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옛날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우리를 기억의 저편으로 이끌고 간다.
그 속에는 지금과는 다른 또 다른 풍경들이 존재한다.
이발소 그림처럼 조잡한 그림을 배경으로 꽃마차를 타고 찍었던 사진들, 그리고 우리들의 어릴적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풍경들과 옷차림들이 빛바랜 사진첩 안에 다소곳이 잠들어 있다.
사내애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밑이 뻥 뚫린 내복하나 걸치고서 앙증맞은 고추를 달랑거리며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닐 때 누나들은 미국에서 돌아온 윤복희와 더불어 미니스커트를 입기 시작하였다.
동네 어르신들은 다 큰 처녀가 백주 대낮에 허벅지를 내놓고 다닌다고 혀를 끌끌 찼지만 자를 들고 다니던 경찰들의 코메디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기를 끌던 외화 원더우먼과 소머즈에 힘입어 핫팬츠까지 등장하게 된다.
미니와 핫팬츠에 롱부츠를 신은 멋쟁이들의 반대편에는 아랫단이 밑으로 갈수록 넓어져 거리 청소부라는 비아냥을 들은 일명 나팔바지라고 불린 판탈롱이 통굽구두와 함께 유행하기도 했다.
남성들은 70년대 후반부에 등장한 결론은 버킹검이라는 기성복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한사라사라고 불리워지던 맞춤복과 기성복이 혼재된 시대였었다.
교복을 입은 형들과 누나들은 신입생 때에 자랄 것을 감안하여 넉넉하게 맞춘 덕분에 어색하기만 했지만 획일적인 교복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멋을 내곤 했었다.
동복을 입을 때면 하얀 칼라에 풀을 잘 먹여 얼마나 깨끗하고 빳빳하게 하느냐가 관건이었고 하복에는 다아트 선을 따라 줄을 내가며 다림질하기에 바빴고 남학생들은 동전 두개를 집어 내직기 세우는데 공을 들였고 모자에는 볼펜심으로 빵을 넣어 빵빵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소룡의 인기와 함께 노란색 줄무늬 츄레링이 유행하기도 하였고 누나와 형들이 기차표 운동화를 수세미로 빨아 담벼락에 말릴 때 우리들은 전천후로 누비고 다니던 왕자표 검정 고무신으로 만족 하여야 했다.
물놀이를 할 때면 배가 되었고 흙놀이를 할 때면 신발 한 쪽을 다른 쪽에 구겨 넣어 자동차를 만들며 놀았다. 그 고무신조차도 뒷부분이 찢어지면 엄마는 헝겊을 덧대 기워 신기도 하였다.
일요일이면 허름한 찐빵집이나 이름 없는 제과점에서 미팅을 한답시고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교복의 호꾸를 풀어헤친 고삐리들이 당꼬바지 속에 청자 담배를 꼬불쳐 농땡이를 피웠고 그래도 누나들의 머리칼은 샴푸와 린스가 없었음에도 햇살에 반짝거렸다.
입셍로랑이 프랑스인지 미국인지도 몰랐고 아디다스와 나이키는 나오기도 전이었으며 레오파드라는 상표만 찍혀도 일주일은 자랑을 하며 신고 다녔다.
대학생 형들은 염색들인 군용 점버만 걸치고도 1년 내내 생활 하였고 고등학생들 역시 군사정권의 교련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도 땀에 절은 교련복을 무궁화 비누로 빨아 각만 잘 세우면 데이트를 할 때 입고 나가도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다.
우리들이 가슴에 길다란 손수건을 매달고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클리프 리처드가 한국을 방문 하였고 당시에 자기의 속옷을 벗어 던졌다는 여대생의 이야기는 온 나라의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어느 틈엔가 흑백텔레비 속에서 비너스 속옷 광고가 나오기 시작 하였고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던 아버지는 먼 산을 바라보며 ‘흠흠’ 헛기침을 지우시곤 하였다.
전쟁이후 모든 것이 모자라던 그 시절에 형들과 언니로부터 내려 받아가며 옷 한 벌에 온 식구가 입고 자랐는 시절이었지만 나름대로 청춘도 있었고 멋도 있었다.
이제 그 시절의 패션들이 촌티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요즘 다시 유행하는 것을 보면서 책보에 벤또를 둘둘 말아 달음질쳐 다니던, 땟국이 줄줄 흐르던 그 때가 새삼 그립기도 한 것은 추억이라는 또 다른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한 세대를 풍미하던 패션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촌티패션으로 전락하여버리고 시대는 새로움과 희망을 앞세우고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