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 비공개 - 효릉(인종과 인성왕후)을 돌아보다.
깊어 가는 가을날
인적이 전혀 없는 왕릉에 발을 들여놓다.
왕릉을 지키는 것은 옆 목초지에서 풀을 베는 트렉터의 요란한 소음뿐.
짧고 불우했던 삶과 재위기간 때문일까....
인적없는 왕릉의 모습에서 쓸쓸함이 진동을 하는것 같다.
돌아서는 뒷자락을 더 있다가라고 누가 꼭 잡고 놓지 않는것처럼 한동안 서성이다 돌아서다.
** 산내음님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
Canon] Canon PowerShot G5 (1/769)s F4.0
효릉(孝陵) (사적 제200호)
조선조 최단명 왕위에 있었던 인종(이호: 1515-1545/ 재위 8개월)과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효릉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종의 능을 먼저 단촐하게 조성했다가 인성왕후 승하(선조 10년) 후에 쌍릉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다.
재 조성할 당시 인종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으나, 난간석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다. 현재는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종은 1544년 11월 20일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불과 8개월이 지난 1545년 6월 29일 인종은 대신 윤인경 등을 불러 ‘내가 병이 걸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경원대군(명종)에게 전위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도와서 내 뜻에 부응토록 하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묻고 모든 내 장사는 소박하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고 분부한 뒤, 이튿날인 7월 1일 경복궁의 정침에서 승하하니 보령 31세였다.
효릉은 간좌곤향(북동에서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있는 쌍릉으로 인종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난간석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다.
인종의 봉분을 두른 병풍석에는 돌이끼가 끼어 군데군데 붉은 빛이 돌고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이, 그 양쪽 우석에는 운채가 조각되어 있다. 능에는 이 밖에도 3면의 곡장과 상석 2, 장명등 1, 문무인석 각 1쌍, 석마 2쌍, 석양 2쌍, 석호 2쌍이 등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0년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인종 곁에 장사지내면서 왕릉의 개수를 명해서 병풍석을 두른 것이라고 한다. 인종 승하 당시의 봉분은 병풍석 등의 석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인종이 승하한 후 을사사화로 인종의 외가 처가 및 가까운 신하들이 큰 희생과 탄압을 겪어야 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왕에 대한 존중관념도 크게 엷어져서 왕릉 조성을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를 모후로 하여 1515년(중종10년) 2월 25일에 중종의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때인 1520년(중종1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3세부터 글을 배워 익히고 8세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하기를 즐겨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중종을 섬기는데에는 그 정성과 공경을 다했고, 태어난 지 엿새만에 잃은 모후 장경왕후를 섬기지 못한 일에 스스로 상심하여 대왕대비(성종의비 정현왕후)에게 더욱 효도를 다했다.
또한 검약하고 욕심이 없어서 일찍이 시녀 가운데 고운 옷을 입은 자가 있는 것을 보면 곧 내보내게 했으므로 궁중안은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도 숙연했다고 한다. 인종은 성품이 착하여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누이 효혜공주가 일찍 죽었을때 매우 애석히 여겨 그로 인하여 병까지 얻었으며 쥐를 잡아 동궁인 자신을 저주한 사건인 ‘작서의 변’에 복성군과 그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혐의를 쓰고 귀양 가자 그 일을 알고는 직접 소를 지어 극진히 아뢰니 중종도 이에 감동하여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하자 인종은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았으며, 겨울철인데도 목욕하고 분향하며 밖에 서서 저녁에서 새벽까지 하늘에 빌었다. 그러다가 중종이 승하하지 식음을 전폐한 게 엿새이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는 것이 다섯달이나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효성이 지극해서 능호까지 효릉으로 정해진 인종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재위 기간의 운명이 생모 장경왕후(중종의 제1계비)의 삶과 유사하게 꽃을 펴보지도 못하고 요절해 버린 비운의 왕이다. 명종이 즉위하고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중종의 제2계비)가 권력을 잡은 후 인종의 외척들을 제거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더욱 사후까지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다.
인성왕후 박씨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태어나 11세 때 세자빈에 책봉되었지만 왕비 재위 8개월만에 인종을 떠나 보내고, 외롭게 여생을 보내다가 후사도 없이 64세(선조 10년)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왕릉 답산-풍지지리-안내]에서 퍼옴
[
Canon] Canon PowerShot G5 (1/1250)s F4.0
★ 마사회의 목초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풀을 베는 트렉터의 요란한 소리만 쓸쓸한 왕릉을 지켜주더군요.
[
Canon] Canon PowerShot G5 (1/769)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322)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158)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322)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625)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500)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500)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250)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158)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100)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400)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400)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500)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625)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769)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769)s F4.0
[
Canon] Canon PowerShot G5 (1/1250)s F4.5
[
Canon] Canon PowerShot G5 (1/400)s F4.0
첫댓글 선림원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서오ㄴ릉에서 만나다니..............감사
잘 보았습니다.
효릉 비공개릉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던데요...
선림원님 ... 효릉 다녀 가셨군요. 제가 살고 있는 곳 입니다. 고양시에서는 효릉 봉향제를 매년 10월에 합니다. 올해는 10월12일에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