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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3인 특사>= 고종 황제의 특사로 임명된 3인 열사 등은 1907년 6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헤이그에 도착해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안건을 회의에 상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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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황제에게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죽음으로써 조약 인준을 거부해 선대가 남긴 책임을 완수하는 게 낫다”고 상소를 올렸다. 조약 체결을 막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종로에서 머리를 찧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 궐기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1907년 4월 황제의 밀명을 받고 서울을 떠난 이준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 5월 21일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른다.
당시 37세의 이상설이 정사(正使), 48세의 이준이 부사(副使)였다.
특사 활동 중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땅에 묻은 뒤 이상설은 유럽을 순회하며 외교활동을 벌이다가 미국에 1년 남짓 머물며 한인단체의 통합을 도왔다.
190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 의병을 규합해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했다.
한때 러시아 정부에 체포됐지만 1911년부터 다시 광복군을 양성하다 1914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통령을 맡았다. 러시아가 광복군정부를 해체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박은식 등과 신한혁명당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1916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병을 얻은 뒤 1917년 3월 2일 니콜스크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46세.
일제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10년 만이다.
(사진은 동평에서 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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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사진을 보니 계시판이 번쩍 살아나는듯.. 감사/ 꾸벅 신
우스리스크의 들녁. 그 흔적, 반추``` 그 모습 그대로군요. 바이칼이나 동북아역사도 중요하지만 사진 속의 현장 언저리에서 이뤄지고 있는 오늘의 한인`고려인`북조선인`한국인`까레이스키``` 그리고 중국인들과 소련인들... 간의 첨예함과 절박함이 생각납니다. 빨리 아리랑포럼도 지금의 역사와 그 현장과 대면할 수 있기를 염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