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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記
-나의 문학, 나의 시, 나의 내력
박 희 용
「풀씨가 날아와서 뼈를 추리던 그 해 여름에 삼강나루에서 김숙자를 만나 첫사랑을 하며 시를 쓰던 못난이가 이제 달맞이꽃 짠하게 피는 금강리에 서성이다.」
편집자의 자료요청을 받고 대표작 열편을 골라서 제목을 이어보니 한 사내의 남루한 내력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주어진 이야기꺼리가 <나의 문학관과 걸어온 길>이나, 사실 반백이 되도록 변방에서 우짖는 한 마리 새로서 내 시나 인간 됨이나 문학관이나 걸어온 길이나 모두 소슬하지만, 입춘을 앞 둔 겨울의 끄트머리에 문학마실을 지나가는 글 나그네여 촌장님이 이왕 멍석 깔아주었으니 심심풀이로 넋두리 한 마당 슬쩍 들어보시려나.
누구에게나 살아오면서 기억에 진하게 남는 몇 개의 장면이 있다. 특히나 시인에게는 유년의 기억이 창작의식의 팔 할은 차지하고 있는 것, 내 비록 시골에 사는 무명시인이지만 그래도 사십여 년 동안 시 비슷한 걸 긁적이거나 시를 써 왔으니 어찌 그 중에는 시적 느낌이 반짝이던 장면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제일 처음으로 감각의 화면에 또렷하게 찍힌 장면은 대여섯 살 때 문득 본 고향 냇물 소천의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설레는 현상,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그 이후 도처에서 만난 물결의 일렁임은 그것만 같지 못했다. 두 번째는 마을 앞 쏘로 아장아장 물놀이 하러 걸어가는 아이에게 쏟아지던 그 한 여름 날 땡볕. 세 번째는 중학교 시절에 소를 풀어놓고 풀밭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즐거움. 네 번째는 스물한 살 때인 1974년에 안동 문화회관 근처를 걸을 때 “저 옥상 위로 비둘기가 나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라 갈파하던 삼십대 초 젊은 소설가 김주영.
이러한 원초적 감각을 더듬이로 삼아, 내가 삶의 즐거움을 시 쓰기에서 찾게 된 연원을 거슬러 올라 생각해보니, 고향과 독서와 일기장이란 세 개의 키워드가 나온다.
나는 고향을 유난히 탔다. 1954년 6월 한여름 날 오전에 우주 은하계 태양계 지구 동북아시아 한반도 남부지방인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태백산이 남으로 가지를 뻗어 각화산, 왕두산, 형제봉 등의 높은 산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 정기가 송진방울처럼 떨어져 응결된 무학봉의 바로 아래 곳진마을에서 태어났다. 舞鶴峯은 이름 그대로 ‘춤추는 학’이다. 태백산맥 속 첩첩의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작은 산이지만 주위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 녹색 털빛의 한 마리 춤추는 학이다. 유년시절을 고향산천의 1급수와 맑은 솔바람 속에서 멋지게 놀았다. 그런데 웬걸 소천국민학교 2학년 때인 1961년 6월 초 장마기에 갑자기 강원도 황지로 이사 간다는 게 아닌가. 해바라기는 아직 어렸고 나팔꽃은 열매가 달렸기에 여동생과 함께 급히 담장 위의 덜 여문 나팔꽃 씨를 따 모아 챙겼으나 막상 이사 간 곳은 온통 시커먼 탄흙뿐이어서 심을 곳이 없었다. 황지로 이사 가서는 고향의 산천을 늘 그리워하였다.
독서는 만화부터 시작되었다. 황지국민학교 4학년 마칠 때까지 방과 후엔 놀이하고 저녁에는 만화책 실컷 보느라 집에서 숙제를 해본 기억이 전혀 없을 정도로 원 없이 자유분방했다. 소풍날 모처럼 생긴 용돈으로 오후 귀가 길에 만화방에 들렀다가 아차 싶어 정신차려보니 밤 10시, 학교와 집에서 아 찾아 난리가 나기도 했다. 어른들은 공부는 안 하고 만화만 본다고 꾸중했지만 그 당시는 만화가 꿈의 세계이자 교과서였다. 또 집에서 신문을 보아서 사진, 시사만화, 기사 등을 눈빛 반짝이며 읽었다. 이사 온 며칠 뒤 신문에서 본 색안경 박정희, 얼룩무늬 차지철, 훌쭉이 박종규 세 쿠데타 군인들이 떡 버티고 선 사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5학년이 딱 되어선 그만 학교 도서실에 붙잡혀버렸다. 복도를 지나다가 ‘도서실’이라고 해서 호기심이 생겨 들어가 몇 권 뒤적거리다가 그만 눌러 앉았다. 만화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5학년 내내 수업시간만 마치면 도서실에서 앉아 뭉갰다. “야야 선생님 퇴근시간이다”라는 도서 선생님의 말씀에 깜짝 독서삼매에서 깼다. 6학년 때는 수업시간 마치고부터 저녁 8시까지 촛불 켜놓고 입시공부 하느라고 도서실에 못 갔다. 북적북적 시장 같은 학교였지만 삼면이 책으로 꽉 찬 도서실이 있었음은 탄광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장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의 배려이리라.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이 때 나는 중요한 두 가지 선택을 했다. 하나는 이름이고 하나는 중학교였다. 원래 아버지께서 지은 이름은 ‘박일용’인데, 반농에다 목상 사업에 바빠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했단다. 며칠 뒤 면사무소에 가서는 아버지의 부탁이 생각났으나 적는 데 기억이 가물가물, 성는 박가고 형이 무슨 용인데 용인데 하다가 그만 ‘박희용’으로 신고하고 말았단다. 그리 불리며 살다가 1965년 겨울에 중학교 원서에 붙이는 호적초본을 떼 보니 이름이 달랐다. 아버지께서 “야야 니 이름을 어느 것으로 할래?”하고 묻자마자 또 호기심에 그만 “희용으로요”. 아버지께서 “니 이름은 면장이 지었다”라고 하셨다. 새 이름이 신기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하니 이름이 중요했다. 본 이름인 ‘일용’이었다면 ‘뛰어나게 일과 녹이다 용’이라는 뜻이고 부르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뚜렷한 느낌을 줘서 그런대로 괜찮은데, ‘기쁘게 녹이다’라는 모호한 뜻을 가진 ‘희용’이다보니 뜻이나 발음이나 히비리 한 게 내 육십 평생하고 똑 같다. 뿐만 아니라 시도 히비리한 게, 이 나이 되도록 좋은 시 하나 못 썼다. 이제 공적으로 ‘박희용’으로 안 써도 되니 본 이름 ‘박일용’을 찾는 개명신청을 할 작정이다. 그러면 시가 좋아지지 않을까?
두 번째 선택은 귀향이었다. 열세 살 때 부모 형제 곁을 떠나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 큰집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나팔꽃씨를 심을 수 없는 검은 탄광촌이 왜 그리도 싫었는지, “야야 일용아 니 소천중학교 갈래 황지중학교 갈래”라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단번에 “나 소천 갈래요” 했다. 이후부터 결혼 때까지 15년 동안을 혼자 생활했다. 이때부터 고독은 내게 편했다. 모든 선택을 나 혼자 해야만 했다. 반백이 된 지금이야 태백시로 개명한 황지가 아련한 추억의 땅이지만 40대 초까지만 해도 황지 하면 비서정의 시커먼 땅이었다.
탄광촌을 떠나고 싶다는 소원은 이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보낸 중학교 시절 3년은 목동이었다. 시골에서 알부자 소리를 듣는 큰집엔 아들이 없었다. 머슴이 한 사람 있었지만 오후에 소를 먹이는 소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집안 간의 합의로 내가 가게 된 것인데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고향 간다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별수 없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소를 먹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오후 시간이 없었다. 학교 시간 외에는 친구들과 놀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책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다행히 도서실이 있어 매일 들러 책을 빌려서는 소 먹이러 가면 소는 저만치 풀어놓고 풀밭에 엎드려서 책을 읽었다. 한참 읽다보면 소가 안 보여 멀리까지 찾아다니기도 했다. 입학 때는 촛불 입시공부 덕분에 수석합격 했지만 졸업 때는 가정학습을 못한 탓에 5등 이었다.
내가 시를 처음으로 읽고 느낀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62년이었다. 그 땐 여섯 살 위인 큰형이 큰집에서 소천중학교를 다녔는데, 명절이나 제사, 방학 때에 큰집에 가면 중학교 교과서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도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시와 산문들이 생각난다. 그 때 월북문인인 이태준의 이름도 알았다. 또 형이 보던 문예지 『학원』을 이불 덮고 엎드려서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요즘도 이불 덮고 엎드려 시집이나 문학지를 읽는 시간이 가장 흐뭇하다. 여자보다 훨씬 좋다.
요즘으로 치면 선행학습이랄까, 하여튼 중학교 국어책을 읽고 감동을 많이 먹었다. 지금도 그 때의 시 <향수>, <고향길>, <저녁산>를 외워내고, 소년 소녀의 풋사랑이던 희곡 스토리가 생생하다. 가장 깊게 감동 먹은 시 <향수>, 바다/ 저 편에 산이 있고// 산 우에/ 구름이 외롭다// 구름 우에/ 내 향수는 조을고// 향수는 나를/ 잔디밭 우에 재운다. 4연 8행의 작은 시이지만 강원도 탄광촌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가슴에 던져진 충격은 대단했다. 요즘은 토종인 유행성출혈열과 80년대 중반에 일본열도에서 이사온 쯔쯔가무시 때문에 함부로 눕지 못하지만, <향수>를 맛있게 먹고 난 다음부터는 가끔 풀밭에 누워 흰구름을 보며 그에 맞는 형상을 그려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이름을 모르다가 수십 년 뒤인 90년대에 시인을 겨우 찾았다. 미래사에서 발간한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8 김용호 시집 『주막에서』. 1921년 경남 마산 출생, 1938년 「맥」동인, 1941년 첫시집 『향연』(흥아사)을 동경에서 간행, 1946년 예술신문사 주간, 1948년 시문학사 주간, 1968년 단국대 문리대학장, 1973년 사망. 1983년 『김용호시전집』(대광출판사) 간행. 혹자들은 정지용의 <향수>를 치지만 내가 볼 땐 그건 별로고 김용호의 <향수> 44자 시어야말로 절창이다. 이런 덕분인지 시로서 처음으로 받은 상은 1학년 봄 백일장에서 <꽃>이란 시로 입선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좋은 책을 많이 읽었다. 도서실에서 빌려서 본 『얄개전』같은 책은 나로 하여금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인생관을 갖도록 하는 데 일조 했다. 또한 2학년 방학 때엔 황지 집에 가서 황지고등학교 도서부원인 중형이 가져온 두꺼운 원본 『부활』과 『동키호테』를 몇날 며칠 침식을 잊고 독파했는데, 그만 책 속의 주인공 두 사람이 내 성격의 양면을 이루고 말았다. 이후의 인생에서 기본적으로는 네휴르도프이다가 객기가 치받으면 동키호테가 되어 난조를 이루는 경우가 흔했다. 거기에다가 혼자 놀다보니까 햄릿도 친구가 되었다. 책 속 등장인물에게서 즉각적인 영향을 받다보니 그만 다중 성격이 되었다. 평생토록 비비안리를 연모하는 것도 카츄샤 이미지 때문이었다.
나쁜 영향을 끼친 책들도 많이 읽었다. 철암탄광의 광부인 4촌 매형 될 사람이 가져온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 새벽길 등 등 야한 책 한 스무 권을 정신없이 통독해버렸더니, 그 게 지금까지 영향을 끼쳐 연중 몇 번씩 풍만한 주막주의에 빠지도록 한다. 또 학교 도서실에서 빌린 『보나팔트 나폴레옹』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히틀러의 『나의 투쟁』 등의 책을 읽은 탓으로 소를 앞산 기슭에 풀어놓고는 마을 뒷산 무학봉을 내려다보면서 ‘나폴레옹의 모자를 닮았구나’하는 상상을 많이 한 탓인지 여학생들이 부르는 별명이 ‘육사생도’였다. 이러한 책들이 끼친 영향이 사십대 초까지 남아 가끔 오만스런 소영웅주의에 빠지게 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독서 행태가 작용 했는지, 해마다 교내 웅변대회에 단골 연사로 출전하여 반공과 북진통일을 무아지경에서 목 놓아 부르짖었다. “외칩니다! 소리 높여 외칩니다!” 하다보면 짝짝짝 박수 소리에 섞여 “딩동댕” 시간 오버였다. 1등은 한 번도 못하고 주로 2, 3등이었다. 원고는 내가 직접 썼다. 국어 선생님이 보시더니 “너 이 원고 형이 써 주었지?” 했다. “아니요, 제가 썼는데요”해도 믿지를 않았다. 큰형이 고대생이란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소년시절의 두뇌는 스펀지와 같아 눈에 들어오는 대로 무조건 저장한다. 그 저장된 지식과 경험을 평생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시켜서 풀어먹으며 산다. 내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친 독재자들의 전기와 야한 대중소설이 밉다. 누나를 여자로 만들기 위해 외설담을 한 아름 가져다 준 매형, 시골 중학교 도서실에 왜 그런 책들을 사들여 놓았는지, 도서 담당 선생님의 안목이 지금 생각하니 원망스럽다. 이 사촌 매형의 아버지는 육이오 때 재산군인민위원장이었다고 한다. 수복 되고서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어머니는 소천 산성마을 박씨에게로 개가, 어린 아들은 재산의 일가집에 의탁해 살다가 스물 가까이 된 67년경에 생모의 주선으로 우리 큰집에 머슴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후 1972년 재수 때에 육사 33기 입시에서 1, 2차와 면접까지 통과 했는데 떨어졌다. 면사무소 다니는 친구 말을 들으니 연좌제에 걸렸다고 한다.
소천 두메 촌놈이 대처 영주에 나와 영주종합고등학교에 다니며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근근이 생활하였다. 학교 도서실도 없고 생활비가 빠듯하다보니 독서보다는 일기장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후 낭인시절, 교대시절 내내 돈 몇 푼 여유 있으면 주로 포켓용 문고판을 사서 읽었다. 이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책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고대인도철학서인『우파니샤드』, 노자의 『도덕경』, 『릴케시집』, 『괴에테와의 對話』등이다.
사십대 이후 경제력이 생기고부터는 지적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인터넷서점에서 사 모은 책으로 서재를 꾸며놓고 지긋이 바라보며 ‘아! 나도 인텔리로구나.’라며 자위하는 게 사는 낙이다. 젊어서는 문학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자연과학 분야의 책은 안 보았는데 10년 전부터는 생물학, 분자생물학, 유전학, 지구과학, 물리학, 천문학, 우주학, 화학 등의 과학 분야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무릇 시와 글을 쓰려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공부해야만 종합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일기장은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쓰기 시작한 일기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햇수로 47년이고 대학노트로 모두 108권인데 각 권마다 ‘黽鳴 맹명’, ‘洛江’, ‘華然’, ‘進化’, ‘湛然’, ‘華嚴’ 등의 그 당시의 화두를 담은 제목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름을 탐하지 말고 더욱 겸허한 배움의 자세를 갖자’라는 뜻으로 『無名錄』이라 제목 하여 쓰는 중이다. 일기를 쓰긴 중1 때인 1966년 3월부터였으나, 1970년 봄 어느 날 그만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정신과 육체의 갈등 때문이었다. 일기란 게 자기 반성인데, 중학교 때는 몰랐으나 고1 때 강 머시기 친구와 함께 자취하면서 배운 용두질 대문에 무척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짓은 교과서에서 배운 도덕심과는 상극이었다. 자제하고자 무척 노력하였으나 그 버릇은 전혀 양심과 체면이 없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형의 중학교 도덕책을 몇 번이나 읽으며 표지를 싸서는 <인생독본>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도덕관념에 투철했는데, 수음이라니,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육체의 욕망조차 막지 못하는 자가 무슨 일기를 쓸 수 있는가라는 자괴감에서 그만 불을 놓고 말았다.
새로 시작한 고2 때인 1970년의 제1권의 제목은 『인생논문』이다. 첫 일기인 1970년 5월 7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씨는 雲. 四年 間 記錄했던 日記冊이 태워 없어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人生무상, 좋은 생각이야. 인간이 삶에 있어서의 궂은 일, 좋은 일이 최후에 도달할 목표는 차가운 영과 肉의 멸망이 있을 뿐, 死 후의 쟁쟁한 명예가 주검에겐 무슨 소용이 있을 소인가? 生前이나 死 후의 편안함을 위함이라면 人間은 모두 利己主義者가 아닌가? 가장 두려워하는 人間의 마음이라 古로부터 내려온 모든 철학적 예술이 아직도 모든 이치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까? 말이 무서웁다. 눈이 무섭다.」
군대에서도 숨겨 일기를 쓸 정도로 일기 쓰기는 나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내 일기는 하루 일과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요 느낌이요 사상이요 시의 들판이다. 깊은 밤에 생각과 느낌을 술술 산문으로 쓰다보면, 간수를 치면 두부가 엉키 듯 생각이 엉켜 시가 된다. 요즘은 컴퓨터가 있어 작업이 쉽지만 전에는 몇 장씩 넘겨쓰면서 퇴고를 했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새벽 서너 시, 한 편의 시를 만든 즐거움에 피곤한 줄 몰랐다. 두 상자 쯤 되는 일기장은 이어서 말할 습작기의 공책시집과 함께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아주 든든한 원천이다. 옛 시절이 생각나서 가끔 펴 보면 유치가 찬란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의 자산이다. 시간이 나면 이 둘을 차근차근 정리하여 비매품으로 발간해서 지기지우들에게 증정할 작정이다. 돌아갈 때는 무명보자기에 곱게 싸서 관속에 넣어 함께 보내달라고 당부할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초기 습작병을 앓게 되었다. 거기에는 내적 요인이 많았지만 외적 요인도 작용했다. 우선 과 선택에 대한 후회가 심각했다. 소천 중3 촌놈이 영동선에서 만난 영주종고 3학년에게서 들은 “화공과가 제일 쎄다”라는 말을 덜컥 믿고 입학원서에 ‘화공과’를 쓴 바람에, 과 수석으로 입학은 했지만 ‘아이쿠 잘못 했구나 여긴 진학이 아니라 취직인데’라는 후회로 화공과 공부를 접고 참고서를 따로 사서 3년 내내 진학공부를 홀로 했다. 그러다보니 학교 안 가는 날이 많았고, 자취와 독공 등으로 고독한 소년기를 보내게 되었고, 그 고독이 향하는 곳은 일기장이었다. 일기를 쓰다 보니 가끔 운문형식을 띄게 되었고, 그것을 따로 정리한 것이 바로 공책시집이다. 결론하면 화공과 선택이란 한 순간의 실수가 평생을 좌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쎄 보통과에 갔다면 아마 어느 정도 성공은 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 성공이야 풍요할 수 있지만,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세계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은 시인만이 알 수 있기에.
그 당시와 40대 초까지는 느끼지 못했는데, 화공과에 진학해서 배운 유익한 점 한 가지를 40대 중반 넘어 나름대로의 사색이 깊어지면서 느끼게 되었다. 무엇인고 하니 바로 유물론이다. 지금도 뚜렷이 떠오르는, ‘야 분자와 원자라니, 물질을 잘게 쪼개면 분자가 되고 더 잘게 쪼개면 원자가 된다니, 그럼 나를 깔아뭉개려고 달려오는 저 자동차도 분자로 분해하면 금방 흩어지겠네’라고 생각하던 때는 화학 공부를 처음 배운 1969년 봄날이었다.
청춘시절에는 정신의 가치, 즉 도덕 우위의 관념론이 절대적이고 육체적 가치, 즉 물질은 상대적인 것으로써 정신과 물질은 주종관계라고 인식했는데, 살면서 경험하고 사색한 것들이 차츰 엉키면서 유신론과 유물론이 대등한 관계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더하여 50대 중반 넘어서부터는 오히려 유물론이 본질이고 유심론은 현상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유심론과 유물론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앞으로도 변화한다.
화공과 3년 동안 일반화학, 분자, 원자, 무기화학, 유기화학, 화학물리, 물리화학 등의 개념과 원리를 배울 적에는 그냥 한갓 평면적 지식 차원에서 암기했는데, 이후에 수십 년 동안 생활경험과 독서를 통해 다양한 지식과 정보들을 축적하면서 그 때 배운 개념과 원리가 효소 작용을 했는지 몰라도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보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성리학을 깊이 천착하면서 리기론과 원자론이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갖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물질에서는 이론물리학과 실천물리학의 관계, 정신에서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얻게 된 통찰력이랄까 예지의 원천이 바로 소년기에 화공과에서 배운 원자론과 분자론이었다. 철들어 돌아보니, 조선시대 성리학의 출발점이었던 격물치지 단계가 화공과 시절이었던 것이다. 구시대 성리학자들이 격물치지 하는 방법은 화두 집중과 오감으로 통한 관찰로서 관념론 위주였으나, 나의 격물치지는 거기에다 화학 이론과 실험검증을 통한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과학이 이룬 학문적 성과와 현실세계의 현상을 기존의 성리학 이론 체계에 응용하면서, 우주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리기론과 심성론을 사색하고 인성론과 수신론, 치국론에 접근하다보니 이전의 성리학과는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선배 성리학자들이 가질 수 있는 사색의 재료는 간단했지만 나는 비교적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까지 정리한 리기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주기론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논리는 정리해 놓은 성리학 관련 논문에 있으니 독자들은 인연이 닿은 다면 일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화공과 선택이 현실적 출세 면에서 보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내 인생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소년 시절에 나름대로 격물치지기를 경험함으로써 이후의 성리학 탐구와 시 쓰기에 큰 밑거름을 장만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구시대 성리학자들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자부심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은 내 성격의 가장 큰 단점인 자만심의 소치일 뿐이고, 학문 앞에서는 더욱 겸허한 자세를 갖춰야만 더 깊은 경지를 볼 수 있으니, 자중자애하며 꾸준히 사색과 학문의 길을 걷고자 할 따름이다.
문학과 시에 대한 넋두리인데 얘기가 번져 성리학 쪽으로 나갔다. 다시 본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 소년시절에 만든 첫 번째 공책시집으로 1970년 5월에 쓴 <飽滿> 외 60편이 들어있는 『松花』가 있다. 마침 박근혜 씨가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는데, 치졸스럽지만 들어있는 한 편을 옮겨본다. 朴正熙 將軍//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잡아/ 民族을 求한 우리의 英雄// 民族의 갈 길을 제시하시고/ 찬란한 太陽 높이 든/ 五千萬 韓民族의 領導者// 뻗어가는 國力으로 우리를 감싸시고/ 숙원 祖國統一과 滿洲 征伐/ 成功하실 稀代의 男兒// 半萬年 歷史에 轉換點을 기르시고/ 번영의 생활을 주신 우리의 太陽,//아, 榮光되어라/님이여, 千年을 노래하소서. (1970년 10월 6일).
11년 째 공교육을 받는 열일곱 살 소년의 눈으로 본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그랬다. 다른 통로의 지식과 정보는 전혀 보고 들을 수 없었다. 그 때가 아마 3선 개헌 직후였겠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유신총통제를 선포하고,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궁정동 안가에서 권총 몇 발에 생을 마감했으니, 3선으로 딱 마쳤다면 후세 역사에 두고두고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을. 2013년부터 5년 동안 펼쳐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 본인이야 얼마나 많은 감회가 서렸으랴. 아무쪼록 선친의 공과 과를 잘 분별하여 공은 늘이고 과는 보충함으로써 부녀 모두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기시라. 민주주의 선거 마쳤으니 찬반을 초월하여 이젠 덕담을 쌓아야지 안 그러면 국민들이 고달프다.
두 번째 공책시집은 고3 때인 1971년 1월 1일에 쓴 <삶> 외 66편이 들어있는 『白雲嶺』이다. 후일인 1975년 봄날 교대 2학년 때 교정에서 우연히 만난 전경 탈영병 김원섭이가 내 자취방에 며칠 눌러 살다가 이 공책 시들을 읽어보고는 다음과 같이 메모해 놓았다. 「地心은 빗물 먹고/ 나는 눈물마저 삼키지 못하는/ 4월 느즈막한 어느 날// 광인이 못내 그리워/ 광인이 못내 그리워// 어차피 正常人이 못된 우리/ 자네마저 그리운/ 이 날/ 돌아와 주게/ 내 곁엔 지금/ 허무뿐인데// 태산이 무너지고/ 지구가 날/ 배신할 적에// 나는 울었네/ 나는 슬펐어라// 못내 그리운/ 情아// 당신마저 날/ 버린다면// 나도/ 날 버려야겠네.
小時쩍/ 할아버지네 초가 처마 끝을/ 날아든 제비 한 쌍은// 그 땐/ 버들피리 불며/ 너와 내가 한 덩어리 되어/ 우리도 자연 속에 묻혔더라만// 오늘은/ 파멸의 창공을/ 찾아든 어리석은 짐승이 되어// 자연으로부터 추방당한/ 天刑의 죄인이 되어// 형극의 가시밭길을/ 함께 헤매는/ 고통스런 同伴者가 될 줄이야.」
물매암이처럼 혼자 끙끙대며 쓰는 일기와 습작이 그런대로 효과를 냈는지, 교내 백일장에서 두 번 상을 탔다. 2학년 때는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에서 산문부 차상으로 냄비를 부상으로 타 자취생 밥솥으로 잘 써먹었다. 3학년 한글날 기념에서는 시부 차하였다. 또 영주시 고전경연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 삼국유사를 논하기도 했다.
세 번째 공책시집은 1972년 7월 17일에 쓴 <七月 -어느 날> 외 52편이 들어있는 『望鄕草』이며, 네 번째 공책시집은 1973년 4월 12일에 서울 남산공원에서 쓴 <슬픈 사람들> 외 50편이 든 『龍頭山』이다. 이때는 2년간의 낭인시절로서 쓴 장소를 보면 남산공원, 야간열차, 용산역, 효창공원, 술집, 역, 산 등인데, 보통사람들이 보곤 ‘저 인간 좀 이상하네’라고 할 정도로 하여튼 많이 긁적거렸다. 우리 시절엔 역이나 공원 구석진 곳에서 뭔가 메모하는 청년들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전혀 볼 수가 없다. 혹여 본다면, 좀 쉬다 하라며 맥주 한 캔 사 주겠다.
출구 없이 속으로만 휘몰아치는 습작기 동안 비비안리가 나의 애인이었다. 그녀의 잡지 사진 한 장을 어찌 구했는데 오른쪽 머리칼 색깔이 좀 희미해서 검정 볼펜으로 공들여 덧칠해서 공책에 척 붙여 놓고는, 美女訟// 白雪 같은 살결 위에/ 방금 뿜어나올 듯한 간드러운 유방 위에/ 그리운 날을 헤는 思索이 散步하고/ 예지에 빛나는 눈은 사랑을 갈구한다// 요염한 미소, 太古의 정적을 깨치며/ 火山처럼 터져 나오는 女人의 欲情,// 世上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입술은/ 이제 새로운 甘泉을 찾아 간다// 純白으로 빛나는 보석,/ 윤기 흐르는 긴 흑발 휘날리며/ 東原을 갈 때 天地는 감격했었다/ 오직 당신만이 人生의 化身이라고,// 침중한 餘白에 싸여 흐트리는 분위기,/ 하얀 얼굴은 하루를 다듬는 정원,/ 太古의 꿈을 꾸며, 신비로운 미소 띄우며/ 人生을 간파한 女人의 눈은/ 黃昏에 작렬하는 落照의 사연. (1973년 9월 1일).
스물한 살 때인 1974년부터 여러 문청들과 어울리면서 지긋지긋한 중기 습작병을 제대로 앓기 시작했다. 거대한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낙동강이 흐르는 안동에서 2년 반 동안 화려하게 펼쳐졌다. 어영부영 두 해를 낭인신세로 보내고, 고3 때와 재수, 삼수의 낭인시절 때 그 어려운 예비고사에 매해 합격해 놓고도 대학 입시는 안 보고 꼭 병든 장닭처럼 비영비영하다가 징병검사를 받는 해인 1974년에 인근도시에 있는 안동교대에 들어갔다. 그것도 꼭 국민학교 선생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정형편 상, 군대 안 가려고, 우유부단한 기질 때문에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자아와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성 카오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그 불안은 사춘기와 청년기 7년 반 동안 모질게도 나를 갉아댔다.
나만 습작병을 앓는 줄 알았는데 안동에는 동병상린 하는 청춘들이 많았다. 첫사랑에 홀려 학보사와 일요문예동인회에 들어가면서 교육대학과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청과 문인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나보다 10년 정도 연장인 김주영, 김원길과 6년 정도 연장인 임명삼, 임병호, 김진택, 임관혁, 김지섭 등이 있었고, 교대 동기, 선배들로는 아래 위 두세 살 차이로 권석창, 황근식, 김선굉, 오승강, 주영욱, 서정오, 권보혁, 안태준, 이중현, 권오범 등이 있었다. 교대생이 아니고 안동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경서가 나보다 두세 살 적은데도 처음부터 말을 놓고는 함께 어울렸다. 각자들의 소속 문학모임은 안동문협, 글밭, 일요문예동인회, 맥향이었다. 우리는 주로 구시장 주점과 복개천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참 많이 마시고는 떼로 낙동강 가에 있는 육사시비에 가서 대성통곡을 한 다음에 백사장에 퍼질시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그 때 술값은 학보사 원고료가 주로 쓰였다. 당시의 화제 가운데 하나가 ‘명작의 고향’이었다. 저마다 나중에 자기 고향이 ‘명작의 고향’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올 거라고 자랑하였다.
그 당시에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던 사람들일수록 이후 이름이 차츰 빛나기 시작하더니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 보면 한국시단에서 중진으로 각자 위치하고 있다. 교육대학과 초등학교 교단이 갖는 특성과 한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와 동화 쪽으로 흘러갔지만, 문청시절부터 자유시를 고수한 시인들은 결국 자유시인으로 이름 석자가 남았다.
다섯 번째 공책시집은 1974년 4월에 성은 김이요 이름은 QJ에게 바친 첫 시 <솔꽃이 피는 고개> 외 31편이 들어있는 『虛無魂』, 여섯 번째 시집은 <이 아침의 혁명 -그대를 그리며>외 31편이 들어있는 『心井』, 공책시집의 제7권은 주로 1975년에 쓴 시로 <東風賦> 외 40편이 들어있는 『靑銅衰』이다. 그런데 앞에 1~4권까지는 그런대로 평온한 정서적 습작풍이었으나, 5~7권은 그만 <솔꽃이 피는 고개> 이후부터 폭발한 첫사랑의 광풍 때문에 시 꼬라지가 피철갑이었다. 매친 듯이 맨날마다 써서는 학보사에서 만날 적마다 주었더니, “박희용씨 나중에 시인되면 한턱 내야되요”라는 딱 한 마디가 돌아왔다. 그녀에게 써 바친 혈시가 모두 한 100여 편? 나에게 닥쳐온 첫사랑이 남들만큼 아팠지만, 40년이 지나도 아직 시인이 못 되었으니 한턱 낼 날짜가 아득타. 그래서 기분이 흐리면 ‘동심초’를 즐겨 부른다.
「獻詩 솔꽃이 피는 고개/// 花冠의 님아/ 솔꽃이 필 때면/ 목 메이는 나그네/ 내 돌아가 살 땅을 주오// 영원한 세월의 江이/ 야리게 일렁이듯/ 내 그리워 할 影을 주오// 당신의/ 화사한 웃음이 사라진/ 龍鄕原의/ 쨍쨍스런 하루는/ 꼭꼭 눈물만 찍어내더이다// 하냥/ 남으라시면/ 당신의 映像을 손질하오며/ 千年이고/ 萬年이고/ 울잖고 기다리오리다// 花冠의 님아/ 먼 먼 훗날에/ 호호백발 할미 되어/ 솔꽃 피는/ 이 고개를 넘을 때면/ 불현듯/ 오늘이 그리울 게외다」
솔꽃은 해마다 피지만 이놈이나 그년이나 호호백발 다 되어 가니, 하루하루 짙어지는 치매끼 땜에 불현듯 그리워할 서정이 없음.
2년 동안 90학점을 이수해야 할 교육대학생이 훌륭한 국민학교 선생이 될 생각은 안 하고 ‘스트럼 운트 드랑크’만 즐기다 보니 교대공부를 팽개친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느라 끙끙대고, 설상가상으로 유신독재정권이 한창 독이 올랐을 때인 1975년 5월, 당시 꽤 잘 팔리던 『문학사상』에 실린 패망한 월남대학생들의 반성문을 대학신문에 전재하라는 주간교수의 명령에 거부하다가 편집국장에서 파면되어 번민, 방황하는 바람에 1학기말고사를 안 쳤으니, 남들 다 졸업한 뒤에 한 학기 학점을 따야 할 수 있는 추가졸업은 받아놓은 사약이었다. 그 때 『문학사상』 등의 문학지가, 어용문인들이 권력에 굽혀 어떤 짓을 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그래도 앞 기수까지의 선배들은 RNTC를 했기 때문에 추졸해도 군대를 안 갔다. 그 대표적 인물이 권 모 시인으로 추졸 두 번 하고도 참으로 운이 좋아 군대 안 갔다. 나도 그걸 믿고 배짱 좋게 뻗치다가 파면당하고 시험 보이콧해서 추졸했는데, 웬걸 남은 학점 따러 후배들 낯 바시는 강의실에 성실히 들어가고, 대부분 시간은 도서관에서 좋은 시 베껴 쓰며 광기를 다스리는 중인 1976년 4월에 군대 가야한다는 청천벼락이 날아왔다. 고놈의 벼락이 어찌하여 이 시골 교육대학의 허접한 인간에게 날아왔는지 뒷말을 들어보니 글쎄, 75년 봄에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북도교육청 초도순시 왔다가는 “교육대학생 가운데 추졸자들이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고는, “무어? 장차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교육대학생이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해. 고연 놈들 당장 군대 보내!”라고 했다 한다. 부랴부랴 75년도 추졸자까지는 군대 안 보내기로 하고, 76년도 추졸자부터는 보낸다고 대구교대와 안동교대로 공문을 보냈는데, 대구교대는 방학학기를 열어 추졸자를 없앴으나 안동교대는 그 공문을 그냥 쳐박았다고 한다. 제대하고 1979년 봄에 대구교대 복학해서 공부해보니 대구교대 교수님들은 정말 교수다웠다. 반면에, 추졸 징집 대상자들을 연구실에 불러선 “군대 안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하던 그 교수 생각난다. 그 땐 그 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박정희도 대구사범 다닐 때 성적이 뒤에서 몇 번이었다 하는 걸 보니 사범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고, 문경보통학교 훈도 3년 남짓 하고는 혈서충성문을 쓴 덕택에 만주군관학교 입학해서 출세했으니 초등교육에 사명감이 별로였지 아니한가. 하여튼 유신정권 명령 때문에 편집국장 파면에다가, “군대 보내”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소중한 청춘시절 2년 동안 일주일에 6시간에다 여름방학 다 바쳐서 RNTC 군사훈련 받고도 군대에 가게 되었으니, 정말 나의 스물두 살인 1975년 을묘년은 재수에 옴 붙었다. 고2 때 <朴正熙 將軍>이란 칭송시를 썼는데도 말이다. 내가 말띠이니 토끼 한 마리가 앞에서 깡충깡충 뛰어가는 걸 심약하게 피하다가 크게 낙상한 쾌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탈영병 김원섭이가 내 공책시집을 읽고 예언한대로 <광인, 허무, 천형의 죄인, 형극의 가시밭길>을 따라 1976년 6월 21일 밤 포항역에서 논산행 입영열차를 탔다. 고3 때는 교대 가기 싫었고, 징집신검 전해엔 군대 가기 싫었다. 가정 형편과 나폴레옹의 모자에 혹해 육사시험은 쳤지만, 우유부단한 문학도의 특성이랄까, 부드러움과 자유에 상극인 군대에 참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군대 문제와 가정 형편 때문에 RNTC제도가 있는 교대로 마음을 굳혀 교육대학생으로 2년을 보냈는데, 결국 가게 되었다. 하여튼 중학시절에 형성된 햄릿형과 동키호테형의 이중성격 대문에 번번이 운명이 꼬였다.
입대 직전에 모진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 금정리다. 신작로 가 뉘 집 어느 여인이 심야에 라디오를 틀어 놓았나, 삼동산 우구치 아래 금정리의 밤하늘에 흐르던 ‘지고이네르 아이젠’, ‘짚시의 달’이 지금도 귀에 감미롭다. 살자, 죽는 것 보다 사는 게 훨씬 아름답다. 감정의 무풍지대인 교육대학에서 ‘라스트 로맨티스트’라고 자부하며 설쳐대던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그렇게 끝났다.
「사금파리의 유언// 내 몸이 흩어져/ 다시 모래알로 흙으로/ 돌아간다만/ 한 평생 살던/ 하늘을/ 날카롭게 금 그어/ 방울방울 솟아나던 혁명을/ 흔적 하여 다오」
「戀歌 26 철길// 마음도 하 서러워/ 별빛이 총총히 들어서는 날/ 철둑을 베고 누웠다가/ 기적소리 쯤에야 아예 놀라지 않다가/ 비로소 징징거리는 철길의 울음에/ 다섯 길 풀언덕 아래로/ 풍만한 몸을 굴리는/ 여인 있었다」
육군제2하사관학교와 육군행정학교의 훈련생활과 울산 제622고사포대대에서 군대 생활을 꼭 30개월 동안 했다. 그 동안에도 늘 시를 생각하고 책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때 『님의 침묵』을 절실하게 읽었다. 스물다섯 때인 1978년 봄에 첫 휴가 나와서 대구매일신문사에 <비비추새>를 투고했더니 4월시단에 실렸다. 아가씨들 펜레터 받을 욕심에 주소를 7232부대로 한 탓에 보안에 걸려 자칫하면 영창 갈 뻔 했다. 공책시집 만드는 버릇은 여전해서 78년 봄 작전과에서 일할 때 폐지도지로 입대 이후에 쓴 <유사.3 -패랭이꽃처럼> 외 8편을 담은 공책시집 제8권 『頓曉詩集 -패랭이꽃처럼』을 타이핑해서 만들었다. 빡쎈 훈련으로 몸과 마음이 정화되어서인지 입대 전의 광기가 사라지고 비로소 시 비슷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군대시절이란 단련기가 없었다면 1976년 여름에 분명히 정신과 육체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유사 3 -패랭이꽃처럼// 옛날 나의 할아버지 한 분은/ 황산벌에 모인 계백의 5천 결사대의 한 사람이었다/ 그날 새벽, 싸움을 앞두고/ 할아버지는 허리춤에다 자꾸 달빛을 감추고 있었다/ 달빛이 하얗게 피는 이깔나무 가지 위/ 목청이 좋은 까치 한 마리가 박자를 맞춰서 울고 있었다/ 전쟁터이라 소반에 올릴 눈물도 없는데/ 손님은 뉘일까/ 퍼올려도 퍼올려도 마를 날 아득한 이별가 너머로/ 벌판을 덮던 조상들의 죽음을/ 영기 그늘 아래 패랭이꽃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시간의 죄 없는 목숨을,/ 손님은 뉘일까/ 천지에 가득한 패랭이꽃의 죽음을 밟고 오는/ 달빛에 젖은 손님은 뉘일까 」
「생명연습 1// 그날 바람이 조금 불었다/ 죽음의 나무에는 청자빛 풀잎이 피었다 이울었다가/ 못된 사내아이가 버린 곰인형은 바람 따라 훌쩍훌쩍 울었다/ 모성의 노을 속으로 까마귀 한 마리 깍깍깍 길게 울었다/ 나는 풀잎 하나 따 물고 풀잎의 절개를 연습하면서 수백 번 엎어졌다/ 그날 바람이 조금 분 후 아무 데도 풀잎은 보이지 않았다/ 풀이란 풀은 하늘 끝까지 말아 올리고 흙이란 흙은/ 뜨겁게뜨겁게 사형되던 날」
「비비추새/// 몇 마디 언어는/ 하늘에서 풀풀풀 떨어져 내리다가/ 이윽고 비비추새가 되어 날아갔다// 환시의 하늘 한가운데/ 붉은 고추잠자리 떼가/ 수없이 시간을 뿌려대고 있었다//몇 마디 언어는/ 언덕에서 풀풀풀 굴러져 내리다가/ 이윽고/ 민들레꽃으로 피어났다// 청동의 거울무늬/ 허물어 내리는 비비추의 하늘을/ 나는/ 수없이 민들레꽃씨를 날리고 있었다」
「아침 병영// 鍾소리도 얼어/ 짧은 아픔을 토하는 겨울날 아침 병영/ 南道의 참새들은 울기도 유난하다」
「새/// 인동의/ 껍질을 깨고/ 의식의/ 가장 깊숙이/ 흩어지는 종소리처럼/ 새/ 금빛 깃 새떼의/ 행방// 성난 자정의/ 살기를 쪼아 물고/ 부활하는/ 오 새벽으로/ 날개 짓 하는/ 새/ 일천 일 만 마리/ 새의 목숨은/ 녹슬었다」
1978년 12월에 제대를 하고, 이듬해인 1979년 영남일보 3월 시단에 <필부가>, 1981 영남일보 7월 시단에 <강 언덕 너머에는> 발표로 이제 겨우 중기 습작기를 벗어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공책시집 제9권은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쓴 <風景 2> 외 65편이 들어있는 『開山詩集』이다. 8권 째인 25세부터 거친 습작기의 불안한 광풍이 잦아들더니 제9권 째인 30세 가까이 되어서야 비로소 늦깎이로 중기 습작병이 갈피를 잡았다.
「낙동강/// 낙동강 칠백리를 떠내려온/ 풀씨 하나/ 오늘은 강변 모래톱에 뿌리 내렸다/ 발돋움해도 발돋움해도 보이지 않는/ 네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꽃은,/ 이제는 떠내려가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풀뿌리 움켜잡으며/ 아비의 삽날에 찍힌 벼 포기들이/ 오늘은 강가에 벌거숭이로 누워있다/ 누가 버렸을까 국산 크림통에/ 가득히 고인 가난/ 그 아득한 마을에 큰물이 나면/ 해 긴 여름날 하루 종일/ 세월을 물레질하던 어머니// 마침내 강가 모래톱 한 구석에/ 이름 없이 묻혀/ 썩어서 무엇이 되는가 풀씨여」
「匹夫歌// 네 손에 거머쥔 한 줌 흙의/ 깊은 밤이면 흘리는 땀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네 눈에 들어와 박히는 한 더미 반도의/ 뜨거운 피 흘림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아우여 가슴을 벌리고 한껏 쬐는/ 눈부신 자유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갈매기가 끌고 가는 수평선의 끝 간 데에/ 이따금씩 분수지는/ 부끄러운 네 눈 속의 그리움을/ 너는 아직 모른다」
「강 언덕 너머에는/// 강 언덕 너머에는/ 사람이 산다/ 마을을 떠나/ 강을 향하여 등을 돌린/ 삶의 비 내리는 부분에도// 갑남을녀/ 후줄근한 이름의 사람들이 산다// 강 언덕 너머에는/ 한 뼘의 마당귀에 피어난/ 패랭이꽃의 꿈만하게/ 시간이 출렁이고// 아내여/ 삶의 풍요는 어디 있는가」
다음으로, 나의 문학활동에서 가장 기력이 왕성했다고 할 수 있는 안동에서의 『말ㅆ․ㅁ』 시절을 정리해 본다.
1979년 10월에 경산군 숙천국민학교에 발령 받아 1982년 2월까지 2년 여 동안의 경산군 선생 생활을 마치고, 1982년 봄에 안동으로 전근을 와서부터 1986년 봄에 녹전으로 전근가기까지 29세부터 32세 까지 4년 동안의 ‘말쌈문학동인시절’을 펼쳤다. 동인은 임명삼, 서정오, 권보혁, 주영욱 등 5명으로 일러서 ‘洛江五友’이라 칭하며 걸걸하게 놀았다. 각자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길안과 청송, 경산에서 생활한지 서너 해, 비록 몸은 국민학교 교단에 얽혀있지만, 교대시절에 제대로 태우지 못한 문학정열이 우리들의 가슴 가득 들끓고 있었다.
문학을 향한 작은 발걸음을 함께 다시 시작해보자는 의논을 한 끝에 장강의 뿌리가 산 계곡에서 시작하듯 우선 회보 형태로나마 동인지를 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 봄에 『同人 말씀』 제1집을 냈다. 서정오가 필경한 14쪽 원본을 안동농아학교에서 100부 정도 복사하였다. 박희용이가 숫자를 시어로 사용한 <眞理>와 <本性> 두 편의 시를, 권보혁이가 소설 <어떤 삶>과 촌평 <달라진 게 없었다>를, 서정오가 우화소설 <舜 임금의 금혼령>과 촌평 <왜 말하기가 두려운가?>를 썼다. 2집부터 제자를 ‘말’ 자와 ‘ㅆ +아래 아 + ㅁ’으로 써서 ⌜말ㅆ․ㅁ⌟으로 나타내고, 말을 쌈 싸서 먹는다는 뜻으로 “말쌈”으로 읽었다. 출판기념회는 1982년 4월 4일 예안호에서 셋이서 자기 낚시대를 호수 가 여기저기 펼쳐놓고, 낚시대에 붙인 두루마리에 쓴 현수막에다 소주잔을 부어 고사를 지내며 조촐하게 했다. 서정오의 <舜 임금의 금혼령>은 나중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곧 교대 한참 위 선배이자 안동농아학교 선생이었던 임명삼이 합류하였다. 형편이 조금 나아져 한여름인 1982년 8월 17일에 광석동 허름한 인쇄소에서 27쪽 인쇄본으로 『말ㅆ․ㅁ제2집』 200권을 냈다. 글모임의 명칭도 ⌜말ㅆ․ㅁ동인회⌟로 하였다.
제2집에는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1 誓願 2 탈 3 사람이 죽던 날 4 풀잎 5 사람의 싸움 6 傷心>, 권보혁의 소설 <사랑, 그 첫 번째>, 임명삼의 수필 <탑돌이>, 서정오의 소설 <大明天地>가 실렸다.
산 계곡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가 차츰 꼴을 갖추게 되자 지역의 문학인들과 문화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타 지역 문인들의 격려가 좀 있게 되자 용기를 얻은 동인들의 창작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동인회도 한층 태를 내기 시작했다. 2집을 어디서 보았는지 울진 후포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는 최영욱이가 합류하였다.
『말ㅆ․ㅁ제3집』은 1983년 1월 20일 영남사에서 인쇄본 58쪽으로 300권을 냈다. 동인들이 20여 권씩 나누어 가진 다음에 전국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및 안동교대시절 인연한 동료, 선후배들에게 보냈더니 많은 격려 답신이 왔다.
제3집에는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7 鬼神論 8 패랭이꽃처럼 9 元曉 10 首陽山고사리 11 全琫準 12 供出>과 <강 언덕 너머에는>, <낙동강>, <水平線> 등이, 임명삼의 수필 <下午의 風景>과 <서울과 지도>가, 최영욱의 희곡 <風土病>이, 권보혁의 소설 <통고산>이, 서정오의 소설 <뒤 따라오는 사람>이 실렸다. 1월 22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김원길, 강윤수, 최유근, 권석창, 장종규, 김진술, 최종식, 김경숙, 김근환, 김충길, 박혜경, 김종숙, 김완배, 임종우, 기영주, 임형규 등이 축하와 부조를 하는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했다. 전국에서 많은 축하와 격려 서신이 왔는데 충주의 박재륜 시인이 격려 붓글씨를 한 폭 보내왔다.
『말ㅆ․ㅁ제4집』은 자필 유일본을 내자는 서정오의 의견에 따라 책 형태의 큰 노트에다 여러 동인들이 돌려가면서 1983년 말 경에 거의 다 썼다. 다 되면 그것을 복사하여 나누어 갖자고 했는데 유사인 박희용이가 잘 챙기지 못하여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아마 포항의 안태준이에게 가 있지 않은가 한다. 청송 진보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는 주영욱이가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최영욱은 이후 연락이 없었다.
『말ㅆ․ㅁ제5집』은 1984년 7월 28일 65쪽으로 영남사에서 300부를 냈다. 제5집에는 주영욱의 시 <겨울까마귀>, <西녘구름 Ⅱ>, <노을앞에서>, <離別>, <絶望>, <幻影>, <決別>, <노을> 등이,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13 僻地에서 14 막걸리를 마시며 15 弔辭 16 강강수월래 17 뼈를 추리며 18 免賤介同이 19 覺華寺에서>가, 임명삼의 수필 <잃어버린 마을>, <단 하루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洛江五友> 등이, 서정오의 소설 <容態>이, 권보혁의 소설 <배앓이>가 실렸고, 마지막 장에 有事인 박희용의 <말ㅆ․ㅁ 5집을 펴내면서> 발문이 실렸다. <洛江五友>를 읽어 본 정보경찰이 안동농아학교로 임명삼을 찾아와 글을 쓴 의도와 동인들의 신상을 물었다고 했으나 뒤탈은 없었다.
출판기념회는 1984년 7월 28일 안동문화회관에서 오승강, 박경서, 김원길, 박인영, 이진구, 장종규, 김춘수, 기영주, 권석창, 강기석, 박성철, 박영교, 김지섭, 안태준 등이 참석하여 부주 및 축하를 해주었고, 한국일보사, 김시종, 김진태, 허형만, 박덕규, 손춘익, 구상, 이윤수, 지용옥, 강영환, 박신환, 이정룡, 방태석, 강윤수, 김필곤 등이 서신을 보내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김춘수가 문화회관에 어찌 왔다가 동인지 출판기념회 안내문을 보고 왔는데, 이미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교재로 돌려 읽었으며, 유풍에서 모여 술을 마실 적마다 성삼문의 <북소리 인명을 재촉하니/ 저승길 주막이 없어라>라는 절명시를 소리높이 읊는 우리로서는 <꽃>은 좋으나 민정당 국회의원이 된 김춘수는 영 시답잖아 대접을 거칠게 했다.
이후 1984년 말에 서정오가 대구로, 1985년에 임명삼이 대전으로, 1986년에 박희용이 녹전으로 전근 가면서 동인들이 얼굴 마주할 기회가 차츰 귀해지더니 동인활동이 소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말ㅆ․ㅁ동인⌟들 몇몇의 문필활동은 쇠약해지기는커녕 더욱 내면화, 외면화하면서 2010년대에도 그 시절의 정열을 잃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임명삼은 1985년 말에 대전으로 식솔을 끌고 이사 가서 원명학교에 근무하며 수필집 『사랑하며 영원을 사랑하며』내고는 없는 머리칼이지만 더 깎아 스님이 되어 경기도 이천에 마련한 부석암에서 『친일불교론』, 『불교사 100장면』, 『종정열전 1, 2』 등 많은 책과 『친일인명사전』의 <친일승려들> 편을 쓰면서 시공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정오는 1985년에 더 넓은 세상인 대구로 식솔을 데리고 이사 가 효성학교에 근무하면서 소설보다는 아동문학과 옛이야기를 되살리고 다시 쓰는 일에 노력하고 있다. 『언청이 순이』, 『꼭 가요 꼬끼오』, 『옛이야기보따리 시리즈 10권』, 『일곱 가지 밤』 등 많은 책을 펴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쓴 글 여러 편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박희용 역시 1986년 봄에 안동 시내를 떠나 식솔들을 데리고 시골인 녹전면 녹남국민학교로 전근을 갔다. 시의 길에 들어선지 30년 만에 그동안 쌓아놓기만 했던 시들을 모아 2000년 7월에 시집 『霜寒圖』를 펴냈다. 2001년 3월에 『교단문학 통권 제29호』의 제31회 교단문학신인상 시 부문에 <바람 부는 날>외 2편이 당선되었다. 2004년 이후부턴 영주작가회의 회원, 경북작가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영주작가』, 『작가정신』, 『경북작가회의 시선집』, 『사람의 문학』 등의 문학지에 시를 발표하고 있다. 2008년 5월엔 대운하 반대와 생명의 강을 모시기 위한 시인 203인의 특별 공동시집 『그냥 놔두라 쓰라린 백년 소원 이것이다』에 <삼강주막>을 발표하였다. 또한 2010년 2월엔 2002년 이후 여러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발표한 時論들을 모아 『兩白集 秋 疏論筆談』을 펴냈고, 현재는 두 번째 시집인 ‘兩白集 春’과 산문집인 ‘兩白集 夏’, 學讀集인 ‘兩白集 冬’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1982년에서 1985년 까지 약 4년 간 이루어진 ⌜말ㅆ․ㅁ동인회⌟활동을 통해 동인들의 문학적 안목과 역량이 비로소 무게 중심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막역한 사이의 문우들이었지만, ‘同人’이란 서로를 더욱 섞이게, 충돌하게, 비교하게 하는 큰 양푼과 같은 존재였다. 저마다 다른 행보로 걸어온 20대 초, 중기의 문청시절을 마감하며, 20대 말기부터 30대 초까지와 안동이란 시공간에서 전개한 활발한 동인활동은 개인적으로는 창작 의욕을 더욱 매섭게 불러일으키며 좁은 아집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회와 시대의식에 눈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ㅆ․ㅁ동인회⌟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으로서의 문학과 사회로서의 문학이 만나 문학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필독서로 하여 돌려보며 토론회를 자주 가진 정황에서 볼 수 있듯이 동인 모두가 변방의식에 근거한 비판정신이 투철하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한창 서슬 푸른 80년 대 초라는 시대적 환경과 공룡 서울공화국이라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지방 소도시 안동의 젊은 문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賊’을 돌림자로 하여 山, 馬, 水, 草, 海를 앞에 놓아 각각의 호를 지어 ‘五賊’이라 부르며 막걸리 잔으로 울분을 토로하였다. 시대가 삐딱해지면 선비들과 문사들은 몸을 감추는 법, 중국에 죽림칠현이 있었고 광해군 때 여강남안에 강변칠우가 있었다면, 1980년대 초의 안동에는 낙강오우가 있었다.
⌜말ㅆ․ㅁ동인회⌟는 엄동의 시대에 관변문학단체만 존재하던 북영남 지역의 경직된 문학풍토에 민중, 민족, 민주를 지향하는 문학 본연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여명이었다. 동인들은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의 다양한 문학 장르를 망라한 각각의 작품에 안동지역의 정서와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확고한 선비정신과 문학관을 갖고 부화스런 세상에 쉬이 굽히지 않았다.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동인회 활동기간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학정신 본연의 자유로운 서정과 사상을 작품과 행동으로 표현했던 노력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연결고리로서, 분명 이후의 북영남문학 발전에 거름이 되는 뚜렷한 문학사의 한 마디가 되었다.
1986년의 삼십대 이후부터는 시와 학문이란 두 길을 걷기로 작심하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후 15년간은 시골 초등학교 교사의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낮에는 호구지책에, 밤에는 일기, 독서, 창작은 이어졌으나 정신의 웅덩이 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구에 사는 서지행이가 민주화운동, 전교조 운동, 민족문학 운동 등에 관한 자료를 보내오고 참여를 권유했지만, 시골 초등학교 선생 노릇에 안일하다보니 시대의 흐름에 뒤지고 말았다. 90년대 초에 안동의 <글밭>에 가입하여 작품 활동을 했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들과의 교류를 접었다. 그러다가 서정오의 권유로 2000년에 시집 『霜寒圖』를 펴내 그간의 갈증을 면한 다음에, 2004년 50대 나이에 들어서 인터넷 카페 ‘양백재’를 만들어 사람들과 교류하고 영주작가회의와 경북작가회의에 가입해서 활동하다보니 글쓰기에 더욱 재미가 들어서 10년 동안 시와 산문을 많이 썼다.
이걸 보면 혼자 하는 문학이란 물매암이처럼 맨날 자기 생각에서만 맴돌지만, 다른 작가들이나 독자들과 교류하는 열린 문학을 함으로써 자기의 그릇이 넓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나의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바로 물매암이 시절이었음을 통감할 뿐이다. 나의 문청시절에, 문학의 길을 이끌어 줄 스승이나 선배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그렇도록 건조한 나르시시즘과 퇴폐주의에 매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문청들은 모두 자기만의 고뇌에 휩싸여 몸부림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어쩌다 만나면 상대방의 아픔엔 전혀 관심이 없이 “우리들의 스승은 술이다!”라고 외치며 술부터 마셔댔으니, 무슨 도움을 받아서 내 시가 자랄 것인가 말이다. 글 선배들도 “시 잘 쓰려면 술 잘 먹어야 해!”하며 그저 술잔만 거듭 권했다. 교대 오기 전까지는 술을 몰랐는데, 그렇게 배운 술 문화 때문에 ‘문인들은 만나면 당연히 술부터’라는 고정관념이 수십 년 동안 뇌에 저장되어 있다.
「예안 장터// 창수네 옥이네 모두 돌아와/ 지난번에 못다 꾼 꿈 이루더라고/ 물먹은 기와장/ 십 년 너머 물살이 하는/ 초가지붕 화안한 박꽃/ 오랜만에 옥희로 오랜만에/ 지상에 나타나 반가운 오후/ 골목어귀 미장원집 미스 정도 돌아와/ 한 겹 서울 먼지 산뜻 털어내고/ 미스 정 오늘 오후는 한 그루 산벚꽃/ 이루지 못할 꿈 오르지 못할 나무/ 다음 세상 기약하며/ 우리끼리 돌아와 따스한 오후/ 초가 이어진 골목 돌아 몇 채 기와집/ 감나무 한 그루 일년국화 곱던 길섶/ 마음속에 그렸다 지웠다/ 하루 종일 수선스런 예안 장터」
「안경을 안 쓰면// 안경을 안 쓰면 눈물이 난다/ 낡은 가을 햇살이 풀어내는 비문증일까//한 하늘을 이고 사는 몇 개의 사물들이/ 생활의 둘레에서 늘 낯선 손님이다/ 안경을 안 쓰면/ 직장생활을 같이 하는 덧니가 이쁜 그 여인이 생각나고/ 카플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꼭 사십 분간/ 대화를 나누는 그 사내의 속내가 궁금하고/ 적막이 늦은 강가 서로 몸을 기대어/ 시든 색이 되는 풀꽃들의 과거가 궁금하다/ 안경을 안 쓰면/ 평은강 너머 저 쪽 오번 옛 국도/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자동차 속에 앉은 인간들의 근황이 궁금하고/ 가로수로 서서 세상을 피해 사는 것들 은행/ 열매는 맺었을까 혼자 묻고 답하는/ 어느 토요일 오후 억새풀도 외면하는 가을강/ 안경을 안 쓰면/ 가벼운 신랑을 등에 업은 때때메뚜기 암컷 하나/ 배고픈 사랑이 만드는/ 생명들이 가만히 떨어지다 피다 사라지는/ 짧은 유리로 된 그 침묵이 서럽다」
「그리운 히프/// 예고개 그 화장실 첫째 칸/ 안경 벗고 핸드폰 벗고/ 재래식 구겨질까 바지 벗고 정조준/ 지긋이 힘을 주는 생리현상을/ 물끄러미 감상하는 낯익은 곡선// 어느 가난한 사내의 비린 육정이/ 검정 볼펜 선으로 남아 희미한/ 후장체위 그림 한 점/ 옥이의 히프였지 아마/ 육기 없이 앙상한 그 것// 인간의 눈 속에 타는 차가운 불꽃/ 차마 못 뱉어/ 서리서리 가슴 속에/ 무자수배암처럼 사려 두었다가/ 조립식 화장실 한 칸에서 혼자 즐거운/ 아련한 곡선미로 남아/ 지상 모든 사내들의 배설을/ 도매금으로 받아주는/ 옥이 후한 사랑이었지 아마// 새벽길 고랭지 배추를 가득 싣고/ 달려와 잠시 쉬는 대구80바 화물차 운전수의/ 이쁜 색시가 되다가/ 이른 아침 출근길 머리 허연 사내의/ 가을 되어 고개 숙인 중산층 자지를/ 잠시 일으켜 세우다가// 여인의 물빛 같은 한 생애 그린/ 담배 은박지 잘게 접어/ 고개 숙여 얼굴 감추며/ 다시 예고개 그 화장실 첫째 칸에/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신부로 돌아와/ 한 점 선으로 만든 히프를/ 살랑살랑 흔드는 옥이/ 하루 종일 꽂히는 사내들 눈정 따라/ 백일홍 붉은 가지 같은 그리움을/ 살랑살랑 흔드는 옥이」
남들은 늦어도 이십대 중반에 습작기를 마치고 이십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를 토해내는데, 나는 습작기 정리와 시 토하기가 10년이 늦었다. 등단도, 안동에서 문청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76년, 77년쯤에 동아신춘, 조선신춘, 시문학 추천, 심상 추천 등으로 훨훨 나는데 나는 스물다섯 살인 78년에 지방신문 월평 난에 겨우 시를 활자화 시켰고 40대 후반인 2000년에야 겨우 첫 시집을 내고, 그 덕으로 대구일보 문화면을 장식하고 『교단문학』에서 신인상을 탔으니, 참으로 재주가 아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목마른 자 물을 구하듯이 절실하게 뛰어들어 일찍 등단을 도모할 것을, 문단 출입을 자주 하면서 이리저리 친교 하여 줄을 잡아 볼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시도 훨씬 풍요로워졌을 것이고 문명도 높을 것 아닌가. 그랬다면 문인들과 만났을 적에 “아 박 시인 어디어디 출신이지, 중앙지 출신이야, 대단해”하는 존경사와 후한 대접을 좀 받고 좌석에서 말발이 좀 안 섰겠나. 이거 뭐 지방신문 흔해빠진 월 시단에 겨우 비비적댔고, 늦깎이로 시집 한 권 달랑 낸 신세이다 보니 모임에선 늘 술상 귀퉁이 차지다.
하지만 핏줄 탓인지 성격 탓인지 환경 탓인지 그렇게 설치고 싶지는 않았다. 지방신문 월시단 세 번 발표도 그냥 투고했더니 실어주었고, 동인지 『말ㅆ․ㅁ』 내고는 두루 보냈더니 반응들이 좋았다. 첫시집 『霜寒圖』를 내서 보냈더니 역시 반응이 좋았고, 이걸로 2001년에 『교단문학』에서 신인상을 주어서 받았다. 또, 고맙게도 맹문재 평론가가 이 시집을 받고는 시 「보리들」을 『농업기반』통권 198호에 실어주더니 2002년 봄에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집』(북갤럽)에 실어주어서 이름 석 자가 비로소 빛을 봤다. 여태까지 유명시인이나 편집자를 찾아가 인사 땡기고 뭐 좀 하고 부탁한 적이 없다.
이것도 성격인데, 그 성격도 핏줄 타는지 조상 내력이 그렇다. 우리 8대조께서 봉화 소천 두메로 은둔하신 후 선조들께서 해마다 선영들이 있는 충주 목행마을에 묘사를 다녔는데, 한 번은 증조부께서 말을 타고 어느 마을 앞을 지나다니 종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선 “어느 놈이 감히 우리 양반마을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느냐”며 시비하더란다. 증조부께서는 의젓하게 말 위에서 “소천 박 아무개 지 말 지 타고 간다 해라아”라고 하셨다는 구전이다. 핏줄 내림은 어쩔 수가 없는 지,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시에서도 나는 자만이 심한 편이다. 비록 못난 시라 하더라도 내 시 내가 쓰는 데 무어 꿇릴 일이 있으랴! 시든 학문이든 빚진 게 없다. 시 스승과 글 스승이 있는 사람들은 스승의 그늘과 동문들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나는 스승 없이 자득하고 있으니, 눈치 보아 깎고 보탤 까닭이 없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인이다. 말을 보탠다면, 각 분야에서 태두인 사람들은 모두 자득파였지 스승의 문학과 학문을 그대로 답습하는 순종파가 아니었다.
또 시는 청춘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감성의 시를 일컫는 경우이고, 진중한 시는 젊은 날의 반짝이는 재기가 아니라 자아와 타아의 삶을 깊이 사색하는 걸음걸음에서 엉킨 오랜 내공에서 우러나오고, 또 그렇게 할 때 시가 비로소 청춘의 문학이 아니라 생애의 문학이 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철석같으니, 비록 문단의 변방에 위치한다 해도 ‘인부지이불온불역열호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내 소년시절부터 시작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문청시절을 거쳐 장년시절을 통과하더니 이제 노년시절로 접어들었다. 문학의 길을 걷는 많은 동지들이 그러하듯 나도 초기 습작기와 중기 습작기간 내내 참담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내게 시는 투철한 자기응시였다. 집요하게 내면을 응시하면 샘물이 차츰차츰 차올라 저절로 넘쳐흐른다는 맹신만을 가졌다. 재주가 모자라는 걸 진작에 알고 시를 포기했다면 편케 살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무언가 모를 강렬한 욕구가 내면 저 깊숙이에서 치받아 오르는 바람에 도저히 안온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안온한 것도 아니다. 재주가 없다보니 시로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학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이모의 머리털이 되었다. 정상적으로 문학공부를 배웠다면 훨씬 쉬운 길을 걷고 좋은 시를 많이 썼을 텐데, 실업계 고등학교와 낭인시절, 그리고 교대시절과 군대시절, 또 호구에 바쁜 초등학교 교사생활에 골몰하는데다가 본래 성격이 청강스럽고 고집스러우며 자존심이 강하다보니 배움과 사귐이 넓지를 못했다. 그러다보니 경험과 식견이 쪼글해지면서 시도 생기를 잃고 말았다.
스승을 모시고 정규로 문학을 배운 게 아니라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자득하다보니 깊고 견고한 이론은 없다. 단지 영감이랄까, 시는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피로 그리는 것이라는 느낌 하나만을 붙들고 예까지 왔다. 그래서 유창한 시론을 대하면 괜히 지근지근 골치만 아프다. 정치한 이론과 견고한 구조를 가진 시론을 갈파하는 논객들을 보면 ‘야 저 정도로 이론에 밝으니 시는 얼마나 잘 쓸까?’ 부럽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쓴 시는 내 수준으론 참 난해하다. 내가 볼 때는 삶에 대한 통찰력보다는 미학적 이론만 승한 것 같은데 많은 시인들이 그러한 시를 높이 치고, 대학 강단문학론에서 주류를 이룬다.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시단에서는 창작과 평론이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도 이 둘이 혼재되어 편리하게 쓰인다. 그리하여 작가, 평론가, 독자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생산자와 중개자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작가가 소비자와 중개자의 요구에 따라 물건을 대량생산 해내는 공장공업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시란 게, 아니 정신작업인 예술, 학문, 종교까지도 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성과 전문성이란 두 개의 큰 흐름을 이룬다. 정신문화론자들의 논문 결론은 그 둘의 조화가 상투이지만, 더 엄밀히 논한다면 그 둘은 영원한 평행선이다. 평행선이라야 개념과 적용이 분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화론을 주장하며 초점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좁혀서 시만 보더라도, 전문성이 높은 시는 극소수 시인들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대중성이 높은 시는 잘 팔려 거금을 손에 쥐기도 하고 유명인이 되어 이리저리 강연 다니며 존경을 받는다. 잘하면 대학교수도 쉽게 되고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는 관운도 거머쥘 수 있다. 그래서 ‘시인 + 대학교수 + 평론가 + 감투’가 완성되면 전문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췄다고 공인받는다.
그런데, 큰 흐름 중 하나인 전문성이란 난해한 시론공학으로 만든 기계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직접 몸으로 생산한 생물시를 말한다. 생물시란 김소월의 시가 갖는 대중성과 이상의 시가 갖는 난해성의 교감이 아니라, 시가 언어로 표현되는 미학 예술의 정수란 기본에 충실할 때 자연히 응결되는 구름이다. 대부분의 나날 동안 그 구름이 그냥 한 하늘을 흘러가지만, 옳게 엉키면 뚝뚝 비 되어 삼라만상을 촉촉이 적신다. 구름이 어찌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는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는 것은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뿐이다. 그 매연은 대량인구의 시대가 요구하는 대량서정용 구름 과자일 뿐, 비를 만들지 못한다.
젊은 날에 들었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수십 수백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언뜻 손바닥에 생기는 꽃이 바로 시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오십 대 이후부터 머리털 다 빠지도록 골몰한 덕분에 날꽃은 아니지만 종이꽃을 만들어 일반시집 한 권, 초등학교 연작시 두 권, 산문집 두 권 분량을 정리하며 출판 준비 중이다. 또한 넓게 보아 문학 영역에 걸치기도 하지만, 시골생활을 시작한 1986년의 30대 초부터 논어부터 한문고전을 독학하기 시작해서 그럭저럭 한 20여 년 꾸준히 하다보니 문리가 약간 틔어 공부가 손가락 한 마디 남짓 발전한 덕분인지 학문집 세 권 정도 펴낼 분량이 축적되었다. 이걸 보면 내 팔자가 늦깎이인 게 확실하다.
이 넋두리의 제목을 ‘산맥 속에서 춤추는 학’이라고 했는데, 고향 집 배산 이름이 무학봉이다 보니 짐짓 차용한 거고, 내가 학 만큼이야 훨씬 못 되지만 춤 흉내라도 내다가야 안 되겠나 하는 생각이 요즘 자꾸 든다. 그런데 춤추는 학이 맞긴 맞는데 발목이 묶여 있다. 주욱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이 아니라, 태백의 산줄기가 남으로 내리치다가 꽈악 한 번 조였다가 확 푼 산이 무학봉이다. ‘꽈악 한 번 조였다가 확 푸는’ 부분은 바위 절벽으로 고등학생 때 내가 이름 지어 龍鄕原이라 하였다. 그런데 곧 착공 될 삼척 가는 4차선 도로가 그 조인 부분을 치고 나간다고 한다. 그러면 발목을 묶고 있는 줄이 끊기고, 수천 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학은 한 바탕 화려한 춤을 추고는 소천을 따라 도호까지 간 다음, 어느 선비가 운둔하였다는 제비산의 음기를 충전하여 일단 낙동강 상류를 타고 이륙비행을 하다가 안동쯤에서 우뚝 비상하여, 북영남 땅 곳곳에서 비상한 여러 학들과 함께 훨훨 구만리 장천을 날아갈 것이라는 쾌.
두 해 전에 명퇴를 한 덕분에 이제 나만의 시간을 한껏 가질 수 있으니, 숨 질 직전까지 펼쳐질 후기 습작기 동안 화려하게 살면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시 세 편만 썼으면 좋겠다.
자연과 인간이 고르게, 적당하게, 알맞게 교감하는 시, 자연의 아름다운 의미를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거나 대변하는 시, 인간의 아름다운 의미를 자연의 언어로 표현하는 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잇는 시, 본질이 현상의 원천이며 진실이란 현상이 본질에 충실할 때임을 증거 하는 시, 제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언하는 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진화가 선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의 시를 쓰고 싶다. 무겁고 둔탁한 언어가 아니라 가볍고 낭랑한 우리말로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을 부르는 시를 쓰고 싶다. 열 살 남짓 때 먹은 <향수>의 감동을 더 진하게 해서 후인에게 전달하고 싶다.
큰 학재가 없고 예리한 관점은 미숙하지만, 기존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정수를 체득한 다음에 나만의 학설을 정립하고 싶다. 나의 학설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월등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보통 정도는 된다는 후인들의 평가와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우주의 침묵에 속상해 하는 인간들에게 한 줄기 이해의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고,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아파하는 의식인들에게 한 가닥의 치유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이왕에 성리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더욱 궁구를 심화하여 ‘근거와 치유’의 묘책을 찾아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하여 형이상학이 유형화 될 수 있음을 내 생애에서 증명할 수 있을는지.
연못에 떨어진 낙엽 한 닢이 그리는 동심원이 조용히 퍼져나가고, 물이 넘치면 흐르듯이 내 마음에 흡족한 시라면 남의 마음에도 흡족할 것 아니랴. 학문에서도, 천성이 아둔한 자이다 보니 화려한 명예는 없을 것이지만, 반백이 전백이 되도록 공책시집과 일기장에서 에너지를 보충 받으며 한 시와 한 학문을 마침내 이루어, 후인들로부터 ‘춤추는 학의 산’ 舞鶴峯이 낳은 시인이자 학자란 소리 듣고자 하나 글쎄.
水禪
어르신이 실수하신 모양이지요
화장실 바닥에 미처 두 점
괄약근을 지나
노천탕에 앉으니 꼭 맞다
둥둥 뜨는 몸
늘 무게를 받기만 하던 하체가
따뜻한 물에 상체를 띄우고
휴우 좀 쉬자
머리칼 다 빠지고 추리하기만 해
좀 깔끔해야 하는데
내가 할 소리
남이 하는 혼자 말 들으며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옷을 입는다
2013년 1월 23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開山兩白 박 희 용 넋두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