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이다.”(민병수, 『한국한시대강』, 1, 태학사, 2013, p.103.)
용삭사(龍朔寺)가 매우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날아갈 듯한 절간은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翬飛仙閣在靑冥)”라고 수연(首聯)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함연(頷聯)에서 “등불은 반딧물처럼 흔들려서 새가 다니는 길을 비추고 사닥다리는 무지개 드리운 듯 돌고 돌아 돌문에 닿았네(燈撼螢光明鳥道, 梯回虹影倒巖扃).”라고 묘사해 인생살이의 어려움과 진리에 이르는 길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경연(頸聯)과 미연(尾聯)에서 “인생은 흐르는 물을 따라 어느 때에 다할 건가, 대나무는 한산에 띠 둘러 오랜 세월 푸른 것을(人隨流水何時盡, 竹帶寒山萬古靑). 시비와 공색의 이치를 물어보니, 백 년 동안 쌓인 번뇌 금방 훌쩍 깨어나네(試問是非空色理, 百年愁醉坐來醒).”라고 묘사해 이규보가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문장력으로 나라를 빛낸다는 화국(華國)의 명수(名手)로 예를 들었다.
長安春日有感(장안춘일유감)
-장안에서 봄날 느낌을 적다
최광유(崔匡裕)
麻衣難拂路岐塵 삼베옷으로 갈림길의 먼지 털기도 어려운데
鬢改顔衰曉鏡新 흰 머리 야윈 얼굴이 새벽 거울에 새롭다.
上國好花愁裏艶 장안의 꽃들은 나의 시름 속에서도 곱기만 한데
故園芳樹夢中春 꿈 속의 고향 동산 꽃과 나무 봄을 맞네.
扁舟煙月思浮海 조각배에 어스름달 실어 내 마음 바다에 띄우고
羸馬關河倦問津 여윈 말 타고 관하의 나루터 묻기도 지쳤네.
祗爲未酬螢雪志 형설의 처음 뜻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綠楊鶯語大傷神 버드나무 꾀꼬리 소리에도 마음이 너무 슬프네.
-『동문선(東文選)』 , 권12
근체시를 짓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는 평을 들은 최광유(崔匡裕, ?∼?)의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은 칠언율시로, 『동문선』·『명현십초시(名賢十抄詩)』 등에 전한다. 꽃들이 화사하게 피고 푸른 버드나무에 꾀꼬리가 우는 장안(長安)의 봄날의 따사로움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시름에 빠져 있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대비해 형설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고뇌를 표출하고 있다. 함연(頷聯)의 “장안의 꽃들은 나의 시름 속에서도 곱기만 한데, 꿈 속의 고향 동산 꽃과 나무 봄을 맞네(上國好花愁裏艶, 故園芳樹夢中春).”에서 당나라의 도성 장안(長安)에서 맞은 봄과 대비시켜 조국인 신라의 고향 동산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하고 있다. 경연(頸聯)의 “조각배에 어스름달 실어 내 마음 바다에 띄우고, 여윈 말 타고 관하의 나루터 묻기도 지쳤네(扁舟煙月思浮海, 羸馬關河倦問津).”에서 다 포기하고 신라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벼슬자리에 앉지 못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민병수는 이 작품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꾸밈에만 공을 들이고 있어 진정(眞情)을 잃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면서 그것은 “아마도 습작기(習作期)의 젊음이 이렇게 하였을 것이다.”(민병수, 『한국한시대강』, 1, 태학사, 2013, p.84.)라고 평했다.
최광유는 통일신라 말기의 문인으로 자세한 생애는 알 수 없다. 당나라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유학하여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당나라에서 최치원·최승우(崔承祐)·박인범(朴仁範) 등과 함께 시로 이름이 있었다. 신라 10현(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동문선(東文選)』에 칠언율시 10수가 실려 있다.
登潤州慈和寺上房(등윤주자화사상방)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
崔致遠(최치원)
登臨暫隔路岐塵 높은 곳에 올라 티끌세상과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吟想興亡恨益新 흥망을 생각하며 시를 읊조리자 한이 더욱 새롭구나.
畵角聲中朝暮浪 뿔피리 소리에 아침저녁으로 물결은 일렁이는데
靑山影裏古今人 푸른 산의 그림자 속엔 고금의 사람이 잠겨 있네.
霜摧玉樹花無主 서리가 옥수를 꺾으니 꽃은 주인이 없어졌는데
風暖金陵草自春 바람결 따뜻한 금릉에는 풀은 절로 봄을 맞네.
賴有謝家餘景在 사씨 집안의 옛 정취 그대로 남아 있어서
長敎詩客爽精神 오래도록 시객의 정신을 맑게 하네.
-『동문선(東文選)』, 권12
최치원(崔致遠, 857년∼?)의 「등윤주자화사상방(登潤州慈和寺上房)」은 시간과 공간을 대조해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고 있는 칠언율시이다. 수연(首聯)에서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면서 그 허망함을 되새기고, 함연(頷聯)의 “뿔피리 소리에 아침저녁으로 물결은 일렁이는데 푸른 산의 그림자 속엔 고금의 사람이 잠겨 있네(畵角聲中朝暮浪, 靑山影裏古今人).”는 청각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대구를 통해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은 곳을 서완(徐緩)하게 묘사하고 있다. 경연(頸聯)에서는 진(陳)나라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사곡(詞曲)을 즐겨 부르다가 망했고, 삼국 시대 오(吳)를 비롯해서 동진(東晉)과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 등 육조(六朝)가 도읍했던 곳인 금릉(金陵)에서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풍경의 묘사를 통해 옛왕조의 화려했던 문화의 흥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용사(用事)를 구사하고 있는 「등윤주자화사상방(登潤州慈和寺上房)」에서 최치원은 초연한 세계를 회고적으로 노래하여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江南女(강남녀)
―강남 처녀들
최치원
江南湯風俗 강남의 풍속은 방탕해라
養女嬌且憐 아리땁고 예쁘게 딸을 키운다네.
性冶恥針線 바느질일랑 부끄러워 하는 성격으로 만들어
粧成調管絃 단장하고 악기를 희롱하네.
所學非雅音 배우는 건 우아한 곡조는 아니고
多被春心索 그 소리 대개 춘정에 이끌리네.
自謂芳華色 아리땁고 꽃다운 그 얼굴이
長占艶陽年 영원토록 청춘을 누릴 것으로 이르네.
却笑隣舍女 도리어 이웃집 딸을 비웃기를
終朝弄機杼 아침 내내 베틀에서 북을 놀리다니.
機杼縱勞身 베를 짜노라고 몸을 괴롭혀도
羅衣不到汝 비단옷은 네게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동문선(東文選)』 , 『청구풍아(靑丘風雅)』
최치원의 「강남녀(江南女)」는 「강남(江南)」이라는 제명(題名)을 가진 악부(樂府)를 본떠서 시험적으로 써본 의고악부(擬古樂府)로 한국한시사에서 악부제(樂府題)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홍만종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 최치원의 「강남녀(江南女)」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점필재 김종직이 말하기를, “공[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벼슬하였으니 아마도 이 시는 삼오(三吳; 중국 양자강 하류 지역)의 여자 아이들을 보고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하였다. 내가 이 시를 보니 아마도 보고 느낀 것이 있어 풍자하여 지은 것으로, 비단 삼오의 여자 아이만 읊은 것은 아니다. 시의 언어가 지극히 고아(古雅)하여 후세 사람들의 미칠 바는 아니다. 최치원은 지은 시문이 무척 많지만 여러 차례 병화(兵禍)를 겪으며 전해진 것은 매우 적으니, 가석(可惜)할 뿐이다.
佔畢齋云, 公仕于唐, 此詩疑見 三吳女兒作. 余觀此詩, 蓋有所感諷而作, 非但詠三吳女兒也. 辭極古雅, 非後世人可及. 所著詩文甚富, 而屢經兵燹, 傳者絶少, 良可惜也.
― 『小華詩評(소화시평)』, 券之上(권지상)
중국 당나라 시대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양주(揚州)가 있던 삼오(三吳)는 장강(長江: 양자강) 하류의 강남 지역이다. 당시 양주의 경제적인 위상에 대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이보다 먼저,양주의 부유함은 천하에서 제일이었고, 당시 사람들은 양주가 1등이고、익주가 2등이라 하였다(先是, 揚州富庶甲天下, 時人稱揚一益二)”(『資治通鑑(자치통감)』, 권(卷)259, 「당기(唐紀)」75년.)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남녀(江南女)」는 삼오(三吳)에 살고 있는 여인들의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사회시(社會詩)이다. 최치원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高騈, 821년~887년)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쓸 무렵 창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고변(高騈)을 대신하여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최치원의 고뇌가 투영된 작품이 「강남녀」라고 볼 수 있다. 아침 내내 베틀에서 몸을 괴롭혀 북을 놀려 베를 짜도 비단옷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고 마는 여인의 모습은 최치원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秋日再經盱眙縣寄李長官(추일재경우이현기리장관)
-가을날 우치현을 다시 지나며 이장관에게 부침
최치원
孤蓬再此接恩輝 외로히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가 두 번 예서 신세지니
吟對秋風恨有違 가을바람에 읊조리며 서로 헤어짐이 서러워지네.
門柳已淍新歲葉 문 앞 버드나무는 이미 새잎을 떨구었는데
旅人猶着去年衣 나그네는 아직 작년 옷을 그대로 입고 있구려.
路迷霄漢愁中老 길은 멀고 아득하여 시름 속에 늙어 가는데
家隔煙波夢裏歸 바다 건너 내 고향, 꿈속에나 돌아갈까.
自笑身如春社燕 우습다, 이 몸은 봄 사일의 제비인가
畫梁高處又來飛 그림 들보 높은 곳에 또 와서 노니는구나.
―『동문선(東文選)』, 권12
「秋日再經盱眙縣寄李長官(추일재경우이현기리장관)」은 “가을날 다시 안휘성(安徽省) 우취현을 지나면서 이장관에게 드림”으로 풀이되는 시로 시적 화자가 당나라 관직에서 실직 상태로 있으면서 당나라 생활의 고달픔을 노래한 작품이다. 요약하면 이 작품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의 고뇌가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해석에 있어서 ‘고봉(孤蓬)’은 다북쑥의 꽃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외로운 신세를 말하는 것이고, ‘은휘(恩輝)’는 ‘은혜의 빛’이란 뜻으로 이장관(李長官)을 말한다. ‘춘사(春社)’는 ‘봄 사일’이란 뜻이다. ‘사일(社日)’은 사신(社神; 토지신), 직신(稷神; 곡식을 주관하는 신)을 제사지내는 날이 봄 가을에 있는데 춘사는 음력 2월 무일(戊日)이다. 제비가 춘사일에 왔다가 추사일(秋社日)에 돌아간다고 한다.
野燒(야소)
―들불
최치원
望中旌旆忽繽紛 바라보노라니 문득 깃발 휘날리니
疑是橫行出塞軍 변방에 나가는 군사들의 행렬인가.
猛焰燎空欺落日 사나운 불길이 하늘을 찌르니지는 해도 무색하고
狂煙遮野截歸雲 광기 어린 연기가 들판에 뻗어 가는 구름을 끊는구나.
莫嫌牛馬皆妨牧 소와 말을 먹이는데 방해된다 탓하지 마소
須喜狐狸盡喪羣 이리나 여우가 모두 소굴을 잃음이 기쁘지 않는가.
只恐風驅上山去 다만 두려운 건 바람이 들불을 산위까지 몰아다가
虛敎玉石一時焚 차별없이 옥과 돌이 한꺼번에 붙타는 일.
⎯ 『계원필경(桂苑筆耕)』, 권20
「野燒(야소)」는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 창작한 칠언율시이다. 들불의 맹렬한 기세의 묘사를 통해 일종의 혁명적 설레임을 나타내고 있고, 분위가가 격렬하다. 당나라에 있을 때 깊은 좌절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창작에 있어서 정적인 흐름을 보여주었던 최치원은「野燒(야소)」에서 상당히 격렬함을 드러내고 있어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서경(書經)』, 「하서(夏書)」, 윤정편(胤征篇)에 “곤강(崑崗)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타고, 임금이 덕을 잃게 되면 그 해악은 사나운 불보다도 더 무섭다(火炎崑岡 玉石俱焚 天使逸德 烈于猛火)”는 말이 있다. “차별없이 옥과 돌이 한꺼번에 붙타는 일(虛敎玉石一時焚)”의 시구가 『서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과 돌이 모두 불에 탄다는 뜻으로, 선악(善惡)의 구별 없이 함께 화를 당함을 일컫는 말인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는 고사성어의 출전이 『서경』이다.
秋夜雨中(추야우중)
-가을 밤 빗소리에
최치원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니
世路少知音 세상에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
窓外三更雨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잔불 앞에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네.
―『동문선』, 권19
「추야우중(秋夜雨中)」은 오언절구의 한시이다. 이 시의 창작 시기를 둘러싸고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라는 견해와,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해서 지은 시라는 견해가 있다. ‘가을바람/세상’, ‘삼경(三更)/만리(萬里)’의 대구로 짜여져 있는 「추야우중」을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로 본다면 ‘가을 바람’, ‘등잔불’, ‘밤’, ‘비’ 등을 통해 외국인으로서 당나라에서 겪은 현실의 좌절에서 오는 소외와 고독감을 묘사한 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가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한 후에 지은 시라고 본다면 주제는 6두품이라는 신분상의 한계로 능력은 있으나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지식인의 고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음(知音)’은 마음을 알아주는 친한 벗을 뜻하는 말로 중국 춘추 시대 사람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는 소리를 듣고 그 뜻을 헤아릴 줄 알았던 종자기(鍾子期)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추야우중」에서‘지음(知音)’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시를 알아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최치원의 전부를 아는 이가 드물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리심(萬里心)’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결구(結句)인 “등잔불 앞에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네(燈前萬里心)”의 해석이 불가능하게 된다면서 「추야우중」은 최치원이 중국에 유학하면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그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윤용식·손종흠, 『한국한문고전강독』,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4. p. 35.)는 견해도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을 때 영달하지 못했다. 그는 당나라를 섬길 때나 신라로 귀국한 후에나 다같이 난세를 만나 세상을 다스리는 포부의 뜻을 펼 수가 없었다. 최치원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을 연결해 볼 때 「추야우중」은 최광유의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과 비교할 수 있다.
「추야우중」과 「장안춘일유감」, 두 작품 모두 신라에서 청운을 꿈을 품고 당나라로 건너온 화자들이 현실에서 부딪친 좌절에서 오는 고뇌를 읊고 있다.
古意(고의)
―옛 생각
최치원
狐能化美女 여우는 능히 미인으로 화하고
狸亦作書生 삵괭이는 글하는 선비로 둔갑하네.
誰知異類物 그 누가 알리요 또 다른 짐승들이
幻惑同人形 사람인 척 속이고 홀린다 하더라도.
變化尙非艱 육신을 바꾸기는 오히려 어렵잖으나
操心良獨難 마음 잡기가 진실로 어렵구나.
欲辨眞與僞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거든
願磨心鏡看 원컨대 마음거울을 닦고나 보소.
―『동문선(東文選)』, 권4
신라는 이미 서산에 지는 해와 같은 나라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최치원의 눈에 지배층들은 권력을 잡고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짐승으로 보였을 것이다. 세상을 속이는 거짓말 같은 혼란스런 신라사회의 풍조에 그는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그는 「고의(古意)」에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마음의 거울을 닦고서 비춰 보아야 구미호가 미인으로 변하고, 너구리가 선비로 둔갑하고, 또 다른 동물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진짜 사람을 유혹하고 속이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당나라 회남 땅을 떠나 신라로 향하는 배를 탔던 최치원이 신라에 도착한 것은 그가 29세 되던 해 봄이었다.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년~886년)은 그에게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事)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최치원은 그가 당나라에서 고변의 종사관으로 일 할 때 지었던 여러 가지의 글들을 정리하여 20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것이 『계원필경(桂苑筆耕)』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신라 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들이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주와 군의 세금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나라의 창고가 텅텅 비고, 나라살림이 말이 아닌 실정이었다.
최치원이 돌아온 다음해에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년~887년)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해에 정강왕마저 죽고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년~897년)이 왕위에 올랐다. 진성여왕은 텅텅 빈 나라의 창고를 채우기 위하여 주와 군에 세금을 납부하도록 독촉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의 독촉은 결국 농민들에게 이중적인 부담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민들은 자기가 속하여 있는 성주에게 뿐 아니라, 중앙정부에도 조세를 납부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들고 일어났다. 반란의 첫 횃불을 든 것은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경북 상주) 지방의 원종과 애노였다. 이들 반란 세력은 상당히 강한 것이었다. 정부군은 그들의 기세에 누려 감히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한다.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가야산 독서당에서 쓰다
최치원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첩첩이 쌓인 바위 사이를 미친 듯이 달려 겹겹의 봉우리를 향해 울부짖으니
사람의 말 소리가 지척 사이에서도 분별하기 어렵구나.
항상 옳다 그르다 따지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하여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온통 둘러 버린 것이라네.
―『동문선(東文選)』, 권19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은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던 초기에 쓴 시로 7언절구의 서정시다. 시적화자의 내면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는 물소리를 통해 세속과 단절되어 세속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을 드러내며 산중에 은거하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자조적인 분위기가 짙은 작품으로 자신의 신세가 고달프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시는 세상을 등지고 홀로 자연에 묻혀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최치원은 또 다른 의미에서 ‘동국문종(東國文宗)’일 수 있다. 그러나 최치원은 자연과의 화합에서 자족했던 것은 아니고, 일찍이 마음의 밭을 갈았다고 자부했으면서도 밭갈고 김매는 농사꾼이 되었던 것도 아니다.
⎯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2003, p.73.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은 29세 때 귀국하여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가지고 그의 포부를 펴보려고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어지러움을 깨닫고 수도 금성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등지의 태수(太守)가 되어 백성을 위해 성실하게 일했다. 그는 시무책(時務策) 10여 가지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시무책’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시급한 일에 대한 계책이라는 뜻이다. 10여 년 동안 중앙과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중앙 진골 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과 같은 사회적 모순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그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내놓게 된 것이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이 올린 시무책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아찬(阿飡)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아찬’은 최치원이 속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자리로 신라 17 관등(官等) 가운데 여섯째 등급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안은 진골 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시행되지 못했다.
최치원은 마침내 모든 벼슬을 내놓고 금성 남산과 강주(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빙산, 합주(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의 별서, 동래 해운대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어느날 최치원은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는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쓰던 갓과 신발이 숲속에 버려져 있었다. 아마 신선(神仙)이 되어 간 것일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결국 신선이 되어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전설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세상에 나아가서도 자기 마음 속에서도, 자기의 자리를 마련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조동일, 앞의 책, p.73)라는 조동일의 평처럼 최치원은 생애는 물론 문학면에서도 모두 불우하였다.
送曺進士松入羅浮(송조진사송입나부)
―나부산에 들어가는 진사 조송을 전송하며
최승우(崔承祐)
雨晴雲斂鷓鴣飛 비 개이고 구름 걷히니 자고새는 날아오르는데
嶺嶠臨流話所思 영교에 이르렀을 때 속마음을 말하네.
厭次狂生須讓賦 염차인(厭次人) 예형(禰衡)의 재주로도 부 짓기를 사양했는데
宣城太守敢言詩 선성태수는 감히 시를 말하네.
休攀月桂凌天險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험한 길을 걷지 말고
好把煙霞避世危 노을을 잡고서 위태로운 세상일을 잘 피하세.
七十長溪三洞裡 일흔 개의 긴 시내 세 동천 안에 숨어 살면서
他年名遂也相宜 후세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으리라.
―『동문선(東文選)』, 권12
최승우(崔承祐, ?∼?)의 「송조진사송입나부(送曺進士松入羅浮)는 용사(用事)가 많이 구사되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칠언율시이다. 수연(首聯)의 “염차인 예형의 재주로도 부 짓기를 사양했는데(厭次狂生須讓賦)”에서 ‘염차광생(厭次狂生)’이 『동문선(東文選)』에는 ‘염차광생(厭次狂生)’으로 되어 있고, 『기아(箕雅)』에는 ‘염차선생(厭次先生)으로 되어 있다. ‘염차광생(厭次狂生)’에서 ‘염차(厭次)’는 후한(後漢) 때의 평원군(平原郡)으로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을 말하고, ‘광생(狂生)’은 후한 대의 평원군(平原郡) 사람으로 「앵무부(嬰鵡賦)」를 남긴 시인인 예형(禰衡, 173년∼198년)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권(卷)8, 「문원전하(文苑傳下)」, ‘예형전(禰衡傳)’에 예형(禰衡)이 조조(曹操)의 영문(營門) 밖에서 그를 욕하니 벼슬아치가 조조에게 ”밖에 광생이 있는데, 영문에 앉아 말이 패역하니 청하건대 죄를 심문하여주시기 바랍니다(外有狂生, 坐於營門, 言語悖逆, 請收案罪).“라고 보고한 기록이 보인다. ‘조송(曺松, 830년∼901년)’은 당나라 서주인(舒州人)으로 최승우(崔承祐)와 친분이 있었던 저명한 시인이고, ‘선성태수(宣城太守)’는 중국 남제(南齊) 때의 시인으로 선성태수를 지낸 사조(謝朓, 461년∼499년)를 가리킨다. 그리고 은거지(隱居地)로 알려져 있는 ‘나부(羅浮)’는 중국 광동성(廣東省)의 산 이름으로 칠 십개의 장계(長溪)가 있고, 상청(上淸)· 차상청(次上淸)· 옥청(玉淸)의 세 동천(洞天)이 있는데, 그곳에 신선이 살았다고 한다. 또한 ‘자고(鷓鴣)’는 메추리와 비슷한 새로 중국의 남방에 서식한다. 끝으로 중국 서남지역 일대 소수민족이 살았던 산악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영교(嶺嶠)는 오령(五嶺)을 의미한다. ‘오령(五嶺)’은 강서성(江西省)의 대유령(大庾嶺), 호남성(湖南省)과 광동성(廣東省)에 걸쳐 있는 도폐령(都廢嶺), 호남성(湖南省)의 기전령(騎田嶺), 호남성(湖南省)과 광서성(廣西省)에 걸쳐 있는 맹저령(萌渚嶺), 광서성의 월성령(越城嶺)을 말한다.
「송조진사송입나부(送曺進士松入羅浮)」는 나부산(羅浮山)으로 들어가는 친구 조송(曺松)에게 준 작품이다. 수연(首聯)과 함연(頷聯)은 조송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앞의 작품[억강남이처사거(憶江南李處士居)]과 함께 정치한 대를 이룩한 솜씨가 돋보인다. 상대를 예형(禰衡)으로 높이면서도, 자신 역시 사조(謝朓)의 시재(詩才)가 있음을 자부하고 있으며, 상대에게 은거지(隱居地)인 나부산(羅浮山)의 명성대로 피세(避世)의 도(道)로 권면(勸勉)하였다.
⎯민병수, 『한국한시대강』, 1, 태학사, 2013, p.92.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험한길을 걷지 말고, 위태로운 세상일을 잘 피해 살아가라고 권유하는 경연(頸聯)에서 시적 화자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미연(尾聯)에서 신선처럼 산 속에서 은거하면서 후세에 이름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묘사하면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최승우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893년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뒤 관직에 있다가 귀국한 뒤에는 신라를 섬기지 않고 후백제(後百濟, 900년∼936년)에서 벼슬하였다. 후백제의 견훤(甄萱, 재위 892년∼935년)을 대신해 고려 태조 왕건(王建, 재위 918년~943년)에게 보낸 격문인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가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동문선』 등에 실려 있다. 『동문선』 권12에는 「경호(鏡湖)」를 비롯한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되어 있다. 『호본집(餬本集)』이라는 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산문문학
유조(遺詔)
문무왕
과인(寡人)이 어지러운 시기에 태어나서 전쟁의 시대를 당하게 되었다. 서로 백제를 정복하고, 북으로 고구려를 토벌하여 강토(疆土)를 평정하였으며 반역자를 토벌하고 협조하는 자를 불러들여 멀고 가까운 곳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조종(祖宗)의 유고(遺顧)[임금이 죽을 때에 유언으로 한 고명(顧命)]를 위로하고 아래로는‘부자(父子)의 숙원(宿寃)’[문무왕과 부친인 태종무열왕이 백제는 멸망시켰으나 고구려는 멸망시키지 못한 것을 원통해 했음을 뜻함]를 갚았다. 존자(存者)와 사자(死者)들에게 두루 상(賞)을 추증(追贈)하여 내렸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官爵)을 나누어 주었으며, 병기(兵器)를 녹여 농구(農具)를 만들고 여원(黎元)[백성]들을 어질고 오래 살도록 이끌었다.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고 요역(徭役)을 덜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되니, 백성들은 안도하고 국내(國內)에는 우환(憂患)이 없어졌다. 창름(倉廩)[곡식창고]에는 구산(丘山)[언덕과 산]같이 곡식이 쌓여 있고 영어(囹圄)는 풀만이 무성하니, 암처(巖處)[저승]에서나 명처(明處)[이승]에서나 부끄러운 일이 없다 할 것이며 ‘사(士)·인(人)’[상하의 인사들]에게도 저버린 일이 없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내가 풍상을 겪다 보니 마침내 침아(沉痾)[고질병]이 생겼고 정교(政敎)[정치 교화]에 애를 써서 더욱 중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운수(運數)는 가고 이름만 남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인지라 갑자기 대야(大夜)[명계(冥界)]로 돌아가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이 이휘(離輝)[밝은 덕]을 쌓고 오랫동안 진위(震位)[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일반 관리들에게 이르기까지 송주(送往)[죽은 자를 보내는] 의(義)를 어기지 말고 사거(事居)[산 사람을 섬기는] 예(禮)를 잃지 말라. 종묘(宗廟)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두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뒷날의 신문왕]는 장사지내기 전에 곧장 구(柩) 앞에서 왕위(王位)를 계승하라. 또 산곡(山谷)은 변천하고 사람의 세대(世代)는 변하니 오왕(吳王)[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초대왕 손권(孫權). 중국 강소성(江蘇省) 강령현(江寧縣) 북산(北山) 호구(虎口)에 무덤이 있음]이 북산의 무덤에서 어떻게 금부(金鳧)[황금오리 향로]의 광채(光彩)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위주(魏主)의 서릉(西陵)[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曹操)의 무덤으로 그의 유언에 의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미인과 악공들로 하여금 동작대에서 가무를 벌이도록 하였고, 또 아들들 역시 때로 동작대에 올라가 서릉을 바라보라고 하였다 한다.]에는 다만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뿐이다. 지난 날 만기(萬機)를 처리하던 영주(英主)도 마침내 한 무더기 흙[墳墓]이 되어 초목(樵牧)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호토(狐兎)가 그 곁에 굴을 팔 것이니, [분묘란 것은] 쓸데없이 재물(財物)만 허비하고 사책(史冊)[사기(史記)]에 기평(譏評)[나무라면서 평론함]만 남길 것이요, 헛되이 인력(人力)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유혼((幽魂)을 오래 머물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아플 뿐이요.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 하는 바가 아니다. 촉광(屬纊)[숨을 거둠. 임종] 후 열흘이 되면 바로 욍궁의 고문(庫門) 밖 뜰에서 서국(西國)[인도(印度)]의 식(式)[천축(天竺)의 식, 곧 불교식(佛敎式)]에 따라 불로 태워 장사지내고, 상복을 입는 경중은 상규(常規)가 있을 터이니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약하게 하라. 변성(邊城)·진알(鎭遏)[새(塞)]의 방위와 주(州)·현(縣)의 과세(課稅)는 긴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律令)과 격식(格式)에서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로 편리하도록 고쳐 반포할 것이며, 원근(遠近)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고 주사자(主司者)가 시행하게 하라.
寡人運屬紛紜,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携, 聿寧遐邇, 上慰宗祧之遺顧, 下報父子之宿寃, 追賞遍於存亡, 䟽爵均於内外, 鑄兵戈爲農器, 驅黎元於仁壽. 薄賦省傜, 家給人足, 民間安堵, 域内無虞. 倉廩積於丘山, 囹圄成於茂草, 可謂無愧於幽顯, 無負於士人. 自犯冒風霜, 遂成痼疾, 憂勞政教, 更結沉痾. 運徃名存, 古今一揆, 奄歸大夜, 何有恨焉, 太子早藴離輝, 久居震位, 上從羣宰, 下至庶寮, 送徃之義勿違, 事居之禮莫闕. 宗廟之主, 不可暫空, 太子即於柩前, 嗣立王位, 且山谷遷貿, 人代椎移, 吴王北山之墳, 詎見金鳬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兔穴其旁.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 屬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有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其邊城·鎮遏及州縣課稅, 於事非要者, 並冝量癈, 律令格式, 有不便者, 即便攺張, 布告遠近, 令知此意, 主者施行.
―『三國史記(삼국사기)』 卷(권)7, 「新羅本紀(신라본기)」7, 文武王(문무왕) 下(하)
681년 가을 7월 1일에 죽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년~681년)이 남긴 유조(遺詔)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유조」는 문무왕의 유언으로, 자서전이라 볼 수 있는 산문이다. 신하들은 문무왕의 유언대로 동해 어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세속에서 전해오기를 왕이 용으로 변했다 하니, 이로 인해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 하였다. 안자산은 『조선문학사』에서 ‘중고문학(中古文學)’의 산문으로 문무왕이 남긴 「유조」를 설총의 「화왕계」· 녹진의 「상각간김충공서(上角干金忠恭書)」·성충의 「옥중상의자왕(獄中上義慈王)」 등과 함께 실어(안자산 저, 최원식·정해렴 역,「조선문학사」, 『안자산국학논선집』, 현대실학사, 1996, pp.59∼68.) 고대 한국문학사의 체계 속으로 편입했다.
화왕계(花王戒)
설총
제가 들은 것은 옛날에 화왕(花王; 모란의 다른 이름)이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화왕을 향기로운 정원에 심어놓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고, 가꾸었더니 봄이 되자 예쁜 꽃이 피어나, 온갖 꽃보다 유달리 아름다웠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에 있는 고운 꽃이며 가녀린 예쁜 꽃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화왕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때 홀연히 한 아름다운 미인이 맵시 있는 걸음으로 사뿐이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에, 옥 같은 이에, 깨끗한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흰눈 같은 고운 모래밭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보며, 봄비에 때를 씻고, 상쾌한 맑은 바람을 맞으며 뜻대로 사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하옵니다. 지금 임금님의 어진 덕을 듣고 향기로운 장막에서 모실까 하여 왔사오니 기꺼이 모시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녀가 화왕에게 아뢰었습니다.
그때 한 사내가 베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찾아왔다. 그의 머리카락은 허옇게 세었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몸이 쇠약하여 허리가 새우등처럼 구부정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교외의 큰길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넓고 시원한 들판을 바라보며 위로는 아스라한 산빛을 바라보며 지내고 있사옵니다. 이름은 백두옹(할미꽃)이라고 하옵니다. 저는 온갖 물건을 풍족하게 드리겠사오며,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부르게 하여 드리겠습니다. 또 차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약으로 원기를 돋아 드리겠나이다. 돌을 가지고 온갖 나쁜 것도 없애 드리겠나이다. 제 꼴이 이렇듯 흉칙하나 버리지 말고 곁에 두어 주시옵소서.”
그가 아뢰었습니다.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화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물었습니다.
“사나이의 말이 옳은 것 같으나, 아름다운 사람을 얻기도 어려우니,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화왕이 망설였습니다.
“저는 임금님께서 덕이 있고 사리를 잘 아시는 줄 알고 왔사온데 지금 뵈오니 그렇지 못합니다. 무릇 임금님의 자리에 계신 분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 하고 올바르고 곧은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맹자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고, 풍당랑(馮唐郞)도 숨어 센머리로 늙었는데 예로부터 이와같으니 전들 어찌하겠습니까?”
사내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화왕이 말했습니다.
臣聞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以翠幕, 當三春而發艷, 凌百花而獨出, 於是自邇及遐, 艷艷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靚服, 伶俜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面, 沐春雨以去垢, 快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帷, 王其容我乎, 又有一丈夫, 布衣韋帶,戴白持杖, 龍鍾而步, 傴僂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峩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左右供給, 雖足膏粱以充膓, 茶酒以淸神, 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蠲毒, 故曰雖有絲麻, 無弃菅蒯, 凡百君子, 無不代匱, 不識王亦有意乎, 或曰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聦明識理義,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佞, 踈遠正直, 是以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 花王曰, 吾過矣吾過矣.
―『三國史記(삼국사기)』, 卷(권)46, 「列傳(열전)」6, 薛聰(설총)
설총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마는 그가 신라 유학의 선구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모란꽃에 인격을 부여하여, 사람의 처신을 말한 「화왕계(花王戒)」는 『동문선』 권52에 「풍왕서(諷王書)」라고 표기되어 있다.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설화문학으로 고려 시대 가전체문학과 조선 시대 『화사(花史)』 같은 작품과 그 맥락이 닿는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리말로 아홉 가지 중국 경서(經書)를 읽어 학생들을 가르쳤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책의 기록을 가지고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려 시대 말기부터 생겨났으나, 그것은 틀린 주장이었다. 설총이 태어나기 전에 벌써 이두로 표기된 향가 작품들이 있었다.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년~632년) 때의 「서동요」와 「혜성가」 그리고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년) 때의 「풍요(風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설총은 이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두를 정리하고, 더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도(吏道)· 이서(吏書)· 이토(吏吐)라고도 하는 이두는 삼국 시대부터 한자(漢字)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이다. 삼국 시대의 지명이나 향가 등을 살펴보면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우리말을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두문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隱(토씨 ‘은’) 萬(토씨 ‘만’ 伊(토씨 ‘이’) 乙(토씨 ‘을’)
厓(토씨 ‘애’) 五(토씨 ‘오’) 臥(토씨 ‘와’) 大(어미 ‘대’)
刀(토씨 ‘도’) 羅隱(토씨‘라는’) 乙奴(토씨 ‘으로’) 爲也(동사‘하야’)
爲古(동사 ‘하고’) 爲尼(동사 ‘하니’) 爲面(동사 ‘하면’)
―안자산 저, 최원식·정해렴 역, 「조선문학사」, 『안자산국학논선집』, 현대실학사, 1996, pp.30∼31.
『삼국사기』에는 설총의 아들인 설판관이 신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 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일찍이 원효 거사가 지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읽고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했는데, 신라국 사신이 원효 거사의 손자라고 들으니 거사를 만난 듯이 기뻤소. 그 기쁨을 이 시로 표현했소.”
그러면서 감격적인 시를 신라에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놓았다.
『삼국사기』에 “글을 잘했지만 세상에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혹 설총의 비명(碑銘)이라는 것이 있지만, 문자가 이지러져 떨어져 나가 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이 어떤 뜻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설총이 남긴 글이 김부식이 살던 고려 시대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화왕계」에 나오는 ‘풍당랑’은 중국 한 나라 때 사람으로 문제(文帝, 재위 기원전 180년 ~기원전 157년) 때 국방 대책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때에야 높은 벼슬이 주어졌는데 이미 그의 나이 90세를 넘겼기 때문에 그의 아들 풍수가 낭으로 채용되었다.(『사기, 권102, 「장석지풍당열전」)
격황소서(檄黃巢書)
최치원
광명(廣明)[당희종(唐僖宗)의 연호(年號)]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모(某)는 황소(黃巢)에게 고한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고 하는 것이고, 위기를 당하여 그때그때 처한 형편에 맞추어 그 자리에서 결정하거나 처리하여 모면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이치에 순응하므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모든 일에 있어서 양심으로 판단하여 그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황제가 내려준 군대를 거느리고 역적을 토벌하려는 것이지 너와 같은 역적을 상대로 싸우려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너희가 침탈한 상경(上京)[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수복하고 큰 신의(信義)를 펼치려 하니 공경하게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간사한 꾀를 부수려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본시 변방에서 살던 하찮은 백성이었던 네가 갑자기 사나운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감히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드디어 불칙한 마음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침범하여 궁궐을 더럽혔다. 이미 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다달았으니 반드시 멸망할 것을 죽는 것보다 잘 알겠다.
아, 요순(堯舜)부터 헤아려 보건대 성인인 순(舜) 임금을 배반한 묘(苗)[순(舜)에게 복종하지 않아서 토벌당한 나라]·호(扈)[하(夏)나라에 복종하지 않아서 토벌당한 나라]와 같이 양심과 체면, 의리와 충성을 팽개쳐 버린 무리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먼 옛적에는 유요(劉曜)[흉노(匈奴)의 후예로 서진(西晉)에 반란을 일으킴]와 왕돈(王敦)[동진(東晋) 때 반란을 일으킴]이 진(晉)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운 시대에는 안녹산(安祿山)과 주자(朱泚)가 황가(皇家)[당나라]를 개 짖듯 대하였다. 그들은 모두 수하에 강성한 군대를 거느리기도 했고, 혹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 번 큰 소리로 호령을 내리면 우레와 번개가 달리 듯하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나연기처럼 깜깜하게 막히게 된다.그러나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마침내 더러운 종자들은 무참히 섬멸당하고 말았다.
태양이 온누리를 밝게 비추고 있는데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의 그물이 높이 걸려 있는데 흉한 족속들이 어찌목을 온전히 부지할 수 있겠느냐?하물며 너 같은 역적은 변방에서 태어난 하찮은 농민 출신으로서 관청을 불지르고 양민을 학살하고 겁탈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악질적인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너를 죽이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아마도 땅 속의 귀신 또한 너를 가만히 베어 죽이려고 의론(議論)하였을 것이다. 비록 잠시 목숨이 붙어 있으나, 이미 정신이 달아났고, 넋이 빠졌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것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 제일이다. 내가 헛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모름지기 살펴 들어라.
요즈음 우리 조정(朝廷)에서 덕이 깊어 더러운 것도 참아주고 은혜가 중하여 결점을 따지지 아니하여 너에게 장령(將領)으로 임명하고 지방 병권(兵權)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데도 너는 만족할 줄 모르고 오히려 짐새(鴆)처럼 악독한 마음만을 품고 올빼미의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물어 뜯고 하는 짓이 개가 주인을 보고 짖듯하였다. 결국 황제가 덕으로 교화하는 것을 배신하고 군사들이 궁궐에까지 몰려들었다. 공후(公侯)[귀족]들은 위태로운 길로 달아나고 황제가 난을 피해 도성(都城)을 떠나 먼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결국 너는 일찍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상의 의무를 저버리고 다만 완악하고 흉악한 것만 늘어가게 되었다. 이에 황제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너는 은혜를 저버렸다. 반드시 얼마 아니 되어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너는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가. 하물며 주(周)나라 솥(鼎)을 물어볼 것이 아니다. 한(漢)나라 궁궐이 어찌 너 같은 자가 머물 곳이랴. 네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갑자기 부는 돌개바람은 한나절을 지탱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소나기는 하루 동안을 퍼붓지 못한다."하였다. 하늘과 땅에 있어서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는 이와 같이 오래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겠는가?
『춘추전(春秋傳)』에는 이르기를, "하늘이 착하지 못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흉악함을 쌓게 하여 더 큰 벌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다."하였다. 이제 간사한 것도 감추고 사나운 것을 숨겨서 흉포함이 쌓이고 쌓여 온누리에 가득 찼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 속에서 스스로 현재의 상황이나 처지에 만족하고 뉘우칠 줄 모르니, 이는 마치 제비가 초막 위에 집을 지어 놓고 불이 초막을 태우는데도 방자하게 날아드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바로 삶아질 줄을 모르고 솥 안에서 나울거리는 꼴과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현명하고 신묘한 전략(戰略)을 가지고 온 나라의 군대를 모았으니 날랜 장수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용맹스러운 용사들이 비 쏟아지듯 모여들었다. 높고 큰 깃발은 남쪽 초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에워싸고, 전함(戰艦)과 누선(樓腺: 다락이 있는 배)은 오(吳)나라 강(江)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진(晉)나라 장군 도태위(陶太尉)[도간]는 적군을 부수는 데 용맹하고, 수(隨)나라 장군 양소(楊素)[양웅]는 말이나 행동 따위가 위엄 있고 정중하여 신(神)이라 일컬었다. 온 세상을 널리 돌아보고 만 리 길을 거침없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고, 태산을 높이 들어 참새 알을 눌러 깨는 것과 같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때는 마침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다. 물귀신이 우리 군사를 맞이한다. 서늘한 바람은 생물을 죽음의 시련으로 몰아넣으려고 한다. 새벽이슬은 답답한 기운을 씻어 버린다. 파도도 일지 않고 도로가 뚫리면, 석두성(石頭城)에서 뱃줄을 풀었다. 손권(孫權)이 뒤에서 호위하고 현산(峴山)에서 돛을 내렸다. 두예(杜預)가 앞장선다. 나는 경도(京都)를 수복할 것이다. 그 기간은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우리 황제의 인자한 뜻을 받들어 엄한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은혜를 펴려는 것은 큰 조정의 어진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역적을 토벌하는 자는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어두운 길을 헤매는 자를 일깨워주기 위해 진실로 바른 말을 해주어야 한다.
나는 이 격문을 보내 너의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다급한 상황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고집을 버리고,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계책을 잘 세우기 바란다. 허물을 알고 그것을 고쳐라. 만일 너에게 땅을 떼어 주어 봉해주기를 원한다면, 나라를 세우고, 집을 계승하여 머리와 몸뚱이가 두 동강으로 떨어져 나가는 횡액을 면할 뿐 아니라 나라로부터 공명(功名)을 얻어 우뚝하게 빛나게 될 것이다.
덧붙여 말하건대 도당(徒黨)의 말을 믿지 말 것이며, 영화(榮華)를 후손에게까지 전할 수 있도록 하라. 이는 하찮은 아녀자들의 일이 아니라 실로 대장부의 일인 것이다. 너는 너의 대답을 조속히 결정하여 나에게 알려 주고 의심을 품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 나의 믿음은 저 맑고 깨끗한 강물에 맹세하여 반드시 말이 떨어지면 그대로 할 것이다. 원망만 깊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네가 미쳐 날뛰는 도당(徒黨)에 이끌려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저항하기를 고집한다면, 그때는 곰을 잡고 표범을 쫒는 우리 군대가 한번 몰아쳐 없애버릴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 솔개같이 덤비던 너의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다. 너의 몸은 도끼에 바르는 기름이 될 것이며, 너의 뼈는 전차에 치여 부서진 가루가 될 것이다. 게다가 처자식도 잡혀 죽게 될 것이며, 종족들 또한 죽게 될 것이다.
한(漢)나라 역적 동탁(董卓)이 죽임을 당한 뒤에 군사들이 그의 배꼽에다 불을 붙였더니 살이 찌고 기름이 많아서 3일 동안이나 불이 탔다는 이야기를 너는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꼴을 당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터이니, 너는 모름지기 너의 진퇴를 이리저리 비교해 보고 알맞게 헤아려 잘된 일인가, 못된 일인가, 분별하라. 네가 나라를 배반하여 멸망되기보다는 귀순하여 영화로운 장래를 보장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다만 바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장사(壯士)답게 과단성 있게 태도를 바꾸는 것을 결정할 것이요, 어리석은 자의 생각에 얽매여 여우처럼의심만 하지 말라.
아무(某)는 알린다.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 臨危制變曰權,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 敬承嘉論, 用戢奸謀, 且汝素是遐甿, 驟爲勍冦,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黷宮闈,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塗地, 噫 , 唐虞已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輩, 尒曹所作, 何代而無 , 遠則有劉曜王敦, 覬覦晉室, 近則有祿山朱泚, 吠噪皇家, 彼皆或手握强兵, 或身居重任, 叱吒則雷奔電走, 喧呼則霧塞煙橫, 然猶蹔逞姧圖, 終殲醜類, 日輪闊輾, 豈縱妖氛, 天網高懸, 必除兇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壟畝之間, 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愆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兼恐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授尒節旄, 寄爾方鎭, 尒猶自懷鴆毒, 不斂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微, 公侯則奔竄危途, 警蹕則巡遊遠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兇, 斯則聖上於汝有赦罪之恩, 汝則於國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况周鼎非發問之端, 漢宮豈偸安之所, 不知爾意, 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况於人,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今汝藏姦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 迷而不復, 所謂鷰巢幕上, 謾恣騫飛, 魚戲鼎中, 則看燋爛, 我緝煕雄略, 糺合諸軍, 猛將雲飛, 勇夫雨集, 高旌大旆,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陶太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眺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爇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雀卵, 卽日金神御節, 水伯迎師, 商風助肅煞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纜於石頭,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尅期旬朔, 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 不懷私忿, 諭迷途者, 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且學見機, 善自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裂土,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大丈夫之事, 早須相報,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酣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批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鴟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齊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噬臍不及, 尒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桂苑筆耕(계원필경)』, 卷(권)11, 「檄書(격서)」, 檄黃巢書(격황소서)
경문왕 8년(868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한지 6년 만인 874년 최치원은 18세의 나이로 당나라 예부시랑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당나라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위해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 고운(孤雲) 최치원은 당나라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지금의 중국 강소성에 있는 표양현]가 되었다. 그는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879년(당나라 희종 6년, 신라 제49대 헌강왕 5년)에 황소(黃巢, ?~884년)가 농민들을 규합해 장안(長安)에서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가 몹시 어지러워졌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변을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으로 삼아 황소를 치게 하였다. 최치원은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항복을 권하는 격문(檄文)을 썼다. ‘격문’은 특별한 경우에 군사들을 모집하거나, 세상 사람들의 흥분을 일으키거나, 또는 적의 군사들에게 알아듣게 말하거나, 혹은 꾸짖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을 말하는 것이다. 그 뒤, 4년 동안 최치원은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도맡아 문명을 세상에 떨쳤다.
특히 적장을 항복케 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터나 고운(孤雲)의 문필 생활은 이 4년 동안이 가장 황금기라 할 수 있으며, 이 동안에 이룩된 문장들은 모두 거대문필(巨大文筆)이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4년 동안에 이룩된 시문(詩文)이 모두 만여 편(萬餘篇)이었다고 자술(自述)한 것으로 보아 양적(量的)으로도 가장 왕성히 집필(執筆)했던 시기인 것으로 여겨진다.
⎯최신호, 「최치원론(崔致遠論)」, 황패강·소재영·금동혁 공저, 『한국문학작가론』,Ⅰ, 형설출판사, 1994, p.38.
반란을 일으킨 황소가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읽어 내려가다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아마도 땅 속의 귀신 또한 너를 가만히 베어 죽이려고 의론(議論)하였을 것이다."는 대목에서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최치원은 순(舜)에게 복종하지 않아서 토벌을 당한 나라인 묘(苗)와 하(夏)나라에 복종하지 않아서 토벌을 당한 나라인 호(扈)·흉노(匈奴)의 후예로서 서진(西晋)에 반란을 일으켰던 유요(劉曜)와 동진(東晋)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왕돈(王敦), 당(唐)나라 때 반란을 일으킨 무장(武將)인 안녹산(安祿山)과 당나라 덕종(779년~804년) 때 반란을 일으킨 주자(朱泚) 등 역모의 실패 사례를 들거나 대자연의 운행 원리가 도(道)이고, 그 도의 작용을 덕(德)이라고 말하고 있는 『도덕경』과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연대기로 공자가 편찬한 『춘추전』의 가르침을 인용하거나 토벌군의 막강한 군세를 알리는 등의 위협과 항복하면 부와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겠다는 회유의 방법을 절묘하게 배합하여 표현해 상대를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격황소서」에서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고 하는 것이고, 위기를 당하여 그때그때 처한 형편에 맞추어 그 자리에서 결정하거나 처리하여 모면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는 구절은 중국 북제(北齊) 시대 유주(劉晝)의 『신론(新論)』에 나오는 “이치를 쫒아 떳떳함을 지키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循理守常曰道, 臨危制變曰權).”라는 구절을 끌어다 변용하여 쓴 것이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세운 공로로 당나라 희종(僖宗, 재위 873년~888년)으로부터 도통순관승무랑 시어사내봉공(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의 직책을 받았고, 882년 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자금어대’는 붉은 금빛으로 장식한, 고기의 그림을 그린 주머니인데, 그 속에 이름을 적어 넣은 신표가 들어 있어 그것을 차고 대궐로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문체로 쓴 「격황소서」는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황소로 하여금 가슴 밑을 서늘하게 하였다. 형식미 및 대장법(對仗法)이 매우 독보적인 「격황소서」는 문학의 힘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는 글로 후세 한학자들과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너무 형식에 치우쳐 작가의 독창적인 사상과 정서가 결여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식제진망장사(寒食祭陣亡將士)
-전사한 장병을 한식에 제사 지낸 글
최치원
아! 삶에 끝이 있음은 예나 이제나 탄식하는 바입니다. 이름을 썩지 않게 하는 것은 충의(忠義)가 가장 우선입니다. 그대들은 쇠뇌를 당겨 몸을 수고롭게 하고, 수레(전차)를 타고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웅비(熊羆)[힘쎄고 용감한 무사]의 대열에서 기를 떨쳤고, 아관(鵝鸛)[군대 진형(陣形)의 이름으로 아진(鵝陳)과 관진(鸛陳)을 말함]의 진(陳) 앞에서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전장에서 용맹을 한껏 떨쳤으니, 이는 진실로 상자(牀笫)[평상과 평상 위에 까는 대자리] 위에서 편히 누워 죽는 부끄러움을 진정 면했습니다.
지금 들판에는 풀은 푸르고, 숲속에는 꾀꼬리가 지저귀며,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은 부질없이 한(恨)을 띄우며 끝없이 나아갑니다. 올망졸망 모여있는 황량한 무덤 속에 혼령들이 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마음속에 새겨두고 싶은 바는 그대들이 세운 공로요, 내가 마음 아파하는 바는 이 좋은 시절입니다. 박한 술이나마 간소히 차려 놓고 저승에서 떠도는 혼령들을 위로하려 합니다. 두회(杜回)[춘추 진(秦)나라 때의 역사(力士)로 위과(魏顆)가 부친인 위(魏) 무자(武子)의 첩이 개가(改嫁)하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두회와 전쟁을 할 때 개가한 첩의 죽은 아버지의 혼이 나타나 결초(結草)하여 두회를 사로잡게 하여 은혜에 보답하였다.]에게 대항할 것을 함께 도모하고, 온서(溫序)[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자 광무제(光武帝)가 그를 불쌍히 여겨 낙양(洛陽)에 묻어주려고 하였는데, 아들의 꿈에 나타나 고향에 돌아가기를 원하여 고향에 돌아가 장례를 치루었다고 한다.]처럼 고향에 되돌아갈 생각을 품는 것을 본받지 말아 능히 장한 뜻을 이룬다면 이를 음공(陰功)이라 이를 것입니다.
嗚呼, 生也有涯, 古今所歎, 名之不朽, 忠義爲先, 爾等彉弩勞身, 蒙輸逞力, 奮氣於熊羆之列, 忘形於鵝鸛之前, 能衍勇於干戈, 固免慙於牀笫. 今也野草綠色, 林鶯好音, 杳杳逝川, 空流恨而無極, 累累荒塚, 誰驗魂之有知, 我所念兮舊功勞, 所傷兮好時節, 俾陳薄酹, 用慰冥遊. 共謀抗賊於杜回, 無效懷歸於溫序, 能成壯志,是謂陰功.
-崔致遠(최치원), 『桂苑筆耕(계원필경)』 , 卷(권)16
최치원의 「한식제진망장사(寒食祭陣亡將士)」는 한식날에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제문(祭文)이다. 「한식제진망장사」는 대구(對句)가 잘 갖추어져 있는 4·6 변려문(騈儷文)이다. 변려문은 한문체의 하나로 4자 또는 6자의 대구를 써서 읽는 사람에게 미감(美感)을 주는 게 특징이다.
난랑비서(鸞郞碑序)
최치원
나라에는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다. 실은 삼교(三敎: 유·불·선)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교화하는 것이다. 또한,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니 노(魯)나라 사구(司寇 : 공자의 벼슬)의 교지이다. 또한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이 말없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주(周)나라 주사(柱史: 노자의 벼슬)의 종지(宗旨)요, 모든 악한 일은 짓지 않고 착한 일들만을 받들어 실천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의 교화이다.
國有玄妙之道曰, 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不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
“당시에 유행하던 유(儒)·불(佛)·도(道)의 삼교(三敎)에 대해서 모두 부정하지 아니하였던”(조정업, 「최치원」, 황패강 외 공편, 『한국문학작가론』, 1, 집문당, 2000, p. 56.) 최치원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조 기사에 일부가 인용되어 있는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신라의 화랑도인 풍류도가 유·불·도 3교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화랑도를 현묘의 도, 풍류(風流)라 일컫고, 풍류 즉, 화랑의 가르침을 베푼 근원이 기록된 책을 『선사(仙史)』라 하여 선(仙)과 관련시킨 것이 주목된다.
최승우·최언위와 함께 문장의 대가인 신라 삼최(新羅三崔)로 꼽히는 최치원은 『계원필경(桂苑筆耕)』의 지은이로 알려져 있다. 『계원필경』에서 ‘계원(桂苑)’은 문장가들이 모인 곳을 말하며, ‘필경(筆耕)’은 문필(文筆)로 먹고 살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의 문장을 구사한 최치원은 문학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도교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삼국사기』 「열전」에 최치원이 고려 왕건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글에 “계림은 누런 잎사귀요 곡령은 푸른 소나무로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다.
“최승우(崔承祐)처럼 후백제(後百濟)를 택할 용기도 최인곤(崔仁滾, 崔彦撝)처럼 고려(高麗)를 택할 용기도 가지지 않고, 결국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쳤던”(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2003, p.72) 최치원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 최치원은 송악 지방에서 나날이 세력을 키워 가고 있는 왕건에게 주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치원은 많은 양의 글을 남겼지만 특히 “모래를 파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桂苑集) 20권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군대 막사]에 기식하며 거기서 먹고 살아왔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그가 스스로 밝힌 『계원필경』에 실려 있는 잡지(雜誌)·시(詩)·부(賦)·표(表)·격(檄)·소(疏)·제문(祭文)·서(書) 등의 글은 그가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천재적인 필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최치원]가 쓴 글은 어느 것이나 성(性)을 기르고 몸을 세우는 유학의 도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고, 유학의 도(道)를 근거로 한 문학관에서 힘써 배격한, 화려한 수식 위주의 병려문(騈儷文)이었다“(조동일, 앞의 책, p.69).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듬해, 최치원은 자신이 편찬하여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에게 『계원필경(桂苑筆耕)』을 비롯한 다섯 편의 저서를 올렸다. 최치원은 『계원필경』 서문에서 “신(臣) 최치원은 저작한 잡시부(雜詩部) 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립니다. 그 권목(卷目)은 아뢰와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과시금체(私試今體) 5수(首) 1권(卷),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首) 1권(卷), 잡시부(雜詩部) 30수(首) 1권(卷),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卷), 『계원필경(桂苑筆耕)』 1부(部) 20권(卷)의 목록을 차례로 적었다. 『계원필경(桂苑筆耕)』, 권11의 첫머리에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실었다. 최치원의 산문으로는 「격황소서」 외에 「사산비명(四山碑銘)」·「한식제진망장사문(寒食祭陣亡將士文)」·「난랑비서(鸞郎碑序)」 등이 알려져 있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