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만난 女人
글 德田 이응철(수필가)
소중하게 얻은 가을이다. 연일 무더위가 여름을 엿가락처럼 길게 길게 늘여 영육이 꺼져 들어갔기에 늦게 맞은 가을은 더욱 새롭다. 가을은 우리의 영혼을 크게 힐링해 준다. 흔들리는 코스모스 하나를 보면서 높은 담장을 다 오르고 내려다보는 담장이 넝쿨을 보면서 모든 것이 많은 교훈을 안겨준다.
사색의 계절이다. 한해살이 식물들엔 한해의 끝이다. 푸르름이 기승을 부리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닫던 칡넝쿨은 마침내 윤기를 잃어 희끄무레하다. 빨간 열매들이 겨울을 예비한 찬란한 가을은 대추처럼 한껏 쪼그라들까 심히 우려스럽다.
우연은 필연의 그림자라고 했던가!
애마를 멀리하고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중앙로에서 공지천 쪽으로, 이어 한참 후 대로변 작은 찻집 지하 계단 앞에서 발길이 머문다. 간판을 확인하고 한참을 머물다가 천천히 건물 지하로 발길을 내딛는 가을 나그네의 행동이 수상쩍다.
순간 만감이 교체한다. 언제 온다는 소식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온 가을 나그네는 차마 한 발짝도 떼지도 못하고 꿀에 빠진 벌처럼 깊은 상념에 빠진다. 무려 18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반추하며 계단을 내디딘다.
맑은 도시,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거짓말처럼 전혀 소식조차 모르고 살아온 인연도 있단 말인가?
그녀는 누구인가? 봉황의 품에 펼친 번개시장에서 푸성귀를 놓고 팔던 장사꾼이었다. 주말 새벽이면 아내와 즐겨 다녀오던 샘터 같던 곳은 안개라도 내리면 몽환적인 곳이다. 새벽 나루터에서 서면 촌로들의 농산물을 도매로 이어받아 리어카를 끌며 새벽 내내 이곳에서 팔곤 했다. 말도 어눌해 외국인임을 직감했지만, 눈빛이 마주치면 마음까지 빨아들이는 수렁같은 눈에, 언제나 후하게 얹어주던 젊은 아낙이라 언제부터인가 매료되고 말았다.
춘천의 삶이 요동치던 번개시장은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한다. 새벽 잠깐 장이 선다. 서면 박사마을에 현금을 바꿔준 현장이었다. 장터는 항상 살아있다. 계절을 제일 먼저 불러오고 희망과 용기로 채워주는 곳이다. 그런 곳을 주말이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던 어느 날, 있어야 할 자리에 젊은 아낙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날, 수소문 끝에 연변에서 온 다문화 가족으로, 남편이 교통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게 아닌가?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여인의 정체가 다소 벗겨진 날이었다. 그 후, 슬픈 표정으로 몇 날을 번개시장에 나오더니 이내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시어머님과 하나뿐인 아들과 다른 일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문화 가족이라 항상 도와주고 싶었지만, 마음 뿐 도와줄 방법이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곁에서 행상하던 노파 한분이 어느 날, 어쩜 근화동에서 다방을 한다고 지나가는 말로 귀띔해 주셨다.
다방? 갑자기 불쾌하였다. 젊은 아낙이 놈팽이들의 소굴 같은 다방에 뛰어든다는 게 여간 불유쾌하기도 했지만, 그가 선택한 직업이라 그저 안타깝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미투운동으로 요즘이야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등이 법으로 우뚝 서서 추근대는 수컷들의 추태를 단호히 정리하지만, 18년 전만 해도 물장수는 속수무책이 아닌가! 주변이 직행버스 관련한 여인숙들이 즐비하였다. 모이고 어디론가 흩어지는 불량배들이 들끓던 길목에 일출 다방이라그녀를 아끼는 나의 자존심은 허락치 않았다. 30대 초반의 수렁 같은 두 눈의 여인이 가여웠다. 며칠을 가슴앓이 하다가 타지로 전출을 가면서 소식이 두절되어 살아온 것이다.
요즘은 찻집이지만 당시는 주로 다방이었다. 담배 연기 속에서 차 한잔을 팔면서 험한 말을 모두 수용하며 노저어 온 청상과부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수렁 같은 두 눈은 얼마나 구겨지고, 욱박지르며 겁주어 어떻게 견디었을까? 서둘러 가게를 넘기고 어디론가 떠난 것이 아닐까 오만가지 염려를 그려보며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
문을 열자 이내 50대 주인이 인사를 하며 놀란다. 예전 리어카를 끌며 푸성귀를 팔던 그 여인이 아닌가! 한눈에 18년의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연변 아낙이었다. 지나치게 앞서 걱정하던 험한 여인의 몰골이 아니었다. 놀라는 모습이 번개시장에서 반가히 맞으며 미소짓던 그 눈길이었다. 아니 춘고 사회 선생님? 맞죠. 놀라며 확인하는 목소리는 떨렸다.
방정맞던 나의 예견은 순간 전혀 다른 공상 소설이 되었다. 다방을 하면서 오로지 시어머님과 아들을 위해 하루하루 도를 닦는 기분으로 손님을 대하면서 터를 잡은 것이다. 부유물처럼 흥청대던 손님들, 험한 말로 겁주며 감언이설 등 별의별 손님들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세월이 흐르며 주인의 참 마음을 이해하였다고 털어놓는다.
인생의 삶에서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라고 했다. 하루하루 한 발짝 한 발짝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온 여인의 의지가 놀랍다. 갑자기 내 예견이 빗나가 민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들도 자랑스러운 군 생활을 마치고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성실히 잘하고 있다고 자랑을 한다.
밤늦게 퇴근하면 아랫목에 주발을 담요로 덮어놓고 며느리 기다리던 시어머님도 재혼을 권하시며 불쌍하다고 도와주시다가 세상 뜨셨다고 한다. 아무 스트레스도 없고, 이제 아들 착한 며느리만 잘 만나길 바란다고 속 마음을 꺼내 보인다. 장하다.
18년 동안 해오던 다방에서 온갖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온 여인의 삶, 손님인 어르신들께서 많이 도와주신다고 자랑까지 한다. 활짝 핀 다문화 여인의 눈가엔 살아온 날들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오로지 한 길만 택해 쓰러지지 않고 삶의 숲을 무난히 헤쳐온 한 여인의 삶은 대성공이다. 하루 한 잔을 팔면서도 정성껏 오로지 바른 길을 고집하며 정도 正道를 걸어온 50대 여인의 올곧은 삶이 대단하다. 흉악스럽게 미리 점친 자신의 걱정이 완전 기우였음을 돌아본다. 가을에 만난 여인의 삶은 아름다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