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태어남 / 1955년 2월 18일 죽음
김성수는 교육가이며 언론인, 정치가이다.
호남의 거부 경중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수학했다. 1915년 중앙학교(中央學校) 설립,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 창립,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등 민력배양을 위한 여러 사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과 1923년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32년에는 설립 이래 계속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했다. 8·15해방 이후에는 정치에 뜻을 두고 송진우와 함께 보수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한국민주당 당수, 1949년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한 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51년 제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반대하여 1952년 5월 29일 격렬한 문구로 된 장문의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이승만정권 타도에 앞장섰다.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 당선/1953. 10. 11
1953년 10월 11일 라몬 막사이사이가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루손 섬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했던 막사이사이는 그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어 루이스 타룩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의 후크발라하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는 카를로스 P. 로물로의 후원 아래 1953년 대통령 선거에서 키리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청렴성으로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그는 농업과 행정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시행했으나 보수적인 의회가 이를 지지하지 않아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변함이 없었고 그의 청렴성에 대한 평판 또한 유지되었다. 1957년 3월 그가 임기를 다하지 못한 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부통령인 카를로스 P. 가르시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되어 공익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되고 있다.
남북통일축구대회 개최/1990. 10. 11
1990년 10월 11일과 23일 남북한 축구대표팀이 평양 5·1경기장과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축구대회를 치렀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만난 남북 선수단은 남북통일축구대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팀은 10월 11일 평양 5·1경기장에서 1차전을 치르고 이후 23일에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북한 선수들을 맞아 2차전을 치렀다. 남한 축구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이회택 감독이 아버지 이용진을 만나기도 했다. 이러한 남북의 스포츠 교류는 1999년 8월 10일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축구단이 북한의 초청을 받아 다시 북한에서 축구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이어져, 민주노총의 이갑용 위원장을 비롯한 선수단 37명이 북한을 방문해 '통일염원 남북노동자 축구대회'에 참가하고 1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이탈리아의 조각가 그레코(Emilio Greco, 1913~1995) 출생
청동과 대리석을 이용하여 주로 여자의 나체와 초상을 구상으로 조각한 이탈리아의 조각가.
그레코는 13세 때 석공의 도제(徒弟)로 들어갔고, 나중에 팔레르모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943년에 로마에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명성을 얻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첫번째 개인전은 1946년에 열렸고, 1948년에는 로마의 미술고등학교에서 조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룬 주제는 평생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의 작품은 길게 늘어뜨린 세련된 형태와 뚜렷한 균형을 나타내는 점에서 이탈리아 미술의 마니에리스모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표현이 풍부하고 반짝이는 표면처리를 한 일부 작품은 자코모 만추와 마리노 마리니의 작품과 뚜렷한 유사성을 보인다.
(a. b. 1976년 발행-Drawings, 'Hope', 'Faith', c. 1974년 발행-'Nude', d. 1998년 발행-Statue, 'Girl')
아인슈타인 등 미국에 원폭개발 촉구/1939
원자탄 개발 역사에서 오펜하이머와 함께 개운치 않은 존재를 드러내는 또 한 사람의 천재는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다. 미국이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45년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폭이 떨어지기 6년 전이었다. 1939년 10월 11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받아 본 아인슈타인의 편지 한 통이 미국 정부에 핵 개발을 '진언'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사실 이 편지에 아인슈타인이 사인한 날짜는 8월 2일이었다. 그 초고를 쓴 것은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였다. 아인슈타인은 질라드와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테라 등 3명의 헝가리계 물리학자들의 간청을 받고 편지에 사인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박해를 받아 미국에 이주한 유태인이었던 이들은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폭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의 반응은 신속했다. 즉시 상임위원 3명으로 우라늄 자문위원회가 발족했다.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아 원폭 개발에 전면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 세워진 것은 1941년 12월 6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하루전 일이었다. 원자폭탄의 산실은,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앨러모연구소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1942년 말 이곳 소장에 임명돼 노벨상 급 물리학자들을 이끌며 원폭 개발을 성공시켰다.
프랑스 시인 장 콕토 사망/1963
Jean Cocteau, 1889~1963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가 1963년 10월 11일 74세로 사망했다. 1889년 파리 근교의 메종라피트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파리 사교계를 일찍부터 드나들었다.
17살 때 '콕토 시 낭송의 밤'을 열어 시단에 데뷔했으며, 20살 때 처녀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냈다.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 범위는 소설가, 극작가, 안무가, 평론가, 영화감독, 재즈 연주가 등 다양했고 재능도 뛰어났다. 사교범위도 넓어 발레 프로듀서 디아길레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화가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세속의 명예를 한껏 즐겼다.
레종도뇌르 훈장, 옥스퍼드대 명예박사,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칸 영화제 명예회장 등 그에게 부여된 명예도 그의 관심만큼이나 폭 넓었다. 호기심이 강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으나 지나친 기교로 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오늘날 칸 영화제에서 공식 로고로 쓰이는 '종려잎'은 콕토가 1955년 그린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 사망/1963
Edith Piaf, 1915~1963
길가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굴곡진 삶의 시작이었다. 3류가수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두 달 만에 사라졌고 곡예사 아버지는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세 살 때 걸린 각막염으로 몇년동안은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10대 때 낳은 딸은 두 살에 죽었다.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불행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노래 몇 곡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그날그날 살고 있던 에디트 피아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세 때였다.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란 이름으로 카바레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작고 초라한 외모, 그러나 청중들은 상처받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노래에 매료됐다. ‘샹송의 여왕’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을 꿈꿨다. 사랑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럴 때면 슬픔을 노래로 달랬다. 그의 삶은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는 여정이었다. 헤비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야말로 그가 느꼈던 진정한 첫 사랑이었다. 그러나 세르당 마저 비행기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자 죽은 연인을 위해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찬가’였다.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은 ‘장미빛 인생’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잇따른 자동차 사고와 마약 중독은 서서히 그의 몸을 망가뜨려 결국 1963년 10월11일, 48세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평생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조금 전 피아프의 죽음에 “그녀는 방랑의 여로를 다한 배”라는 애도의 말을 남겼던 콕토였다.
그밖에
2000년 이영섭 전 대법원장 사망
1999년 99서울 NGO(비정부기구)세계대회 개막
1999년 귄터 블로벨, 세포내 단백질기능 규명으로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8년 '뚱뚱이와 홀쭉이'의 뚱뚱이 역을 맏은 코미디언 양훈씨 별세
1996년 마이클 잭슨 첫 내한 공연
1996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출생
1994년 북한, 단군릉 복원 준공
1993년 로버츠-샤프 박사, 절단유전자 발견으로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1년 소련 KGB 해체
1989년 항공우주연구소 발족
1976년 신안 앞바다서 중국 송(宋)-원(元)대 유물 인양
1974년 일본,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
1973년 문화예술진흥원 개원
1969년 소련, 소유즈 6호 발사
1968년 미국, 아폴로7호 3인승 우주선 발사 . 궤도진입 성공
1963년 유엔총회서 남아(南阿) 인종차별 비난결의안 가결
1962년 제2회 바티칸공의회 개최
1962년 인도네시아 군중, 아시아경기대회 문제 불만으로 일본대사관 습격
1960년 4.19혁명 유족과 부상학생, 국회의사당 점거
1958년 미국 달 로켓트 파이오니어 발사
1957년 북한, 휴전선서 남북교역을 제의
1955년 라오스 정전협정 성립
1950년 중국군, 티베트 진군 개시
1949년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원폭실험 중지 제안
1939년 아인슈타인 등 미국에 원폭개발 촉구
1928년 독일 비행선 대서양횡단 성공
1916년 원불교 개교
1915년 프랑스 곤충학자 파브르 사망
1912년 영국-프랑스, 해군군사협정 성립
1909년 진고개에 가스관 매설공사 착공
1904년 민속학자 송석하 출생
1899년 보어전쟁 발발
1896년 민비, 뮈델 주교에게 세례 받음(민 마리아)
1885년 프랑스 작가 모리아크 출생
1592년 임진왜란 진주대첩
1453년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발발
1335년 조선 태조 이성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