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가 가르치는 교훈에 대하여
신천지의 교리교육 과정에 속하여 4개월간 배운 이의 노트를 점검한 결과 나는 신천지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 신천지의 특징은 비유풀이다. 성경 전체를 일종의 비유와 암시로 접근한다.
①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것과 비슷하다. 동화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매우 유연하고 자유롭다. 꿈꾸는 것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달을 따올 수도 있다.
② 음악가 슈베르트의 노래 ‘마왕’ 이야기와 유사하다. 말을 타고 가는 아버지 등에 업힌 병약한 아이의 눈에 마왕이 보인다. 그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리고 두려워 아버지께 하소연한다. 아버지는 나지막한 소리로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잎 소리라고 다독인다. 그러나 그 아들은 마왕이 자기를 잡아간다고 절규하고 호흡을 멈춘다. 신천지에 속한 무리들은 비유를 사용하여 어른들을 다시 아이로 만든다.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이야기를 믿어버리게 한다. 마침내 그 아이는 두려움과 공포로 질식해서 죽어버린다.
③ 예수님의 비유를 비롯하여 성경에는 많은 비유와 은유, 그리고 상징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반복적으로 재가공되고 재해석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신천지의 용어가 말하듯이 ‘실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상이 진리다. 그런데 신천지는 그 진리를 겨우 선악의 이분법적 접근으로 귀결시킨다. 삶에서 만나는 복잡다단한 현상과 상황들을 대하는 성숙한 어른의 관점과 지혜를 길러주기보다는 권선징악의 아동기적 사고에 머무르게 한다. 그 결과 어른이나 부모를 필요로 하는 ‘아동들’을 만든다. 그래서 신천지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한 사람 부모나 몇몇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위탁시킨다. 신천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은 오늘날 교회의 비극이다. 아동과 성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실제로 4개월간의 노트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이런 도장을 유치원에서 보았던가!
2. 성경의 이야기를 자기들의 것으로 독점한다.
① 신천지는 성경의 이야기를 많이도 가르친다. 구약의 역사에서 성막과 예수님의 비유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각종 그림이야기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이들이 바로 자신들뿐이며 기성교회는 거짓목자들이 있고 바른 가르침이 없는 곳이라고 반복적으로 가르친다.
② 낯 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비유로 가공하여 사람들의 사고를 멈추게 한 후에 이분법적으로 교회와 신천지를 대조한다. 이것은 마치 ‘나쁜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로 아이들에게 훈육하는 보모나 유치원교사의 가르침과 같은 방식이다.
③ 결국 신천지 무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많이 배우고 인용하는 이유는 신천지의 주장 한 가지를 주입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바른 진리 가운데 살라는 것이 아니라, 신천지에 가입하라는 것이다. 진리는 폐쇄적이지 않으며 진리는 보편적이다. 그리고 진리는 그 자체로 이타적이며 공동체 지향적이다. 이들의 가르침은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는데 치명적이다. 그들의 공동체에만 충실하게 한다.
④ 결국 신천지의 가르침을 배우면 배울수록 삶은 풍성해지고 너그러워지고 폭넓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아기적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두려움과 편협하고 편집적인 사고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그런 사람은 그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사교(邪敎)에 빠진 사람들이 집과 삶을 다 그 교주에게 바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사이비이단을 향하여 가정을 파탄시키는 이들이라고 정죄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3. 예언과 예언의 성취를 오해한다.
① 성경에는 많은 예언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 예언은 점쟁이의 미래예측과 다르다.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그 진리 가운데 행하게 하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②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여 예언의 성취를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마태복음과 히브리서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에 대한 예언 성취를 구약의 본문에서 끌어와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율법적인 배타주의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포용적인 사람들로 세우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③ 바울의 경우에도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 등의 이야기를 비유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설명한다. 그것 역시 비유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열어가는 일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어리석고 완고한 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④ 예언과 관련하여 가장 큰 오해는 아담과 노아, 이스라엘과 신약 백성들을 달리 대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아담에게와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님과 오늘 우리를 향하여 모두 같은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옛 언약 백성에게는 불리한 조건을 제시하시고 오늘에는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시는 분일까? 계시의 점진성은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흐르면 더 많은 수량의 강물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상류의 물이나 하류의 물은 동일하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상류의 물이 더 맑고 깨끗하다. 성경을 관통하는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 겨우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식으로만 설명될 것인가? 더 크고 심오한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등불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계시록에 대한 오해와 곡해가 심하다.
① 기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쓴 묵시문학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묵시문학은 참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 궁극적인 승리를 판타지로 쓴 글이다.
② 그러므로 계시록에는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대적에 대한 이야기가 비유와 상징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기존교회와 신천지 사이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극치다. 도리어 신자가 그리스도께 충성된 사람으로 살아 ‘이기는 자’가 되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 사람의 덕목은 분명하다. 그것은 투명한 진실과 따뜻한 친절, 그리고 겸손한 신앙이다(미가 6:8). 그것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 마귀요 짐승이다. 짐승은 사람이 아닌 삶을 살게 하는 대적을 그린 그림이다.
③ 구원은 어떤 조직체에서 어떤 조직체로 옮기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따르는 삶이다. 참과 거짓을 가르는 선은 어떤 조직과 다른 조직 사이를 지나는 것이 아니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관통하여 지난다. 즉, 모든 조직체와 사람은 때로는 참되고 때로는 거짓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따르라고 빛을 온 세상에 비추신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관점은 스스로 하나님 됨을 주장하는 ‘마귀적’ 생각이다.
5. 구원과 영생에 대한 이원론적 오류에 빠져 있다.
① 신천지에게 구원은 ‘들어가는’ 것이다. 144,000명에 들어가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신천지다. 그것도 하늘은 지도자요 땅은 백성이란다.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4)와 같은 시적 표현을 유아적으로 해석하여 지도자를 장막으로, 성도를 땅으로 묘사한다. 신천지에게 구원이란 멸망 받을 세상에서 벗어나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라고 그들은 부른다.
②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 영생은 무엇인가?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 17:3).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최고의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영생이며 구원이다. 어떤 사람들을 위해 특별하게 마련된 어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③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죄로 낡아진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새롭게 되어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나타난 삶이다. 신천지는 신천신지를 말한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말로서 만물이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계 21:5).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그리고 그처럼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전에 준비하신 선한 일을 우리가 하면서 살아갈 때 그 세상은 더 이상 낡은 세상이 아닐 것이다(엡 2:10).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세계를 이처럼 생명으로 충만하게 만들라는 아담적 소명을 완성하게 하려는 것이며, 비진리의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라는 이스라엘적 소명에 동참하라는 초청이다. 오류와 거짓과 아집과 독선 투성이의 신천지 집단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 아니다.
④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영생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사람답게 살지 않는 삶은 오래 살수록 더 큰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오래 살고 장수하는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요 비극이다.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소임을 깨닫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꽃피워 공동체를 위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닐까? 그런 삶이 영생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복이 그런 삶이다.
⑤ 그래서 나는 구원을 이렇게 정의한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신천지에서 배운 내용을 기록한 노트를 나에게 전해준 이는 우리 교회 교우다. 나는 그의 고백을 듣고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한 후에 그들이 신천지임을 깨닫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동안 내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생각할 때 자괴감(自愧感,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신천지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할 기회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고 익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신천지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각성하라고 양들 가운데 보내신 이리들이다. 그들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양들은 깨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참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하여 좀 더 치열하게 다듬고 정직하게 논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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