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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불패의 해전기록
당포파 왜병장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을 똑바로 충돌케 하고, 용의 입으로는 위를 향해 현자포 철탄을 치쏘며, 천자 · 지자 대포로 대장군전 등을 쏘아 그 배의 선체를 부수고, 뒤에 있는 판옥선들은 포탄 · 화살 · 살탄들을 교대로 쏘아대게 했습니다.
위에 소개한 장계는 이순신이 기록해 둔 거북선 관련 내용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자들조차 이를 정확하게 해독하지 못해서 거북선 관계 기록이 없는 줄 알았고, 학자들 나름대로 꾸며서 설명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출판물, 그림, 모형들은 예외 없이 망발된 것이 되어 왔다.
‘똑바로 충돌했다’ 는 대목에서 거북선이 왜장선(기함)과 바짝 붙어 있었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를 향해 치쏘며’ 는 왜장이 있던 함교의 층각을 공격한 것인데, 불과 3~4m 정도의 거리였다. 아무리 무쇠포탄이라 해도 사정거리가 1,000m나 되는 현자포를 이 정도 거리에서 쏘았다면 층각의 기둥과 판자, 방패 등이 그 충격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판옥선단에서 퍼부어 대는 일시집중타의 살탄과 총포탄들도 층각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판옥선단의 일시집중타는 거북선에도 유탄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거북선은 등에 철판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
함대를 지휘하는 왜군 사령관들은 대개 본국에서는 영주의 신분이었다. 그리고 각 단위대장들은 모두 영주의 가신(家臣)들이었으며, 왜병들은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의 군사들이자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왜군 기동함대들은 영주인 왜장에 대한 충성심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늘같은 영주가 거북선의 포격에 당했는지 아니면 판옥선에서 쏜 무기에 당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층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왜군들은 아연실색했고, 사령관을 구하기 위해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가메이는 이미 죽은 뒤였다. 가메이의 시체는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의 가슴에는 화살탄(화살보다 굵고 길다) 하나가 깊이 박혀 있었다.
사령관의 주검 앞에서 왜군들은 경악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시신이라도 거두고자 했지만 포탄과 살탄, 화살과 근접전용 동시다발 포창탄들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에 접근해 있던 왜병들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모두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그 사이 거북선은 기함을 향해 좌현대포와 우현대포를 번갈아 쏘아대며 공격에 박차를 가해 왔다.
대장군전을 맞아 생긴 구멍으로 소발화탄을 매단 불화살들이 날아들었고, 왜군 기함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왜군들은 화염을 피해 갑판 이곳저곳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번에는 10여 척의 판옥선단이 일시집중타를 가해 왔다.
사령관이 죽은 마당에 이들에게는 더 이상 기함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함을 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붉은 색 휘장을 둘러치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왜군의 기함은 순식간에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붉은 색 휘장과 붉은 색 일산은 마지막 빛을 토해냈고, 마치 대형의 깃발처럼 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이것이 ‘일산을 쓰고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던’ 왜장과 그 기함의 최후였다.
왜군 기함이 최후를 맞고 있을 때 나머지 왜선들도 또 다른 거북선과 판옥선단에 의해 기함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왜군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마땅히 숨을 곳도 없었다. 정면의 판옥선을 피해 선미(船尾)로 도망치면 거북선이 직충전을 감행하며 들이닥쳤고, 부딪히는 순간에는 지진이라도 난 듯이 선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거북선에 들이받친 부분은 크게 부서졌다. 그리고 그 부서진 틈새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콩알만 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이쪽저쪽으로 피해 봤찌만 또 다른 거북선이 다가와 용머리 포탑과 2층 총좌에서 근접사격을 가해 왔다. 그 다음 옆으로 빙그르 돌면서 측면의 포문들을 열었고, 그 속에서 대포들이 불꽃과 포연을 일제히 내뿜었다. 거북선에 탑재된 20~30문의 대포들이 총동원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선으로부터 한 차례 충돌과 몇 차례의 대포 공격을 받자 왜군 함대의 층루선들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급격히 불타고 침수되기 시작했다.
격군들과 배 안으로 숨어들었던 왜군들은 물귀신을 면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앞을 다퉈 갑판 위로 몰려 나왔다. 그러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거북선 등 쪽의 3층 창문이 열렸고, 소·중형 승자총통에서 산탄형 철탄과 피령전들이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그리고 거북선 등에 있는 창문이 열리면서 중·대형 발화탄들이 불꽃을 튀기며 왜선 갑판 위로 떨어졌다. 왜선에 투척된 발화탄들은 커다란 폭음과 함께 주위에 있는 것들을 가차없이 날려버렸다. 위치상 거북선의 3층 총좌는 층루선의 선상보다 높았고, 거북선에서는 내려다보고 쏘았기 때문에 명중률도 높았다.
거북선의 공격은 미리 짜놓은 각본에 의한 것처럼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공격을 받은 층루선들은 어떤 형태의 구조이든, 2층이든 3층이든,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불에 타 전소되었다.
한편, 분탕질을 나갔다가 가메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왜군들은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는 병선을 타고 조선 함대와의 접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공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거북선 1척이 뒤편(육지 쪽)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왜군들은 사색이 되어 몸을 떨었다.
바다로 뛰어들 작정으로 왜군들은 격군들까지 노를 버리고 갑판위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또 다른 거북선들과 수십 척의 판옥선들이 해상을 완전히 장악하고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료들을 향해 화살을 빗발치듯 쏟아 붓고 있었다. 때문에 바다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특히 조선 함대 수병들이 쏘아대는 편전(片箭)과 조선 활은 사거리와 관통력에 있어서 자신들의 활(대궁)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위력적이었다. 근거리에서 날아온 활은 갑옷은 물론 투구까지 꿰뚫을 정도였기 때문에 조선의 활은 조선제 대포와 각종 살탄형 무기류들과 함께 왜군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군들은 초전에 사령부를 잃고 유일한 퇴로마저 봉쇄당하자 더욱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왜군 단위대장들 중에는 ‘이렇게 된 이상 저놈의 괴물만이라도 요절을 내놓고 말 테다!’ 라는 심정으로 결사항전을 결심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돌진해 오는 거북선을 노려보며 “전원 사격!” 을 명령했고, 왜군 조총수들은 대장들의 명령에 따라 거북선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땡그랑!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은 튕겨져 나갔고 앞쪽 나무판자에도 무수히 많은 탄환을 날려보냈지만 거북선은 코끼리가 벌에 쏘인 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무의 두께가 5cm만 되어도 조총탄으로는 판자를 뚫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거북선 선수 쪽 판자의 두께는 무려 15cm나 되었으므로 왜군 조총수들의 사격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괴물의 눈을 찾아라! 눈을 공격해라!”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왜장 하나가 괴물의 눈을 찾아 공격하라고 부르짖었다.
눈이란 지휘관이 타고 있는 함교를 말한다. 옛 해전에서 함교는 최우선의 공격목표였다. 그런데 왜군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북선의 함교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지 못했다.
거북선은 적이 함교의 위치를 알아보기 어렵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거북선을 가리켜 ‘저놈의 소경배!’ 라고 불렀다.
거북선은 자신의 약점은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적의 약점을 철저하게 공략했고, 그것이 조선 함대가 해전 초기부터 시종일관 전세를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거북선은 다양한 공격전술을 구사하며 적진을 유린했다. 그리고 적의 기선을 제압했다. 또 해전을 조기에 종결짓는 역할까지 도맡으면서 이순신이 의도한 ‘다기능 전략무기’ 로서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왜군 함대로서도 해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조선 함대의 기함을 최우선적으로 공격해야 했지만 번번이 거북선의 선제공격에 막혀 기선을 제압당했고, 거북선의 맹공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상황에서 조선 함대의 특공선단과 본대는 마치 사격연습을 하듯 왜선단을 두들겼다.
아무튼 당포의 왜군들도 거북선의 함교를 찾아 회심의 일격을 가하고자 했지만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용머리 부분? 그 아래쪽? 2층 선수 쪽? 거북 등의 꼭대기?’
따지고 따져 봤지만 역시 수수께끼였다.
괴물과 싸울 때는 눈을 공격하는 것이 이치라지만 아무래도 이 괴물에게는 급소가 없는 것 같았다.
왜군들은 거북선 등과 3층 선실(총좌가 있는 곳)에 있는 군사들을 조총으로 공격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거북선의 등은 거적으로 덮여 있어서 거북선 총좌에 붙어 있는 것이 사람인지 허수아비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 함대 수병들은 화살이나 동시다발형 피령전을 쏘고는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창문을 열고 다시 쏘고 또 닫았다. 때문에 조총으로는 거북선의 수병들을 조준하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왜군들은 이를 갈며 분개했지만 홍두깨만한 살탄들이 근접한 거리에서 날아와 세워 둔 이동식 방패를 맞췄다. 그 충격으로 방패 뒤에 피해 있던 왜군들은 즉사하거나 실신했다.
노라도 부러뜨려 괴물의 움직임을 묶어놓고자 했지만 거북선의 경우는 6~7명이 젓는 대형의 노였기에 부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1인용 노인 자기들 쪽 노가 “우지끈!” 하고 부러져 나갔다.
거북선의 뒤쪽으로 접근해 보려고도 했지만 6개의 총포 구멍으로 산탄형 탄환과 동시다발형 피령전들이 접근을 원천 봉쇄하고 있었다.
거북선의 등위로 올라가려는 생각도 했지만 비록 산탄과 피령전의 공격을 피해 그곳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사타구니는 끝장이 날 것 같았다.
선수 쪽으로의 접근은 더욱 위험했다. 용머리 포탑을 포함한 선수 측의 화력도 위력적이었지만 직충전(直衝戰)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거북선의 선수 아래쪽은 직경이 70cm가 넘는 통나무 구조에다 밑변이 각각 2미터, 높이도 2m는 족히 되어 보임직한 큰 삼각 구조의 돌기(도깨비 머리)가 뾰족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그 돌기 끝에는 무쇠돌기가 박혀 있었는데, 그것은 충돌 전용 돌기였다.
왜군들의 항전은 단 몇 분 사이에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다. 그들에게는 이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짐이었다.
불타고 있는 기함 위로 올라탄 몇몇 조선 군사들이 왜장 가메이의 목을 베기 위해 왜장의 시체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왜군 단위대장들에게도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했다. 이제 죽든 살든 육지로 기어올라 조선 함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었다. 당포해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약 20~30분. 역시 속공 속전이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중위장 권준이 돌격해 들어가 왜장을 쏘아 맞추매 활 시윗 소리에 응하여 거꾸로 떨어지자 사도첨사 김완의 군관 흥양 고을 보인 진무성이 목을 베어 왔습니다. 남은 적도들은 겁이 나서 도망가며 탄환과 화살을 맞은 자들이 여기저기에 자빠졌습니다.
이 장계를 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양측의 총포 소리가 당포항 뒷산 암벽에 부딪혀 울려 퍼졌을 것이므로 현장은 굉장히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화살로써 왜장을 쏘아 맞추었다면 권준의 배는 화살의 사정거리까지 들어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화살 시윗 소리가 이순신의 기함에까지 들릴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같은 의문은 당일에 기록된 《난중일기》를 보면 풀린다.
※《난중일기》 1592년 6월 2일 ※
맑다. 아침에 떠나서… 큰 배 1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한데, 누각을 꾸며서 높이가 두 길이나 됨직하고 누각 위에는 왜장이 높이 앉아 끄덕도 아니 한다. 편전과 대 · 중형 승자총통들을 비 퍼붓듯 마구 쏘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고, 여러 왜군들은 놀라 흐트러진다. 우리 편 장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을 맞아 거꾸러지는 자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모조리 섬멸시켰다.
권준에 대한 언급이 없고 왜장이 맞은 것도 편전과 실탄 등 여러 종류로 기록되어 있다.
사천포 해전 때는 갯벌 때문에 거북선은 기대했던 전술을 모두 구사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기함이 왜군의 조총 유효사거리까지 접근하면서 이순신과 그의 참모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당포해전 때는 바다가 깊어서 거북선은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었고, 왜군측이 극도로 혼란해진 틈을 타서 마치 《삼국지》의 조자룡이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들 듯 순천부사 권준이 특공조의 판옥선을 타고 모험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해전을 치렀지만 아직까지 적장을 베거나 사로잡은 경우는 없었다. 전라좌수영 수뇌부들에게는 그 점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해전을 앞두고는 거기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특공 판옥선단의 방탄을 강화시키고 왜장이 죽고 나면 대기하고 있던 군관들이 왜장의 목을 베어 온다는 계획이었다. 그 사이 거북선과 특공 판옥선단은 왜장의 시체를 거두고자 하는 왜군 친위대를 합동으로 견제해서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거북선이 왜군 호위함대와의 접전을 개시했고, 이 틈에 순천 기지 소속의 거북선이 왜군 기함의 층각을 파괴했다. 거북선과 판옥선단의 집중사격을 받은 왜장은 곧장 층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왜장의 숨통을 끊은 결정적인 무기는 살탄류였다.
‘순천’ 이라는 고을 이름이 새겨진 살탄은 왜장의 갑옷과 흉부를 동시에 꿰뚫었다.
왜군 친위대는 왜장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분전했지만 거북선과 특공 판옥선단의 협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장선이 불길에 휩싸이기 직전 김완의 배가 기함에 다가갔다. 그리고 김완의 보인(保人:징병 나간 집에 농사를 지어주는 것으로 군대의 의무를 대신했던 신분. 전투에 참가한 것을 보면 지원한 것이다) 진무성이 다람쥐같이 올라가 왜장의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 고을의 공은 고을 대장의 이름으로 보고 되는 것이 통례였다. 중위장 권준은 그의 부하 가운데 억센 군졸과 격군들을 뽑아 거북선에 승선시켰고, 그들에게 임무에 차질이 없도록 각별히 일러두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권준이 중위장으로서 작전을 잘 풀어나갔고, 그 결과 임진왜란 수륙전을 통해 처음으로 왜장의 수급을 벤 것이라 감회도 컸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시윗 소리에 응하여’ 라고 신명나게 기록해 둔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날 당포에서 접전할 때 우후 이몽구가 왜장선에서 찾아 낸 금부채 한 자루를 신에게 보냈는데, 부채 한 쪽 바닥 가운데 쓰기를 ‘6월 8일 수길(秀吉)’ 이라 서명했고, 오른쪽에는 우시축전수 다섯 자를 썼으며, 왼쪽에는 ‘구정유구수전 (가메이 코레노리를 이름)’ 여섯 자를 썼습니다. 옻칠한 갑 속에 간직한 품이 응당 평수길이가 왜장에게 신표로 보낸 것일 것이오며, 소비포 군관 이영남이 그 왜장의 배에서 울산의 사삿집(개인집) 여종이었던 억대와 거제도 출신 계집아이 모리 등을 도로 찾아왔는데, 신이 직접 문초를 하였습니다.
억대가 증언해 말하기를, “날짜는 기억이 안 되나 한 보름 전에 적에게 붙들려 왜장(가메이 코레노리)에게 시집가게 되어 늘 한 곳에서 지냈는데, 왜장은 키가 남보다 크고 힘이 세며 나이는 30세쯤 되고, 낮에는 배 위 층각에 높이 앉아 누런 비단옷을 입고 금관을 썼으며, 밤에는 들어와 자는데 금침과 자리가 모두 사치하고 각 배의 여러 왜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찾아와서 머리를 숙여 명령을 들으며 명령을 어기면 용서 없이 죽이고, 때로는 술을 가져다 바치고 웃고 지껄이나 오랑캐의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다만 울산이니 동래니 전라도니 하는 말은 우리나라 말과 같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접전할 때 왜장이 앉아 있는 층각배에 화살과 탄환이 퍼부어져 처음에 이마를 맞았으나 얼굴빛이 태연하더니 화살이 가슴을 꿰뚫자 소리를 지르며 떨어졌습니다.” 고 하였사온데…
이순신은 왜장을 잡은 특공작전을 설명하면서 억대 여인의 증언도 이어서 기록해 놓았다.
경상우수영 소속 소비포 기지대장인 권관 이영남이 왜군들에게 붙잡혀 있던 조선 여인들을 되찾아 왔다. 이영남 장군은 늘 협선을 타고 전투에 임했는데 그날도 협선을 타고 불타는 왜선에 올라 왜장의 여인이 된 억대와 모리를 되찾아 왔다.
억대는 왜장의 여자가 되었으므로 옥포해전 때 되찾은 윤백련처럼 왜국식 머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윤백련을 통해서 왜군 측의 상황을 입수했던 것처럼 억대를 통해서도 다양한 정보를 입수했다. ‘전라도니 하는 말’ 등에서 왜군들이 전라도 공략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밖에 왜장과 왜군들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조정에 보고했다.
왜장 가메이의 나이는 30세였다. 전리품이 된 그의 금부채에는 히데요시가 ‘전쟁이 끝나면 오키나와의 영주로 봉할 것’ 을 약속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을 만큼 신분이 높은 무장이었다.
그의 선상생활은 대단히 호화스러웠다. 층각에는 붉은 일산을 쳤고, 선체에도 붉은 천에 황금색으로 ‘黃’ 자를 썼으며, 거기에 황금색 비단옷과 금관까지 썼던 것을 보면 ‘미래형 오끼나와의 왕’ 과 같은 권위와 위세를 과시했음을 알 수 있다.
가메이는 그날 해전에서도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며 자신이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일산 아래에 태연히 앉아있었다. 그는 훤히 드러나 보이는 누상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비 오듯 퍼붓는 편전과 화살, 그리고 각종 탄환을 뒤집어썼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특유의 무사 정신으로 계속 버텼지만 화살탄을 맞고서는 층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마를 맞고도 바로 죽지 않았던 것은 쓰고 있던 투구의 방탄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살탄은 갑옷과 흉부를 동시에 꿰뚫었고, 층각 맨 위에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떨어질 때의 충격도 치명적이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적의 수급 여섯을 베고 배를 모조리 불태운 뒤에 모든 병선의 용사들로 하여금 그대로 육지로 따라 올라 추격에 나서서 목을 베게 하려던 차에, 또 왜의 큰 배 20여 척이 작은 배를 많이 거느리고 거제도로부터 와 닿고 있다고 탐색선이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당포항은 지형이 좁기 때문에 접전하기가 마땅치 않으므로 바깥 바다로 유인해서 쳐부수고자 노를 재촉하여 바다로 나온 즉, 5리쯤 되는 바다에서 적선들이 우리를 보고 도망가기에 정신이 없는데 여러 전선들이 바깥 바다로 뒤쫓아 갔으나 날이 이미 어두워져 접전할 수 없어…
그 큰 해전을 치르고서도 적의 머리를 벤 것은 모두 6개에 불과했다. 왜장의 머리를 베고서 곧바로 물러나왔기 때문인데, 이유는 좁은 당포항이 온통 불바다가 된 데다가 왜선에 있던 조총용 화약단지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함대 측은 특공선단의 일부 병력만이 왜선 가까이 접근해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이 거북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병력이 목을 베러 다닐 수도 없었다. 또 이순신이 수급 베기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던 것도 이유였다.
일반 병선들도 불바다가 된 좁은 당포항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 증명된다. 들어갔다면 수급이 6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해전이 끝난 후에라도 수급을 벨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에 빠진 시체(더군다나 무거운 갑옷을 입은 시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면으로 떠오른다. 기동력을 생명으로 했던 이순신 함대로서는 적의 수급을 베기 위해 장시간 머무를 이유가 없었고, 그것은 이순신의 수군 전략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한편, 좁은 포구가 온통 불바다가 된 탓에 미끼 배도 남겨 두지 않았다.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육지로 도망치는 적은 역시 뒤쫓지 않았다.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때마침 또 다른 왜군 함대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함대는 즉시 외항(쑥섬 부근)으로 나왔다.
만약 머물러 있었다면 조선 함대는 오밀조밀하게 몰리게 되는 반면, 왜군 측은 자연스레 포위 대형을 형성하게 되어 조선 함대는 지리와 진법에서 불리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외항 쪽은 바다가 넓기 때문에 전 함대를 학익진 대형으로 펼치기가 용이했다. 그렇게 학익진으로 대치한 상태에서 적 함대를 당포항 쪽으로 몰아넣고 차츰 조여 가면서 일시집중타와 거북선의 돌격전을 감행한다면 손쉽게 승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전을 펴기에는 장군봉 앞은 확실히 바다가 좁았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해 둘 것은, 새로운 왜군 함대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이순신은 육지로 도망치는 왜군들을 결코 뒤쫓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포항은 가파른 바위산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도 있었다. 미륵도 역시 대단히 큰 섬이라 왜군이 쉽게 잡힐 리도 만무했으며, 거기에 분탕질을 나갔던 왜군 단위부대들이 돌아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패잔병을 추격하는 일이라고는 해도 큰 위험이 따르는 작전이었으므로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절대 추격할 의사가 없었다.
당포항 쪽으로 접근해 오던 왜군 함대는 당포 하늘이 연기로 가득한 것을 보고는 왜군 함대가 노략질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당연히 이기는 해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포항을 빠져 나오고 있었던 것은 황포돛의 조선 함대였고, 이를 본 왜군 함대는 가메이 함대가 전멸당한 것으로 짐작하고 황급히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선 함대는 즉각 추격에 나섰지만 날로 저물었고, 군사들은 사량도에서 당포까지 노저어 이동해온 데다가 방금 전에야 해전을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추격을 단념하고 적의 섬멸을 미뤄 두게 된다.
한편, 포구로 돌아온 왜군들은 불탄 함대와 사령관의 죽음, 그리고 동료들의 죽음에 망연자실했다. 또 되돌아갈 일도 아득했다.
지금은 미륵도와 통영시 사이에 다리가 놓여 있지만 옛날에는 배없이는 들어가지 못했던 섬이다. 왜군 패잔병들이 나무를 베어 뗏목을 엮은 후 야밤에 몰래 해협을 건너 육지 쪽으로 간다고 해도 돌아갈 육로는 멀고 험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왜군 기동함대가 사라졌고, 나고야 사령부의 특명으로 추진된 남해안의 왜성 쌓기 작업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무렵 한성 수복을 위해 용인까지 진출한 전라감사 이광의 조선 근왕군 5만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왜군에 대패하여(6월 3일)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조선과 일본은 서로에게 바다와 육지에서 1승 1패씩을 주고받은 셈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수륙의 승장들은 한 달 후 한산도 앞바다에서 진정한 승자의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 당항포 해전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날도 이미 저물어서 접전할 수 없었기에 진주 땅 창신도 창신항에 머무르며 밤을 지냈습니다. 3일은 새벽에 출발해서 추도로 향했습니다. 그 근처 섬을 협공하고 수색했으나 적의 자취는 없었으며, 날이 저물어 가므로 고성 땅 고둔포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당포해전을 끝내고는 창신도까지 물러 나왔다. 지도를 보면 20km나 서쪽으로 후퇴해 나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저녁 때 놓친 왜군 함대가 혹시 한밤중에 기습해 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튿날은 다시 당포 부근에 있는 추도(당포 남쪽 8km 지점에 위치)를 수색했고, 다시 그 부근에서 밤을 지냈다. 역시 동쪽으로 진격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4일은 이른 아침에 당포 앞바다에 나가 적선을 망보라고 했더니 10시쯤에 당포에 사는 토병(土兵) 강탁이란 사람이 피난하여 산으로 올라갔다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고는 줄거이와서 말하기를, “2일 당포 접전 뒤에 왜인들이 죽은 왜인의 머리를 많이 베어 한 군데 모아 불사르고 그 길로 육로로 향하면서 길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도 죽일 생각도 못하고 슬피 울면서 돌아가는 것이었으며, 그날 당포 바깥 바다로 쫓겨난 왜군 함대는(6월 2일 당포해전이 끝날 무렵 출현한 왜군 함대) 거제도로 향하더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장병들과 약속을 거듭 밝히고(사전에 협의한 작전대로 임할 것을 지시한 듯) 막 함대가 출항하려 할 때…
6월 4일, 조선 함대가 다시 당포항에 왔을 때 한 사나이가 반갑게 소리치면서 포구 쪽으로 뛰쳐나왔다. 강탁이라는 그 지역 토병이었다. 강탁의 증언에 의하면, 왜군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모아 모두 화장해 주었다고 한다. 이는 목 잘린 귀신, 귀 잘린 귀신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조선군 측에서 왜군의 왼쪽 귀를 잘라 소금에 절이고 그것을 조정에 올려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왜군들에게 죽은 자들은 전우이기도 했지만 같은 영지 출신이었기에 가까운 친척이나 심지어는 부모 형제들도 섞여 있었다. 특히 죽은 왜장은 영주의 신분이었고, 왜군들은 모두 왜장이 다스리는 영지의 백성들이었다. 왜장 가메이의 죽음은 말하자면 소왕국의 왕을 잃은 사건이었으며, 그 왕의 머리마저 빼앗겼으니 그들로서는 분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그래서 슬피 울며 되돌아갔고, 슬픔이 너무 커서 조선 사람을 만나도 해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패잔병의 처지이다 보니 겁도 났을 것이다.
패잔병이 되면 어느 나라 군대를 막론하고 겁쟁이가 된다. 그래서 당포의 왜군 패잔병들은 민간인을 보고도 놀라서 숨곤 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와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전선의 장병들이 외로운 것을 항상 근심해 왔고, 연속되는 전투로 바야흐로 피곤해질 무렵에 있었던지라 후원하는 부대가 오는 것을 보고 춤추고 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6월 4일. ‘거제도로 향했다’ 는 왜군 함대를 치기 위해 출격하려는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함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우수영 함대가 출동을 위해 소요한 시일은 당시 조선 수군들의 일반적인 출동 역량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이순신이 1차 출동 때 4월 20일부터 4월 29일까지 출동 준비를 완료하고 출동한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이억기 함대의 합류로 좌수영 함대의 사기는 충천했고, 조선 함대 병사들은 군악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우수영 함대의 합류를 반겼다.
이순신이 달아난 왜군 함대를 쫓아 동진(東進)을 하지 않고 당포 부근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억기 함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처음 길을 오는 이억기 함대가 기습당하지 않도록 수색전도 펴고 있었던 것이다.
추도는 이억기 함대가 오는 길목이었으며, 왜군 기동함대가 복병하고 있을 우려가 높은 지역이었다.
1차 출동 때 이순신은 원균 수사에게 수로 안내인을 보내 달라고 했으나 원균은 아무도 보내주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이순신 함대는 무척 애를 먹은 경험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세한 해도(海圖)가 없었고, 남해의 다도해는 평상시에도 조류와 암초, 그리고 바람의 움직임이 복잡해서 구역별로 수로 안내인이 필요했다.
전쟁 중이라 적의 기동함대가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때문에 낯선 해로를 따라 첫 출동을 하는 이억기 함대가 무사히 이동해 올 수 있도록 해로를 안내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날의 원균 수사는 수로 안내를 해주지 않고 숨어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 함대는 소비포 쪽으로 갔다가 당포로 왔던 것이다.
이순신이 머뭇거리지 않고 단독으로 동쪽으로 이동했다면 또 한 번의 승리를 쟁취할 수도 있었지만, 이억기 함대는 낭패를 당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음은 《이충무공행록》(충무공의 조카 이분 저)에서 인용한 것인데, 전라좌수영 함대와 전라우수영 함대가 1592년 6월 4일 당포에서 합류할 때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 이충무공행록 》
6월 초나흘에 당포 앞바다로 나가 진을 쳤는데, 마침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서 돛을 달고 군악을 울리며 왔다. 모든 배의 장병들이 연달아 싸워 피곤해진 때라 구원병이 오는 것을 보고 모두들 기운을 돋구는 것이었다. 공은 이억기를 바라보며 “왜적의 형세가 한창 벌어져 국가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는데, 영감은 어찌 이리 늦게 오시오.” 하였다.
‘군악을 울리며 왔다’ 고 했다. 당시 악기는 판옥선마다 갖추고 있었고, 이들 악기는 출항 전날의 전야제, 출항 때의 출항식, 항해 때, 전투 직전, 전투 때, 승선 후 함장과 병사들의 축하연, 귀항 때 가족과의 상봉시 두루 이용되었다.
또 해전 때에는 단위 함대별로 나뉘어져서 군악에 맞춰 왜군 함대를 공격했기 때문에 군함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순신이 이억기를 만났을 때 “영감은 왜 이리 늦소!” 라고 했는데, 이는 반가움과 원망이 섞인 말이었다(이때 이순신은 부상을 입은 몸이었다). 아무튼 이때부터 이억기 함대는 이순신 함대와 연합해 해전을 치렀다.
이억기가 이끌고 온 함대는 전선(판옥선)만 25척이었다. 여기에 협선과 포작선들도 약 50여 척 정도가 뒤따랐을 것이므로 병력은 5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렇게 연합한 조선 함대는 판옥선 50여 척, 보조선 100여 척, 총병력 1만의 수준으로 대폭 증강되었다. 게다가 거북선도 2~3척 정도가 가세하면서 지구촌 최강의 함대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조선 함대의 전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급신장되었고, 수병들은 자신감과 노련미를 더해 갔다. 반면에 왜군 측은 병선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수병들은 싸울 때마다 매번 신병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또 계속된 패배로 조선 함대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개전 1개월 만에 드러나기 시작한 양국 수군력의 격차였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 수군이 원래 약했지만 이순신의 뛰어난 지도력과 그 어떤 신비한 힘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 거나 “왜군들은 육군에 비해 수군의 전력이 약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는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해 온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이 지금까지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였고, 그것이 임진왜란사와 이순신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어렵게 해왔음을 유념하자.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신은 이억기 수사와 함께 적을 쳐부술 방책을 의논하고, 날이 저물어가므로 함께 떠나 거제와 고성 사이의 경계인 착량 앞바다에 와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5일 아침은 안개가 사방에 짙게 끼었다가 늦게서야 걷혔기에 거제도로 도망간 적을 토벌하러 돛을 올리고 바다로 나올 무렵 거제에 사는 귀화인 김모 등 7, 8명이 각기 작은 배를 타고 와서 기뻐하며 마중하여 말하기를, “당포에서 쫓긴 왜선이 거제를 지나 고성 땅 당항포(회화면 당항리)에 옮겨와 대었다.” 고 하므로 노를 재촉하여 그 포구 앞바다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동쪽(동북쪽이 다소 잘못 기술된 듯) 진해 쪽을 바라보니 성밖 몇리쯤 되는 곳에 군병 천여 명이 깃발을 세우고 진을 치고 있기로 사람을 시켜 물어보니, 함안군수 유숭인이 기병 1,100명을 거느리고 적을 쫓아서 이곳에이르렀다고 하옵니다.
이억기와 그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전개해 나갈 합동작전을 의논하면서 착량(충무와 미륵도 사이의 해협. 지금 육교가 있는 곳)으로 함대를 옮겨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짙게 드리운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제도 백성 김모 등이 달려와 적 함대의 소재를 알려 왔다.
앞에서 이순신과 백성들 간의 긴밀한 정보 협조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날 김모 일행도 ‘이순신 장군에게 알린다면 반드시 이기게 되리라’ 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고, 이순신도 애쓴 공로를 치하하며 그들에게 양식을 나눠 주었을 것이다.
지도를 보면 당항포는 큰 바다에서 길게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 왜군 함대는 그곳에 숨어 있었다.
진해성(지금의 진동리) 부근에 함안군수의 육군부대가 있었다. 함안군수 유숭인은 그후 경상우병마사가 되었고, 그해 10월 왜군의 진주성 공격이 있을 때까지 함안군 일대에서 왜군들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다가 전사했다. 장계의 기록을 보면, 유숭인의 분전 상황과 이 무렵까지 조선 육군이 진주성과 함안군 일대를 잘 지키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함안군은 잘 지켜지고 있었고, 다도해를 접하고 있었기에 해안선도 대단히 복잡했다. 그래서 사천포와 당포의 왜군 패잔병들은 돌아갈 때 많은 고생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통스런 패잔병 생활을 겪고 나면 그 후유증은 오래 남는다. 어느 나라 군대든지 패전의 상처가 깊을수록 다시 전투에 나가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장에 재배치되더라도 전투역량을 100% 발휘하기도 어렵다. 왜군 패잔병들 역시 그랬고, 때문에 밀항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 숨어 지낸 경우도 많았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이어 당항포 어귀의 지형을 물어본즉, 거리는 10여 리 정도로 넓어서 배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기에 먼저 전선 몇 척을 보내어 지리를 살피게 하되, 적이 만일 뒤쫓아 오거든 짐짓 물러나면서 유인해 오도록 엄하게 지시해서 보냈으며, 신등의 우리수군은 몰래 잠복해 있으면서 무찌를 계획을 세웠습니다.
보냈던 전선들이 곧 바다 어귀로 돌아와서 신기전을 쏘면서 왜적이 있음을 알리며 속히 오라고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선 4척을 바다 어귀에 매복시켜 두고 노를 재촉하여 들어간즉, 양편 산기슭이 강을 끼고 20여 리인데 그 사이의 지형이 그리 좁지 않아 싸울 수 있는지라 여러 배들이 일렬로 일제히 나아가 머리와 꼬리를 서로 이어 소소강 서쪽 기슭에 이르러 본즉 왜군 함대가 있었는데…
당항포 부근의 지형이 복잡해서 사전에 지형을 분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함대의 규모가 150여 척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해전을 위해서는 대규모 함대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또 암초나 조수의 사정, 그리고 갯벌이 되는 지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조선 함대가 지형 조사를 하면서 유인전을 병행하고 있을 무렵, 현장을 정탐한 탐색 선단이 ‘적을 발견했다’ 는 신호로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이순신은 4척의 판옥선과 그에 소속된 중·소형 선단을 포구 입구쪽에 매복시켜 외부에서 접근해 오는 왜군 함대에게 우군 함대가 갇히지 않도록 경계를 서게 했다. 그리고 본대는 수초 사이를 누비는 고기떼처럼 종으로 늘어서서 ‘소소강 서쪽 기슭에 이르러’ 라고 한바, ‘소소강’ 은 실제로 있는 강이 아니라, 바다 어귀에서 당항포까지 이르는 좁은 바다가 마치 소리쳐 부르면 맞은편에서 들릴 정도로 좁은 강처럼 길게 생겼기에, 당시에는 이곳을 ‘소소강’ 이라 불렀다. 아무튼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군 함대가 있었던 곳은 오늘의 당항포 쪽이 아니라 좀더 서쪽에 있는 두호리 쪽이 된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검은 칠을 한 왜선으로 크기가 판옥선만한 것이 9척, 중간 4척, 작은 배 13척이 해안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배 하나는 뱃머리에 따로 판자로 된 3층 누각을 설치했는데 단청을 칠하고 회벽을 칠한 것이 마치 절간 같았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우고 누각 아래는 검은 비단 휘장을 둘렀는데 그 휘장에는 흰 꽃무늬를 크게 그리고 휘장 안에는 왜인들이 많이 늘어 서 있었습니다. 또 왜의 큰 배 4척이 포구 안쪽에서 나와 한 곳에 모이는데 모두 검은 깃발을 꽂았으며, 기마다 흰 글씨로 나무묘법연화경이란 일곱 글자를 썼습니다. 우리 군대의 위엄을 보고서 총알을 우박 퍼붓듯 마구 쏘아대는데…
검은빛의 깃발과 선체, 휘장에 흰 글씨와 흰 꽃무늬를 새긴 왜군 기동함대였다.
큰 배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것이 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배는 판옥선보다도 더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층각은 나무판자로 만들었고, 붉은 칠을 했으며, 벽은 흰 회를 발라서 마치 커다란 배 위에 절간 하나가 서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휘장 안에 늘어선 무사들은 기함을 지키는 호위대로 보여진다. 또 밖으로 나오고 있던 큰 배 4척은 함대 호위대 겸 돌격대장들이 타고 있는 층루선들이었다.
‘나무묘법연화경’ 은 일본형 불교 경전의 이름이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여러 전선들은 포위를 하고 먼저 거북선이 돌격해 들어가면서 천자 · 지자 대포를 쏘아 적의 큰 배를 꿰뚫게 하고, 여러 전선들은 번갈아 드나들며 대포와 화살을 폭풍과 천둥치듯 쏘아대면서 잠시 동안 접전이 계속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위엄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총알을 우박 퍼붓듯 마구 쏘아댔다’ 는 것으로 보면 위기감을 느끼고 무차별적으로 위협사격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양측 함대간의 거리도 멀었지만 이순신이 ‘우리 군대의 위엄을 보고…’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순신 역시 위협사격으로 보고 있다.
왜군들은 왠지 겁을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날 도망쳤던 전력과 그동안 숨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4척이 포구의 방파제 밖으로 나와서 위협사격을 해 온 것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러나 신의 생각에 만약에 저 적들이 형세가 궁해서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가 버린다면 모두 섬멸치 못할 것이 염려되어 “우리가 짐짓 군사를 돌려 포위를 풀고 길을 물리는 것을 보이면 저들이 응당 그 틈을 타서 배를 옮길 터이니, 이때 좌우에서 추격하면 거의 모두 섬멸할 것이다. 고 전령한 뒤에 물러나 한 쪽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층각이 있는 왜선이 과연 터놓은 수로를 따라 나오는데 검은 물을 들인 돛을 둘이나 달았으며, 다른 배들도 층각배를 날개처럼 호위하면서 노를 재촉하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함대도 대포로 응사했고, 거북선은 돌진해 들어가 좌우에 탑재된 천자대포와 지자대포로 대장군전과 철탄을 쏘아 먼저 포구 앞을 막아선 4척의 층루선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바다가 얕아서였을까? 아니면 포구의 방파제 때문이었을까? 웬일인지 거북선이 층루선과 충돌하거나 접전을 벌이는 장면이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4척의 층루선들이 모두 포구 안쪽에서 나와 한 곳에 모이는데…’ 라는 글귀는 4척이 포구 입구의 수로를 막아선 모습이다.
당시 두호라는 황토흙 지역으로 썰물 때는 갯벌이 수백 미터나 드러났던 곳이다. 갯벌 가운데쯤에 수로가 있었을 것이다. 이 수로를 4척의 층루선이 막아선다면 포구 안에 있는 왜선들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거북선으로 하여금 이들 층루선들을 깨트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층루선이 그 자리에서 가라앉게 되면 수로가 아주 막혀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층루선들이 선수를 거북선 쪽으로 향하고 있어 충돌전이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거북선은 직충전(直衝戰)을 벌일 때 주로 왜선의 옆구리쪽 선복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그 부분을 공격해야 직충의 효과가 컸다. 더구나 적선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으므로 그곳으로 들어간다면 거북선의 경우라도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면 왜군 측은 육전에서 성벽을 기어오르듯 좁은 수로에 들어간 거북선에 총공격을 가해 올 우려도 있다.
아무튼 왜군 측은 절묘한 항만 수비전으로 조선 함대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여러 전선들이 번갈아 드나들며…’ 라는 것은 일부 판옥선들만 수로에서 공격에 나섰고 다른 병선들은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시각을 기록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밀물과 썰물의 형편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얕은 바다였기 때문에 판옥선 같은 큰 배 50여 척이 해전을 벌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왜군들이 싸움을 포기하고 육지로 도망쳐버린다면 아쉬움이 남는 승리가 될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함대는 우선 후퇴하는 척하면서 포위망을 풀고 물러 나왔다.
‘검은 돛을 두 개나 달았다’ 고 하였는바, 당시 왜선들이 한 개의 돛을 달았던 통례로 볼 때 선체가 유별나게 컸던 것 같다. 또 해전 때는 화공(火攻)을 염려해서 돛을 내리는 것이 상식이지만 돛을 달고 나온 것을 보면 처음부터 달아날 의도였던 것 같다.
그러면 조선 함대는 얼마나 어떻게 물러 나왔을까?
당항포 앞바다의 폭은 1.5km가 넘는 곳이 별로 없다. 그리고 물러난 함대가 모두 성산 쪽으로만 향한다면 조선 함대 쪽이 오밀조밀 몰리는 대형이 되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게 볼 때 이순신 함대는 바다 입구 쪽으로, 이억기 함대는 성산 쪽으로 물러났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두 함대가 바다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가 이순신 함대가 왜선단의 정면을 막고 공격을 시작하자 이억기 함대가 왜선단의 뒤로 돌아 포위해서 왜군들이 육지 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을 수도 있다.
왜군 함대가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수적 열세에 몰려 있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조선 함대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지난 5월 옥포, 적진포, 합포에서 당한 왜 함대의 패전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들도 한성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서진(西進)에 나섰고, 마침 당포항으로 접근해 들어가던 중 가메이 함대의 패전 현장을 목격했다.
그리고는 그 길로 도망쳐 이곳까지 온 것인데 행여 들키지나 않을까 고민한 끝에 찾고 찾은 곳이 지형이 복잡한 당항포였다.
왜장은 처음부터 전면전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수비전으로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땐 육지로 도망치겠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경우였다.
당항포 인근 지역은 아직 조선 육군들이 활동하고 있었기에 육로보다는 아무래도 해상 탈출이 안전했다. 그래서 왜장은 조총수들을 동원해서 무차별 사격을 지시했고, 조선 함대가 총 소리에 놀라 피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늘이 굽어살폈음인지 조선 함대가 외항 쪽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구나’ 라고 생각한 왜장은 조선 함대가 퇴각하는 것과 동시에 전 함대에 탈출을 명령했다.
왜군 함대의 탈출작전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함대가 자리를 완전히 뜨기도 전에 시도한 탈출이었던 것을 보면 왜군들의 심정이 그만큼 절박했었음을 알 수 있다.
왜장은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각오하고 있었고, 그 방법만이 전멸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놓치면 썰물 때가 됐음을 완전히 갇히게 되고, 그때 조선 함대가 혹시라도 조선 육군과 연계해서 협공을 해온다면 헤쳐 나갈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젓기 방식을 겸했던 옛 해전에서는 돛을 올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에는 돛을 올리기도 했다. 조선 함대 쪽도 이러한 이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군들이 돛을 올리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이순신도 그 장면을 상당히 인상적으로 본 듯하다. 그래서 ‘돛을 둘이나 달았으며…’ 라고 특별히 기록해 두었다.
당시 일본 병선의 돛은 ‘외돛이었다’ 는 것이 해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쌍돛을 단 왜선도 있었음을 밝혀 놓았다.
왜군 함대는 넓은 바다에서 조선 함대가 기함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새의 날개 진형’ 을 갖추고 두호리를 빠져 나왔다. 이 진형은 탈출을 목적으로 한 ‘혈로 돌파형 진법’ 이다.
그렇게 탈출을 시도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방이 육지였던 점을 감안, 재빨리 육지에 배를 대고 산으로 도망갈 요량이었다.
이렇게 요행도 바라는 심정으로 왜군 함대는 일제히 탈출을 시도했다. 또 새의 날개형 진을 치고 기함을 호위하면서 나왔기 때문에 왜장과 기함만은 쉽게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군 함대가 당항리 앞바다에 이르자 두호리 쪽의 퇴로가 1~2척의 거북선과 몇 척의 판옥선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리고는 물러가고 있던 조선 함대도 빠른 속도로 군악을 울리며 되돌아오고 있었으며, 일부는 왜선단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속았다!”
구사일생의 심정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왜군들은 순간 적의 유인술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왜군 함대는 전방에서 조여 오는 대형 함대와 맞서는 상황에 직면했다. 해상 탈출이 어렵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 왜군들은 황급히 육지 쪽으로의 탈출을 도모하고자 했지만 어느 새 양옆도 포위망이 형성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해전사 중에서 조선함대가 처음으로 선보인 사방포위진형, 이른바 ‘쌍학익진(雙鶴翼陣)’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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