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병천에 잠깐 방문을 했는데 어느 사찰 앞을 지나다보니 그 입구에 프랜카드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예수님의 탄신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작 우리 교회는 밖에다 그런 거 하나 내걸지 않았는데 절에서 대신 내걸었습니다. 어디에 걸던, 위에서 그분이 보실 때는 다 똑같을 겁니다.
어느 교회에서 석가탄신일에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드립니다.’라는 프랜카드를 똑같이 내걸었는데 한 교인이 그 프랜카드를 떼어버리고 우리 목사님이 미쳤나보다고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석가탄신일에 보면 사찰 주변에 연등을 답니다. 그래서 어느 사찰에서 그 입구 양 길가에 연등을 달았는데 교회가 그 절 앞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교회에서 우리 교회 앞에는 연등을 달 수 없다 해서 거기만 딱 잘라버렸어요. 중간을 잘라버리니 불이 다 나갑니다. 그걸로 서로 싸우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그 관할 파출소장한테 들었습니다.
자, 기억을 잘 더듬어보시기 바랍니다. 과거 수 년 전만 하더라도 성탄절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의 명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불교 집안에서 나서 자랐는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는 성탄절에 선물도 받았고 또 직장 다닐 때는 우리 아이들한테 성탄 선물도 매년 사다주었습니다. 당연히 지인들한테 카드도 보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말입니다. 교회 한 번 다니지 않았지만 성탄절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석가탄신일은 국경일도 아니었고 연등행렬, 거리행진 그런 거 없었습니다.
또 12월 달만 되면 온 거리가 성탄 트리와 장식물로 번쩍거렸고, 거리마다 그리고 방송마다 캐롤송이 울려퍼졌습니다. 서울 시청 앞에는 대형 성탄 트리가 세워졌고 시장이 그 꼭대기에 직접 불도 점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 사라졌습니다. 요즘은 거리가 번쩍거리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안 나가서 그런 건가? 맞습니까? 물론 이게 정상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좀 섭섭한 것은 내가 교회를 안 다닐 때는 시끌벅적하더니, 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부터는 너무 조용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성탄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여기 모여서 성탄을 이렇게 축하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오늘을 도대체 어떻게 지낼까? 성탄절이 무엇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내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거두절미하고, 우리와 함께 이 땅에 살고 있는 믿지 않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믿는 우리들에게만 오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가 이제 내일모레면 60입니다. 제가 40년은 안 믿는 사람으로 살았고, 한 9년은 좀 믿는 소위 양다리 걸치기로 살았고, 그리고 사제가 되고 9년은 폭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때그때의 성탄절의 의미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안 믿는 사람으로 살았을 때의 성탄의 의미입니다. 저는 불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월초파일 즈음하면 절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 모시고 절에 가서 연등 만드는 봉사도 하고, 사다리 들고 밖에 나가서 가로수에 연등을 연결연결하여 매달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절이나 불교와 관련하여서는 많이 친근합니다.
예를 들어 스님들의 회색, 무색옷, 또 불상의 금색이 친근합니다. 목탁소리, 염불소리, 아주 익숙합니다. 법당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늙은 개 한 마리가 보고 싶습니다. 나물밥이 먹고 싶습니다. 스님이 다려서 내려주시는 그 밍밍한 차 맛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주로 어머니의 친구분들인 할머니들과 친했습니다. 분위기가 좀 차분하다 못해 무겁습니다만, 하여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타종교 신자로서 본 성탄의 이미지는 정 반대입니다. 흰색, 녹색, 빨간 색, 밝고 따뜻합니다. 징글벨, 가볍고 명랑한 캐롤송, 알록달록 선물보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달콤한 케이크, 반짝반짝 성탄트리, 학창시절 때는 예쁜 여학생들,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별세계였던 교회였습니다.
그때의 성탄의 이미지는 이국적인 부드러움과 따뜻함이었습니다. 아마 겨울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겨울은 추우니까 밖에서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성당이나 교회의 안 풍경은 참 따뜻해 보였습니다. 밝고, 부드럽고, 흥겹고, 과자 굽는 냄새도 나는 것 같고 그랬습니다. 나도 솔직히 좀 섞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샘도 나고 괜히 어깃장 놓고 그래서 잘 다니지도 않던 독서실에 가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보고, 사춘기 때는 그랬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직장생활을 할 때는 연말과 겹쳐서 캐롤송이 울려퍼지는 거리를 회식이다 망년회다 뭐다해서 쏘다니고, 옆구리에 달력 둘둘 말아 끼고 아이들 줄 선물 사서 들고 술 취해서 다니던 기억이 많이 나는 것을 보니 주로 그렇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 걸치고 있을 때는 또 달랐습니다. 막상 그 교회라는 그 대열에 참여하려니까 시간도 많이 투자하게 되고, 뭘 자꾸 일을 맡게 되어 부담이 생기게 됩니다. 아이들을 한 번 가르쳐 보면 어떻겠느냐, 대림 심방 가는데 같이 가자, 성탄 공연 준비하러 나와라, 내가 들어오기 전에 밖에서 가졌던 성탄절에 대한 이미지는 점점 옅어지고, ‘이거 뭔가 엮이고 발목 잡히는 거 아냐?’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어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면서 갖는 기분은 또 완전히 다릅니다. 미 신자였을 때는 그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에 대한 동경, 반쪽 신자였을 때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가장 큰 기념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큰 이벤트나 행사로서 갖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가 미신자였을 때, 그리고 내가 반쪽 신자였을 때 그때 성탄절에는 내게 예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에 대한 동경만 있었고, 이벤트와 행사로 대변되는 약간은 의무감으로 부담스런 친교만 있었습니다. 예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의문이나 관심도 없었습니다.
병천의 어느 사찰 앞에 걸려 있는 프랜카드의 글귀인 ‘예수님의 탄신을 축하합니다.’라는 말처럼 그랬어야 했는데, 정작 그 주인공인 예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때 저는 그랬습니다. 마치 어느 아기 돌잔치에 갔는데, 정작 주인공인 아기는 그 불편한 옷을 입고 낮잠도 못자고 졸려서 짜증을 부리면서 우는데, 그 아기를 축하한다고 다들 모여서는 아기 얼굴 대충 한 번 보고는 지네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먹고마시고.... 그 아기 잔치 끝나고 나서 병 안 걸리면 다행이죠.
그런 겁니다. 오늘 이 밤은 아기 예수가 탄생한 거룩한 밤입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우리들이 아니라 아기 예수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기 예수의 탄생을 찬양하는 수많은 하늘의 군대입니다. 또는 양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최소한 이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오시기도 했지만, 이를 전혀 모르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같은 날, ‘밤늦게까지 제네들은 뭐 하느라 이렇게 시끄러워?’하면서 우리 교회 주변을 기웃거리는 옆집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거, 또 혹시 이 자리에 약간의 부담감을 갖고 ‘오늘 같은 큰 잔칫날 빠지면 안 되지’ 해서 나오신 분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오셨다는 거,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이 우리들만의 잔치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 하루로 이 잔치가 마감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물리적인 잔치는 시간이 지나면 끝나겠지요. 그렇더라도 오늘 이 기쁘고 따뜻하고 넉넉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 년 내내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오늘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한 하느님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기쁨과 축복의 말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첫댓글 전해주 신부님 유튜브 설교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VmNJRVBmk&t=3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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