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도의 면담한 한신 (예)대장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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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부하에게 시켜선 안된다" "내가 뇌물을 받으면 가족도 썩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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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호 月刊朝鮮 韓信 예비역 육군대장 ‘군율의 화신’ ‘결백의 표본’ 등 수많은 별명과 일화를 지니고 원리원칙대로 사는 예비역 육군대장. 그는 왜 군인은 정치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난국을 헤쳐나갈 그의 지도자론에 귀를 기울인다. 맨발의 예비역 육군대장 예비역 육군대장 韓信(한신) 장군은 수많은 별명과 그에 따른 더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군율의 화신’, ‘청렴결백의 표본’, ‘강직한 야전지휘관’, ‘常勝(상승)의 백골부대장’, ‘군인 중의 군인’…. 모두 다 찬바람이 돌고 으스스한 것들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 때부터 마음이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말을 잘못했다가 군대식으로 불호령이라도 떨어지는 게 아닌가해서였다. 그러나 그쪽에서 누군가 전화를 받으면서부터 상황은 역전됐다. __한 장군 댁이죠? “예.” __그럼 한 장군 좀 바꿔주시죠. 이 말 한 마디에 상대방 남자는 그만 더듬더듬했다. “…왜, 그 사람을 꼭 바꿔야 하나?” 기자는 더듬거리는 사람이 한 장군인 것 같아 얼른 넘겨짚었다. __아, 한 장군님이시로군요! 그러자 그는 더 더듬었다. “…그, 그런데,…, 누구시오?” 이렇게 시작된 한 장군과의 대화에서, 기자는 안양 교외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인터뷰와는 아무 관계없이 놀러 와도 좋다는 승낙을 얻었다. 그런데도, 그의 아파트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마음이 영 놓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타나는 예비역 육군대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런닝셔츠를 입고 맨발로 기자를 맞았는데,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쓸어 넘긴 것 같았다. 우리는 거실의 날바닥에 철푸덕이 앉아, 그가 냉장고 문을 열고 꺼내온 오이즙을 마시며 인사를 닦았다. 그의 아파트엔 응접세트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부인 김길자 여사가 출타 중이었다. 한 장군은 우리가 왜 마주앉게 됐는가를 격식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명했다. “내가 전화를 잘못 받았소. 난 거짓말을 못하거든. 그래서 첫째, 거기서 ‘한 장군입니까’하고 묻는데 ‘아닙니다’하고 대답을 못했다 이거야. 둘째, 우리 집에 놀러 오겠다는데 어드렇게 오지 말라 하나 이말야. 셋째는, 내가 자네한테 요즘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좀 얻어야겠다 이말야. 그러니 인간탐험과는 관계없이 얘기나 하자우.” 기자는 처음으로 기자를 ‘자네’라고 부르는 자신있는 인물을 만났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기분이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기자는 그의 원칙에 따라서 기자가 가지고 있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반강제적으로(?) 30여 분간이나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진술을 통해 기자를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테스트가 끝나자, 그와 나는 역시 원칙에 따라 ‘탐험’과는 상관없는 얘기로 안타깝게 하루 해를 다 보내야 했다. 마음 속으론 급해 죽겠는데 한가한 표정을 억지로 지어가며 느긋한 얘기를 해야 하다니, 여간 속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모차장 앞에서 발발 떨던 생각 사실 기자에겐 한 장군이 구면이었다. 기자가 육군본부에서 제대 말년에 사병으로 근무할 시절, 한 장군이 참모차장으로 부임해 왔는데, 그날부터 제대 말년을 느긋하게 즐기던 대학생 같은 군대생활은 하루아침에 ‘고로와졌던’ 것이다. 조금도 예외가 없는 철저한 내무반 생활…, 3보 이상 구보, 경례 엄정, 두발__복장 단정…. 이런 지시나 구호들이, 그냥 문서로 하달되고 말로만 외쳐지는 것이 아니라, 높고 높은 참모차장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직접 나타나서 몸소 확인하는 바람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사무실 밖에 나갔다 하면 뛰어야 했으며, 높은 사람을 만났다 하면 경례하느라고 바빴고, 수염이나 머리가 길지 않도록 각별히 마음을 써야 했다. 특히 경례에 관한 한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육본에는 사병은 몹시 귀하고 장교는 무척 흔하다. 그래서 사병이 만나는 장교마다 경례를 할라치면 길을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좀 과장하면 어깻죽지가 빠지도록 경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육본에는 사병들이 대령 이하의 장교에겐 경례를 붙이지 않는 게 관례가 돼 있었다. 그런데 한 장군이 참모차장으로 부임해 오면서 이런 사정이 전연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없이 경례를 하다가 지쳐서, 며칠 뒤엔 아예 밖에 나가기를 꺼려하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식사시간마다 참모차장이 별 세 개를 달고 배식대 앞에 떡하니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밥의 양과 부식의 양이 갑자기 두 배로 불어나서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이 나왔다. 우리는 그때 ‘육군 정량’이 그렇게 많은 것인 줄을 처음 알았다. 한 장군이 참모차장으로 부임하고 나서 또 창군 이래로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대령 이하 전 장사병과 문관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기식 때 연병장에 집합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참모차장이 줄 맞춰 선 장사병 사이를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복장·용모·두발상태 등을 검사했던 것이다. 기자는 그때 차렷자세를 하고 3성 장군이 앞을 지나갈 때 발발 떨던 생각이 아직도 선하다. 그때 한 장군이 어느 대령의 머리칼을 뽑아 자로 직접 재 보고 7센티미터가 넘자, 지휘봉으로 배를 쿡쿡 찌르며 단단히 주의를 줬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그런 무서운 장군이 내 앞에서 맨발로 날바닥에 철푸덕이 앉아 있다니! 그리고 그 장군이 오이즙을 직접 따라 주며 기자와 함께 얘기를 하고 있다니! __참모차장으로 계실 때 그때 참 무서웠습니다. “왜, 자네가 잘못한 게 많았나 보지? 죄 진 사람이나 무섭지, 죄 안 진 사람이 왜 무섭나? 나랑 6개월만 지내면 무서워하는 사람 없어요.” __제가 한 장군께서 참모차장으로 오신 지 1주일 만에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됐는데, 동료들이 ‘군대복 많은 놈은 다르다’면서, 회식을 해주던데요. 이 말이 끝나자 한 장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그러니, 그 부대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말야! 자네 잘못한 게 뭐뭔가?” 이러다가 판이라도 깨어지면 큰일이다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자네 내 신원조사하는 건가”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__‘3보 이상 구보’도 너무 심한 게 아니었나요? “난 그런 거 시킨 적 없어요.” __예? 그렇습니까? “그럼. 난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얘긴 하질 않아요. 내 밑에 있는 사람 가운데 누가 했는지 몰라두, 난 나두 할 수 없는 건 시키지 않아요. 자네 3보 이상 구보할 수 있나 말야. 그거 했다는 사람은 미친놈이고, 제가 했습니다 하면 거짓말이야. 지시는 실행할 수 있는 것만 내려야 돼! 보신탕 먹지 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요. 조상님들 대대로 잡수어 왔고, 또 지금도 먹어서 별 탈이 없는데, 그런데 갑자기 먹지 말라면 지켜집니까? 지금도 먹는 사람 많잖아요.” 이 다음부터 한 장군에 대해 기자가 가지고 있던 상당량의 일반상식은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상식은 확인됐으며, 그보다 적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 탐험됐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탐험’을 거부했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이거요. 책임도 지지 않은 사람이 괜히 이러쿵 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다 이거요. 듣자니까 내 전기를 쓸 모양인데 쓸라면 나 죽은 다음에 쓰시오. 사람은 죽어봐야 알게 되니까.” __죽은 사람은 말이 없잖습니까? “아, 그런가?” 이러한 곡절을 겪으며, 기자가 그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온 ‘성의가’ 인정돼서, 우리는 ‘적법절차에 따라’ 이튿날부터 이틀 동안 10여 시간에 걸친 마라톤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러나 기자가 한 가지 사항을 놓고 꼬치꼬치 캐어 묻자 한 장군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사람 꼭 한국 사람 고등계 형사 같네. 내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귀국할라치면, 부두에 일본 형사하고 한국 형사하고 둘이 나와 있는데 한국 형사가 더 미워! 꼭 자네처럼 꼬치꼬치 캐어 묻는다 말야. 그 옆에서 일본 형사는 빙긋빙긋 웃고 있고. 자네 지금 내 신원조사하는 건가? 나 이런 일 평생 처음 당하네. 이거 전화 한번 잘못 받았다가 큰 욕보잖나 말야.” 집에서 소·돼지 길러 상급학교 진학 한신 장군은 함남 영흥군 진흥면 진흥리 중농의 가정에서 아버지 國燮(국섭)공과 어머니 金大娥(김대아·71년 작고) 여사의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인 열네 살 때 타계해서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가 왜 오늘의 ‘한신 장군’이 됐는가 하는 그 까닭이 제일 먼저 그의 할머니에게서 발견된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보니까 선비처럼 친구들하고 노래나 부르고, 술이나 마시고, 여행이나 댕기고 그런 생활을 하신 것 같애.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할머니가 여장부였어요.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치마만 둘렀다 뿐이지 완전 남자야. 일본 순사들도, 우리 할머니가 막 바른말을 하며 대드니까 꼼짝 못했소. 옳지 않은 일이면 일본 놈이고 뭐고 없었어.” 그 호랑이 할머니한테서, 어린 한신 군은 이렇게 대쪽같이 곧은 정신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정신을 배운다. “우리 집이 거지 집합소이댔어. 거지들이 나가서 얻어먹고 돌아댕기다가 돌아와서 우리 집에서 잤어요. 우리 할머니가 참 강하고 인자한 노친이었소. 올바른 일에 대해선 굽히지 않고, 없는 사람에 대해선 잘 돌봐주고…” 이러한 한씨 집안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한 장군과 그의 부인 김길자 여사를 통해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그의 인격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어머니 김대아 여사였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나하고, 동생(韓徹·71년 작고)하고, 누이동생(韓福順·52)을 기르면서 절대로 누구한테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없도록 가르쳤어요. 교육이 스파르타식으로 아주 엄격했소. 뭘 잘못했다간 호되게 회초리를 맞았지. 아 한번은 어릴 적인데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용강에 가서, 깊은 웅덩이에 뛰어 들어가 멱을 감았거든. 어머니가 거긴 가지 말랬는데 말야. 아 그러다가 그만 어머니한테 들켰어! 집에 붙잡혀 가서 종아릴 되게 맞고도 모자라서 손들고 벌을 섰지 뭐. 그게 아직도 안 잊혀지는군. 또 할머니하고 어머니는 남을 도와주면서도 우리한테는 근검절약해야 한다고 가르쳤소. 또 우리 어머닌 말요, 우리가 부자는 아니었지만 나한텐 궁색하게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난 지금도 돈에 대한 욕심이 없소.” 그는 여덟 살에 고향에 있는 진흥보통학교에 들어가 열네 살에 1등으로 졸업하고 함흥고보로 진학했다. 그 학교가 그가 4학년 때 함남중학으로 교명이 바뀌었다. 그의 집안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았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궁색하지 않게 공부한 건 순전히 어머니의 알뜰한 계획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도야지를 아주 많이 키웠어. 그래 도야지 덕에 중학교에 댕겼지. 또 내가 대학에 댕길 땐 우리 어머니가 소를 또 그렇게 많이 키웠구. 그러니까 대학은 소 땜에 댕긴 셈야.” 변호사가 되려고 했으나… 그의 중학교 때 석차는 반에서 4~5등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그에게 있어서 취미 이상의 것이 된 정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규율과 절도와 원칙을 생명으로 하는 교련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5학년 1학기 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인 배속장교가 맨날 조센징 조센징 해서 나하고 다른 두 학생하고 사과하라는 내용을 서면으로 제출하고 배속장교실에 찾아가서 책상을 치고 의자를 내던지며 싸웠지. 그 바람에 무기정학 먹잖았나. 2개월간 학교를 못 댕겨서, 그래 졸업 때 성적이 나빠.” 그 사건의 여파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교에서 도항증명서를 떼어 주지 않아 일본 유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미리 학교에 성적증명서를 떼어다 놓고 영흥군에 가서 경찰서에 있는 학교 선배의 힘을 빌어가지고 일반 민간인처럼 도항증명서를 떼었지. 그래서 민간인처럼 일본에 건너가서 중앙대학 법과에 시험쳐서 들어간 거요.” __왜 법과를 택하셨습니까? “변호사를 한번 해볼까 생각을 했지. 영흥이란 데가 금이 많이 나오는 덴데 우리 먼 친척 하나가 금광을 놓고 일본 사람하고 재판을 하다가 결국 뺏겼어. 그때 변호사가 되면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법학 공부를 좀 해보니까 법이란 게 그저 그런 것 같애. 약한 사람한테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더라 이 말이오. 변호사도 별 수 없겠다 싶어서 사회학을 공부할까 하다가 그만 학병에 끌려가고 말았지.” __왜 사회학을 공부하려고 하셨습니까? “우리 할머니하고 어머니가 못사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는데, 막연히 그런 데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그는 중앙대학 법과 2학년을 거의 마치고 “학병에 안 갈려고 만주로 갈까 해봤지만 그것도 뜻대로 안 돼서” 44년 1월20일 학병에 끌려간다. 그는 그때까지도 홀어머니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서 어머니 앞에선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학병엘 가게 됐는데, 우리 어머니가 상을 잘 차려 놨어. 친구들을 오라고 했는데 말야. 무슨 상인가 보니까 술상이야.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니가 나하고 친구들을 죽 앉혀 놓고 술을 따라 주는 거야. 그때부터 술을 공식적으로 먹기 시작했소.” 그가 학병에 갈 때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이었다. 그래서 다 진 전쟁에 끌려가서 개죽음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일본의 학병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첫 번째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는 어떻게든 개죽음을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거고, 둘째는 일본 군대에 가서 시간활용을 잘해서 무언가 배워와야겠다 이거요. 이게 뭔 말이냐 하면, 우리도 독립되면 군대를 만들어야 할 텐데 이번에 군사지식이나 배워가지고 오자 이거지요.” 용산에 집결한 학병들은 열흘 만인 1월30일 中支(중지)로 보내졌다. 거리서 그는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처음엔 장개석의 남경군관학교 건물에서 장교교육을 바다가 곧 일본 도요하시로 가서 교육 훈련을 바치고 일본 육군 소위가 됐다. 그러고 나서 도야마 연대에 배속됐는데, 그는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월남해서 한신으로 개명하다 일본 학병에 간 지 19개월 만에 한신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 서울을 거쳐 38선을 넘다가 예기치 않은 일을 목도한다. “38선을 넘는데 소련 군대 애들이 시계를 팔목에서부터 팔꿈치 있는 데까지 여러 개를 쭉 찼어요. 다 빼앗아 찬 거지요. 내가 보니까 시계를 못 본 애들이야. 나한테서도 ‘다와이(내놔)”했지만 난 안 줬어요. 참 큰일 났더군. 고향에 가니까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우리 고향이 논이 많은 덴데 소련놈들이 쌀을 다 빼앗아 가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요. 흥남에 있는 기계까지도 다 뜯어가고…“ 그것보다 더 큰 일은 북쪽에 붉은 기운이 만연해 있는 것이었다. “진짜 공산당이 있고, 갑자기 공산당 주사를 맞아서 급조된 공산당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더 설치고 더러워요.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고 스탈린을 위대한 원수라고 했는데, 하여튼 돼먹지 않은 말을 하고 다니더라구.”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날보고 자꾸 같이 일하자는 거요. 설득도 하고, 책도 갖다주면서 읽으라고 하고…. 그냥 귀찮아서 미치겠어. 나중엔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날 집어넣으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왜 집어넣지 못했냐 하면, 우리 집이 거기서 비난 받는 집이 아니거든. 존경받는 집인데 날 집어넣으면 인심을 잃잖나 말야.” 그러나 그는 결심을 한다. “공산당 애들이 자꾸 우리 집에 오고, 내 의사하고 맞지는 않고, 그러니까 내 신변이 자꾸 위험해지고…. 그래서 나 혼자 월남을 했지요.” 그때가 46년 6월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다. “내 뒤를 누가 항상 따라다녔어요. 그래 걔들 눈을 속이느라고 원산에 가서 며칠 술 먹고 놀다가 몰래 기차로 철원까지 왔는데 그만 덜컥 걸렸지 뭐야! 철원역에서 보안대원이 수상한 사람들을 죽 잡아서 한 옆에 세워놨는데, 나도 잡혀서 거기 서 있었지. 그런데 내가 바보처럼 거기 서 있겠어. 슬금슬금 빠져나와서 냅다 뛰었지. 그래서 전곡으로 해서 임진강을 건너 동두천으로 들어왔지.” 월남하자마자 그는 이름을 그때까지 쓰던 두 자 이름에서 외자 이름 信(신)으로 바꾸었다. __이름을 왜 바꾸었습니까? “이제부턴 새 사람이 되자 해서 바꾸었소.” __전에 쓰던 이름은 무엇입니까? “새 사람이 되자고 이름까지 갈았는데 건 알아 뭣해. 다 잊어버려 아는 사람도 없는데, 거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__그럼 왜 신으로 지었습니까? “내가 그 信자를 좋아했거든. 전에 누가 중국(漢)의 韓信(한신)이 좋아서 따라 지었느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그랬지. 하여튼 난 信자를 좋아해. 믿음 없이는 이 세상을 살 수 없거든.” 그가 이름을 한신으로 바꾸자 뒤따라 월남한 동생도 撤(철)로 이름을 바꾸었다. 꿈 속에서도 공산당과 싸워 그는 45년 9월 육사 2기생으로 군에 입대한다. “당시 정치지도자 몇 분을 만나서 얘기했더니 그분들이 국가의 장래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인 말씀들을 해요. 6_____ 내다봤던 분도 있었던 것 같애. 김일성이 무슨 장난을 할 거라 이거요. 그래서 결국 내가 모든 꿈을 다 버리고 군대에 들어가서 나라를 지키는 데 몸을 바쳐야겠다 생각을 한거요. 왜 내가 학병갈 때 결심한 거 있지 않소. 죽지 말고 살아 돌아오고, 또 군대지식을 배워오겠다고 했던…. 이제 그 지식을 써먹을 때가 온 거지요. 내가 말했지. 중학교 때도 교련을 좋아했다구. 맞아, 나 군대를 좋아한 사람이오. 그게 얼마나 씩씩하고 좋나!” 여기서 기자는 참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젊을 때 고향을 떠나 와서 군에 입대했고, 도 그 이후 한 번도 고향에 못 가봤으니, 고향이 얼마나 그리울까 해서 불쑥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__지금도 고향 꿈을 꾸시지요? 그러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고향 꿈은 안 꾸어요. 난 지금도 공산당하고 싸우는 꿈을 꿔요.” __그럼 가끔 꿈 속에서 공산당한테 지는 때도 있습니까? “아니,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소. 싸울 때마다 내가 이기지요. 그거 참!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딱 기분이 좋아.” __실전에선 어땠습니가? 혹시 지신 적도…. “없어요. 나는 전투에서도 공산당한테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철수할 때도 싸움에 져서 철수한 적은 없소. 후퇴명령 때문에 철수한 거지.” 여기서 말머리를 돌린다. _____________ 박정희 대통령과 동기시죠? “근데 육사 때는 한 10여 주 같이 있었는데 잘 몰랐어요. 그러고 나서 서로 얼굴이나 알고 이름이나 듣고 지냈지. 그런데 그전부터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같이 손을 맞추거나 같이 지낸 건 그분이 1군 참모장을 하고 내가 수도사단장을 할 때가 처음이오.” 육사를 졸업한 한신 소위는 8연대 1중대장이 돼서 당시 부대가 있던 춘천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사병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잠을 자며 영내생활을 했다. __한 장군께서 군단장 땐가 군사령관 땐가 사병 옷으로 갈아 입고 예하부대 사병 내무반에 가서 슬쩍 주무신 적이 있다면서요. 들리는 말로는 그날 점호를 취해 보니까 머리가 하나 남아서 탄로가 났다구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소? 여보시오, 장군이 어드렇게 사병 내무반에 가서 자나 말이야! 내가 가서 확인을 철저히 했지. 밥도 같이 먹어보고. 그러나 사병들하고 같이 잔 적은 중대장 때밖에 없소. 장군이 할 일 따로 있고 하사관이 할 일 따로 있지.” __그럼 이런 말들은 누가 다 지어냈을가요? “글세 나도 모르겠어. 그냥 웃고만 있지.” 고향 가서 결혼하려 했지만 3기생들이 육사를 졸업하고 부대에 배치돼서 오게 되자 2기생들은 부대 밖으로 밀려나게 됐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하숙을 했다. 그때 그의 일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 집사람이 월남해서 하숙으로 날 찾아왔어요. 약혼만 하고 결혼 날짜까지 받아놨다가 못 견디고 내가 먼저 넘어왔거든. 그때 참 반가왔지! 우리 장인 장모가 죽든지 살든지 날 찾아가라고 해서 온 모양이야. 근데 참 큰 선물을 가져왔어요. 우리 집사람이 우리 집 제삿날, 생일 이런 날짜를 적은 쪽지를 옷 속에 꿰매서 입고 내려왔어. 그래서 지금도 우린 그런 날짜를 다 알고 지키지요.” 그후에 그의 자당과 동생들도 월남해서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서 혼례식을 올리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고향 가서 장인 장모하고 친척들이 있는 데서 식을 올리려고 했지.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휴전 후에 서울에 와서 결혼식을 올렸지요.” 비록 처 가족이 함께 내려오진 못했지만 한신 일가는 남쪽에서 다시 만나 가정을 꾸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자마자 가장 원초적인 어려움에 부딪쳤다. 이때 한신은 ‘한신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식구들이 다 넘어왔는데 갈 데가 있어야지. 그래 하숙집에서 방 한 칸을 더 얻어서 같이 사는데, 그때 내 봉급가지고 살 수가 있나. 못 사니까 부대에서 쌀도 보내주고 부식도 보내주고 그래. 그때 영외 거주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지냈소. 그때가 어떤 때냐 하면 군인들이 먹을 게 없어서 고구마를 먹을 땐데, 그런데 그걸 얻어 먹으며 가만히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파 못 견디겠어. 그래 내가 이거 군대 관두자 그랬어. 관두고 사회에 나가 돈벌어 가족을 거느리자 그랬어.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하고 동생들이 날보고 그냥 군대에 있으래. 자기들이 벌어서 먹고 살겠다구. 그래서 동생들이 취직을 했지. 그담부터 난 부대에서 보급을 안 받았소. 그리고 난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소. 난 군대밖에 몰랐어. 나한테 젤 고마운 사람은 우리 집사람이야. 우리 집사람이 다 어떻게 어떻게 했지 나는 아무 것도 몰라.” __그때 생활은 괜찮았나요? “내 이것만은 말하지. 우리집 국이 시래기국이오. 그때부터 지금까지요.” 그리고 그때부터 상당히 오랜 동안, 시멘트 대리점을 했던 그의 동생(撤)이 형의 경제적 후원자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18연대 부연대장을 하고 있을 때 6·25가 터졌다. 18연대가, 6·25 전에 있었던 옹진전투에 참가하고 돌아와 용산에 주둔하고 있을 때 6·25가 일어난 것이다. __난리가 일어날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셨던가요? “그거 참 희한한 일이오. 우리가 옹진에서 전투를 할 때 포로를 잡아보면 적의 부대가 자꾸 바뀌거든. 우린 일정한 부댄데 말야. 그러니까 적이 돌려가며 실전훈련을 하고 우리 군대 전투능력을 테스트하는 거지. 이런 걸로 봐서 전쟁이 머지않아 일어난다는 걸 군 내부에선 충분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도…” __그런데 왜 준비를 안했을까요?“글쎄…. 미군한테 장비를 달라고도 했지만 그렇게 안 됐고…. 게다가 사병들을 농번기라고 휴가까지 보냈고, 장교들은 6·25 전날 용산에 장교 구락부를 지어 놓고 춤을 췄고…. 하여튼 김일성이 남침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준비가 소홀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오.” __첫 전투는 어디서 했습니까? “포천 남방에서 싸웠는데 적의 보급부대하고 부딪쳤어요. 포로를 많이 잡아서 서울로 보냈어. 그렇게 한참 싸우다 보니까 26일 저녁 의정부가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그만 포위당해서 행주나루를 건너 부평으로 왔지. 싸움에 져서 쫓긴 건 아니고.” 6·25가 일어난 지 1개월쯤 후에 그는 중령으로 진급해서 1연대장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서 명성을 떨친다. 안강__기계 전투, 함흥 공략전, 북청__청진 탈환 작전…. 6·25 때 一日一生(일일일생)의 정신으로 싸워 그는 지금도 안강__기계 전투를 잊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싸울 때, 안강__기계 지방에서 사흘간 포위당한 채 전투를 했거든. 옆에 있던 부대가 다 밀려나서 우리가 포위된 거요. 그때 우리 연대가 참 잘 싸웠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산다, 여기서 죽을 각오하고 싸우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여기가 최후다, 이러면서 싸워서 우리가 이겼지. 그 뒤에 옆으로 부대가 진격해 와서 포위가 풀렸어요. 내가 9월에 육군대학 학생들하고 그 현장에 다시 가기로 했어요. 하여튼 일본 학병으로 갈 때는 어떻게든 죽지 말자고 했지만, 6·25 때는 내가 매일 오늘 죽는다는 각오로 一日一生의 정신으로 싸웠소.” 마침내 전세가 역전돼서 우리가 북쪽을 향해 진격할 때, 그는 행인지 불행인지 고향 근처를 지나가게 됐다. 그러나 고향땅엔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알려져서 그의 고향에서 40~50리쯤 떨어진 처가에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내가 일선지휘관이란 사실이 적에게 알려져서 철수한 다음에 우리 처가가 다 녹았어. 후에 월남한 사람이 그래요, 장인 장모가 학살당했다고. 우리 집사람에게 젤 미안하게 생각하는 게 그거야. 돌아가신 날짜를 알 수가 없어서 백중날 내가 제사를 받들어요.” 그의 부대는 청진 북방까지 진격해서 내일이면 두만강 물을 마실 정도가 됐다. “그런데 철수명령이 내렸어. 우린 괜찮았는데 중부전선이 밀리니까 철수한 거지. 철수할 때는 별 싸움도 없이 그냥 철수한 거지.” 그는 흥남철수작전 때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그때 보니까 이북 사람들이 정신없이 철수하는 배에 탔다가 그만 배에서 바닷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배에 탈 때까지는 정신이 없었다가 타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거지. 집에 두고 온 부모, 처, 자식, 이런 생각이 나니까 배에서 막 떨어져 죽는 거야. 이걸 보면 우리 민족의 가족애가 대단해요. 김일성이 우리 민족의 최대의 죄인이오.” 그는 6·25 때 세운 수많은 전공으로 많은 훈장을 받았다. 태극무공훈장, 보국훈장 통일장, 미 동성훈장…. 그래서 기자는 또 세속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__훈장도 많이 받으셨지요? “나는 훈장이란 거 어떻게 받았는지 몰라요. 그냥 주니까 받은 거지.” __어디다 보관하셨지요? 사진 좀 찍게요. “훈장 같은 거 없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군인이 임무수행한 거야 당연한 거지. 훈장에 참 결함 많은 거야. 죽은 내 부하들이 받을 걸 내가 대신 받은 건데 뭘. 나는 훈장이니 뭐니 그런 거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박정희 소장이 혁명하자 했으나… 한신 장군은 그후 수도사단장(57년), 육본 감찰감(59년), 논산 훈련소장(60년)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그는 감찰감 시절의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당시 조달감실 피복 부정사건이 있어서, 그걸 철저히 조사해서 처벌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경무대 곽 비서관한테서도 잘 봐줄 수 없느냐고 전화가 오고, 국회의원들한테서도 그런 전화가 오고 그래요. 내가 절대로 안 된다니까 나중엔 국회의원 8명이 찾아와서 막 협박하다시피 하잖나 말야. 그래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지금 집집마다 아들, 손자, 남편, 이런 식구를 군대에 안 보낸 가정이 없는데, 그 사람들 입힐 피복에 부정이 생겼는데 뭘 어드렇게 봐주나, 우리 군대가 그 사람들 잘 입히면 얼마나 좋아하겠나, 그런 걸 떼어 먹으면 어드렇게 되겠나, 절대로 봐줄 수 없으니, 내가 잘못 조사한 게 있으면 그걸 지적하시오, 그랬지.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참모총장한테 찾아가는 거요. 그래 내가 총장실에 뒤따라 가서 그 사람들이 앉아 있는 데서 총장한테 말했어요. ‘총장님, 이 분들이 피복 문제를 저한테 얘기했는데 그건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총장도 안 된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것 좀 봐요. 그 8명 가운데 4명이 다시 내 방에 와서 ‘한 장군이 그렇게 올바르게 하는데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겠소. 참 고맙습니다’ 이러잖아요.” __한 장군께서 그렇게 ‘적당’이 없고 철두철미하고, 어떤 의미에선 모나게도 처세하고 그러다가 혹 사시면서 손해 본 적은 없습니까? “손해? 봐도 할 수 없지. 내 할 일 내가 하는 거니까. …응, 그때 그걸 안 봐준다고 국회의원 L씨가 나를 모함했지. 내가 수도사단장에 모포를 팔아먹었다구. 얼마나 분한지 밥이 안 넘어가. 내가 그때 조선일보를 봤거든.” __고맙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에 그 기사가 났어. 한신이 모포 팔아먹었다구. 그 자가 국회에서 아무렇게나 떠든 걸 받아썼지. 다른 신문엔 내 이름이 안나왔는데, 조선일보만 나왔어.” __아이고 미안합니다. 그가 논산 제2훈련소장으로 있을 때 2군사령부에서 우연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분이 혁명을 해야겠다고 나한테 말하는 거요. 그래 나는 한참 있다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했소. 그러고 서울에 올라와 보니 매일 데모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판문점에 간다고 하고 정말 큰일 나겠다 싶더군. 그래도 나는 군인이 정치에 나서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 61년 5월16일, 그는 당시 국방연구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날 새벽 총소리를 듣고 ‘박 장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5·16이 나자마자 걱정이 돼서 박 장군을 찾아갔지요. 군대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내가 ‘지금 뭐가 제일 문젭니까’ 그랬어요. 박 장군이 ‘1군이 문제’라고 해요. 그래 내가 ‘알았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1군사령부로 갔더니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숙소에 있으면서 날 만나주질 않아요. 할 수 없이 숙소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아침에 이 장군을 만났지요. 무슨 일이 있든지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했더니 자기도 싸우지는 않겠다고 해요. 그래 안심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만 내가 떠난 뒤 바로 부하들이 이 장군을 연금했잖아요.” __한 장군께선 원칙을 지키는 데 충실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 왜 5·16에 협조했습니까? “난 절대루 군인이 정치에 나서는 거 찬성 안해요. 그래서 혁명하자는 것도 모르겠다고 한 거요. 그런데 기왕 5·16이 일어났는데 어드렇게 하나 말야. 또 당시 사회가 너무 혼탁하고 문란해서 좀 깨끗하게 청소해야 할 필요가 있었구.” “내무부 장관 때 깨끗하게 일했다” __거기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한 장군께서 소장으로 곧 내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셨는데, 그 부분이 ‘한신 장군’이란 전체 이미지와 좀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군대에 그냥 계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라면 ‘깨끗한 군인’으로서의 경력이 아주 ‘깨끗하게’ 됐을 텐데요. “글쎄, 내가 내무부 장관 할 때는 정말 우리 사회를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할라고 했소. 나도 정말 깨끗하게 했소. 난 절대 깨끗이 해놓고 민정이양하라고 했소. 난 그때 그런 신념을 가지고 일했어요.” __박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실하고 듬직하고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 분 같았지. 근데 지금도 박 대통령에 대해 잊혀지지 않는 게 있어. 그분은 자기 친척은 절대로 자기 옆에다 안 둡니다. 친척은 항상 먼 거리에다 둬 두고 봤어요. 내가 내무부 장관을 할 때 그분이 하루는 날 찾아요. 그래서 가보니까 자기 친척과 처갓집 사람들 이름을 죽 대면서 이 사람들이 어디 가서 나쁜 일 안하는지 봐 달라 이거야. 이권운동이라도 안하는지 그걸 조사해서 자기한테 꼭 보고해 달라 이거야. 그분은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 주변을 관리했어요.” __장군께선 취직 같은 청탁을 들어주신 적 있습니까? “나한텐 소문이 나서 그런지 오지도 않아. 그러구 누굴 취직시킬라면 다른 사람 목을 떼구서야 넣어야 되는데 어떻게 일 잘하고 있는 사람 목을 떼나 말야.” 내무부 장관 시절에 있었던 한 일화는 그가 강조하는 ‘깨끗함’의 표본이기도 하다. 사업을 하는 친구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장에 도로를 뚫어 주면 “앞으로 내 돈으로 자네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그는 “이 나쁜 놈아, 돈으로 친구를 농락해!” 하고 소리치면서 따귀를 갈기고 발길질을 해서 친구를 내쫓았다고 한다. 그는 또 나라를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던 시절을 더듬는다. “내가 1년 남짓한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두 바퀴 반을 돌았소. 다니면서 보니까 그야말로 엉망이었소. 충남 금산엘 갔더니 축산을 장려한 정부지시대로 돼지를 많이들 키우고 있어. 가만히 보니까 돼지 마리 수는 많은데 키운 게 아니라 장에 가서 죄다 사다 놓은 거야. 청주엘 갔더니 시장이 ‘아이고 이렇게 누추한 데를 오셔서 고맙습니다’ 이래. 난 그게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어. 시장이 보고를 하는데 계속 시청건물을 다시 짓는 얘기만 하고 있어. 그래 내가 그랬어. ‘국민들의 혈세로 좋은 집 지을 생각 말라. 이 집이 무너져서 시민들이 제발 시청을 다시 지으십시오 할 때까지 그대로 써라. 시청이 낡았으면 어떠냐. 나무 그늘에 멍석 깔고 일을 봐도 좋다. 국민들이 잘살도록 하는 데만 힘써라.’ 나는 거짓말하는 걸 젤 싫어합니다. 기회를 줘도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서 그만 두게 했어요.” __그렇게 덜컹덜컹 목을 자르면 국민들은 좋아했겠지만 당한 사람으로선 억울한 점도 있었을 텐데요. “그때는 혁명을 했을 때니까, 우리 사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위에서부터 본보기를 보여준 거지요. 그렇지만 난 군에서는 내 부하 목을 한 사람도 자르지 않았어요. 반드시 5분 동안 잘못을 지적하면 10분 동안은 좋은 말로 타일렀지요. 군대의 지휘관은 엄한 아버지와 형님, 인자한 어머니와 누님의 성질을 같이 가지고 부하를 대해야 해요.” “군인이 정치에 나서선 안돼!” 한신 내무장관은 62년 8월15일 강화에 홍수피해를 시찰하러 가다가 운전기사가 전봇대를 들이받는 바람에 양쪽 무릎에 중상을 입는다. “그날 아침 내가 부관한테 이랬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 나라가 깨끗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그런데 그만 그날 교통사고로 죽을 뻔하지 않았소.” __한 장군께서 너무 시찰을 많이 다니셔서 운전기사가 견디지 못하고 졸다가 사고를 낸 거라면서요? “아니 아니, 운전병이 상을 당해서 잠을 못 자고 온 거요. 난 어딜 가나 운전병하고 비행사는 피곤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운전병이 잘못하면 영창에 넣어요. 왜? 운전병이 과속을 하거나 잘못을 하면 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죽지 않소?” __그때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처럼 마취를 않고 수술을 받았다지요? “그것도 사실이 아니오. 아 어드렇게 서너 시간 하는 수술을 마취 않고 그냥 하나 말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그건 사실이 아니고 육대 다닐 때 코 수술을 하는데 중간에 마취기운이 떨어졌어. 군의관이 다시 마취를 하겠다기에, ‘얼마나 더 걸리겠나’ 했더니 ‘10분이면 끝납니다’ 그래. 그래서 ‘에이 그 정도면 그냥 해달라’ 하고 그냥 수술을 마친 적은 있지.” 어쨌든 그는 다리 부상으로 병원에서 5개월 동안이나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동안 다리를 이렇게 많이 다쳐서 군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만 생각했다고 한다. 마침내 완치가 돼서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는 거기서 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줬다. “박 대통령이 ‘잘 됐나?’ 그래. 그래 ‘아주 잘 됐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하고 점프를 했지.” 그러나 다리는 완전히 원상회복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업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이 없는 덜 중요한 자리로 보내달라고 자청했다. 그는 2군부사령관으로 군에 복귀했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이 ‘한 장군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63년 7월부터 5개월 동안 감사원장을 맡았다가 민정이양과 함께 2군부사령관으로 다시 복귀했다. __그때 박 대통령도 ‘조속한 시일 내에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이른바 ‘혁명공약’을 지켰으면 좋았을걸… “그 공약이 위반된 거지 뭐!” __한 장군께서도 그때 그냥 눌러 앉지 그러셨어요. “천만에, 난 그런 생각 없었어요. 난 정치는 몰라요. 군대는 할 일이 따로 있지요. 말했잖소. 군이 정치에 나서선 안된다고.” __요즘까지도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안돼! 박 대통령도 전역식에서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다시 없기를 바란다’고 했잖소. 난 그 말을 자기도 쿠데타는 싫었는데 할 수 없이 했다, 그러니 다시 하지 말라 이런 뜻으로 봐요.” __자기는 하고 남은 하지 말라는 건 좀 설득력이 없군요. “글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때 사회가 너무 혼탁했소. 그러니 군이 나서지 않도록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해야 돼요.” __“내무장관 시절 한 장군의 이름이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졌는데, 깨끗하고 철두철미한 군인이라는 면뿐만 아니라, 아주 무서운 분이란 점도 알려졌지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날 무섭다고 그래요. 내가 내무장관으로 있을 땐 막걸리집에도 잘 갔어요. 국민들이 막걸리집에 와서 와와 떠들고 해야 잘 되는 거거든.” __혹시 거기서 누가 유언비어를 유포한다고 잡아가지 않으셨어요? “노노! 천만에. 한번은 막걸리집 안주인이 내가 내무장관인 걸 모르고, ‘요즘 내무장관은 여자 끼고 잠도 안 자본 바본가 보다’고 하잖아. 왠가 하니, 자기 같은 여자는 남자들하고 재미도 볼 수 없다 이거야. 여관이나 호텔 앞에서 남녀가 같이 가면 조사를 하니까.” __혹시 연애해 보셨습니까? “아니, 난 그런 거 없어!” __한 번도 없습니까? “…응, 있다. 옛날에 집사람과 약혼하기 전에 고향에서 선본 여자랑 몇 번 만났지.” 박 대통령은 그에게 여러 차례 “한 장군은 군인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군에 돌아가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 힘을 쏟도록 도와줬다. 그래서 그는 2군사령관, 1군사령관을 거쳐 육군대장이 돼서 마침내 합참의장의 자리에 앉았다. __참모차장으로 계시다가 2군사령관으로 가실 때 섭섭하지 않으셨어요? “어디서건 열심히 일했어요” “아니, 2군이 얼마나 중요한데? 군인이 그런 생각 가지면 안돼요. 어디 가서든 최선을 다하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지. 그게 군인이오.” 2군사령관에서 참모총장으로 가셔야 할 텐데, 합참의장으로 가셨으니 물 먹은 거 아닙니까? “물 먹고 안 먹고 난 그런 거 상관없어요. 난 합참의장 와서 참 좋았어요. 잘 왔다고 생각했지. 공부를 많이 했거든.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공군까지 보게 되니까 시야가 넓어졌고, 또 외국과 관계가 잦아서 세계적으로도 생각하게 됐으니까. 합참 와서 참 많이 배웠어요.” 그는 마침내 75년 3월6일 30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고 한 시민으로 돌아온다. “난 군대에 대해서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 거기서 내 정열을 다 바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__전역하시고 난 다음에 아시아자동차 사장과 대한중석 사장으로 10여 년 계셨는데, 육군대장 자리에 비해 좀 소홀한 자리가 아니었나요?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아시아엔 특수산업 때문에 갔었고, 중석은 당시로선 아주 중요한 회사였어요. 아무데 가서건 난 열심히 일했으니까 부족한 게 없소.” “지도자에겐 철학 있어야” 그는 대한중석에 가서도 그의 신념과 철학을 실천에 옮겼다. “대한중석이 개인회사라면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컸을 겁니다. 클 수 있는 소지가 튼튼했고, 유리한 조건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회사만 키워서는 안 됩니다. 이익만 많이 내려고 일하는 사람들 울려서는 안 되지요. 회사가 해줄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아랫사람들한테 잘 해줘야 합니다. 지금 한 달에 봉급을 10만 원씩 주고 있지만, 15만 원씩 줘도 회사를 꾸려 나갈 수 있다면 15만 원을 줘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익공동체가 돼선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운명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누구든지 인간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그의 말이 대한중석을 한국 제일의 대회사로 키우지 못한 데 대한 변명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휴머니스트였던 그의 할머니의 모습도 언뜻 떠오르고, 그가 법학을 그만두고 사회학을 공부하려 했던 까닭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군대에서의 그의 지휘방침도 바로 이런 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하여튼 사병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우고, 교육훈련을 철저히 시키고 걱정이 없게 도와주고 이게 내 기본방침이야.” 다시 얘기가 대한중석으로 돌아간다. __대한중석에서의 급료는 어떠했습니까? “근로자들은 다른 데보다 높았지만 임원이나 간부는 다른 데보다 적었어요. 임원들은 재벌회사보다 한 40만 원 적었지.” __사장의 봉급은 얼마나 됐습니까? “85년 내가 그만둘 때 90만 원 조금 넘었소.” __그래도 판공비가 많았지요? 이 말을 했다가 기자는 또 호통을 맞았다. “그거 어디 주머니에 넣고 혼자 쓰자는 건가? 회사를 위해 같이 써야지. 난 그런 돈 몰라!” __노사 문제는 왜 일어난다고 보십니까? “경영주가 욕심이 많아서 일어나요. 근로자들을 다 내 자식이나 동생이라고 생각하면 노사 문제가 안 일어나요. 그 사람들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다 나가서 피 흘리고 목숨 바칠 사람들 아니오. 그 사람들한테 내 자식처럼 잘 해주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해주면 노사 문제가 안 일어나요.” 그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과 근로자들의 심성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 참 훌륭하고 참해요. 그래서 우리나라 희망이 있는 나랍니다. 옛날에 군대에서도 보면, 사병들이 배 곯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내가 ‘배 안 고픈가?’ 하면 다 ‘안 고픕니다’ 그래요. 그렇게 물을 때 아무 말도 안하면 그건 ‘정말 죽겠다’ 이 뜻이야. 또 그런 사람들이 배고프다고 할 땐 정말 ‘금방 죽게 됐다’ 이 말이거든. 근로자들도 마찬가지요. 2~3만 원만 올려달랄 땐 ‘그거 없으면 정말 못살겠으니 꼭 좀 올려주시오’ 이 뜻이야. 그런 말이 나올 땐 경영주는 할 수만 있다면 ‘꾀부리거나 거짓말 말고 올려줘야 해요. 경영자에겐 철학이 있어야 해요. 운명공동체를 생각해야 하고, 반사회적이어서는 안돼요. 경영자에게 철학이 없으면 미친놈에게 칼을 준 거나 마찬가지야. 지도자에겐 다 철학이 있어야 해! 철학이 없이 반사회적으로 치부하는 지도자는 국민이 용납을 안하지.” “대통령을 임금처럼 모셔선 안돼” __정치지도자도 마찬가지지요? “물론, 그건 더욱 그래야지. 철학 없는 지도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거요.” __경영주가 근로자들에게 잘 해줘야 하는 건 물론이지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다간 회사 망할 거 아닙니까? “천만에! 우리 근로자들은 다 알아요. 회사가 얼마나 이익을 보고 있으니 우리에게 얼마쯤 더 줄 수 있다, 또는 불경기에 장사가 잘 안되니 회사 형편이 어렵다, 그러니 이런 때는 참아야 한다, 이런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꼭 필요할 때 줄 수 있는 만큼만 달라는 겁니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겁니다. 윗사람이 잘못한 거, 부정한 거 아랫사람들이 휜히 다 알아. 내가 요즘 새벽에 약수터에 가서 보면 별 말이 다 많아. 자기들은 감춘다고 하지만 윗사람한테 비밀이 어딨소! 지도자는 깨끗해야 해요. 깨끗하지 않고 결격사유가 있으면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아랫사람이 안 따릅니다. __요즘 학생이나 근로자들의 데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주의 아래에서 데모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과격하고 폭력적인 데모는 절대 해선 안됩니다.” __김일성이 쳐내려올지 모르니까 데모를 해선 안된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정권안보론을 찬성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는 틈만 나면 반드시 쳐들어 올 겁니다. 6·25 전처럼 김일성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 함정에 빠져선 안돼요.” __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첫째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고, 그러면서 평화통일을 달성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없이 북한을 이길 수 없고, 나라 뺏기고 자유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 해요. 평화적으로 북한을 이기려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지. 이때 젤 중요한 게 북한에 없는 자유민주주의야. 또 부정도 없어져야 하고, 깨끗해져야 하고, 사회정의도 이뤄져야 하고, 복지사회도 건설해야 하고, 그래야 북한보다 월등히 앞서서 평화통일의 조건이 된다 이거지. 그리도 또 북한이 평화통일을 원하지 않고 전쟁을 하겠다고 할 때 우리가 ‘싸우지 말고 말로 합시다’ 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 그쪽으로도 대비를 안하면 우리가 또 침략을 받아요.” __끝엣말은 민주화 운동을 하지 말란 말처럼 들립니다. “아니지, 민주화 운동은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기본적인 길이오. 사회가 발전해 나가면 나갈수록 좋은 거지. 그런데 적의 간접침략 술책에 걸리면 안된다 이말야.” __지금 민주화 열기가 대단한데요. 잘 되겠습니까? “난 정치 문제는 잘 모르니까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되지만,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해서 비관 안해요. 왜냐하면 우리 국민이 원래 참하니까. 지도층만 잘하면 돼. 얼마 전에 TV에서 임금님 행렬을 보여주더군. 나도 그게 신기해서 보긴 봤지만, ‘저 임금님이, 참한 백성들은 저렇게 모시느라고 땀을 뻘뻘 흘렸는데, 그래 어쩌다가 나라를 그 꼴로 만들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3공화국 때도 그래. 대통령을 임금처럼 만들고, 그분의 딸을 공주처럼 만든 사람들이 그분들을 욕되게 한 겁니다. 그걸 알아야 해요.” “지도자만 잘하면 된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모름지기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젊은 애국자들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고, 그 사람들의 뼈가 묻히지 않은 곳이 없소. 이 땅이 그런 땅이오. 나는 국립묘지를 자주 가진 못하지만, 항상 내 머리 속엔 국립묘지가 박혀 있어요. 거길 가도 현충일 같은 날 안 가고 그 이튿날 가요. 가선 꼭 걸어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젊은 애국자들을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출세하려고 싸우다 죽었겠소, 돈 벌려고 싸우다 죽었겠소? 그 사람은 아무 생각없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죽었을 뿐이야. 그런데 거길 가면서 그 안에까지 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 참 이상한 사람들이오. 그 젊은 애국자들이 그때 공산당과 싸워 죽지 않았다면 지금 이 나라가 없소. 이런 것을 그 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지도층들이 좀 알아라 이거야. 그런 생각을 한다면 모든 게 다 잘 되리라고 봐. 지도층들이 항상 국립묘지 성역을 자기 양심의 거울로 삼아서 비춰 보고 순화시키면 훌륭한 지도자가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지. 난 그걸 뼈저리게 느껴요. 우리 부하들이 총 맞고 포탄 맞아 엎어지는 걸 내 눈으로 보지 않았소! 그러니 나는 죄인이오…” 이러다가 그만 노장군의 말이 뚝 끊어지는 게 아닌가! 한참을 울먹울먹 하다가 어렵게 내놓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 나라가 내 나라요, 당신 나라요, 아니면 어떤 개인 나라요? 이 나라는 우리나라요!” 호랑이 장군 한신 대장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기자는 한참 만에 질문을 계속했다. __정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국민을 편안하게 잘살게 해주는 게 정치 아닌가. 다시 말하면, 국민이 잘 먹을 수 있고, 잘 입을 수 있고, 인간답게 살 수 있고,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고, 그렇게 해주는 게 정치의 기본 방향이 아닌가.” __장군께선 군대의 지도자와 사회의 지도자를 다 지내셨으니, 어느 점이 서로 다를까요? “다 마찬가지야. 군대나 사회나 똑같애. 좋은 군인은 좋은 국민이야. 지도자만 잘하면 돼요.” __혹시 뇌물 받아 본 적 있으십니까? “난 그런 거 몰라요. 뇌물을 받으면 집에서부터 도둑놈이 돼요. 당신이 한 달에 80만 원으로 생활한다 치자 이거야. 그런데 누가 뇌물을 한 100만 원 줬다면 그걸 당신 부인한테 갖다 주겠지. 그럼 부인은 첫 달엔 웬돈인가 하고 그냥 쓰겠지만 다음달 부턴 당신이 도둑질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거야. 애들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용돈이 늘어나고 사는 형편이 좋아지면 아버지가 도둑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야. 애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우리 아버지 봉급이 얼마고, 그 돈으로 어느 정도 살아야 한다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그거보다 잘살면 아버지를 의심하고, 나중에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리고는 애들도 도둑놈이 된다 이거요. 자네는 그래도 뇌물 받겠나?” 술 좋아하나 술집엔 안 가 __선물의 상한선은 어느 정돕니까? “비싸지 않은 건 다 받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은 양말이야. 내가 발을 다쳐 보니까 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 그래서 술에 담뿍 취해서 들어오면 그냥 꼬꾸라져 자지만, 웬만하면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발을 아주 정성껏 씻어요. 그 귀한 발에 신기는 양말을 사주는 걸 제일 좋아하지. 전에 회사에 있을 땐 내 생일 같은 때 직원들이 선물 걱정을 하는 것 같애. 그럼 내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래. ‘난 양말 사주는 게 젤 좋더라’ 그러면 양말을 사오거든. 다른 건 몰라도 양말을 사오면 내가 꼭 뜯어서 이래 보고, ‘거 참 색깔도 곱다’하고 한 마디 해주지.” 기자가 이튿날 찾아갔을 땐 이렇게 말하는 그의 발엔 떨어져서 기운 양말이 신겨있었다. __약주는 잘하십니까? “잘 먹지. 소주를 잘 먹어요. 그런데 여자 있는 술집엔 안 가요. 왜 안가느냐. 휴전이 돼 가지고 서울에 오니까 친구들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술집엘 갔어. 옆에 앉은 여자가 벌써 좀 취한 것 같애. 아주 젊었는데 나한테 술을 안 따라 준다고 시비야. 난 그때까지 술집에 가도 여자들한테 술잔을 안 돌렸거든. 내가 취해서 데데 하는 것도 싫은데 왜 여자들한테 술을 먹여. 그런데 나한테 시비거는 여자 말씨가 함경도 말씨야. ‘너 언제 나왔냐’ 했더니 흥남에서 배타고 나왔다 이거야. 내가 그 말 듣고 그냥 나와 버렸소. 냉면집에 가서 쟁반하고 소주를 먹었지. 그때 술집에 있는 여자들이 전쟁 미망인 아니면, 그 누이동생들이었단 말야. 그런데 내가 그 군인들이 총을 맞고 엎어져 죽는 걸 봤는데, 어떻게 그런 여자들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시고 앞에 안고 춤을 추냐 말야. 그래서 난 춤도 안 춰요. 내 양심상 그런 짓은 못해요. 또 내가 전방에서 군사령관으로 있을 때도 술집에 가서 여자 끼고 술을 안 마셨어요. 애들이 밤에 보초를 서고 있는데 어떻게 여자를 옆에 끼고 술을 먹나 이거요.” __너무 그러시면 접대할 때 곤란한 경우도 있었겠지요? “뭐 여자 없다고 접대 못하나!” __보신탕은 좋아하십니까? “그럼, 어려서부터 먹었지.” __담배를 너무 피우시는 것 같은데요. 하루에 얼마나 피우십니까? “하루에 한 갑이면 되는데 자네 만나 이렇게 많이 피니까 손해 많다!” 그는 담배꽁초가 짧아지면 빨뿌리에 끼워서 필터가 탈 때까지 피웠다. __담배 끊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없어, 그것마저 끊으면 세상에 무슨 재미가 있나.” -1군에 계실 때 전군 신자화 운동을 벌이셨던데 무슨 종교를 믿으십니까? “난 종교 없소. 공산당과 싸우는 데는 종교의 힘이 중요하다 싶어서 그렇게 한 거지.” __지금까지 지켜오신 원칙이나 신념 같은 게 있으십니까? “나와 우리 집의 신조가 ‘위를 보지 말자’예요. 그래 나는 윗사람 집에도 안 찾아가고, 내 부하들에게도 내가 그 부대에 있는 한 우리 집에 절대 못 오게 해요. 사람은 위를 보면 불행하게 느껴지고 아래를 보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나는 위를 보지 않습니다. 또 나는 절대로 집에 와선 공무를 안 봅니다. 또 누가 와서 우리 부대나 회사의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이렇게 조잘조잘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내가 가서 겪어보고 시켜 보면 다 알 거 아닌가 말야.” 약수터 다니고 독서로 소일 __그렇게 철두철미한 분이 운동은 근무의 연장이라고 장려하셨다면서요? “사람은 밤낮없이 일만 할 수는 없어. 책상머리에서 고민하는 것보다 운동하고 돌아와서 새로운 기분으로 효과적으로 일하는 게 낫지. 그래서 1군 있을 땐 피곤하면 책상머리에서 자도 좋다고 했어. 그러나 근무할 땐 철저히 하라 이거지.” __술 먹고 자도 좋습니까? “노노! 그건 용서 안해! 아 몸이 튼튼해야 근무도 잘하고 싸움도 잘할 거 아닌가. 할 땐 하고 놀 땐 놀아야 해요. 난 중석에 있을 때도 야간 근무할 일 있으면 하고 없으면 제 시간에 다 퇴근하라고 했어요.” 우리가 만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점심 때가 되자, 한신 대장은 중국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빨리 되는 게 뭐가?” 그쪽에서 아마 짬뽕이 빨리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짬뽕이라는 게 어드렇게 생겨 먹은 거요?” 우리는 짬뽕을 먹고 나서 저녁 때까지 인터뷰를 계속했다. 저녁 때 부인 김 여사가 돌아오자 김형인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이, 저 양반이나 찍지 저는 찍지 마세요.” 그러자 한 대장이 이렇게 말했다. “난 벌써 수태 찍었수다. 얼마나 찍었는지 몰라. 이거 참 난생 처음이오.” 한신 대장은 안양 교외에 있는 43평짜리 아파트에서 부인과 단 둘이 그야말로 조용히 살고 있다. 지난해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 전까진 원효로의 목조 2층에서 살았는데 10여 년 전 그 집을 살 때 그 집값의 절반 가량은 동생(撤)이 도와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내무장관으로 있을 때까지 방 세 개 달린 16평짜리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딸만 둘을 두었는데 큰딸 정숙(39)씨는 의사인 박창조 씨와 결혼해서 미국에 살고 있으며, 작은 딸 경숙(36)씨는 소아과 의사로 개업을 하고 있고, 작은 사위 탁관철씨 역시 성형외과 의사다. __요즘 어떻게 일과를 보내십니까?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서 산에 가지. 관악산 줄긴데 약수터도 있고. 한 바퀴 돌아오면 2시간 걸려. 근처에 박현식 장군이 살고 있어서 함께 가기도 하고. 돌아와서 8시에 아침 먹고 시간이 나면 책을 보지. 책 보는 게 내 취미요. 좀 딱딱한 책이지만.” __차가 없으니까 외출할 때 좀 불편하시지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버스 타고 다니니까 아주 편해요. 책 사러도 가고 친구 만나러도 가고. 누가 자리를 양보하면, ‘난 지금 내 체력을 테스트하고 있소’ 그러지. 공식행사 같은 데 꼭 가야 할 필요가 있으면 중석에서 차를 보내줘요. 그럼 그걸 타고 가요. 그냥 걸어갈 수도 있지만, 혹시 누가 너만 깨끗하다고 티 내는 거냐 할까봐.” __조그만 차를 하나 사시지 그래요? “그럴 형편이 안 되는 건 아니지요. 그러나 차를 많이 안 쓰고 세워놓는 때가 많을 텐데, 나는 운전을 못하니까 운전기사를 두면, 그 사람을 매일 빈둥빈둥 놀려서 되겠수? 또 젊은 사람한테 그런 걸 가르쳐선 안 되지.” 사흘째 되던 날 오후 우리 취재진은 한 장군을 따라 산책을 나갔다. 그는 아파트의 문을 나서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 참 좋지요? 일요일만 되면 내가 유치원 원장이오. 우리 손자들, 조카들의 애들, 이런 꼬마들이 다 몰려와서 떠들썩해요. 내가 이렇게 밥술이나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__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연금타서 하지. 한 달에 80만 원이 넘으니 그만하면 됐지.”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오” 아파트를 뒤로 하고 논길을 지나 산으로 오르며 한 장군이 또 이랬다. “이 흙 냄새, 참 좋지요! 이 얼마나 좋소. 내가 친구들한테 우리 집 정원이 수천 평이라고 자랑을 해요. 이게 다 우리 정원 아니냐 이거요. 여기가 우리 집사람이 와보고 자리를 잡은 데요.” 화제가 부인에게로 옮겨졌다. “우리 집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오. 원만하게 우리 집안을 잘 이끌지요. 그래서 우리 형제끼리 참 우애도 좋소. 정말 난 행복한 사람이야. 우리 집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군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못했을 거요. 우리 집사람은 나보다도 더 깨끗하게 산 사람이오.” 한 대장은 약수터에서 물을 떠서 배낭에 짊어졌다. 약수터에서 만난 노인들과 태풍이야기도 나눴다. 아파트 단지의 노인회장 조인형씨가 산 밑에 있는 자기네 밭뙈기에서 호박 한 개를 따가지고 와서 한 장군에게 주었다. 한 장군이 짊어진 배낭에선 약수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출렁였고, 그의 한 손에 호박 한 개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그의 아파트 단지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을 때 기자가 물었다. __하시고 싶은 소원이 있으십니까? “난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오. …이젠 늦었소. 우리 집사람이 처녀 적에 누에를 키워 봐서 그걸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응 참 나한테 한 가지 소원이 있소. 내가 대한중석에 있을 때에 대구에 살았는데 우리 집 옆에 시장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보니 어떤 중년 부인 둘이 광주리에 채소를 이고 와서 그걸 다 팔았어. 그걸 다 팔고 돌아가면서 둘이서 웃는 웃음이, 야, 카메라가 있었으면 담았을 텐데, 그렇게 흐뭇하고 좋을 수가 없었어. 지금도 그 모습이 훤해. 내가 그렇게 한 번 웃어봤으면, 그렇게 웃으며 죽을 수 있으면…, 그게 내 소원이오.” 그의 아파트 앞에 다달았을 때 그는 우리에게 어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간곡히 사절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허허, 우리 집사람이 지시한 걸 실행하지 못하게 됐네!” 그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 6개월만 지나면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기자의 경우 6개월이 아니라 사흘 만에 조금도 그가 무섭지 않게 돼 버린 것이다. 기자는 깨끗한 군인 한신 대장의 손을 놓기가 싫어서 한동안 그대로 붙잡고 서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자는 내내 그가 소원이라던 그 웃음을 떠올리며 웃는 연습을 혼자 해봤다. 기자도 그때쯤 그런 소원을 갖게 됐으면…. (86년 10월) |
[ 2010-07-02, 07:43 ] 조회수 : 22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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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 멋쟁이 군인이였지 한국의 맥아더 한신장군 ! ! 국가가 위기에 처 했을때 잠시 내무장관을 맡기도 했지만 영원한 군인으로 돌아간 old souldier never die just fade away 한마디로 군을 떠난 맥아더와 똑 같은 존경스런 군인 한신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