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산업과 소설
본격적인 소설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나타났다. 19세기에는 숱한 명작 소설이 출판되었다. 말하자면 출판과 소설의 발행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세기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이다. 인간 활동의 바탕은 ‘돈’이었다. 사람들은 돈이 되는 사업에 몰렸다. 큰돈을 번 사람은 강철을 만들거나 석탄을 캐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금융가였다. 출판업은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었다. 큰 돈을 번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사람이 부자였다.
책을 펴낸 뒤에 제작비를 회수하는 책임은 일차적으로 출판업자에게 있었다. 출판업자는 손해를 줄이고 이익을 높이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하나가 인쇄업과 겸하는 일이었다.
1815년에 1000부의 책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4500루불이었다. 권당 5루불로 서적상에게 넘기면 출판업자는 약 500루불을 남겼다. 그러나 이익을 남기기 보다는 손해를 볼 때가 더 많았다. 출판업자가 ‘찍어내는 대부분의 책은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은 극소수이었다.(지금도 출판의 대부분은 문학 작품이 아니고 수험서, 참고서 등등이다.) 19세기 전반기의 인기 작가이고 전업작가인 발작크도 아주 어렵게 살았다.
신문 발행이 인기를 얻으면서 출판비를 낮추려는 노력으로 인쇄 기술을 개발하였다. 1811년에 원압인쇄기를 발명하였다. 1830년 대에는 증기 인쇄기가 나타났다. 출판비는 더욱 저렴해졌다.. 철도가 발달하면서 운송비도 줄여 주었다. 인쇄기술의 발달이 문화산업을 팽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인쇄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출판물이 쏟아지면서 문학의 장르에서도 구분이 나타났다. 역사소설, 모험소설, 성애소설, 탐정소설, 전기, 대중역사서, 대중과학서, 요리책, 건강서 서부물, 여행기, 화보집, 회고록, 일기, 자기 개발서, 어린이용 서적 등등의 분류가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장르의 분류에는 오락성이 짙은 소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재미를 주는 내용의 책이 많아진 것은 문학의 세계에서 변화를 의미한다. 수도원의 보관소에 보관되어서 개인의 손에는 닿지 않던 책이 이제는 책을 들고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인쇄물, 신문, 책을 집으로 가져가서 읽을 수 있는 것은 19세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출판의 양은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책 거래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문학 카페나 살롱 같은 책 읽는 공간도 늘어났다.
빅토리아 시대는 도시 산업이 발달하면서 대중문화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책의 유통 체계가 만들어졌다. 책의 유통의 중심지는 대도시였고, 영국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가 대표적인 도시이었다.
책의 보급과 확산에는 글 읽는 인구가 많아야 하고, 책을 살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였다. 서점의 역사를 보면 지식인을 고객으로 한 영업체이다. 16-7세기에는 대학의 주변에서 상설 서점이 몰려 있었다. 지방이나 농촌에는 상설 책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들을 연결시켜 주는 그물망은 서적 행상이 맡았다. 서적 행상은 이 도시, 저 도시로 떠돌아 다녔다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길에 좌판을 만들어 놓고 책을 진열하였다. 그곳에서 2-3 주 영업을 하다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우리나라의 시골 장을 따라다니면서 민화를 그리던 떠돌이 환쟁이가 연상된다.
이들의 서적 목록에는 몽테뉴 같은 고전도 있었고, 해적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질이 나쁜 소책자들이었다. 돈이 없는 민중을 고객으로 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민중서적이었다. 삽화가 들어간 책은 오늘의 만화책의 원조로 볼 수 있다. 대중들이 즐겨 보는 소책자를 챕북(chapbook)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일반적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챕북을 사는 사람은 빈곤층도 아니고, 미숙한 노동자나 농민도 아니었다. 책을 볼려면 적어도 글은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이들 계층은 글을 읽지 못 하였다. 챕 북의 고객은 글은 읽을 줄 알지만 교육수준이 낮은 중간게급의 하층민이 대부분이었다. 중류층도 물론 책을 사 볼 수 있다.
서적 시장이 확대되면서 서점이 유통체계를 담당하였다. 저가 책의 독자는 신문으로 신문의 연재소설로 옮겨갔다. 오늘에 명작 고전으로 꼽는 책의 상당 부분이 신문 연재 소설이었던 이유이다 .명맥을 유지하는 챕북은 중세의 가사문학이나 캘트 신화, 프랑스 신화를 많이 다루었다. 19세기에 시골구석까지 팔려 나간 챕북은 대부분이 민중화한 귀족문화의 유산이었다. 말하자면 기사문학, 고대 신화, 강도로 전락한 귀족의 이야기를 다룬 악한 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18-19세기에는 서민들의 집에서도 챕북 정도의 싸구려 책을 찾아 볼 수 있다. 도서 시장에는 민중적 소재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표절과 모방도 넘쳐났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까막눈인 대중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었다. 까막눈 독자들은 기사 이야기, 마술이야기, 성인전 등을 좋아 하였다. 성인전은 고난을 딛고 성공을 이룬 이야기가 많으므로 어렵게 살고 있는 서민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환상에 빠져 자신의 처지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서적 행상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서적 행상은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다. 보기로서 베니스에 출발한 서적 행상은 베오그라드, 부다페스트까지 돌아 다녔다. 당국은 행상의 서적 판매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금서도 지정하였다. 검열을 하여 금서인 경우에는 압수하였다.
시골 장터에 자리를 잡은 행상은 책을 팔기 위하여 큰 소리로 읽어 주거나 노랫가락으로 읊으면서 손님을 모았다. 유랑극단이 와서 나팔을 구슬프게 불면서 시골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 취급하는 서적은 ‘범죄 이야기’가 제일 인기가 있었다.
19세기 초반의 지식인은 싸구려 문학이 품위 있는 생활에 위협이 된다고 우려하였다. ‘나쁜 책’은 수준이 낮은 독자들에게 해롭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로서 행상은 더욱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852년에 나폴레온 3세는 ‘감시 위원회’를 설치하여 책북은 이 위원회의 검열필 도장을 받아야 판매하도록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정규 서점은 늘어나고 행상은 줄어들면서 서적 행상은 쇠퇴하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가난하였다. 발작크와 제인 오스틴의 인기는 대단히 높았지만 겨우 생계를 꾸러나갈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생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이 소설을 썼다. 출판업자들도 파산하는 자가 부지기수 였다. 대부분의 책은 초판을 1000부 쯤 찍었다.
출판물의 소비자로 ‘도서 대여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자들은 책을 직접 구매하지 않고 빌려서 읽었다. 친구에게도 빌리고, 가족들도 한 권의 소설책을 돌려가면서 읽었다. 18세기가 되면 공공 도서관을 건립하였다. 1750-1800년 간에 독일에서 생산되는 소설 약 5000편 가운데 3/4이 도서 대여점에서 소비하였다. 1830년 대에는 파리에서 도서 대여점이 약 520여 개소가 있었다.
도서 대여점을 이용하는 고객은 주로 부르주아지 계층이었다. 상류층 계급과 자주 접촉하는 하인, 수위, 직공, 점원 등도 많이 이용하였다. 대여점에서 빌려간 책은 소리 내어서 읽었다. 소리 내어 읽기는 가족이나 주변사람이 들을 수 있어서 상당히 효율적이었다. 출판사에서도 소리 내어 읽기 좋은 문장으로 책을 찍었다.
(우리나라도 조선 후기가 되면 책을 읽어주는 직업인이 있었다. 하릴없는 사람들이 절초전(담배를 썰어 파는 집)에 모여서 시간을 보냈다. (주로 낙척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가서 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았다. 하도 구설프게 책을 읽으므로 청자가 흥분하여 칼로 책 읽는 사럼울 찔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