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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했습니다. 서울 만큼 이 말에 딱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겁니다. 하늘 궁전 같은 고층 아파트와 빌딩 숲 사이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선율이 흐르는 서울은 천당 같습니다. 현대 문명의 잣대로 볼 때는. 과연 국민가수 조용필이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이라고 노래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하철 노숙자 앞을 지나기는 죄스럽습니다. 높이로 치면 타워 팰리스가 부럽지 않은 달동네의 고불고불한 계단을 오를 때는 삶의 무게가 천 근입니다. 그래서 정태춘이라는 가수는 “화사한 가로등 불빛 너머 / 뿌연 하늘에 초라한 작은 달 / 오늘 밤도 그 누구의 밤길 지키려 / 어둔 골목, 골목까지 따라와 / 취한 발길 무겁게 막아서는 / 아, 차가운 서울의 달”이라고 노래했나 봅니다.
다 알다시피 서울의 양면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시절에도 ‘서울이 무섭다니까 과천서부터 긴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울로,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갈 양으로 ‘눈썹마저 빼놓고’ 달렸습니다. 그 결과 남한 면적의 약 0.6%밖에 되지 않은 땅덩어리에 남한 인구의 약 21%가 모여 삽니다. 수도권까지 포함시키면 절반 이상이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집중 현상은 산업화 이후의 일입니다. 19세기(대한제국) 말 한양의 인구는 20만 명 정도였고, 해방 무렵에도 60여만이었습니다. 역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희망’이고, 어느 스님의 말처럼 ‘사람이 문제’입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희망이고 또한 문제인 이 서울이라는 곳에도 축복이 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 원짜리 한 장만 가지면 교통비에 점심, 가볍게 생맥주 한 잔 하며 하루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서울입니다. 사실 서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골(?)입니다.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이라 하여 북쪽의 북악산(백악산), 동쪽의 낙산(타락산), 남쪽의 남산(목멱산), 서쪽의 인왕산이 한양의 4대문을 연결하는 성곽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겹으로 외사산(外四山)이라 하여 북쪽의 북한산, 동쪽의 용마산(아차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산과 인간의 삶에 관하여 이렇게 정교한 이해 속에 이루어진 국제적 도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은 분명 축복 받은 땅입니다. 만약 서울에 북한산과 도봉산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엄청나게 더 많은 (정신)병원이 생겨났을 겁니다.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40여 개의 사찰이 있습니다. 다 가 보지 않아서 함부로 할 말이 못 되지만, 내가 가 본 곳 중에서는 가장 호젓하고 예쁜 절이 도봉산 원통사입니다. 더 주관적으로 말하자면―대찰은 다른 경우가 되겠고―관광지화된 웬만한 산중 사찰보다 더 산사 같습니다. 도봉산을 자주 가 보신 사람들은 다 느끼셨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평일에―가능하면, 꼭―무수골을 통해 원통사를 찾는다면 ‘아니, 서울에도 이렇게 호젓한 곳이 있었다니!’ 하고 놀라실 겁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우이령을 기준으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남쪽이 북한산이고 북쪽이 도봉산인데, 사실 이 두 산은 완전히 독립된 산입니다. 두 산 중에서 도봉산이 규모가 작습니다. 그중에서도 원통사쪽은 상당히 한갓집니다. 그 이유는 절을 목표로 산을 오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별 매력이 없는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도봉산 마니아라면 도봉유원지나 원도봉산쪽에서 올라 다양한 코스 구성을 할 것이고, 도봉 주능선과 포대능선을 잇는 종주 산행을 할 경우에도 원통사는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처음 또는 가끔 도봉산을 찾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밋밋한 무수골 코스는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덕분에 원통사는 등잔 밑 같은 절이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북한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도 원통사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조용히 산책하듯 산사를 찾고 싶은 도시인들에게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을 듯합니다. 그 길을 한번 걸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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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1호선 도봉산역(북부)에서 내린 다음 길을 건너십시오. 그리고 도봉초등학교 앞을 지나 성황당쪽을 향하면 무수골이 나옵니다. 동네의 행색이 범상치 않습니다. 80년대에서 딱 멈춰버린 듯한 주택가를 지나면 주말농장이 나옵니다. 1평, 2평에 대문짝만한 이름표를 붙인, 진짜 농사꾼이 봤다면 빙긋 웃을 밭이지만 땅 냄새가 그리운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농장일 것입니다. 주말농장을 지나 난향원(성신여대 생활관)을 지나면 무수골 매표소가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원통사까지는 1.7km, 뒷짐 지고 걸어도 1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자현암쪽 계곡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도심에서 묻어온 때는 숲이 거두어갑니다. 상당히 울창한 수림 사이로 길과 물이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계곡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이 세상을 가장 사랑한 한 보살을 떠올립니다. 관세음(觀世音) 보살입니다. 지금 우리는 관세음보살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물소리가 하도 좋아 계곡으로 내려가 발을 담가 봅니다.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 그대로 원통사로 오릅니다. 우이암 아래 아담한 바위 같은 절이 거기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달리 원통대사(圓通大士)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두루 막힘이 없으므로 원통이고, 또한 모든 존재에 영향을 미치므로 원통입니다. 그 미치는 바란 대자대비(大慈大悲)이므로, 또한 관세음보살은 시무외자(施無畏者)입니다. 모든 중생이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마음 상태에 이르도록 자비를 베푸는 보살이란 말이겠지요.
따라서 관세음(觀世音)을 흔히 글자 그대로 세상의 소리를 ‘보는’ 것으로 풀이하는 건 안이한 문자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를 본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살펴서 알아채는 것이고, 돌이켜 비추는 것(返照)이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 모든 중생의 신음 소리를 듣고 되비추어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보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부른다고 했을 때, 그 가피는 관세음보살을 통해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의 지혜를 느끼는 것이겠지요. 관음의 지혜 즉 ‘너와 내가 하나’임을 체득하고 이기심의 뿌리인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가피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표현한 노래가 원통사 관음보전에 주련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보고 듣는 데 걸림이 없으면
세사에 부대껴도 그대로 삼매.
새들이 하늘을 날 때 그냥 날듯이
취함도 버림도, 사랑도 미움도 말지니.
경계에 부딪쳐도 무심하다면
그가 바로 관자재보살일진저.
聞見覺知無障碍
聲香味觸常三昧
如鳥飛空只?飛
無取無捨無憎愛
若會應處本無心
始得名爲觀自在
전등록(傳燈錄) 권5에 전해오는 사공 본정(司空本淨·중국 당나라·667-762)의 게송입니다. 번역이 조금 과감해졌습니다만, 원문 없이 읽어도 뜻이 통하려면 우리말다워야 하겠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이 노래의 뜻을 새기며 원통사 앞마당에서 전망을 살핍니다.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그리고 초안산 사이사이로 동양 최대의 밀집도를 자랑한다는 상계동 아파트 단지를 비롯한 도봉구, 노원구 일대가 눈 아래에 걸립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아등바등 싸우고 물어뜯고, 시기 질투하고,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살아가는 내 삶이 손금처럼 내려다보입니다. 핏발 선 내 목소리가 결국은 세상 문제의 출발점임을 알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르침입니다.
원통사는 도선 스님이 864년(경문왕 3)에 초창했다는 천년 고찰입니다. 이후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중창해 오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현존 건물은 근세에 지은 것으로, 관음보전과 종각, 약사전, 삼성각, 정혜료(요사)가 곱게 앉아 있습니다. 삼성각 아래에는 천연동굴에 조성된 나한굴이 있습니다. 만공, 동산, 춘성 같은 근세 고승이 수행하던 청정 가풍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현 주지인 향산 스님이 알뜰히 보살피는 도량입니다.
나는 또 원통사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사 시끄러움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곧 잊어버릴 테니까요.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정정현 부장 rockart@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