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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곧바로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 갔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은 조촐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쳐 삶을 마감하였으니 많은 유물이나 기록물이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적어도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할 만큼 여파가 컸습니다. 단순히 의분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폭탄을 투척하였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윤의사의 의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해임시정부와 일본의 군부, 중국 국민당의 복잡한 내부 상황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미가 없는 여행기가 될 수도 있지만 1920년 후반과 30년대 초반의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본문에서는 윤봉길 의사를 윤봉길로 표기합니다.)
윤봉길은 1908년에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1살이 되던 해에 예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그만 두고 1921년 오치서숙에 입학합니다. 오치는 까마귀고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서숙은 개인이 운영하는 글방(서당)을 말합니다. 이 글방은 매곡 성주록이란 선비가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성주록은 매죽헌 성삼문의 후손으로 당시 주위에서 학문이 깊고 기개가 높다고 소문이 자자한 선비였습니다.
기념관 입구에서 윤봉길에 관한 영상물을 보고 있습니다. 윤봉길은 오치서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스승인 성주록도 윤봉길을 많이 아낀 모양입니다. 윤봉길이 졸업할 때 스승 성주록이 지어 주었다는 윤봉길의 호 매헌(梅軒)은 성주록의 윗대조상이기도 한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의 호에서 딴 것입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호를 제자에게 내려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주록 자신도 성삼문의 호인 매죽헌의 첫자를 따서 매곡(梅谷)이라고 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 연보를 보고 있습니다. 1921년 오치서숙 성주록 문하에서 수학, 1922년 배용순과 결혼하여 두 아들 종과 담을 두다. 오치 서숙에 다니면서 무식과 무지야말로 독립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고 교육 활동에 뜻을 두고 야학을 개설합니다. 이때 윤봉길은 아내 배용순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쳐 글눈을 뜨게 하였다 합니다. 두 아들 중 맏이인 윤종은 일제의 방해로 학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해방 후에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여 공무원 생활을 하였고, 둘째인 윤담은 두 살 때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일제는 가족에게도 가혹하였습니다.
윤봉길의 글자를 모아서 만들 글귀입니다. 실제로 이 휘호를 윤봉길이 쓴 것이 아니라 윤봉길이 쓴 글자를 한 자 한 자 모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집자(集字)라고 합니다. 젊은 청년이지만 글씨가 힘이 있고 날래어 기백이 범상치 않습니다. 오치서숙에 다니던 때 덕산 수암산에서 열린 중추절 시회(詩會)에서 윤봉길은 장원을 차지합니다. 이때가 16세였습니다. 2013년 백제문화예술협회에서 이를 기념하여 매헌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전국을 대상으로 시인 한 명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습니다.
윤봉길은 1921년 오치서숙에 입학하여 사서삼경을 비롯한 고전을 배우고 19세 되던 해인 1927년에 오치서숙을 졸업합니다.(졸업 연도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1928년 혹은 1929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졸업 후 윤봉길은 야학을 비롯한 농춘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신명을 바칩니다. 마을회관인 부흥원을 건립하는데 앞장을 섰고, 수암체육회를 이끌었으며 월진회를 조직하여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농촌을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윤봉길은 청년시절에 시집도 3권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농민독본도 직접 편집하여 자신이 세운 야학의 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윤봉길은 어느 날 일제의 만행을 보고 울컥하는 심정으로 의거를 결행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물리적으로 항쟁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독립이 더욱 요원하여지리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봉길이 아마도 물통 폭탄을 들지 않았으면 위대한 민족 시인이나 교육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치서숙에 다닐 적에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의 팻말을 몽땅 뽑아들고 윤봉길을 찾아와 자기 아버지의 묘를 찾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윤봉길은 기가 막혔습니다. 묘표를 다 뽑았으므로 자기 아버지의 무덤은커녕 다른 사람들의 무덤도 다 잃어버릴 판이었습니다. '어리석은 한 사람 때문에 무덤을 다 잃게 되었구나.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리석어 나라를 잃었구나.' 이 사건은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 돌아오지 않는다. 고향에서 열심히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윤봉길은 1930년 이 글을 남기고 만주로 떠납니다. 그러나 조선 땅을 건너기도 전에 일경에 체포되어 45일간의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출소하자마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채소장사를 하다가 1932년 김구가 이끌고 있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그런데 1915년에 고흥군에서 윤봉길 의사의 친필 휘호를 5억원에 사들였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 윤봉길 의사의 글귀는 집자한 것이기 때문에 친필 휘호가 없다고 반박을 하였습니다. 누가 윤봉길 의사를 빙자하여 장사를 한 것일까요?)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 당시 중국의 상하이는 서구의 열강들이 진출하여 있었습니다. 1842년 중국이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에 패배하여 상하이를 개방하자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이 이곳에 진출하여 치외법권 지역을 형성합니다. 이런 지역을 조계(租界)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중국이 경찰권과 행정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특히 프랑스 조계에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로 많은 조선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 나고 그 결과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때가 1919년 4월 13일이었습니다.(최근에 4월 11일이라는 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2층 김구 선생 집무실 복원(사진출처_독립기념관) 상해 임시정부는 초기에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구성원들 사이에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고 실질적인 투쟁 조직이나 무장 병력이 없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으로 임시정부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결론 없는 논쟁을 반복하다가 분열되었고 1925년 임시정부 수반인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되고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는 등 내부 진통으로 인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금을 인출하기 위하여 은행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1927년 일본) 일본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으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습니다. 복구에 많은 천문학적인 돈이 들면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1927년에는 일부 은행이 파산하기도 합니다. 더하여 1929년 세계대공황이 닥쳐오자 일본의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어 실업률은 두 자리를 넘어섭니다. 국내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게 되자 일본은 만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만주에 정착한 한인촌 아이들 만주 지역은 조선시대 말부터 우리 동포들의 이주가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최초의 조선인 정착촌으로 알려진 고안촌(高安村)이 이미 1876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짧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후 일제의 조선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많은 한인들이 북간도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북간도는 섬이 아니라 압록강 이북 만주 지역을 가리킵니다. 일본의 핍박을 피하여 온 사람들이니만큼 당연히 항일 의식은 높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대첩도 만주의 한인촌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승리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 길림성 연길시 거리. 언뜻 보아도 한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는 이 지역의 독립군들의 근거지를 없앨 목적으로 한인촌을 습격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고(경신참변)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지원하며 조선독립군에 대한 핍박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만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1928년 6월 만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암살을 합니다. 장쭤린이 죽자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만주 지역을 통치하게 됩니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과 대립하던 아버지와 달리 장제스의 휘하로 들어가 일본 관동군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만주 이민 독려 포스터 장쭤린이 죽자 만주에 진출해 있던 일본 관동군은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하여 곧바로 만주 지배를 위한 침략 행위에 돌입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조선과 일본의 빈농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우선 자국의 농민들을 만주에 정착시킨 다음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출동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자발적으로 만주로 건너간 사람들이 아니라 '낙토만주'라는 일제의 기만적인 구호에 속아서 간 사람들이거나 강제로 이주당한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만보산 삼성보 이러한 시기에 만보산 사태가 터졌습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으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이주한 한인 농민들과 기존의 중국 농민들 사이에 수로를 놓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한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끌어 온 수로 때문에 중국인들의 수로가 붕괴될 위험이 생기자 중국 농민들이 나서서 수로 건설을 중단시키고 한인 농민들이 건설한 수로를 메우고 제방을 파괴하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중국 경찰과 일본 경찰 그리고 한인 이주민들과 중국 농민들이 대치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상황이 진정되지 않자 일본 경찰은 중국 농민들에게 위협사격을 가하여 시위를 진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총격이 오고 갔지만 경미한 부상을 입은 중국 농민들이 몇 명 있었을 뿐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이때가 1931년 7월 2일이었습니다.
당시 오보를 낸 조선일보 기사 그런데 이 사건을 조선일보가 보도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조선일보는 7월 3일 호외를 발행하면서 우리 동포들이 중국 농민들과 충돌하여 생명을 위협 받고 있다고 과장된 보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표제로 ‘중국 관민 팔백여 명과 이백 동포 충돌 부상’ 그리고 이어서 ‘1시간 동안 중국과 일본 관헌이 교전’을 하였고 ‘장춘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고 기사를 썼습니다. 이것은 조선과 중국을 이간질하여 서로 반목하게 한 다음 만주를 침공하려는 일제의 계략에 의하여 조작된 뉴스였습니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일보 특파원이었던 김이삼 기자에게 정보를 주었고 김이삼 기자는 이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서울로 타전하였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 축제(사진출처_인천관광공사) 인천 차이나타운 축제(사진출처_인천관광공사) 7월 3일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가자 조선 안에서 화교배척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납니다. 인천, 서울 , 대구, 부산, 평양 등 전국 각지의 화교거리에서 조선인들이 화교들을 공격하여 100여 명 이상 사상자가 났습니다. 이 사건도 일제가 배후에서 조종하여 피해가 커졌다는 증언들이 나왔습니다. 나중에야 일본 경찰이 조선일보 기자에게 거짓 정보를 의도적으로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조선과 중국은 이미 서로 깊은 상처를 받고 난 후였습니다. 김이삼 기자는 7월 15일 살해됩니다. 일본의 밀정이어서 독립군이 처형을 했다는 설이 있고,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고, 자살을 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어느 설도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철로를 조사하고 있는 국제 연맹 리튼 조사단. 만보산 사건 이후 당시 만주에 진출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침략할 명분을 얻기 위하여 로 류타오후사건을 조작해 냅니다. 일본 관동군은 중국군으로 위장하여 류타오후(柳條湖)근처에서 철로를 폭파하고 이를 빌미로 당시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 장쉐량(張學良)군대를 공격합니다. 장쉐량은 장제스(蔣介石)의 명령으로 일본군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장제스는 당시 중국은 일본과 전쟁할 수 있는 힘을 갖추지 못하였고 일본군보다 공산군을 토벌하는 것이 더욱 급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군이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일본은 불과 4개월 만에 만주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만주사변이라고 합니다.
만주사변에 동원되는 일본군 탱크 만주사변은 일본 국내의 경제적 불안과 중국을 지배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여야 한다는 군부의 논리가 맞아 떨어져 자행된 일본의 침략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만주 사변을 일으킨 주체가 관동군이었고, 관동군은 일본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침략 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음해인 1932년 젊은 해군 장교들이 당시 일본 29대 내각총리인 이누카이 츠요시를 암살하는 5 ·15 사건이 일어 나면서 일본은 군부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나찌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래로 다시 한 번 세계를 전쟁의 회오리 속으로 끌고 갑니다.
중국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 사령부 건물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하고 난 후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괴뢰정권을 세워서 통치하는 것이 침략전쟁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피해 가기가 좋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주국을 수립하여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하고 이 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합니다. 그러면서 국제적인 시선을 만주에서 돌리고자 상하이에서 사변을 일으킵니다. 상하이는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모여 있고,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사는 곳이어서 이곳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세계의 이목이 자연스럽게 쏠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동군은 상하이에서 사건을 만들어 만주에 쏠린 세계 각국의 시선을 돌리기로 합니다.
이렇게 동북아시아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상해 임시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만보산 사태로 인한 화교배척폭동사태로 중국의 여론은 조선에 대하여 아주 좋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는데 조선이 그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인식이 당시에 광범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로 분열되어 자중지란이 일고 있었습니다. 국내의 자금 지원도 거의 끊기고 중국의 지원도 받지 못하여 거의 고사 상태에 처하여 있었습니다. 이때 김구는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착하기 위하여 만주사변이 한창이던 1931년 10월 한인애국단을 조직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인애국단이야말로 임시정부의 유일한 희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봉창 의사와 한인애국단 선서문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가 토쿄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일본 천왕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이봉창 의사는 그자리에서 체포되어 9월 30일 일본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고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김구의 애통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 신문들도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습니다. 그 때 상하이 신문들이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실패한 것을 애석해 하면서 '불행하게도 명중하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자 상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젊은 해군들이 '천황에 대한 불경스러운 보도'라며 중국 신문사를 습격하여 장비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져 상해는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였습니다.
피난길에 오르는 상하이 시민들 이봉창 의사의 사쿠라다몬 폭탄 투척 사건 기사로 상하이의 중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가고 있는 중에 1월 18일 일본인 승려들이 중국인들에게 습격을 당하여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 중국인들은 일본군에게 포섭되어 그들의 사주을 받고 승려들을 폭행한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만보산 사태와 만주사변으로 중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인 만큼 일본군이 공작에 이를 이용한 것입니다. 사건이 있은지 이틀 뒤 이번에는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이 중국 회사에 들어가 난동을 피웁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인 3명과 일본인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상하이 시에 배일단체를 해산하고 항일운동을 단속하라고 요구하며 1월 28일 일본군을 출동시킵니다.
상하이 방어 진지의 중국 19로군 일본은 몇 시간이면 상하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지만 막상 전투는 일본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화력은 일본이 월등하였지만 시가전에서는 지리를 잘 아는 중국군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하이에 출동한 일본 사령부는 연이어 본국에 증원을 요청하였지만 한 달이 지니도록 전황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월 1일 알 수 없는 이유로 상하이 방어를 담당해 온 중국 19로군이 철수를 하게 됩니다. 19로군이 철수하고 뒤늦게 3월 2일 도착한 장제스 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다음날 상하이에서 물러납니다. 이어 중국과 일본은 상하이 전투를 종결하는 강화조약을 진행합니다. 이 전투로 중국인들은 자존심이 크게 상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였고 이로 인하여 난징(南京)에 있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도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만주국 황제 푸이와 정부 각료들 중앙에 안경을 끼고 서 있는 사람이 푸이입니다. 세계의 이목이 상하이에 쏠려 있던 1932년 3월 1일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수립됩니다. 그리고 3월 9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가 집정(최고 통치자)에 취임합니다. 푸이는 다시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로 추대됩니다. 푸이는 3살에 청나라 12대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곧 이은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6살에 퇴위를 하여 자금성에 거주하고 있다가 1924년 자금성에서 나와 일본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텐진의 일본 조계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의 황제가 된 푸이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스스로 정부를 해산하고 일본으로 출국하려는 중에 소련군에 의하여 전범으로 체포되어 일본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어 자신이 주인이었던 자금성의 정원사로 일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그 후 1987년 이탈리아의 베르톨루치 감독이 '마지막 황제' 라는 영화로 제작하였습니다.
만주국 건국 십주년 기념 우표 만주국 수립은 일본 본국 내각과도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고 관동군이 거의 독단적으로 진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29대 내각총리대신인 이누카이 츠요이는 만주국이 수립되었지만 중국 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소를 하자 국제적인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서 일본군을 만주에서 철수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군부는 언제가는 미국과 일전을 치르기 위하여 만주를 점령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만주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여 병참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본토를 점령하여 거대한 블럭을 형성하여야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내각과 군부가 만주를 놓고 서로 갈등을 빚다가 1932년 5월 15일 해군의 젊은 장교들에 의하여 내각 총리대신이 암살되고 국내의 동정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일본의 군부는 이제 내각의 통제를 벗어나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됩니다.
윤봉길 의사와 한인애국단 선서문 이러한 상황에서 윤봉길은 1932년 4월 26일 백범 김구를 만나 선서문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지는 전승기념식에서 일본군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합니다. 이 거사는 결과적으로 당시 중국과 만주, 조선과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잡한 정세의 흐름을 일거에 뒤집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상해 임시정부와 유명무실한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령 김구에게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성공은 신의 한 수에 비견될 만큼 절묘한 시기에 터져 나온 장쾌한 의거였습니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기념식장에 오른 일본군 수뇌부과 일본거류민단장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 직전의 단상의 모습입니다.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중국의 자존심은 구겨질대로 구겨졌습니다. 한반도 역시 만주과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화가 추진되면서 일제의 살벌한 통치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상하이 사변의 정전협정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일제는 4월 29일 천황의 생일을 맞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훙커우 공원의 전승 기념식은 중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군부 세력의 위력을 과시하는 행사였으며 상하이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공공연히 서구 열강에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서구 열강은 깊은 우려의 시선으로 이를 지켜보았고 중국인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울분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윤봉길의 폭탄이 일본 제국주의 선봉에 선 자들에게 투척되었습니다. 이날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으로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일본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그리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 등이 현장에서 중상을 입어 사망을 하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상하이 사변을 지휘한 일본군 사령관들이었습니다. 윤의사의 의거 소식이 전해지자 상하이 사변 패퇴로 자존심이 상해있던 중국인들은 환호작약하였으며,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워준 조선 청년 윤봉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의거 직후 장제스(蔣介石)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용사 한 명이 단행하였다."고 한 말은 단순한 치하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폭파 직후의 기념식 단상과 주위의 모습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대만보(大晩報) 4월 30일자 기사에는 폭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폭발 사건이이 발생하자 우리는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들었다. 처음에는 강력한 폭발음이 들리더니 잠깐 동안 온 세상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뒤이어 폭발로 인한 화염이 마치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귓속에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사령대 부근에 있던 관중들이 난폭하게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제압하여 땅바닥에 내동이치는 모습이 보였다. 군중들은 그 사람의 옷을 찢고 발로 차며 마침내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헌병대가 군중들 사이에서 그를 끌어냈을 때는 얼굴부터 허리까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었다.
1932년 4월 30일자 노스 차이나 데일리 지에 실린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사쿠라다몬 폭탄 투척 사건과 상하이 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중국인들 때문에 일제는 기념행사에 일본인들만 출입을 허락한 채 철저히 통제하였지만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잠입에 성공하였습니다. 윤봉길이 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유창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습니다. 단상 가까이 접근한 윤봉길은 11시 40분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 물통 폭탄을 단상에 투척합니다. 다시 도시락 폭탄을 들려는 순간 주위에 있던 일본인들과 일본 경찰들이 덮쳐서 두 번째 폭탄은 불발하고 맙니다. 일설에는 물통 폭탄은 저격용이고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리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닙니다.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1932년 5월 1일자 아사히 신문 호외에 실린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조작설 논쟁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당시 훙커우 공원에는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기사를 보면 하나같이 폭탄 투척 용의자가 구타를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는데 아사히 신문에 실린 사진에는 윤봉길 의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연행되니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강효백 교수에 의하여 제기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5년 sbs가 이를 보도하면서 표면화되었습니다. 지금 윤봉길 의사 가족들의 증언이나 기념사업회의 입장은 윤봉길 의사가 맞다는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가 불거지자 보물로 지정되었던 이 사진은 보물에서 해제된 상태입니다. 확실히 두 사진을 비교하여 보면 아사히신문에 실린 연행 사진에 윤봉길 의사가 너무 말끔하여 의심이 갑니다만 지금은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송고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전송되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상하이 루쉰 공원의 매헌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는 조국 대한민국의 운명을 확실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동안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소원해졌던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였고, 항일 독립 투쟁에 있어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였으며 특히 김구의 정치적인 입지를 한껏 끌어 올려 주었습니다.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청사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김구는 60만의 현상금을 목에 건 채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김구가 도망을 다니는 중에도 상하이 훙커우에서는 1933년 3월 백정기, 이강훈 등이 중심이 되어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 거사는 밀정의 밀고로 불발에 크쳤지만 일제의 간담을 다시 한 번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백정기 의사는 체포되어 일본 이사하야 감옥에서 옥사합니다. 이 때 이들이 사용하려던 폭탄이 윤봉길이 사용했던 폭탄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도시락 폭탄이었습니다. (참고로 1930년의 1원은 지금 약 12,000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루쉰 공원 매헌 앞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비 만주와 상하이에서 잇단 패배로 중국 인민들의 비난 여론이 장제스의 난징 정부를 향하고 있을 때 훙커우 의거는 일거에 여론의 방향을 틀어 장제스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장제스는 그 후 윤봉길 의사의 집안에 자신의 휘호를 전달하였으며 김구를 만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였고 끝까지 이를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에 광복군 창설에도 도움을 주었고 카이로 회담 때에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적극 주장하여 연합군의 동의를 얻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매헌 안에 있는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사건 이후 훙커우 공원은 일본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1942년 이후에는 일본의 군사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다시 훙커우 공원으로 부르다가 루쉰이 생전이 이곳을 좋아하여 자주 산책하였다는 연고로 1956년 뤼쉰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명칭을 루쉰 공원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루신 공원 안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매헌이 있고 매헌 안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상하이를 찾는 한국인들이 한 번은 꼭 들러보는 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 순국 직후의 모습 일제는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윤봉길에게 사형을 선고 합니다. 이해 11월 18일 윤봉길은 오사카의 육군 형무소로 압송되었다가 한 달 뒤인 12월 18일, 상하이 침략 주력 부대인 9사단의 본부가 있는 가나자와 구금소로 이감됩니다. 1932년 12월 15일에 하달된 ‘윤봉길 사형집행 명령안’에 의하면 사형은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육군 작업장 내 서북쪽 골짜기에서 집행되었습니다. 윤봉길은 의거 당시의 양복을 입고 십자가모양 나무 형틀에 양팔이 묶이고 무릎이 꿇린 채로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형틀 전방 10 미터 앞에는 9사단에서 선발된 하사관 두 명이 윤봉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없는가 하고 묻자 윤봉길은 '사형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할 말이 없다.'라고 간단히 대답하였습니다. 이윽고 군 검찰관인 네모토 소타로의 사격 명령으로 정사수가 쏜 한 발이 윤봉길의 미간에 명중하였습니다.
동아일보사가 확인한 윤봉길 의사 순국지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 그로부터 13분 후 군의관이 윤봉길의 절명을 확인하였습니다. 오전 7시 27분은 상하이 일본군 사령관 시로가와요시노리가 윤봉길이 투척한 폭탄에 중상을 입어 12차례 수술을 받고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시각이었습니다. 이날 일본 신문에는 윤봉길의 사형집행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격'이란 구령 한 마디에 열 명의 보병이 사격을 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시각은 오전 7시 40분, 사체는 곧 화장됐다.
그러나 지금 이 기사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윤봉길은 화장되지 않았고 유해는 또 다른 고통과 모욕을 받으며 조국이 해방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는 윤봉길의 시신을 한인 애국지사들이 찾아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화장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만 비밀리에 매장하였다는 소문이 끝임없이 나돌았습니다.
윤봉길 의사 암장터 일제는 윤봉길의 처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으며 시신은 처형된 그대로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아무런 표식도 없이 매장하였습니다. 무덤은 봉분도 없이 평평하게 하여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습니다. 일제는 악랄하게도 시신에까지도 보복을 한 셈입니다. 그 만큼 훙커우 의거는 일제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대륙 침략 계획이 몇 년 동안 지연되었습니다. 중국이 항전의 태세를 채 갖추기 전에 대륙을 침략하여 중국을 점령하였다면 이차세계대전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갔을 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현재 암장지는 ‘매헌 윤봉길 의사 현양회’가 관리하고 있으며, 1992년에는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이 중심이 되어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 작업(1946년 3월 4일) 처형 후 윤봉길의 무덤에 대하여서는 일체 비밀로 부쳐져 함구되어 왔습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고국으로 돌아온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를 본국으로 봉환하기로 하고 일본에 있는 재일조선인거류민단 단장인 박열에게 협조를 요청합니다. 당시 거류민단 단장인 박열은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 때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려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혐의로 간토 대지진 직후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이 되어 23년간 수형 생활을 하다 일본의 패망으로 석방된 직후였습니다. 박열은 거류민단 부단장인 이강훈과 대한순국선열유골봉환회 회장인 서상한에게 윤봉길 등 삼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하는데 힘써 줄 것을 당부합니다.
윤봉길 의사 유해 봉환 (일본 가나자와 역) 이강훈과 서상한은 직접 인부들을 대동하고 1946년 3월 4일 유해 발굴 작업을 하였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공동묘지 관리인들 때문에 이틀 동안이나 헛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발굴단장인 서상한이 3월 5일 저녁 ‘내일부터 공동묘지의 모든 묘들을 일일이 파헤쳐서라도 유해를 찾겠다’고 발표를 하자 그 서슬에 놀라 일본군 형무소 간수였다는 시게하라(石原)라는 자가 한밤중에 몰래 와서 윤봉길이 묻힌 장소를 알려주고서는 돌아갔습니다. 암매장터를 2 미터 정도 파내려가자 먼저 나무 형틀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어서 윤봉길이 훙커우 의거 당시 입고 있었던 양복과 구두 그리고 중절모자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조각으로 흩어진 유골을 재일동포 의과대학생인 주정균이 수습을 하여 새 관에 봉안하여 가나자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사무실 2층에 임시로 안치하였다가 이틀 뒤인 3월 8일 가나자와 역을 출발하여 토쿄으로 향하였습니다.
부산 추도식 (1946년 6월 15일) 동경의 임시 빈소에 관을 안치하고 유해 발굴단은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다시 찾았습니다. 삼의사의 유해를 모두 찾자 서상한 대한순국선열유골봉환회 회장이 앞장서서 유해를 모시고 5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삼의사의 유골이 도착하자 제일 먼저 김구가 나와 이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삼의사 유해는 임시로 마련한 동광초등학교 빈소에 한 달 동안 안치되었다가 6월 15일 부산 시민운동장에서 시민들의 참가한 가운데 추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이 세사람을 죽으라고 내보낸 것은 바로 나다. 그런데 나만 살아 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니 삼의사에 대하여 부끄럽기 한량없다.' 고 하였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해 수만 명이 참가한 부산의 추도식을 마친 다음날인 6월 16일 특별열차인 해방자호로 삼의사의 유해는 서울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삼의사 유해는 태고사(현 조계사) 임시 빈소에 안치되었습니다. 7월 7일 삼의사 합동추도식은 전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삼의사의 유해는 7월 7일 새벽에 조계사를 출발하여 종로를 지나 서울역을 거쳐 효창공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 예정 시간을 훌쩍 넘긴 12시 40분 경이었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조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삼의사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애도의 정을 표하였습니다.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 이 날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말했습니다.
"반드시 진정한 독립을 이룬 나라를 위하여 이 한 몸을 바칠 것이오, 그대들은 조국의 품에서 편안히 쉬시오."
광복후 처음 국민장으로 치러진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삼의사의 장례식에는 한민당, 공산당, 한독당, 민전, 독촉국민회, 전평 등 주요 정당, 단체들과 서울 시민 등 5만여 군중이 참례하였습니다. 이 날 조성된 삼의사 묘가 효창공원 독립운동가 묘역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삼의사 묘역의 왼편에 묘비가 없는 묘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지 못하였습니다.
해방 후 충남 예산의 윤봉길 가족을 찾은 김구 이보다 앞선 1946년 4월 26일 김구는 예산 윤봉길 생가를 찾아 가족을 만나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윤의사 고향마을 들판에서 열린 '상하이 의거 14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내가 윤의사를 죽게 했다'고 통곡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윤의사의 부모님을 가리키며 '저 분들은 윤의사의 부모님이 아니라 전 국민의 부모님'이라고 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의사의 고향에서조차 일제의 간악한 선전에 의하여 윤봉길을 흉악범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김구의 윤의사 생가 방문은 이러한 인식을 단숨에 바꾸었습니다. (왼쪽부터 김구, 윤봉길 의사의 아버지 윤황, 어머니 김원상,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윤봉길 의사의 건국공로훈장증 민재가 훈장증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합니다. 당시 건국공로훈장은 중장, 복장, 단장 등이 있었는데 중장은 최고 등급의 훈장에 속합니다.
아이들이 추모글을 붙이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 돌아본 기념관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윤의사는 거사 직전에 두 아들에게 글을 남깁니다.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둘째 아들 윤담은 어려서 세상을 떴지만 큰 아들 종은 나중에 김구의 둘째아들인 김신의 집에서기숙을 하면서 성균관대학을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김구의 아들들은 윤의사 아들의 뒷바라지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흉상 비록 스물 다섯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약관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은 우리 민족의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일상을 살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죽음을 앞둔 윤봉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백범일지
윤봉길은 거사 후 연행되어 취조를 받는 중에 폭탄을 투척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취조관 “시라가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과 우에다 겐치키 육군 9사단장을 처단하면 한국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가”
윤봉길 “ 일본 군부 수뇌 몇 사람을 처단하면 한국의 독립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리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이들을 처단하면 한국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전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각성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윤봉길 의사, 김구와 함께 일정에 쫒겨서 윤봉길 의사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지만 글로 남길 수가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윤의사 의거는 당시 독립투사들 사이에 찬반 논쟁을 불러 왔습니다. 외교를 통하여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던 이승만은 훙커우 의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이승만의 평가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윤봉길의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연합을 가능케 한 사건이며, 카이로 회담에까지 이어지는 국제적 의미가 있다"-도왜실기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