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제사 이공 묘갈명(統制使李公墓碣銘)
신축년(辛丑年,1721, 경종 1), 흉악한 역적이 창궐하여 정승 김창집(金昌集,1648~1722), 정승 이이명(李頤命,1658~1722) 등 여러 공이 모두 혹독한 화(過)를 입었다. 통제사 이수민(李壽民,1651~1724) 공은 평소 두 공이 알아보고 발탁하였기에 흉인들이 원수로 여겨 죄를 만들어내어 구속한 지 2년이 되었는데,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했다.
정의현(旌義縣)은 남해(南海)에 있어 서울과 수천 리 떨어져 유배(流配)간 자가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공(公)을 보냈다. 공은 당시 나이 일흔 셋이었는데 1년 있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갑진년(甲辰年,1724) 11월 12일이었다. 판서 신임(申銋,1639~1725) 역시 여든 남짓의 나이로 함께 유배되었는데, 시(詩)를 지어 통곡하기를,
선조의 늙은 장수는 애초에 죄가 없었는데 / 先朝宿將初非罪
이역에서 마침내 원한 품고 떠도는 혼이 되었네 / 絶域羈魂竟抱寃
하니, 들은 이들이 슬퍼하였다.
지금 성상 원년 을사년(乙巳年,1725)에 억울한 이들을 대거 신원하여 유배되었던 자들이 모두 돌아오고 신공은 바다를 건너와 길에서 죽었는데,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알 수 없었다. 4월에 용인(龍仁) 굴암(窟巖)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복관(復官)을 명하고 의례대로 제사 지내고 부조(扶助)하였다.
공(公)의 자는 일경(一卿)이다. 선조는 청해백(靑海伯) 지란(之蘭,1331~1402)으로 우리 태조의 원훈(元勳)이 되어 자손이 그대로 청해에 본적을 두었다. 몇 대를 내려와 동중추 인기(麟奇,1549~1631), 호 송계(松溪)라는 분은 고고하고 간결하며 시와 글씨에 뛰어나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선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이분이 명로(明老)를 낳았으니 승지에 추증되었다. 승지는 첨정 휘 문주(文柱)를 낳았으니 공의 조부이다. 부친의 휘는 (詡)이며 선전관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금구 이씨(金溝李氏)로 그 부친은 준생(俊生)이다.
공은 숭정 신묘년(辛卯年,1651) 태어나 병진년(丙辰年,1676)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을 세 번, 훈련원 주부, 도총부 도사와 경력을 지냈다. 외직으로 나가 고원군(高原郡)과 낙안군(樂安郡)을 맡고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
신사년(辛巳年,1701), 나주 토포사(羅州討捕使, 예전에, 각 진영에서, 도둑을 잡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에 발탁되었다가 조정으로 들어와 우림장(羽林將), 사복장(司僕將)을 지냈다. 중간에 남우후(南虞候)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면하였는데, 부임하기 싫어 피한다는 이유로 해당 지역에 충군되는 벌을 받았으나 어떤 중신이 사실을 아뢰어 풀려났다.
철산 부사(鐵山府使),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제주에 부임하기 전에 체직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임기를 마치자 도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를 거쳐 전라 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에 임명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로 승진하였으나, 논하는 자가 너무 빠르다고 말하여 도로 예전 직임을 맡았다. 또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승진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해년(己亥年,1719), 어영 중군으로 가선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금군 별장 겸 도총부 부총관으로 옮겼다가 다시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공은 다스림이 강직하고 밝아 아전(衙前)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그리워하였다. 가는 곳마다 무기를 모두 일신하여 어사와 순무 어사가 누차 칭찬하며 아뢰었다.
통제영에 있을 때는 더욱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다. 체직을 앞두었을 때 화란의 불꽃이 하늘을 달굴 정도였기에 사람들이 두려워 움직이지 못했다. 김 정승(金壽恒,1629~1689)이 남쪽으로 유배 가다가 통제영을 지나자 공은 원문(院門)을 나가 문안하고 편비(褊裨)에게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또 원근에 유배된 이들에게 빠짐없이 먹을 것을 주었다. 어떤 이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하자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일흔 먹은 늙은이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선한 이들을 위하다가 죄를 얻는다면 달게 받겠다.”
하였다.
얼마 후 흉인들이 공을 두고 역당을 옹호한다고 하며 멀리 유배하기를 청하였다. 얼마 후 또 군포 3백 동(同)을 서울로 보낸 일로 죄를 만들어 감옥에 가두었다. 마침 국문을 받는 죄수 중에 역적 김일경(金一鏡,1662~1724)과 내통한 자가 있었는데, 몰래 그의 사주를 받고 훈련대장 이홍술(李弘述,1647~1722)이 통제영의 군포를 받고 역모를 도와 이루려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공은 마침내 국청으로 이송되었다. 이보다 앞서 훈련도감에서 재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이 맡은 통제영에서 빌려갔는데, 그 수가 3백의 절반이었으며, 공은 또 그 절반을 깎았다. 그러다가 훈련도감에서 탕감해달라고 청하자 공이 장계를 올려 따지고 통제영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
이때에 이르러 실상을 조사하자 한결같이 공의 원사(爰辭)대로였기에 흉인들의 계책이 실패하였다. 공은 이 때문에 죽지 않았으나 그래도 유배는 면하지 못했고, 이어서 걱정과 울분 속에 죽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여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입은 옷이 선비 시절과 같았다.
어버이가 병들자 겨울 밤에도 몸소 정화수를 길었으며, 또 섶을 때어 추위와 더위를 알맞게 하였는데, 아이 종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누이의 아들이 어머니를 잃자 집에서 키우고, 장성하자 집과 땅을 밑천으로 주었다. 곤궁한 친척 중에 곤궁하여 시집 가지 못한 자는 시집 보냈으니, 집안에서의 행실이 이처럼 돈독하였다.
벼슬해서는 오랫동안 막혀 있었기에 사람들이 그의 불우한 처지를 애석해하였으나 공은 온화하였다. 늙어서 등용되어 또 액운을 만났으나 마침내 선한 이들과 영욕을 함께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마음속에 지키는 바가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통덕랑 두극(斗極)의 딸이다. 밝고 현숙하여 부인의 덕이 있었다. 숙종이 승하하자 집안에 남자가 없었으나 때맞추어 곡읍하고 상복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하였다. 공보다 5년 뒤에 76세로 세상을 떠나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즙(檝)이고 사위는 사인 신사정(申思鼎), 병사 최명주(崔命柱)이다. 경(㯳)과 신귀하(申龜夏)의 아내는 측실 소생이다. 즙은 계자를 두었으니 경장(慶章)이고, 사위 신사정은 계자를 두었으니 위(暐)이며 딸 하나는 사인 홍성한(洪星漢)에게 시집갔다. 사위 최명주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육(䘻)이다. 즙이 묘지명을 청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옛적 당파의 화는 / 在昔黨禍
후한보다 심한 적이 없었네 / 莫甚東京
당시 황보규는 / 維時皇甫
스스로 영웅으로 여겼으나 / 自謂豪英
연루되지 않은 것이 부끄러워 / 而恥不與
혼자 살고자 하지 않았네 / 不欲獨生
공은 얼마나 다행인가 / 公則何幸
이것이 영광이라네 / 斯爲光榮
나는 명을 지어 / 我作銘詩
그의 무덤에 표시하노라 / 以表其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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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脚註]
[주01] 통제사 이공 묘갈 :
이 글은 이수민(李壽民)의 묘갈명이다. 이수민의 본관은 청해(淸海), 자는 일경(一卿)이다. 1651년(효종2) 태어나 1724년(영조
즉위년) 11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청음(淸陰) …… 지었다 :
《청음집(淸陰集)》권30에〈동지중추부사 송계 이공 묘갈명(同知中樞府事松溪李公墓碣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03] 황보규(皇甫規) :
후한(後漢) 사람으로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났을 때 연루되지 않자 수치로 여겨 상소하여 함께 처벌받기를 청하였다.《後漢書 卷
65 皇甫規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