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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귀감 禪家龜鑑
<休靜, 1520년 3월 26일~1604년 1월 23일>
휴정(休靜, 1520년 3월 26일~1604년 1월 23일)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최(崔), 본관은 완산,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이다. 휴정은 법명.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호되,
종본이래(從本以來)로 소소영령(昭昭靈靈)하야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며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이라.
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호되,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종본이래(從本以來)로, 근본을 좇은 이래로.
소소영령(昭昭靈靈)하야, 소소하고 영령하야.
소소나 영령이나 다 밝고 신령하다.
소소(昭昭)는 밝을 소자고요, 영령(靈靈)은 신령하다, 또렷또렷하다. 이런 소리입니다.
소소하고 영령하야,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며, 일찍이 나지도 아니하고, 일찍이 소멸하지도 아니했다. 불생불멸이라는 거죠.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이로다.
이름도 부득, 얻을 수 없고. 상, 형상도 부득, 얻을 수 없도다.
이런 소리가 되겠습니다.
한 물건이 여기에 있는데, 근본을 좇은 이래로, 본래부터 소소하고 영령하여, 밝고 신령하여서 일찍이 나지도 않고 일찍이 소멸하지도 않았으며, 이름도 얻을 수 없고 모양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선가귀감의 첫 번째 게송이 되겠습니다.
이 선가귀감을 지은 조계 퇴은, 다시 말해서 서산 대사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로 그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일으킨 분이죠. 원래 이 서산 대사는 산에서 수행을 열심히 했죠. 서산은 바로 묘향산을 뜻하는 것이고. 본래 이분이 인제 출가는 지리산으로 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리산에 와 가지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바로 숭인(崇仁) 장로의 설법을 듣고 다른 친구들은 다 서울로 돌아갔는데, 쌍계사에 그대로 남아가지고 전등록, 선문염송, 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법화경, 유마경. 이런 경전들을 거기서 읽고 다시 영관(靈觀) 대사에게서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쌍계사하고도 굉장히 인연이 깊으신 분이죠.
지리산 쌍계사 쪽으로 이렇게 처음에 불교와 아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죠. 그래 가지고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 명산대찰을 또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어느 날 우연히 남원 근처를 지나다가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쳤다 그래요. 그때 읊은 게송이,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사람 일찍이 일렀더구나
닭 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서
장부의 할 일을 마쳤도다.
문득 자기 집 일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것뿐이네.
팔만대장경도 본래는 한 장의 빈종이로구나.
하~ 이런 아주 멋진 시를 읊으셨어요.
이게 바로 지금 우리 첫 번째 게송에 나온 한 물건, 불생불멸하는 한 물건의 도리를 깨치신 거죠. 불생불멸을.
그러고 나중에 또 사방을, 절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선교양종판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역시 나중에 그 자리도 사임을 하고 묘향산과 두류산 또 금강산, 이런 식으로 들어가서 또 수행을 하고, 또 시를 지었는데, 유명한 시가 있죠. 삼몽시(三夢詩)라 그래서,
주인이 꿈을 객에게 말하고
객이 꿈을 주인에게 말하니
이제 두 꿈을 말하는 저 나그네
어저버 그도 또한 꿈속의 사람이로다.
하~ 이 게송을 보면은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이 나요.
모든 것이 다 꿈속에서 이루어진, 주인이 자기 꿈을 손님에게 말하고, 손님은 또 자기 꿈을 주인에게 말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주인이니, 손님이니, 꿈을 말하는 저 두 나그네가 다 꿈속의 사람이다. 하하하하~
또 향로봉시(香爐峯詩)에 이런 시를 짓습니다.
만국의 서울은 개미집이요
천고의 호걸은 하루살이라.
밝은 달을 베개하고 고요히 누웠으니
끝없이 부는 솔바람 갖은 곡조 아뢰네.
이런 그 향로봉시를 지었는데,
이 바로 ‘만국의 서울은 개미집이요 천고의 호걸은 하루살이라.’ 이런 내용을 나중에 어떤 다른 스님이 무고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옥에 갇히게 돼요. 이게, 향로봉시가 임금을 모독한 글이다. 이렇게 무고를 하는 거예요.
“뭐? 만국의 서울이 개미집? 그러면 서울에 사는 임금이 개미란 말이야?” 뭐 이런 식으로. “천고의 호걸은 하루살이? 그럼 뭐 온갖 영웅호걸들, 장군이나 또는 이런 대신들이 다 그러면 하루살이에 불과하다고?”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무업이라는 스님이 그것을 역적. 정여립과 음모를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어전까지 잡혀갑니다.
그러나 직접 이 서산대사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본 선조 임금께서 오히려 그 인품에 감화를 받았죠. 그래 가지고 오히려 선조 임금과 서로 잘~ 지내는 계기가 됩니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죠. 그래서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임금이 의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때 이 대사는 묘향산에서 의주까지 가서 임금님 앞에서 “전국의 승려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나서지 못할 자는 각각 그들이 있는 곳에서 분향을 하고 불공을 올려 부처님의 도움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신이 통솔하고 전진 속에 뛰어들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의병을 거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활약을 했죠. 특히 평양 탈환하고 이럴 때는 엄청난 큰 공로를 의병들이 세웠다고 합니다.
나중에 서산 대사는 그러고 나서 은퇴를 하고 제자들에게 뒷일을 맡기게 되죠. 그래서 서산 대사는 <청허집(淸虛集)>, 또 <선가귀감(禪家龜鑑)>, 또 <삼가귀감(三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 이런 책을 남기게 되는데 그 글들이 아주 대단한 역작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역작 중의 역작,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선가귀감이고, 선가귀감의 바로 이 첫 귀절,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아주 내용을 담고 있는 거죠.
여기 한 물건이 여기에 있는데,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그래 놓고 서산 대사가 직접 주해도 달았어요.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고서 주장자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쫙~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고 나서, 허공에다.
옛 어른은 이렇게 말했다.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아직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
이런 아주 호방한 시를, 서산 대사가 보면은 호방한 시를 잘 지었던 것 같애요.
‘석가도 아직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 이것도 인제 옛 시 중에 있는 거죠.
이것이 한 물건의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음이며,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 없는 까닭이다.
육조 스님이 대중에게 물었죠.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느냐?”
그때 신회 선사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그 불성 아닙니까 하고 대답을 한 거예요.
그래 가지고 신회가 육조 스님의 서자가 되었죠. 적자가 되지 못하고.
그와는 달리 남악 회양 선사가 숭산에서 와서 뵙자, 육조 스님이 물었죠.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그때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매다가 8년 후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일물(設似一物)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회양은 육조의 적자가 되었다.
예, 그래서 신회 선사는 공부를, 알음알이로 공부를 한 것으로 인정을 받고, 회양 선사는 참다운 선으로 공부한 것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죠.
송에 보면,
유불선의 성인들 모두 이 말에서 나왔네
뉘라서 말할 터인가, 눈썹이 빠질라!
하~ 이런 말을 딱 붙여 놓았어요.
모든 성인들이 다 한바탕 이 말에서 나왔다.
한 물건이 여기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길 없다.
이 물건이 어떤 물건인가?
이게 말하자면은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 화두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어떤 건가? 어떻게 생겼는가?
이거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사실은 선가귀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글이죠.
그래서 선가귀감의 이 첫 게송이야말로 참선하는 사람들이 정말 화두로 삼고, 이 한 물건이 어떤 물건인가? 일물자(一物者)는 하물(何物)고? 이게 바로 이 뭣고? 화두죠. 시심마(是甚麽), 또는 시삼마, 쓰씀머. 시삼마 화두의 이게 말하자면은 아주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호되,
종본이래(從本以來)로 소소영령(昭昭靈靈)하야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며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이라.
선가귀감(仙家龜鑑)
序(서)
古之學佛者(고지학불자)는 非佛之言(비불지언)이면 不言(불신)하고
非佛之行(비불지행)이면 不行也(불행야)라
故(고)로 所寶者(소보자)가 惟貝葉靈文而已(유패엽영문이이)러니
今之學佛者(금지학불자)는 傳而誦則士大夫之句(전이송즉사대부지구)요
乞而持則士大夫之詩(걸이지즉사대부지시)라
至於紅綠(지어홍록)으로 色其紙(색기지)하고 美錦(미금)으로 粧其軸(장기축) 하야
余雖不肖(여수불초)나 有志於古之學(유지어고지학)하야 以貝葉靈文(이패엽영문)으로
爲寶也(위보야)나 然(연)이나 其文(기문)이 尙繁(상번)하고 藏海汪洋(장해왕양)하야
後之同志者(후지동지자)가 頗不免摘葉之勞故(파불면적엽지노고)로
文中(문중)에 撮其要且切者數百語(촬기요차절자수백어)하야
書于一紙(서우일지)하니 可謂文簡而義周也(가위문간이의주야)라
如以此語(여이차어)로 以爲嚴師(이위엄사)하야
而硏窮得妙則句句(이연궁득묘즉구구)에 活釋迦存焉(활석가존언)이시니
勉乎哉(면호재)인저 雖然(수연)이나
離文字一句(이문자일구)와 格外奇寶(격외기보)는
非不用也(비불용야)나 且將以待別機也(차장이대별기야)하노라.
예전에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보배로 여기는 것은 오직 불경의 거룩한 글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전해 가면서 외는 것이 사대부의 글이요,
빌어 지니는 것이 사대부의 시뿐이었다.
그 것은 울긋불긋한 종이에 쓰고 고운 비단으로 꾸며서,
아무리 많아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가장 큰 보배로 생각하니
아! 예와 오늘에 불교를 배우는 이들의 보배 삼는 것이 어찌 이 다지도 같지 않을까.
내가 비록 불초하나 옛 글에 뜻을 두어 불경의 거룩한 글 로써 보배를 삼으나
그러나 그 글이 오히려 번다 하고 장경 의 바다가 넓어서
뒷날의 도반들이 가지를 헤쳐 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로움을 면치 못할까 하여
글 가운데 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것 수백 마디를 간추려서 한장에 쓰니
참으로 글은 간략하나 뜻은 주밀 하다고 할만하다.
만일 이 말로써 스승을 삼아 연찬하고 궁구하여 묘리를 얻으면
자자 구구에 산 석가 여래가 나타나실 것이니 부디 힘쓸 지어다.
그렇더라도 글자를 떠난 한 글귀와 격에 벗어난
기묘한 보배를 쓰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지만
또한 장차 특별한 기틀을 기다리고자 한다.
嘉靖(가정) 甲子(갑자)(1564) 夏(하)
淸虛堂(청허당) 白華道人(백화도인) 序(서)
1.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從本以來(종본이래)로 昭昭靈靈(소소영령)하야
不曾生不曾滅(부증생부증멸)이며 名不得狀不得(명부득상부득)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2.
佛祖出世(불조출세)가 無風起浪(무풍기량)이로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 결을 일으킨 것이다.
3.
然(연)이나 法有多義(법유다의)하고 人有多機(인유다기)하니 不妨施設(불방시설)이로다.
그러나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기틀 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4.
强立種種名字(강립종종명자)하야 惑心惑佛惑衆生(혹심혹불혹중생)이라 하니
不可守名而生解(불가수명이생해)하고 當體便是(당체편시)니 動念卽乖(동념즉괴)니라.
굳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라 하였으나
이름에 얽매어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다.
그러나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그러진다.
5.
世尊(세존)이 三處傳心者(삼처전심자)는 爲禪旨(위선지)요
一代所說者(일대소설자)는 爲敎門(위교문)이라
故(고)로 曰(왈) 禪是佛心(선시불심)이요 敎是佛語(교시불어)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6.
是故(시고)로 若人(약인)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실지어구즉염화미소)가 皆是敎迹(개시교적)이요
得之於心則世間序言細語(득지어심즉세간추언세어)가 皆是敎外別傳禪旨(개시교외별전선지)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방긋 웃는 것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7.
吾有一言(오유일언)하니 絶慮忘緣(절려망연)하고
兀然無事坐(올연무사좌)하니 春來草自靑(춘래초자청)이로다.
내가 한 마디 말을 할까 한다. 생각 끊고 반연을 쉬고
일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8.
敎門(교문)은 惟傳一心法(유전일심법)하고 禪門(선문)은 惟傳見性法(유전견성법)하니라.
교문에는 오직 한 마음 법만을 전하고 선문에는 오직 견성 하는 법만을 전하였다.
9.
然(연)이나 諸佛說經(제불설경)은 先分別諸法(선분별제법)하고
後說畢竟空(후설필경공)하되 祖師示句(조사시구)는
迹絶於意地(적절어의지)하고 理顯於心源(이현어심원)이니라.
그러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는 먼저 모든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공한 이치를 말씀하셨다.
조사들의 가 르침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 드러났다.
10.
諸佛(제불)은 說弓(설궁)하고 祖師(조사)는 說絃(설현)하시니
佛說無碍之法(불설무애지법)은 方歸一味(방귀일미)라
拂此一味之迹(불차일미지적)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방현조사소시일심)이니
故(고)로 云庭前柏樹子話(운정전백수자화)는 龍藏所未有底(용장소미유저)라 하니라.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 다.
부처님께서 걸림 없는 법을 설하신 것은 바로 한 맛에 들 아 감이다.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 버려야 바야흐로 조사 가 보인 한 마음이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에 잣나무 이니라}고 한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11.
故(고)로 學者(학자)는 先以如實言敎(선이여실언교)로
委辨不變隨緣二義(위변불변수연이의)가 是自心之性相(시자심지성상)이며
頓悟漸修兩門(돈오점수양문)이 是自行之始終然後(시자행지시종연후)에 放下敎義(방하교의)하고
但將自心現前一念(단장자심현전일념)하야 參詳禪旨則必有所得(참상선지즉필유소득)하리니
所謂出身活路(소위출신활로)니라.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하 지 않는 것과 인연 따르는 두 가지 뜻이 곧 네 마음의 본 바 탕과 형상이고,
단박 깨치고 오래 닦는 두 가지 문이 공부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히 가려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교의 뜻을 내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두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 써 참선한다면
반드시 얻은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뛰쳐나온 살길이다.
12.
大抵學者(대저학자)는 須參活句(수참활구)요 莫參死句(막참사구)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13.
凡本參公案上(범본참공안상)에 切心做工夫(절심주공부)하되
如鷄抱卵(여계포란)하며 如猫捕鼠(여묘포서)하며 如飢思食(여기사식)하며
如渴思水(여갈사수)하며 如兒憶母(여아억모)하면 必有透徹之期(필유투철지기)하라.
무릇 공안을 참구하되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이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하고,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 이 물을 생각하듯 하며, 어린애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어 사무칠 때가 있을 것이다.
14.
參禪(참선)엔 須具三要(수구삼요)니
一(일)은 有大信根(유대신근)이요 二(이)는 有大憤志(유대분지)요 三(삼)은 有大疑情(유대의정)이라
苟闕其一(구궐기일)하면 如折足之鼎(여절족지정)하야 終成廢器(종성폐기)하니라.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고,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다.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이 소용없는 물건이 되고 말 것이다.
15.
日用應緣處(일용응연처)에 只擧狗子無佛性話(지거구자무불성화)하되
擧來擧去(거래거거)하며 疑來疑去(의래의거)에
覺得沒理路 沒義路 沒滋味(각득몰리로 몰의로 몰자미)하야
心頭熱悶時(심두열민시)가 便是當人放身命處(편시당인방신명처)며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역시성불작조저기본야)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도
오직 {어찌하여 개한 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한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
이 치의 길 끊어지고 뜻 길이 사라져 아무 맛도 없어지고
마음 이 답답할 때가 바로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대목이다.
16.
話頭(화두)를 不得擧起處(부득거기처)에 承當(승당)하며 不得思量卜度(부득사량복탁)하며
又不得將迷待悟(우부득장미대오)하며 就不可思量處(취불가사량처)하야 思量(사량)하면
心無所之(심무소지)함이 如老鼠入牛角(여노서입우각)하야 便見倒斷也(편견도단야)하리라
又尋常(우심상)에 計較安排底(계교안배저)도 是識情(시식정)이며
隨生死遷流底(수생사천류저)도 是識情(시식정)이며
怕怖慞惶底(파포장항저)도 是識情(시식정)이어늘
今人(금인)이 不知是病(부지시병)하고 只管在裡許(지관재리허)하야 頭出頭沒(두출두몰)하나니라.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히려 하지도 말고, 생 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라.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더 생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 이다.
또 평소이런가 저런가 따지고 맞춰 보는 것이 식정이 며, 생사를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식정이며,
무서워하고 갈팡 질팡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빠졌다 솟았다 할뿐이다.
17.
此事(차사)는 如蚊子(여문자)가 上鐵牛(상철우)하야 更不問如何若何(갱불문여하약하)하고
下嘴不得處(하취부득처)에 棄命一(기명일) 하면 和身透入(화신투입)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 째 들어갈 것이다.
18.
工夫(공부)는 如調絃之法(여조현지법)하야 緊緩(긴완)에 得其中(득기중)이니
勤則近執着(근즉근집착)하고 忘則落無明(망즉낭무명)하리니
惺惺歷歷(성성역력)하고 密密綿綿(밀밀면면)이니라.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듯 팽팽하고 늦음이 알맞아야 한 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19.
工夫(공부)가 到行不知行(도행부지행)하며 坐不知坐(좌부지좌)하면 當此之時(당차지시)하야
八萬四千魔軍(팔만사천마군)이 在六根門頭伺候(재육근문두사후)라가 隨心生起(수심생기)하나니
心若不起(심약불기)하면 爭如之何(쟁여지하)리요.
공부가 걸어가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 게 되면,
이 때 팔만 사천의 마군이가 육근 문 앞에 지키고 있다가 마음을 따라 온갖 생각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20.
起心(기심)은 是天魔(시천마)요 不起心(불기심)은 是陰魔(시음마)요
或起或不起(혹기불혹기)는 是煩惱魔(시번뇌마)니
然(연)이나 我正法中(아정법중)엔 本無如是事(본무여시사)니라.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요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요,
혹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도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이다.
그러나 우리 바른 법 가운데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다.
21.
工夫(공부)가 若打成一片則縱今生(약타성일편즉종금생)에
透不得(투부득)이라도 眼光落地之時(안광낙지지시)에 不爲惡業所牽(불위악업소견)이니라.
공부가 한 고비를 넘긴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때에 악업에 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22.
大抵參禪者(대저참선자)는 還知四恩(환지사은)이 深厚麽(심후마)아
還知四大醜身(환지사대추신)이 念念衰朽麽(념념쇠후마)아
還知人命(환지인명)이 在呼吸麽(재호흡마)아 生來値遇佛祖麽(생래치우불조마)아
及聞無上法(급문무상법)하고 生希有心麽(생희유심마)아 不離僧堂(불리승당)하여 守節麽(수절마)아
不與隣單(불여인단)으로 雜話麽(잡화마)아 切忌鼓扇是非麽(절기고선시비마)아
話頭(화두)가 十二時中(십이시중)에 明明不昧麽(명명불매마)아 對人接話時(대인접화시)에 無間斷麽(무간단마)아
見聞覺知時(견문각지시)에 打成一片麽(타성일편만)아 返觀自己(반관자기)하야 捉敗佛祖麽(착패불조마)아
今生(금생)에 決定續佛慧命麽(결정속불혜명마)아
起坐便宜時(기좌편의시)에 還思地獄苦麽(환사지옥고마)아
此一報身(차일보신)이 定脫輪廻麽(정탈윤회마)아
當八風境(당팔풍경)하야 心不動麽(심부동마)아
此是參禪人(차시참선인)의 日用中點檢底道理(일용중점검저도리)니
古人云(고인운) 此身不向今生度(차신불향금생도)하면 更待何生度此身(갱대하생도차신)이리요 하니라.
대저 참선하는 이는 이렇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로 구성 된 더러운 몸이 순간 순간 썩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 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그대로 지 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서도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 을 떠나지 않고 수도인 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 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하 게 시비나 일삼고 있지 않는가? 화두가 어느 때나 또렷또렷 하게 매하지 않는가?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한결같은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꼭 부처님의 지혜를 이룰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여덟 가지 바람이 불어올 때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내 몸을 이생에 못 건지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하 리요}
23.
學語之輩(학어지배)는 說時似悟(설시사오)나 對境還迷(대경환미)하나니
所謂言行(소위언행)이 相違者也(상위자야)라.
말을 배우는 무리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지 경계에 당하게 되면 그만 아득하게 된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틀리는 것이다.
24.
若欲敵生死(약욕적생사)인댄 須得這一念子(수득자일념자)를 爆地一破(폭지일파)하야사 方了得生死(방료득생사)하리라.
만약 생사를 막아내려면 이 한 생각을 탁 깨뜨려야 비로소 생사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25.
然(연)이나 一念子(일념자)를 爆地一破然後(폭지일파연후)에도 須訪明師(수방명사)하야 決擇正眼(결택정안)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라도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 가 눈알이 바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26.
古德(고덕)이 云(운) 只貴子眼正(지귀자안정)이요 不貴汝行履處(불귀여행리처)라 하니라.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지 자네의 행실을 보려고 하지 않네}라고 하였다.
27.
願諸道者(원제도자)는 深信自心(심신자심)하야 不自屈不自高(부자굴부자고)니라.
바라건대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어, 스 스로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28.
迷心修道(미심수도)하면 但助無明(단조무명)이니라.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무명만을 도와줄 뿐이다.
29.
修行之要(수행지요)는 但盡凡情(단진범정)이요 別無聖解(별무성해)니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뿐이지 따 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30.
不用捨衆生心(불용사중생심)이요 但莫染汚自性(단막염오자성)하라 求正法(구정법)이 是邪(시사)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성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바르지 못한 사도니라.
31.
斷煩惱(단번뇌)가 名二乘(명이승)이요 煩惱不生(번뇌불성)이 名大涅槃(명대열반)이니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이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이다.
32.
須虛懷自照(수허회자조)하야 信一念緣起無生(신일념연기무생)이어다.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비춰 보아,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일어남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33.
諦觀殺盜淫妄(체관살도음망)이 從一心上起(종일심상기)하면 當處便寂(당처벽적)이니 何須更斷(하수갱단)이리요.
죽이고 도둑질하고 음난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다 한 마음 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 없는데 무엇을 다시 끊으리요.
34.
知幻卽離(지환즉리)라 不作方便(부작방편)이며 離幻卽覺(이환즉각)이라 亦無漸次(역무점차)니라.
환상인 줄 알면 곧 여읜 것이라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상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또한 닦아 갈 것도 없다.
35.
衆生(중생)이 於無生中(어무생중)에 妄見生死涅槃(망견생사열반)이 如見空花起滅(여견공화기멸)이니라
중생이 나는것 없는 가운데서 망녕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기멸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36.
菩薩(보살)이 度衆生入滅度(도중생입멸도)나 又實無衆生(우실무중생)이 得滅度(득멸도)니라.
보살이 중생을 건져 열반을 들게 했다 할지라도 실은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는 것이다.
37.
理雖頓悟(이수돈오)나 事非頓除(사비돈제)라.
이치를 단박에 깨칠 수 있으나, 버릇은 한꺼번에 가시어지 지 않는다.
38.
帶婬修禪(대음수선)은 如蒸沙作飯(여증사작반)이요
帶殺修禪(대살수선)은 如塞耳叫聲(여색이규성)이요
帶偸修禪(대투수선)은 如漏巵求滿(여루치구만)이요
帶妄修禪(대망수선)은 如刻糞爲香(여각분위향)이니
縱有多智(종유다지)라도 皆成魔道(개성마도)니라.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 차 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 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 라도 다 악마의 길을 이룰 뿐이다.
39.
無德之人(무덕지인)은 不依佛戒(불의불계)하며 不護三業(불호삼업)하며
放逸懶怠(방일나태)하야 輕慢他人하며 較量是非로 而爲根本하니라.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을 지키지 않는다.
함부로 놀아 게을리 지내며, 남을 깔보아 따 지고 시비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
40.
若不持戒(약불지계)면 尙不得疥癩野干之身(상부득개나야간지신)이온대
況淸淨菩提果(항청정보리과)를 可冀乎(가기호)아.
만약 계행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 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41.
欲脫生死(욕탈생사)인댄 先斷貪欲(선단탐욕)과 及除愛渴(급제애갈)이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 버려야 한다.
42.
無碍淸淨慧(무애청정혜)가 皆因禪定生(개인선정생)이니라.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에서 나온다.
43.
心(심)이 在定則能知世間生滅諸相(재정즉능지세간생멸제상)하니라.
마음이 정에 들면 세간의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든 일을 다 밝게 알 수 있다.
44.
見境心不起(견경심불기)가 名不生(명불생)이요
不生(불생)이 名無念(명무념)이요 無念(무념)이 名解脫(명해탈)이니라.
어떤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 않 음이라 하고,
나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며 무념의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
45.
修道證滅(수도증멸)이 是亦非眞也(시역비진야)요
心法本寂(심법본적)이 乃眞滅也(내진멸야)라
故(고)로 曰(왈) 諸法從本來(제법종본래)로 常自寂滅相(상자적멸상)이라 하니라.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은 또한 진리가 아니다.
심 법이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부터 늘 그대로 열반이다}라고 하 신 것이다.
46.
貧人(빈인)이 求乞(구걸)이어든 隨分施與(수분시여)하라
同體大悲(동체대비)가 是眞布施(시진보시)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라.
한 몸 처럼 가엾이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니라.
47.
有人(유인)이 來害(내해)어든 當自攝心(당자섭심)하야 勿生瞋恨(물생진한)하라
一念瞋心起(일념진심기)하면 百萬障門開(백만장문개)니라.
누가 와서 나를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성내는 데에 백만 가지 장애 의 문이 열린다.
48.
若無忍行(약무인행)하면 萬行不成(만행불성)이니라.
만약 참는 일이 없다면 보살의 육도만행도 이루어질 수 없다.
49.
守本眞心(수본진심)이 第一精進(제일정진)이니라.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이다.
50.
持呪者(지주자)는 現業(현업)은 易制(이제)라
自行可違(자행가위)어니와 宿業(숙업)은 難除(난제)라 必借神力(필차신력)이니라.
진언을 외우는 것은 금생에 지은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 쉬 워서
자기 힘으로도 고칠 수가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은 지워 버리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신비한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51.
禮拜者(예배자)는 敬也(경야)요 伏也(복야)니 恭敬眞性(공경진성)하고 屈伏無明(굴복무명)이니라.
예배란 공경이요 굴복이다.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52.
念佛者(염불자)는 在口曰誦(재구왈송)이요 在心曰念(재심왈념)이니
徒誦失念(도송실념)하면 於道無益(어도무익)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면 염불이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 무 도움도 없다.
53.
聽經(청경)은 有經耳之緣(유경이지연)과 隨喜之福(수희지복)하며
幻軀(환구)는 有盡(유진)이나 實行(실망)은 不亡(불망)이니라.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치는 인연도 있게 되고, 기쁨이 따른 복도 짓게 된다.
물거품 같은 이 몸은 다할 날이 있으나 참다 운 행은 헛되지 않는다.
54.
看經(간경)은 若不向自己上做工夫(약불향자기상주공부)하면
雖看盡萬藏(수간진만장)이라도 猶無益也(유무익야)니라.
경을 보되 자기 마음속을 돌이켜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 장경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55.
學未至於道(학미지어도)하고 衒耀見聞(현요견문)하야
徒以口舌辯利(도이구설변리)로 相勝者(상승자)인댄 如厠屋塗丹鑊(여칙옥도단확) 이니라.
배워 도를 이루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만 부려 서로 이기려고 한다면 마치 변소에 단청하는 것과 같다.
56.
出家人(출가인)이 習外典(습외전)하면
如以刀割泥(여이도할니)하야 泥無所用(니무소용)이요 而刀自傷焉(이도자상언)이니라.
출가한 사람이 외전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아서 흙은 아무 소용도 없는데 칼만 망가지게 된다.
57.
出家爲僧(출가위승)이 豈細事乎(기세사호)아
非求安逸也(비구안일야)며 非求溫飽也(비구온포야)며 非求名利也(비구이명야)라
爲生死也(위생사야)며 爲斷煩惱也(위단번뇌야)며
爲續佛慧命也(위속불혜명야)며 爲出三界度衆生也(위출삼계도중생야)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편안함 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 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 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 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 이다.
58.
佛云(불운), 無常之火(무상지화)가 燒諸世間(소제세간)이라 하고
又云(우운), 衆生苦火(중생고화)가 四面俱焚(사면구분)이라 하며
又云(우운) 諸煩惱賊(제번뇌적)이 常伺殺人(상사살인)이라 하니라
道人(도인)은 宜自警悟(의자경오)하야 如救頭燃(여구두연)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태운 다} 하셨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방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 하셨으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 고 엿보고 있다} 하셨다.
그러므로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해야 한다.
59.
貪世浮名(탐세부명)은 枉功勞形(왕공노형)이요
營求世利(영구세리)는 業火加薪(업화가신)이니라
세상의 뜬 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괴롭게 하는 것이요,
세상의 잇속을 따라 허덕이는 것은 업의 불에 섶을 더 보태는 것이다.
60.
名利衲子(명리납자)는 不如草衣野人(불여초의야인)이니라.
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는 초의를 걸친 야인만도 못하다.
61.
佛云(불운)하사대
云何賊人(운하적인)이 假我衣服(가아의복)하고 稗販如來(패판여래)하야 造種種業(조종종업)고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나의 옷을 빌 려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업을 짓고 있느냐}고 하셨다.
62.
於戱(오희)라 佛子(불자)여
一衣一食(일의일식)이 莫非農夫之血(막비농부지혈)이요
織女之苦(직녀지고)어늘 道眼(도안)이 未明(미명)하면 如何消得(여하소득)이리요.
아! 불자여.
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이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삭여 낼 것인가.
63.
故(고)로 曰(왈)
要識披毛戴角底麽(요식피모대각저마)아 卽今虛受信施者是(즉금허수신시자시)니라
有人(유인)은 未飢而食(미기이식)하고 未寒而衣(미한이의)하니 是誠何心哉(시성하심재아
都不思目前之樂(도불사목전지락)이 便是身後之苦也(변시신후지고야)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 인 줄 아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하지 않 으면서 거저 받아먹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 니 이 무슨 심사일까?
도대체 눈앞의 쾌락의 바로 후생이 괴 로움인 줄을 생각지 않는구나.
64.
故(고)로 曰(왈)
寧以熱鐵(영이열철)로 纏身(전신)이언정
不受信心人衣(불수신심인의)하며 寧以洋銅灌口(영이양동관구)언정
不受信心人食(불수신심인식)하며 寧以鐵鑊投身(영이철확투신)이언정
不受信心人房舍等(불수신심인방사등)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차라리 뜨거운 철판을 몸에 두를지언 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옷을 입지 말며,
차라리 쇳물을 마실 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음식을 억지 말고,
차라리 끊는 가마솥에 뛰어들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집에 거처하지 말라}한 것이다.
65.
故(고)로 曰(왈)
道人(도인)은 進食(진식)을 如進毒(여진독)하고
受施(수시)를 如受箭(여수전)이니 幣厚言甘(폐후언감)은 道人所畏(도인소외)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에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하라}고 한 것이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 를 닦는 사람으로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66.
故(고)로 曰(왈)
修道之人(수도지인)은 如一塊磨刀之石(여일괴마도지석)하야
張三也來磨(장삼야래마)하고 李四也來磨(이사야래마)하야
磨來磨去(마래마거)에 別人刀(별인도)는 快(쾌)하되
而自家石(이자가석)은 漸消(점소)라
然(연)이나 有人(유인)은 更嫌他人(갱혐타인)이
不來我石上磨(불래아석상마)하나니 實爲可惜(실위가석)이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 서방이 와서 갈고,
이 서방이 와서 갈아 가면 남의 칼 은 잘 들겠지만
나의 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도리어 남이 와서 돌에 칼을 갈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67.
故(고)로 古語(고어)에
亦有之(역유지)하니 曰(왈) 三途苦(삼도고)가 未是苦(미시고)라
袈裟下失人身(가사하실인신)이 始是苦也(시시고야)라 하니라.
그러므로 옛말에 또한 이르기를
{삼악도의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가사를 입었다가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참말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68.
咄哉(돌재)라 此身(차신)이여
九孔常流(구공상류)하고 百千癰疽(백천옹저)에 一片薄皮(일편박피)로다
又云(우운) 革囊盛糞(혁낭성분)하야 膿血之聚(농형지취)가 臭穢可鄙(취예가비)라
無貪惜之(무탐석지)는 何況百年將養(하황백년장양)이나 一息背恩(일식배은)이니라.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백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또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뭉치라.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나거나 아까울 것이 없다.
더구나 백년을 잘 기른다 해도 숨 한 번에 은혜를 저버리고 마는 것이랴.
69.
有罪卽懺悔(유죄즉참회)하고 發業卽慚愧(발업즉참괴)하면 有丈夫氣象(유장부기상)이요
又改過自新(우개과자신)하면 罪隨心滅(죄수심멸)이니라.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곧 부끄러워 할 줄 알면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70.
道人(도인)은 宜應端心(의응단심)하야 以質直爲本(이질직위본)하야
一瓢一衲(일표일납)으로 旅泊無累(여박무루)니라.
도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박하고 곧은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한 개의 표주박과 한 벌의 누더기 옷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71.
凡夫(범부)는 取境(취경)하고 道人(도인)은 取心(취심)이니
心境(심경)을 兩忘(양망)하야사 乃是眞法(내시진법)이니라.
범부들은 눈앞의 현실에만 따르고, 수도인은 마음만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과 바깥 현실 두 가지를 다 잊는다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법이다.
72.
聲聞(성문)은 宴坐林中(연좌임중)이나 被魔王捉(피마왕착)하고
菩薩(보살)은 遊戱世間(유희세간)이나 外魔不覓(외마불역)이니라.
성문은 숲 속에 편히 앉아서도 마왕에 붙잡히고,
보살은 세간에 노닐어도 외도와 마군이 보지 못한다.
73.
凡人(범인)이 臨命終時(임명종시)에 但觀五蘊皆空(단관오온개공)하야 四大無我(사대무아)요
眞心無相(진심무상)하여 不去不來(불거불래)니 生時(생시)에도 性亦不生(성역불생)하고
死時(사시)에 性亦不去(성역불거)라 湛然圓寂(담연원적)하고 心境(심경)이 一如(일여)라
但能如是直下頓了(단능여시직하돈료)하면 不爲三世所拘繫(불위삼세소구계)니
便是出世自由人也(변시출세자유인야)라
若見諸佛(약견제불)이 無心隨去(무심수거)하며 若見地獄(약견지옥)이라도
無心怖畏(무심포외)니 但自無心(단자무신)하면 同於法界(동어법계)니 此卽是要節也(차즉시요절야)라
然則平常(연즉평상)은 是因(시인)이요 臨終(임종)은 是果(시과)니 道人(도인)은 須着眼看(수착안간)하라.
누구든지 임종할 때에는 다만 오온이 다 빈 것이어서 네가지 원소가 나라고 할 것이 없고,
참마음은 모양이 없어 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또한 난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또한 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맑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단박 깨친다면 삼세 인과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세상을 뛰어난 자유인이다.
만약 부처님을 만나더라도 따라 갈 마음이 없고, 지옥에 가더라도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되면 법계와 같이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요긴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좋은 씨를 심고 임종하 ㄹ때에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곳에 주의하여야 한다.
74.
凡人(범인)이 臨終命時(임종명시)에 若一毫毛(약일호모)라도
凡聖情量(섬성정량)이 不盡(부진)하고 思慮(사려)를 未忘(미망)하면
向驢胎馬腹裡(향려태마복리)하야 托質(탁질)하며
泥犁鑊湯中(나리확탕중)에 煮煠(자잡)하며 乃至依前再爲螻蟻蚊虻(내지의전재위루의문맹)이니라.
사람이 임종할 때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성이이다 범부다 하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되면
나귀나 말의 뱃속에 끌려들거나 지옥의 끊는 가마 속에 처박히게 되며,
혹은 개미나 모기 같은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75.
禪學者(선학자)가 本地風光(본지풍광)을 若未發明則孤峭玄關(약미발명즉고초현관)을 擬從何透(의종하투)리요
往往斷滅空(왕왕단멸공)으로 以爲禪(이위선)하며 無記空(무기공)으로 以爲道(이위도) 하며
一切俱無(일체구무)로 以爲高見(이위고견)하나니
此(차)는 冥然頑空(명연완공)이니 受病幽矣(수병유의)니라
今天下之言禪者(금천하지언선자)가 多坐在此病(다좌재차병)이니라.
참선하는 사람이 본래 면목을 만약 밝히지 못한다면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왕왕 어떤 이는 아주 끊어 없어진 빈 것으로써 참선을 삼기도 하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빈 것으로써 도를 삼기도 하며 일체 모두 없는 것으로써
높은 소견을 삼기도 하나니 이것은 컴컴하게 비기만 한 것이라 병든 바가 깊다.
지금 천하에 참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이런 병에 걸려 있다.
76.
宗師(종사)도 亦有多病(역유다병)하니
病在耳目者(병재이목자)는 以瞠眉努目(이당미노목)과 側耳點頭(측이점두)로 爲禪(위선)하며
病在口舌者(병재구설자)는 以顚言倒語(이전언도어)와 胡喝亂喝(호할난할)로 爲禪(위선)하며
病在手足者(병재수족자)는 以進前後退(이진전후퇴)와 指東畵西(지동화서)로 爲禪(위선)하며
病在心腹者(병재심복자)는 以窮玄究妙(이궁현구묘))와 超情離見(초정이견)으로 爲禪(위선)하니니
據實而論(거실이론)컨대 無非是病(무비시병)이니라
종사도 또한 병이 많다.
병이 귀와 눈에 있는 자는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울이며,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선을 삼고,
병이 입과 혀에 있는 자는 횡설수설되지 않는 말과 함부로 {할}하는 것으로써 선을 삼는다.
병이 손발에 잇는 자는 나아갔다 물러갔다 이쪽저쪽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선을 삼으며,
병이 마음 가운데 있는 자는 진리를 찾아내고 오묘한 것으로써 선을 삼는다.
사실대로 말하면 어느 것이고 병 아닌 것이 없다.
77.
本分宗師(본분종사)의 全提此句(전제차구)는 如木人唱拍(여목인창박)하며 紅爐點雪(홍로점설)이요
亦如石火電光(역여석화전광)이니 學者實不可擬議也(학자실불가의의야)니라
故(고)로 古人(고인)이 知師恩曰(지사은왈)
不重先師道德(부중선사도덕)이 只重先師不爲我說破(지중선사불위아설파)라 하니라.
본분 종사가 이 구를 온전히 들어 보임은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여, 배우는 자가 참으로 생각하고 의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하기를
{스님의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는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78.
大抵學者(대저학자)는 先須祥辨宗途(선수상변종도)니
昔(석)에 馬祖一喝也(마조일할야)에 百丈(백장)은 耳聾(이롱)하고 黃壁(황벽)은 吐舌(토설)하고
這一喝(자일할)은 便是拈花消息(변시염화소식)이며 亦是達摩初來底面目(역시달마초래저면목)이라
吁(우)라 此臨濟宗之淵源(차임제종지연원)이니라.
대저 배우는 사람은 먼저 종파의 갈래부터 자세히 가리어 알아야 한다.
옛날에 마조스님이 한 번 {할} 하는데, 백장스님은 귀가 먹고, 황벽스님은 혀가 빠졌다.
이 한 {할}이야말로 곧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소식이며, 또한 달마대사의 처음 오신 면목이다.
아! 이것이 임제종의 근원이 된 것이다.
79.
大凡祖師宗途(대범주사종)가 有五(유오)하니
曰臨濟宗 曰曺洞宗 曰雲門宗 曰僞仰宗 曰法眼宗(왈임제종 왈조동종 왈운문종 왈위앙종 왈법안종)이니라.
臨濟宗(임제종)은 本師釋迦佛(본사석가불)로 至三十三世六祖慧能大師下直傳(지삼십삼세육조혜능대사하직전)하니
曰南嶽懷讓 曰馬祖道一 曰百丈懷海 曰黃檗希運 (왈남악회양 왈마조도일 왈백장회해 왈황벽희운)
曰臨濟義玄 曰興化存奬 曰南院道顒 曰風穴延沼 (왈임제의현 왈흥화존장 왈남원도옹 왈풍혈연소)
曰首山省念 曰汾陽善昭 曰慈明楚圓 曰楊岐方會 (왈수산성념 왈분양선소 왈자명초원 왈양기방회)
曰白雲守端 曰五祖法演 曰圓悟克勤 曰俓山宗杲禪師等(왈백운수단 왈오조법연 왈원오극근 왈경산종고선사등)이니라.
무릇 조사의 종파에 다섯 갈래가 있다.
즉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위앙종, 법앙종 등이다.
임제종은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33대 되는 육조 혜능대사의 밑에서 곧게 전하여 내려가기를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임제의현, 황화존장, 남원도옹, 풍혈연소,
수산성념, 분양선소, 자명초원, 양기방회,
백운수단, 오조법연 원오극근, 경산종고 선사 등이다.
80.
曹洞宗(조동종)은 六祖下傍傳(육조하방전)이니
曰靑原行思 曰石頭希遷(왈청원행사 왈석두희천) 曰藥山惟儼 曰雲巖曇晟(왈약산유엄 왈운암담성)
曰洞山良价 曰曹山耽章 曰雲居道膺禪師等(왈동산양개 왈조산탐장 왈운거도응선사)이니라.
조동종은 육조의 아래에서 곁 갈래의
청원행사, 석두희천, 약산유엄, 운암당성,
동산양개, 조산탐장, 운거도웅 선사 등이다.
81.
雲門宗(운문종)은 馬祖傍傳(마조방전)이니
曰天皇道悟 曰龍潭崇信 曰德山宣鑑 曰雪峰義存(왈천황도오 왈용담숭신 왈덕산선감 왈설봉의존)
曰雲門文偃 曰雪竇重顯 曰天衣義懷禪師等(왈운문문언 왈설두중현 왈천의의회선사등)이니라.
운문종은 마조의 곁 갈래로
천황도오, 용담숭산, 덕산선감, 설봉의존,
운문문언, 설두중현, 천의의회 선사 등이다.
82.
僞仰宗(위앙종)은 百丈傍傳(백장방전)이니
曰僞山靈祐 曰仰山慧寂 曰香嚴智閑 曰南塔光湧(왈위산영우 왈앙산혜적 왈향엄지한 왈남탑광용)
曰芭蕉慧淸 曰霍山景通 曰無着文喜禪師等(왈파초혜청 왈곽산경통 왈무착문휘선사)이니라.
위앙종은 백장의 곁 갈래로
위산영우, 앙산혜적, 향엄지한, 남탑광용,
파초혜청, 곽산경통, 무착문희 선사 등이다.
83.
法眼宗(법안종)은 雪峰傍傳(설봉방전)이니
曰玄沙師備 曰地藏桂琛 曰法眼文益 曰天台德韶(왈현사사비 왈지장계침 왈법안문익 왈천태덕소)
曰永明延壽 曰龍濟紹修 曰南臺守安禪師等(왈영명연수 왈용제소수 왈남대수안선사등)이니라.
법안종은 설봉의 곁 갈래로
현사사비, 지장계침, 법안문익, 천태덕소,
영명연수, 용제소수, 남대수안 선사 등이다.
84.
臨濟家風(임제가풍)은 赤手單刀(적수단도)로
殺佛殺祖(살불살조)하며 辨古今於玄要(변고금어현요)하고 驗龍蛇於主賓(험용사어주빈)이라
操金剛寶劍(조금강보검)하여 掃除竹木精靈(소제죽목정령)하며
奮獅子全威(분사자전위)하여 震裂狐狸心膽(진열호리심담)이로다
要識臨濟宗麽(요식임제종마)아 靑天轟霹靂(청천굉벽력)이요 平地起波濤(평지기파도)로다.
임제 가풍은 맨손에 한 자루의 칼을 들고 부처도 조사도 죽이고,
예와 이제를 삼현 삼요로써 판단하며, 용과 뱀을 주인과 손으로 징험한다.
금강이 보검으로 도깨비를 쓸어 내고 사자의 위험을 떨쳐 여우와 삵쾡이의 넋을 찢다.
임제의 종지를 알겠는가? 푸른 하늘에 벼락치고 평지에 물결 인다.
85.
曹洞家風(조동가풍)은 權開五位(권개오위)하여 善接三根(선접삼근)하며 橫抽寶劍(횡추보검)하며
斬諸見稠林(참제견조림)하며 妙協弘通(묘협홍통)하여 截萬機穿鑿(절만기천착)이로다
威音那畔(위음나반)에 滿目煙光(만목연광)이요 空劫已前(공겁이전)에 一壺風月(일호풍월)이로다
要識曹洞宗麽(요식조동종마)아 佛祖未生空劫外(불조미생공겁외)에 正偏不落有無機(정편불락유무기)로다
조동 가풍은 권도로 오위를 열어 세 가지 근기를 잘 다루며,
보검을 빼어 들고 모든 사건이 자라는 빽빽한 숲을 베어내며
널리 통하는 길을 묘하게 맞추어서 천만가지 모든 생각을 끊고 천착하여 가도다.
위음왕불 나시기 전 눈에 가득찬 풍광이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 신선 세계 경치로다.
조동종을 알겠는가? 부처님과 조사도 안 나시고 아무 것도 없는 그대로,
바른 것, 치우친 것, 있는 것이나 없는 것에 떨어지지 않는다.
86.
雲門家風(운문가풍)은 劍峰有路(검봉유로)하고 鐵壁無門(철벽무문)이라
掀翻露布葛藤(흔번노포갈등)하고 剪却常情見解(전각상정견해)니라
迅電(신전)은 不及思量(불급사량)하고 烈焰(열염)에 寧容湊泊(영용주박)이리요
要識雲門宗麽(요식운문종마)아 拄杖子勃跳上天(주장자발도상천)하고
盞子裡(잔자리)에 諸佛(제불)이 說法(설법)이로다.
운문 가풍은 칼날에 길이 있고, 철벽에는 문이 없다.
온 천하의 갈등을 흔들어 엎고 못된 소견을 잘라 내버리다.
빠른 번개와 같이 미처 생각할 수 없고 활활 타는 불꽃 속에 어찌 뛰어들어 갈 수 있을까.
운문종을 알겠는가? 주장자가 날아 하늘 높이 오르고 잔 속에서 모든 부처님이 설법을 한다.
87.
潙仰家風(위앙가풍)은 師資唱和(사자창화)하고 父子一家(부자일가)로다
脇下書字(협하서자)하니 頭角(두각)이 崢嶸(쟁영)이요
室中驗人(실중험인)에 獅子腰折(사자요절)이로다
離四句絶百非(이사구절백비)를 一槌粉碎(일추분쇄)하니
有兩口無一舌(유양구무일설)이여 九曲珠通(구곡주통)이로다
要識潙仰宗麽(요식위앙종마)아
斷碑(단비)는 橫古路(횡고로)하고 鐵牛(철우)는 眠少室(면소실)이로다.
위앙 가풍은 스승과 제자가 부르면 화답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 살고 있네.
옆구리에 글자 쓰고 머리 위에 뿔이 높이 솟았구나.
방안에서 사람들을 시험하니 사자 허리 부러지다
네 가지 말 다 여의고, 백가지 아닌 것도 모두 끊어 버려 한 망치로 부수었네.
입은 둘이 있으나 혀는 하나도 없는 것이 구곡주를 꿰뚫었다.
위앙종을 알겠는가?
부러진 비석 옛 길에 쓰려져 있고 무쇠 소 작은 집에 자네.
88.
法眼家風(법안가풍)은 言中有響(언중유향)하고 句裡藏鋒(구리장봉)이라
髑髏(촉루) 常干世界(상간세계)하고 鼻孔(비공)은 磨髑家風(마축가풍)이라
風柯月渚 顯露眞心(풍가월저 현로진심)하고 翠竹黃花가 宣明妙法(취죽황화 선명묘법)이로다
要識法眼宗麽(요식법안종마)아
風送斷雲歸嶺去(풍송단운귀령거)하고 月和流水過橋來(월화유수과교래)로다.
법안 가풍은 말 끝에 메아리가 울려오고 글 속에 칼날이 숨었구나,
해골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콧구멍은 어느 때나 그 가풍을 불어 내네.
바람 부는 나뭇가지와 달 비치는 물가에는 참마음이 드러나고 푸른 대와 누른 국화 묘한 법을 환히 밝혀 주네.
법안종을 알겠는가? 맑은 바람 구름을 산마루로 보내 주고 밝은 달 물에 떠서 다리지나 흘러오네.
89.
臨濟喝德山棒(임제할덕산방)이 皆徹證無生(개철증무생)하여 透頂透底(투정투저)라
大機大用(대기대용)이 自在無方(자재무방)하여 全身出沒(전신출몰)하며 全身擔荷(전신담하)하여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퇴수문수보현대인경계)니
然(연)이나 據實而論(거실이론)컨대 此二師(차이도)도 亦不免偸心鬼子(열불면투심귀자)니라.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망이가 다 나는 것 없는 도리를 철저하게 증득하여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꿰뚫었다.
큰 기틀과 큰 작용이 자유자재하여 어디나 전신으로 출몰하며 전신으로 짐을 져,
물러나 문수와 보현의 대인 경계를 지킨다 하더라도
실상대로 말한다면 이 두분도 또한 도깨비가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90.
大丈夫(대장부)는 見佛見祖(견불견조)를 如寃家(여원가)하나니
若着佛求(약착불구)하면 被佛縛(피불박)이요
若着祖求(약착조구)하면 被祖縛(피조박)이라
有求皆苦(유구개고)니 不如無事(불여무사)니라.
대장부는 부처님이나 조사 보기를 마치 원수와 같이하여야 한다.
만약 부처에게 배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부처에게 얽매인 것이요,
만약 조사에게 배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조사에게 얽매이는 것이 된다.
무엇이든 구하는 것이 있다면 다 고통이 되므로 아무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91.
神光(신광)이 不昧(불매)하여 萬古徽猷(만고휘유)로다
入此門來(입차문래)에 莫存知解(막존지해)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여라.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