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성인기2 (음식이란 단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다.)
온갖 방법을 해봐도 효과가 없다. 나를 비롯해서 가족들은 점점 지쳐갔다. 학교생활은 여전히 컴퓨터실에서 혼자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루는 어떤 한의원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아토피를 음식으로 나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의심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먹어왔던 음식.. 이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후 나는 음식이란 단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한의사는 채식(유기농)을 권했는데, 난 스테로이드를 극단적으로 끊은 것처럼, 그날이후 난 채식을 극단적으로 하려고 맘 먹었다.
하지만 기존의 식습관을 변화한다는게 생각보단 쉽지 않았다. ‘조금은 먹어도 괜찮겠지.’ ,‘한번쯤은 괜찮겠지?’ 란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간헐적인 육식습관과 오염음식습관은 아토피를 잘 낫게 하지는 않았다.
ROTC에 합격한 나는 ‘운동’이란 아이템을 내 생활에 자연스럽게 접목시킬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채식을 하면서 운동을 하였다. 주로 달리기를 하였는데, 수업을 빼먹으면서 달렸던 것 같다. 근데 이 운동이란 것을 한 이후 피부는 전 보다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음식탓일까?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 아직 남아 있는 걸까? 운동을 해도 근본적으로 치료는 안 되었다. 답답했다. 당시의 상태를 기술하면 검은 얼굴에 굵은 태선화, 가려움은 여전했고 각질과 진물도 여전히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학4년까지 일상생활을 할 정도로만 아토피를 다소 호전시켰던 거 같다.
5)군인시절 (내생에 최악의 상황)
군대음식은 기름져서 이내 내 몸은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다.
신입소대장 때는 선배장교들이 마련하는 술자리가 많다. 불가항력적으로 참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곳 술과 각종 기름진 음식.. 치킨, 깐풍기, 탕수육, 자장면, 수육, 등에 자연스레 노출되었다. 과거 유년기, 청소년기에 내가 즐겁게 먹었던 그 맛의 향수가 그리웠던 걸까..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3개월만에 내 인생을 통털어 가장 심각하게 아토피가 심해졌다. 국군OO병원으로 급송되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한단어로 ‘지옥’이었다. 의가사제대를 꿈꿨지만, 마침 그 병원에서 군비리사건이 터지는 바람 전역기준이 매우 깐깐해져서 못했다.
군의관의 간단한 처방?으로 난 한달 보름 후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군의관의 스테처방: 주사, 먹는 약, 바르는 약.. 얼마나 센 약을 주었는지 모른다. 아마 당시 나의 상태로 봐선 최고등급으로 처방하였을 듯,, 하지만 대학 때 스테로이드의 위험성을 너무나 강력하게 깨달았던 것일까? 당시 간호장교는 환자가 약 먹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는데, 먹은 약은 입에 머물고 있다가 간호장교가 나가면 뱉었고, 바르는 약은 물로 씻어내었다. 하지만 주사는 맞은 것을 빼낼 수 가 없었다. 그 찝찝함이란.). 피부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역시 스테의 힘이란..)
퇴원후 ‘군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란 생각으로 가득찼다. 도저히 피부가 낫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대학생활 때 채식위주의 생활을 하였더니 좋아졌지!’ 난 대대장께 직접 취사를 하겠다고 하고 BOQ(간부숙소)에서 전기압력밥통 사용허가를 요청했다. 당시 화재사건이 빈번해서 허가된 것 이외의 전기기기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내 사정을 잘 아는 대대장은 상부의 허가를 받아냈다.
그때부터 나의 독자적인 취사생활은 시작되었다. 현미밥은 직접 지어먹었고 집에서 붙여오는 채식위주의 반찬으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채식 위주'라 함은 어머니께서 뻐 튼튼하라고 멸치반찬을 주셨기 때문이다...사실 멸치 먹는다고 뼈 튼튼해지는 것은 아닌데..암튼 어머니는 이 못난 아들이 먹는 것에 요모조모를 걱정하였으리라..)
그리고 ‘음식’이란 단어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건강과 음식관련 서적을 100여권 샀는데, 내가 여태 몰랐던 내용 즉, 우유 등 유제품의 유해성, 육류 및 생선의 폐해, 가공식품을 비롯한 인스턴트식품의 유해성, 도정곡식의 영양손실 등을 하나하나씩 알아가면서 식습관의 중요성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과거의 그릇된 식습관이 나를 유혹할 때가 많았다. P.X.에 진열되어있는, 과거에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과자들과 기름진 음식들과 음료들은 내 과거의 식습관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주말이면 P.X. 에 가서 제일 커다란 봉지에 마구 담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쳐! 먹었다. 미친듯이...
맛있었다.
하지만 죄책감과 두려움도 있었다. 우선 밤낮으로 아들 걱정하며 정성들여 반찬을 싸주시는 부모님께 죄송했고, 그 음식들이 아토피를 더 심하게 할 것 같아 무서웠다. 그래서 먹은 직후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토해내기도 했다.
물론 그런 처! 먹는 행사를 치룬 날 밤에는 긁고 피나는 지옥의 밤이었다.
그래도 채식을 하는 날이 많아서 몸은 견딜만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경험은 5박6일 가량의 야외훈련엔 생식을 싸갔는데, 그 훈련이 마치면 정말 피부가 좋아졌다.(물론 몸무게는 많이 빠졌지만..)
이렇게 해서 2년 4개월의 군생활 동안 다시 어설픈 채식으로 내 몸은 어느 정도 좋아졌지만 아토피로 벗어나진 못했다.
6) 전역후 (모든게 귀찮다)
취직을 하려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3번의 낙방. 남은 것은 다시 극도로 심해진 아토피와 극도로 약화된 내 몸뿐이었다.
성격까지 이상해진 나는 이래서는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7일간의 단식을 했고, 3개월간의 완전현미떡으로 급한 불을 껐다. 그리고 영어를 배우면서 성격을 밝게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토피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극심한 가려움과 간헐적인 진물... 지켜야지하면서도 의지박약으로 지켜지지 않는 식습관!
그러다가 30살 되던해...
지쳤다.
아무 희망이 없었다. 뭔가 해보고 싶어도 이젠 의욕이 없었다.
음식의 중요성, 운동의 중요성 물론 안다. 하지만 지친상태에서는 식상할 뿐이다.
귀찮다! 모든게 귀찮았다.
한편으론 이러다 나도 모르게 자살하거나 죽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에 두려웠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것은 해외도피!
마침 필리핀에서 적외선광선으로 아토피를 나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아주 빠르게 출국을 준비해나기기 시작했다.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냥 그곳으로 날아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는 당연했고, 난 그 광선으로 나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나은 사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은 사례가 생각보다 만족치 못한 것을 발견하고, 난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출국 5일을 남겨두고 비행기를 취소했다.
7) 공황상태...(하지만 다시시작!)
공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내 이성은 이 공황상태를 잘 극복해준 것 같다. 이내 나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과연 어떻게 아토피를 낫게 할까?’
이 생각을 기반으로 아토피를 극복한 사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쪽지나 메일로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직접 전화를 걸거나,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나은 경험담을 들었다. 때로는 직접방문을 하면서 두 눈을 마주보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당시 전화비와 교통비 꽤 나왔다.
가급적 병원의 도움을 받거나 돈이 많이 드는 방법은 지양했다.
당시 내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