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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간, 서울
오 준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속에서 영원한 고향을 추구한다. 그러나 아주 소수이지만 영원한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멜랑콜리한 사람들로 사랑에 있어 어머니 대지와의 접촉을 싫어한다. 그들은 향수를 멀리 떼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을 추구한다.1)
발터 벤야민의 이러한 진술은 서울과 서울 사람을 이해하는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서울은 한국의 그 어떤 장소보다 ‘어머니 대지’ 또는 낙원으로서의 고향의 의미를 상실한 공간입니다. 아니 박탈당한…, 탈피한…, 망각한…. 여하튼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 관념적으로 진화한 공간입니다. 서울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떤 조건으로 명명할 수 있는 존재들일까요. 서울에 거처하는 어느 누구도 서울 사람일 수 있으나 그 어느 누구도 그곳을 고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온전한 서울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이 고향인 시인을 묻는다는 것 또한 넌센스 퀴즈와 같은 것입니다. 서울 출신의 시인인 오장환은 이런 서울 사람의 익명성을 다음과 같이 변주했습니다.
내 성은 오씨吳氏.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룰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 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구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오장환, 「성씨보姓氏譜 -오래인 관습,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전문
그렇다면 서울이라는 공간이 소재나 배경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서울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 속의 ‘서울’은 대개 근대도시, 정치권력, 자본주의 시장, 문화 중심 등의 환유로 등장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 서울은 왜곡되거나 과장, 소외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의 대상으로 매도당해 저주와 지탄의 표적이 되어 억울한 오명의 화살들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들 안에는 유령인 서울이 부유할 뿐 실재하는 서울은 부재합니다.2)
공간은 시간에 대한 인간의 기억을 담을 때에만 구체성을 띠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시·공간이 비로소 인간적 의미로 말하기 시작하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상징으로서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때문이지요. 상징으로 태어난 자연적 공간은 추상과 관념으로 성장하여 심리적·문화적으로 사멸하기도 하는 역사성의 회로를 플랙탈로 순환 복제하게 됩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양수리兩水里에서 만나 거침없이 한 몸이(한강)이 되고, ‘북한산’과 ‘남한산’ 사이에 몸을 풀어 서울을 낳았다.”3)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兄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兄의 어깨 뒤에 얼골을 들고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 서게 되는 「광화문光化門」(서정주).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인 이 지역은 예로부터 한반도 남북 문화권의 경계지대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 인근이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수도로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백제 건국 초기로, 찬란한 백제문화는 한반도의 문화를 일구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부터 삼국의 주도권 쟁탈전이 가장 치열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기록을 통해 한반도 안에서 서울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4)
또한 조선 개국 시기에 쓰여진 정도전의 「신도가新道歌」는 수도로서 처음으로 호명된 공간인 서울(한양)5)이 당시에는 예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신도형상” “덕듕하신 강산 즈으메/ 만세를 누리”ㄹ 만한 공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울도 한때는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풍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음풍농월과 미음완보의 세속화되지 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을 남효온의 다음 시들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봄을 다 찾아보고/ 서상에서 계모임을 하였지./ 버들 강안에 배를 옮기고/ 살구꽃을 찾아 나선다네.// 홀로 시절을 아파하는 마음에/ 봄이 온 밤섬을 찾아왔다네./ 뽕나무 제방 너머 강물은/ 작년 자국까지 차지 않았네.// 만 채의 집에 연기가 걷혔는데/ 푸른 깃발이 저녁 바람에 기우뚱./ 맑은 강은 저녁에 물이 빠지니/ 이를 잡으려 풀밭에 앉았다가/ 도포를 걷고 바위에서 발을 씻는다./ 저녁 한기에 병든 몸이 깨어나니/ 강 안개에 봄옷이 촉촉이 젖었네.// 강가의 풀은 하나하나 향긋한데/ 물가의 버들은 만 가닥 드리웠네./ 늙은이 와서 너 나 하며 말을 트고/ 나에게 시 지어 보라 권하는구나.// 외로운 주막에서 저녁을 먹은 후/ 기둥에 기대어 시를 읊조린다./ 해 지니 온 숲은 깜깜해졌는데/ 강물이 빠졌으니 갈 때가 되었네.
그러나 500년 조선의 영욕의 수도로서의 ‘한양’은 조지훈을 「봉황수」에서 “구천에 호곡하”게 만든 망국, 그 치욕의 현장이 됩니다. 식민치하에서 ‘경성’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개명을 당하고6) 식민 자본주의에 의해 재편됩니다. 식민치하에서 경성은 “지도 속에 한낱 화농된 오점”으로서의 「수부首府」(오장환)였지만 심훈은 「그날이 오면」을 통해 해방된 공간으로써 ‘서울’을 치열하게 염원했습니다. 해방 후에야 비로소 ‘서울’로 통칭되게 된7) 이 공간은 오장환이 보기에는 여전히「병든 서울」이었으며 그래서인지 1950년에 이영순의 『연희고지』가 치열하게 보여주 듯 동족상잔의 비극 그 가장 격렬한 한복판의 전장으로써 한국의 그 어떤 공간보다도 처참하게 초토화,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서울은 4.19 혁명의 함성을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김광규)로 기억하기도 하고 군사독재와 유신 시기의 억압과 구속을 통해 왜곡된 개인을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최승자, 「197x의 우리들의 사랑」)라고 기억하기도 합니다. 또한 서울은 산업화·세계화·정보화 시대를 거치며 “무뇌아를 낳”는 「공장지대」(최승호),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연주),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울이라는 공간 존재의 기억은 신성한 공간이 어떻게 인간에 의해 세속화 되는지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영진 시인은 “다시 서울이 다시 바다가 되기”를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명동엔 닫힌 문이 없었다. 땅 한 평에 기천만원을 호가하는 가게의 주인들과 상인들도 자본의 족쇄에 묶여있던 노예들이 아니었다. 넥타이를 맨, 선글라스를 쓴 늘씬한 각선미의 여인들도 모두 자신의 불온함을 벗어던진 채 함께 노래하고 함께 그 눈 따가운 페퍼포그를 향해 걸었다. 그때 명동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저 ‘우리’라고 불렀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 아니었다. 명동성당 철거민들이 라면을 끓이던 그 때 절은 천막 그늘 밑에선 노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 서면 노래보다 더 먼저 가슴이 더워오던 지상의 한 중심中心이 보였다. 그 비좁은 대지 위에 발 딛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성스러워져 스스로의 부끄러움과 비겁함을 털어낼 수 있었으며 남몰래, 정말 남몰래 모두를 껴안고 세계 속에 내 육신을 소신 공양하고 싶어졌다. 그날 우리 모두는 영원한 미래의 기획자들이요 새로운 시간의 씨앗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살인과 살육으로 이어진 권좌, 아니 그 문화가 되어버린 삶의 양식을, 그 비참이 지어 올린 모든 천한 죄를 씻어내리기 위해 피를 흘린 제의와 제의의 날들을 통해 들끓는 비참과 욕망에서 스스로가 구원되는 헌신의 시간을 체험하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새로운 시간의 지평에 사는 자들, 그들은 자신이 익혀야 할 사람의 규범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 이영진, 「다시 서울이 바다가 되기 위해 5」 전문
21세기에 이르러 수도로서의 서울8)은 다시 한번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체험을 겪게 됩니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의 대명사로 그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들의 집합체인 정처로부터 무수하고 다양한 세계인들의 디아스포라적 공간, 호모 노마드들의 경유지나 일시적 거처로 문을 열게 됩니다.
나의 눈이 가는 길, 서울에선 없다, 서울이 수시로 내 눈을 끌어당길 뿐이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 속에서 광고의 잡음과 매체의 아우성으로 나온다, 저, 아니, 이 길뿐, 빈틈은 없다,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 아니다, 그러하니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잠 안쪽에서도 두 눈 뜨고 있어야 하느니 내 눈이 먼저 가 닿아 내가 불려가는 길, 사라졌다, 시선이 떠나가 돌아오질 않는다, 서울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겁게 돌아간다, 즐겁다고, 쫓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안구 패여나간 나는 말할 뻔한다, 뻥 뚫려 허당인 내 두 눈 구멍 속으로 서울은 24시간 형광을 불밝혀 놓는다, 의안은 울않지 않느니 내 정수리 위에 거대한 타워 크레인 하나 박혀있다, 엔진 끄지 않는다, 몸속의 엘레베이터도 멈추지 않고 오르내리느니 내 안에 서울이 죄다 들어와 있구나, 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저것들이, 어,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는 것들이, 저 분명한 것들이
──이문재, 「타워크레인-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7」
서울은 이제 한국의 시인들에게 있어 발터 벤야민적 공간, 파편화 된 시간이 산재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겨울 나그네들의 순례가 이어지는 환상적 공간, 허깨비들의 언어와 싸워야 하는 전장이며 자칫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는 너무 휘황찬란해서 위험한 시장이고 여전히 우울한 회색빛 일상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전통과 관습의 본거지이면서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이나 해방을 꿈꾸는 끝없는 길들이 혼선을 빚거나 정체가 상습화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병치되고 혼재되어 있지만 대립관계라기보다 우주의 어둠과 성좌의 관계와 같이 서로의 빛을 후경으로 할 때 더욱 또렷한 이미지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현재는 과거에 의해 조명되고 과거는 현재의 새로움에 의해 더욱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자연과 도시, 과거와 현재, 관습과 유행, 퇴락과 생성, 성과 속, 그리고 많은 다른 지역적 공간이 교직되어 이룬 우주적 공간. 정주定住의 공간이면서 과정적 통로이기도 한 공간이 바로 서울입니다.
그래서 이상의 「오감도」에도 김소월의 「왕십리」에도 오장환의 「병든 서울」에도 서정주의 「광화문」에도 김지하의 「오적」의 본산으서 「똥바다」인 서울에도 안도현 「서울로 간 전봉준」의 ‘서울’에도 황지우의 「徐伐, 셔발, 셔발, 서울, SEOUL」에도 서울은 있지만 서울은 없습니다.
서울은 다른 고향들과는 달리 어머니의 공간이 아니라 무서운 아버지의 공간입니다. 포근하고 안락한 어머니의 품 그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그 고향을 탈주한 행방불명되었던 아버지들의 현재적 공간입니다. 서울은 거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없고 “돈을 버는 거리의 부인”(김수영의 「거리 2」에서)들만 있는 곳입니다. 이상적 시간이 아니라 실존적 시간만을 담는 냉혹한 공간입니다. 이상의 “무섭다는” 또는 “무서운” “아해”들을 “질주”하게 만드는 서울, 박인환의 ‘마리서사’, ‘명동’이 있는 서울, 김수영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옹졸하게 반항” 하는 소시민적 자신을 반성하도록 만든 서울,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래서 파고다극장에서 죽은 기형도의 서울, 이연주의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김기택이 「사무원」으로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장좌불립長座不立”하며 보낸 “30년”, 그래서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 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는 신화 아닌 신화들만이 떠도는 서울.
김혜순의 「서울의 저녁식사」는 서울의 또 다른 정체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거대 ‘시장’으로써의 소비성과 “꽃”과 고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잡식성, “같은 문으로 싸고 먹는” 착란을 보여줍니다. 이런 카니발적 도착적 탐식은 아노미 현상의 특징 중 하나로 일시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시적이어야 할 이러한 증상이 서울이 지닌 불치의 병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꽃이 들어온다. 입술을 쫑긋거리는 꽃이. 트럭 한 대 가득 실린 꽃이 터널 벽을 쪽쪽 빨아 먹는다. 터널이 잠시 빨갛게 익는다. 그가 새싹을 똑똑 꺾어 입 속에 집어넣는다. 두릅이 두릅나무에서 똑기똑 떨어져 초장 그릇 속에 빠진다. 한 트럭 가득 두릅이 들어온다. 두릅이 서울의 입 안을 초록으로 물들인다. 가자미가 들어온다. 얼음에 채워진 가자미 천 마리가 모두 기절한 채 들어온다. 동해 바다 한 트럭이 실려 들어온다. 돼지들이 들어온다. 돼지들이 서울의 입술을 꿀꿀 빤다. 그는 돼지 목살 수육을 새우젖 찍어 먹는다. 꿈틀거리는 그의 목구멍은 잡식성이다. 미꾸라지가 흙탕물 개울처럼 밀려 들어온다. 태백산맥이 갈가리 찢어져 꿈틀거리며 들어온다. 설악산 자락의 고냉지 밭이 소금에 절여져 들어온다. 트럭 하나 가득 반만 나온 무의 하얀 엉덩이들이 겹겹이 실려있다. 불켠 트럭들이 들어온다. 이빨 사이로 줄지어 들어온다. 트럭들이 터널을 나서면 검푸른 서울의 위액이 트럭을 감싸안는다. 입구를 나선 트럭 중엔 그 큰 눈으로 휘이익 위액의 바다를 헤쳐보는 놈도 있지만 서울의 내장 속 어둠은 짙다. 푸성귀가 자루에 실려 들어온다. 수만 마리의 닭이 오늘 낳은 수만 개의 달걀을 따라 벼슬을 붉히며 실려 들어온다. 코끼리만한 황소들이 눈을 부릅뜨고 들어온다. 서울 사람의 몸 속 길로 황소 떼가 떼지어 몰려간다. 그는 오늘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다. 소주가 부어지는 이 터널은 길고 어둡다. 소양호를 채우고도 남을 흰 우유가 터널 밖을 나와 밤의 내장 속으로 쏟아진다. 호남 평야가 통째로 실려 들어온다. 그러나 터널의 반대 차선으로 정화조를 실은 트럭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다. 술자리를 파한 내가 소주방의 문을 나서자마자 토하기 시작한다. 서울은 같은 문으로 싸고 먹는다. 지렁이처럼 내 몸이 도르르 말린다. 몇 일에 한 번쯤, 하늘에서 큰 손이 내려와 흰구름 같은 두루마리 휴지를 펴 서울의 입인 동시에 항문인 터널을 닦아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 막차가 터널을 지나자 함박눈이 쏟아진다. 나는 눈을 받아 입안에 처넣는다.
“입인 동시에 항문인 터널”이며 “문”이다. 이 “문”으로써의 서울은 이미 1930년대 이상의 「가정」에 의해 언급된 바 있습니다.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조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에더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을헐어서전당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이매어달렸다.문열려고안열리는문열려고.
이상의 “문”이 식민치하에서 열리지 않는 지난한 삶의 “문”이라면 김혜순의 “문”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강제로 열어젖혀진 문입니다. 두 문들이 모두 서울이라는 공간이 지닌 성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소통 불능의 억압된 욕망이며 실현 불가능한 불안한 환상이며 주체 없는 타자입니다. 끝으로 오래 전 읽었던 소설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겠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주)1) 발터 벤야민, 조형준 역,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94쪽.
2) 이에 대해서는 권오만의 『서울의 詩, 서울의 詩人들』(혜안, 2005.)에서 제기한 논의가 흥미롭다. 그는 시의 생산자, 그것의 생산지, 그것이 생산한 삶의 모습 등을 고려해 “서울의 시”라는 용어의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3) 김기빈, 『600년 서울 땅 이름 이야기』, 살림터, 1993, 4면.
4) 오늘날의 서울 지역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약 2000년 전경 당시 한반도의 3개 고대국가 중의 하나인 백제의 수도가 된 이후이며 위례성이라고 불렸다. 서기 668년 3개 고대국가 중 하나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현재의 서울 지역은 한양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졌으며, 이 한양이란 이름은 그후 조선왕조 수도의 이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서기 918년 고려왕조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 양주로 불리게 된다. 고려 초기에는 자그마한 지방도시였으나 점차 발전하여 3경 중 하나가 되면서 서기 1067년에는 남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서울특별시, http://www.seoul.go.kr/v2007/seoul, 2010, 4. 17)
5)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는 당시 사회에 풍미했던 풍수지리설에 따라 신수도로서의 조건을 갖춘 지역을 물색, 오늘날의 서울 지역을 수도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한양으로의 천도에 필요한 모든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1394년 10월 28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왕성과 궁궐사찰 등이 세워졌으며 성벽이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쌓여졌는데 연인원 197,000여 명을 동원하여 98일만에 17km에 달하는 긴 성벽을 구축했던 것이다.
다음해인 1395년에 왕은 수도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할 기관으로써 한성부를 설치했다. 신수도의 행정구역은 도성 안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중부의 모두 5지역과 성저 10리 지역으로 나누어 관할하였는데 이러한 지역 구분의 기능은 오늘날 구의 기능과 유사한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4번째 군주인 세종 10년인 1428년 서울의 인구는 103,328명이였고 성 밖 인구까지 합하면 약 11만 명이었다. 성안의 가용 토지면적에 비하여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었다. 하수처리를 위하여 운하를 설치했으며 모든 토지는 국가소유였다. 1660년대부터 약 200년 동안 서울의 인구는 20만 명 선을 유지했으나 19세기말 문호개방과 함께 인구는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외국의 대사들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국제도시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6)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서울은 ‘경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36년에는 인구 약 73만 명의 도시로 변모되었다.
7)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면서 현재의 명칭인 서울Seoul로 공식 명명되었는데 서울이라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한국 사람들에게 수도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8) 2008년 현재 서울의 행정구역은 25개 구와 43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면적은 605.27km2, 인구는 1,000만 명을 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으며, 지난 30년에 걸친 경제발전과 이에 따른 도시화의 과정을 통하여 팽창된 도시를 재정비하고 보다 살기 좋은 도시, 깨끗한 환경을 갖춘 도시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오 준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비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섬끝에서』, 『이별이 두렵지 않은 사랑』, 『다로러거디러』 등이 있으며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