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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7 -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브라질과 스페인령 우루과이 및 파라과이
1. 브라질(4형 : 식민지 정부가 본국에 자립 선언!)
오늘 새벽에 이슬람의 땅 카타르의 도하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팀이 포르투갈에
2대 1로 이겨 이제 브라질과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었는데..... 참 묘한 것이 이슬람
으로 부터 독립한 포르투갈이 신대륙으로 진출해 브라질을 식민지로 다스렸는데
오늘은 그 브라질의 독립을 얘기하려는 것이니.... 우연히 세 나라가 겹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팀 첫 골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와는 노쇼로 악연인 호날두의 등에 맞고 떨어진 공을 김영권
이 넣었는데 호날두 고향은 포르투갈의 아베이루로... 호날두의 정식 이름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산토스 아베이루” 니 아버지는 아들에게 배우에서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 이름에서 “Ronald"
를 따 왔으니 로널드의 포르투갈어 발음이 "호날두로“ 인데 우리나라는 줄여서 ”호날두” 로 부릅니다.
저 포르투갈의 아베이루 Aveiro 는 운하도시로 리틀 베니스로 불리는데 호날두 말고도 유명한 사람이
태어났으니 마젤란으로, 그는 스페인 배의 선장으로 "세계일주" 를 했으니... 그외 1492년 배 3척을
이끌고 대서양을 횡단해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도 스페인인이 아닌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 콜론이라!
아? 콜론은 스페인 발음이고 고향 이탈리아는 콜롬보 라 하고 영어에서는 콜럼버스(콜럼부스) 이지요?
아베이루에서 기차로 포르투를 거쳐 북상하면 스페인의 비고인데 2012년 부터 "박주영" 이 있었으며,
711년 이슬람 사라센인들은 서고트족이 다스리던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해 알안달루스 왕국을 세웠고
기독교도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쪽으로 달아나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는데, 1096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동 엔히크에게 갈리시아 남쪽 땅의 통치권을 양도해 포르투칼레 백작령이 세워졌습니다.
서기 1500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카브랄이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하니 새로 발견된 땅이, 1493년
세계를 두 나라가 분할하라는 교황 칙령이 나오고, 다음해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체결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른 경계선(서경 43도 37분)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으로 확정되었는데, 그럼 브라질은 발견도 되기 전에 교황이 포르투갈에게 준 것이라?
다만 조약기준 포르투갈의 몫은 지금 브라질 보다는 훨씬 작은 해안지역에 국한됐고 포르투갈
개척자들이 내륙인 강 상류로 배를 타고 계속 올라가면서 남미대륙 내륙 부분을 대거 추가
해서 지금의 브라질 국토의 틀이 잡혓으니, 스페인인들이 차지한 남미대륙 서해안에서 내륙
으로 가려면 안데스 산맥을 넘어야 하니 불가능한지라 포르투갈의 내륙 선점이 가능했습니다.
스페인이 점령한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는 금과 은, 구리, 주석, 납, 백금 등등 온갖 지하
자원들이 쏟아져나오는데 비해, 포르투갈이 점령한 브라질에서는 자원 개발이 볼게 없었
으니 실망한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대충 관리하고, 대신에 당시 짭잘한 수익을 올리던 인도
교역에 집중하니 이때 명나라 관헌들에게 뇌물로 협박하며 마카오를 영구 임대하기도 합니다.
포르투칼은 인도 고아와 말래카에 대만을 점령하는등 중국이나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진출을 시도한 것인데.... 브라질 북동부 전체가 광활한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었으니 소수의 브라질 식민 개척자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개발할수 없는 상황
이었는데 초창기 브라질에 이민한 포르투갈인 상당수는 세파르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슬람인이 700년간 다스렸던 이베리아반도에서 레콩키스타후 포르투칼은 스페인처럼 유대인
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추방했는데, 일부는 기독교인으로 위장한후 브라질 식민지로 이주
하였고, 이후 원주민과 흑인 노예를 부리며 플랜테이션 농장주로 살았는데 식민지 운영 인력
이 워낙 부족했던 이유로 유대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해 신분세탁 하는 것을 봐주어야 했습니다.
포르투갈인 대농장주들이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게 "파우 브라질" 이라는 빨간색 염료의 원료가
되는 나무였으니 이걸로 염료로 팔아 돈을 벌다가 마데이라 제도에서 재배하던 사탕수수
를 도입해 플랜테이션을 시작하는 순간 계륵과도 같았던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있어
진정한 축복의 땅이 되었으니 브라질 북동부는 플랜테이션으로 엄청난 번영을 구가하였습니다.
문제는 브라질 북동부 토양이 열대 라테라이트 토양이니 플랜테이션을 짓기 위해 열대
우림을 파괴하면 강수량 때문에 표토층이 씻겨나가고 금새 토양이 황폐화되었고
나무가 다 베어지고 가림막이 없어져 뜨거워진 대지에는 비가 예전 처럼
내리지 않게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북동부의 땅들은 점점 가물고 척박해져 갔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공해 왕실이 브라질로 망명을 오는 사태가 벌어지니 브라질
의 리우데자네이루가 잠시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는데 나폴레옹이 몰락한뒤,
왕실은 본국으로 복귀했으나 정치적 위상이 엄청 커진 브라질에 기반한 포르투갈 귀족들
은 포르투갈 본국과 맞먹으려 했고 이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위치를 격하하며 탄압했습니다.
1822년 브라질은 포르투갈 의회에서 대표자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안 후, 왕태자 동 페드루가
브라질 제국의 독립선언후 황제에 등극해 아버지의 뒤통수를 쳤으며 그리고 1822년부터
1825년까지 브라질 독립 전쟁이 발발하는데.... 1825년에 브라질 최남단 시스플라티나주
가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등에업고 독립에 나서자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500일 전쟁을 합니다.
브라질 - 아르헨티나 전쟁은 1825년부터 1828년까지 브라질령 시스플라티나의 지배권
을 두고 우루과이 독립군, 그들을 지원하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아르헨티나) 와
브라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21세기 현재까지 내려져오는 남아메리카의
두 강국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두 나라의 앙숙 관계를 시작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전쟁의 발단은 여느 이웃나라의 앙숙 관계처럼 영토나 국경 문제로 인한 영토분쟁이 아닌 바로
두 나라의 국경 사이에 끼어 있었던 우루과이의 독립 문제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루과이는
이웃인 아르헨티나와 함께 스페인의 식민지인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중남미
일대의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들이 현지 세력의 독립운동으로 붕괴되는 틈을 노려 리오데라
플라타 부왕령도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5월 혁명으로 스페인에서 독립을 선언합니다.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최동단주였던 반다오리엔탈(Banda Oriental) 도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반다오리엔탈의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호세 아르티가스 역시 5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1811년 반다오리엔탈에서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독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는 연합주를 구성하던 각 주들끼리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데 강력한 중앙집권주의를 지향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정부에
반발하여 1814년 아르티가스의 주도로 반다오리엔탈, 코리엔테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등 연합주의 동부 지역들이 연방동맹 (Liga Federal) 을 결성하여 중앙정부에 맞섰습니다.
연방동맹의 등장은 남쪽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뿐만 아니라 연방동맹 북쪽에 위치한 아직
까지 브라질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의 불안감을 샀고 이에 포르투갈은
브라질로 공화주의가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 히우그란지두술 등 브라질 남부 지역
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1816년 전격적으로 반다오리엔탈을 침공 하였습니다.
4년간의 전쟁 끝에 독립군 잔당을 완전히 몰아낸 포르투갈은 1820년 정식으로 반다오리엔탈
을 자국 브라질의 일부로 병합하고 그 자리에 시스플라티나(Cisplatina) 주를 신설하였
는데, 이후 1822년 포르투갈의 왕세자 동 페드루가 포르투갈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을 세우자 시스플라티나 역시 새로 독립한 브라질 제국의 1개 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루과이(시스플라티나주)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아오며 언어, 역사, 문화 등 모든
것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는 판이하게 달랐는지라 정작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브라질의 지배를 결사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브라질의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군 세력들이
일어나서 브라질군을 공격하며 시스플라티나주는 브라질군과 독립군간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브라질군에 의해 쫓겨나 연합주로 망명했던 독립군 지도자였던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를 중심으로
33명의 독립운동가들이 1825년에 다시 시스플라티나(우루과이)로 들어와 브라질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연합주에 가입하자 이에 분노한 브라질이 연합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연합주 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를 가졌던 브라질 해군이 라플라타 강을
봉쇄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무역을 차단하자 연합주 해군은 라플라타 강을 봉쇄한 브라질
해군을 상대로 돌파를 시도하고 라플라타강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파타고니아 일대에 주둔
시켜놓은 사략선을 대거 대서양으로 보내 브라질 상선을 대상으로 약탈하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육지에서는 연합주군이 라플라타강을 건너 시스플라티나를 점령하고 브라질 영내로 진격하자
황제 페드루 1세가 연합주의 공세에 반격하려고 브라질 전역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여 직접
친정에 나섰는데 전쟁에 끌려가기 싫었던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징병 거부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에 페드루 1세는 어쩔 수 없이 친정 계획도 포기하고 얼마 안되는 육군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격하도록 명령했으나 1827년 이투자잉고 전투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좌절되었으며
그렇지만 연합주도 이 전투의 여파로 공세를 이어갈 여력을 상실하고 브라질 영내에서 철수합니다.
양측 모두 서로에게 일격은 주지못한채 전황은 지지부진해졌고 브라질 국내에서는 돈만 잔뜩 들어가고
인기도 없는 전쟁을 당장 중단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여론이 커져갔으며 무역로가 막히게
된 영국이 양측에 전쟁을 끝내라고 압박하면서.... 양국은 시스플라티나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되고 패전한 브라질 황제는 어린 아들에게 양위하고 포르투칼로 쫃겨갑니다.
2. 우루과이(1-B :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독립전쟁)
스페인의 아메리카 라플라타강 유역 식민지화 이전 투피-과라니계의 차루아족과 차니족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 종족들이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면서 살던 지역으로 스페인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자
차루아족들은 스페인군에 거세게 저항하며 맞섰지만 당연하게도서 내륙지방으로 계속해서 쫃겨갑니다.
우루과이는 스페인 식민지였으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과 접경 지역이라 포르투갈이 자주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던 지역인데 스페인의 7년 전쟁으로 잠깐 포르투갈이 점령했었지만
그후 스페인이 되찾아 계속 스페인의 식민지로 유지되었고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의
지배가 무너지면서 우루과이 역시 아르헨티나인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의 일원으로 독립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합주 정부와 갈등을 빚던 와중에 우루과이는 1816년 포르투갈의
침공으로 강제 합병되어 브라질의 한 주로 편입되었는데, 이후 1822년 브라질이 독립
하면서..... 브라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니 브라질의 시스플라티나 주로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언어와 역사, 문화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는 판이하게 달랐는지라 브라질의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으며 이 일대는 독립을 요구하는 우루과이 지역의 스페인계 백인 반란군과
이를 억누르려고 하는 브라질군과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내전 상태로 이어집니다.
1825년 우루과이의 수복을 노리는, 아르헨티나로 부터 지원을 받은 우루과이 독립운동가
들이 시스플라티나의 아르헨티나 재편입을 선포했고, 이에 분노한 브라질이 아르헨티나
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발발했으니..... 결국 1828년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사실상 브라질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우루과이는 브라질로 부터 독립을 이뤄냅니다.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최동단주 반다오리엔탈(Banda Oriental) 도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반다오리엔탈의 독립운동 지도자 호세 아르티가스는 5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1811년에 반다오리엔탈에서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에 가담
하였고 연합주의 동부 지역이 연방동맹(Liga Federal) 을 결성하여 중앙 정부에 맞서게 됩니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로 공화주의가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 히우그란지두술 등 브라질 남부 지역
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1816년 전격적으로 반다오리엔탈을 침공하였는데...
우루과이(시스플라티나주)는 스페인 식민지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는 판이하게
달랐는지라 주민들은 브라질 지배를 결사반대하니 브라질군과 독립군간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독립군 세력들은 군사력이나 인구 수에서 브라질에게 열세였고 이에 독립군을 지원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였으니 처음에 연합주는 반다오리엔탈이
포르투갈군에게 침공당한 것을 보고 "기껏 뛰쳐나가더니 꼴좋다" 는 반응을 보이며
관망하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브라질 해군이 몬테비데오 항을 통해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코앞의 라플라타 강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보고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는 라플라타강을 사이에 둔 지척으로 두 도시 사이에 실질적인
교류도 수운을 통해 손쉽게 가능했으며 또 반다오리엔탈이 브라질에게 집어먹힌 것을 보고
겁을 먹은 연방동맹의 다른 주들이 연합주에 재가입하자 연합주는 마지막 반다오리엔탈
을 되찾고 또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플라타 강을 보호하기 위해 독립군을 지원한 것입니다.
결국 브라질군에 의해 쫓겨나 연합주로 망명했던 독립군의 지도자였던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를 중심으로 한 33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연합주의 지원으로 1825년에
다시 시스플라티나(우루과이)로 들어와 브라질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연합주
에 가입하자 이에 분노한 브라질이 연합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연합주 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를 가졌던 브라질 해군이 라플라타 강을 봉쇄
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무역을 차단하자 연합주 해군은 라플라타 강을 봉쇄한 브라질 해군
을 상대로 돌파를 시도하고 라플라타강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파타고니아 일대에 주둔시켜
놓은 사략선을 대거 대서양으로 보내 브라질 상선을 대상으로 약탈하는 방식으로 대응 합니다.
연합주(아르헨티나) 해군은 준칼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파타고니아로
침공해온 브라질 함대를 물리치는등 성공을 거두었으나 1828년 몬테산티아고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이 숫자가 많아 연합주 해군을 박살내자 결국 제해권은 브라질이 쥐게 되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연합주군이 라플라타강을 건너 시스플라티나를 점령하고 브라질 영내로 진격
하자 브라질의 페드루 1세는 육군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격하도록 명령했으나
1827년 이투자잉고 전투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좌절되었으며 그렇지만 연합주
역시 이 전투의 여파로 공세를 이어갈 여력을 상실하고는 곧 브라질 영내에서 철수합니다.
결국 양측 모두 서로에게 일격은 주지못한 채 전황은 지지부진해졌고 브라질 국내에서는 돈만
들어가고 인기도 없는 전쟁을 당장 중단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여론이 커져갔으며
연합주도 브라질에 공세를 이어갈수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이 브라질 해군 한테 봉쇄를 당하고 재정 수입이 대폭 줄어들면서 재정 부담이 커졌습니다.
라플라타강이 봉쇄당하면서 연합주와의 무역로가 막히게 된 영국이 양측에 빨리 전쟁을 끝내라고 압박
하면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1828년 8월 27일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 하에 양국은
시스플라티나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되었으며 10월 4일 몬테비데오
에서 우루과이 동방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반다오리엔탈 일대를 둘러싼 3국의 갈등은 마침내 끝납니다.
이 전쟁은 아무도 우루과이 자체의 독립을 노리고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었으니 시스플라티나
를 지키려던 브라질이나 반다오리엔탈을 되찾으려던 아르헨티나, 심지어 전쟁의 시발점이
된 33인의 혁명가들 또한 원래 의도는 브라질에서 독립하여 아르헨티나의 일부로 재편입
을 시도한 것이었을 뿐인데 어쩌다보니 협상의 결과가 그렇게 나와서 독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를 자국의 은인으로 여기며 양국은 영구 혈맹국인데 그도 그럴
것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양 도시 모두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계 이민자
들이 주류였기에 비슷한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Rioplatense 에 속하는 유일한 두 나라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방언 역시 리오플라텐세 스페인어로 동일 합니다.
알고보면 포르투갈의 식민지의 식민지였던 해괴한 이력을 가진 나라가 우루과이니 그런즉 우루과이
는 포르투갈의 2차 식민지였고 포르투갈과 우루과이 사이에는 브라질이 있었으니 정확히는
포르투갈 왕실이 피신한 포르투갈령 브라질 제국의 땅이었던 것으로 그래서 리오플라텐세
스페인어 외에도 Portuñol (포르투뇰)이라는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농업과 축산업 등 1차 산업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해 옆나라인 아르헨티나와
함께 남미에서 경제적으로 잘 사는 국가로 분류되기도 했었고, 제1차 세계 대전때는
중립을 지켰으나 1930년대에 세계 대공황으로 한바탕 휘청거렸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에는 초기엔 중립을 고수했다가 전세가 완전히 기운 1945년 2월에야 연합군에 참전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시 1940년 독일 해군 장갑함인 그라프 쉬페가 남대서양에서 영국 해군과 교전
을 벌인후 몬테비데오항에 피항했는데 독일은 그라프 쉬페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고
영국은 그라프 쉬페를 몬테비데오에 묶어두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했으니, 중립 노선을
고수하는 우루과이와 치열한 외교전이 진행되었으니 결국 그라프 쉬페는 자침했고.....
함장인 랑스도르프는 자살했으며 승조원들은 우루과이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되었습니다.
그라프슈페(Die Admiral Graf Spee) 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인데 이 배는 독일 해군
이 1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제한조항의 범위 내(배수량 1만톤
이하)로 맞추면서도 강력한 군함으로 건조한 배이니 취역은 1936년으로 영국
해군은 이 군함을 덩치는 작지만 강력하다고 인정하며 포켓 전함이라고 불렀습니다.
함명은 막시밀리안 폰 스페 제독에서 따왔는데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칭다오를
근거지로 한 동양함대 사령관이었으며..... 기타 그라프슈페라 불리는 배 중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미완성으로 끝났던 마켓젠급 순양전함 4번함이 있습니다.
1932년 10월 빌헬름스 하펜 해군공창에서 기공해 1934년 6월 30일 진수식을 가졌으며
함명은 슈페 제독의 손녀가 붙였는데 1936년 1월 6일 취역하고 대서양에서 수개월에
거친 숙련훈련을 가졌으며 이듬해 5월 20일에 조지6세 대관 기념 관함식에 참가하여
일본의 아시가라나 프랑스 해군의 됭케르크 등과 같이 각국 해군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라프슈페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후 통상파괴작전에 종사하며 1939년 9월 30일 부터 남대서양이나
인도양에서 많은 상선을 침몰시켰으니 연합국은 대서양에 일곱, 인도양에 하나로 총세 전함 3척,
항모 4척, 순양함 16척의 대책부대를 편성하여 통상파괴함을 수색했는데 12월 6일 그라프슈페의
함장은 야간 조명훈련을 실시했고 이것을 무등화 상태 함선이 목격하지만 함장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1939년 12월 13일 그라프슈페는 영국해군 G부대의 중순양함 엑세터, 경순양함 에이잭스와
아킬리스 3척에게 포착되어 라플라타 해전이 발발하는데 이 전투에서 그라프슈페의
손해는 경미했지만 겨울철 북대서양의 격랑에 견디며 본국에 돌아갈 상태는 아니었고
함장인 한스 란돌프는 가까운 중립국인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항에 함을 피항시킵니다.
애초부터 이 배는 본국으로 부터 군함과의 교전을 금지당하고 있었는데 우루과이는 중립국
이라곤 하지만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로 또 독일 본국에서는 우루과이에서 조기철수
명령이 내려왔고 수리도 못한채로 절망적인 귀국 항해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박기간중 영국 해군의 선전방송이나 본국으로 부터 정보에 의해 단독으로는 대항할수 없는 유력한
함대에 탈출로가 봉쇄당했다고 본 란돌프는 우루과이 정부가 제시한 항구 철수기간을 맞이해
12월 17일에 질게 뻔한 싸움으로 승조원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게 하기위해 승조원을 독일 상선에
옮겨태우고 남은 승조원 40명과 함께 그라프슈페를 몬테비데오 항구 밖으로 끌고 나가 자침시킵니다.
승조원은 전원 구명보트로 대피했는데 이 모습은 라디오 실황중계로 전 세계에 방송되었으며 독일
본국에선 "자침시 유감을 가지지 말라" 고 지시는 있었지만 스스로 자침에 책임을 지고있던
란돌프는 계류하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군함기를 몸에 두른채 권총으로 자결
했는데 그가 아르헨티나 정부와 교섭하던 승조원에 대한 선처도 인정되지 않고 전원 억류당했습니다.
그라프슈페의 자침 이유로는 오래전부터 해오던 선전방송에 의한 적 함대세력의 오인,
탄약부족(사실은 아니다.), 란돌프의 감투정신 결여등 다양한 설을 고찰해왔는데
전후 시간이 흐르고 승조원이었던 기술장교의 증언에 의해 이 배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에 공통되는 구조적 결함에서 기인하는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 명백해 집니다.
선박용 디젤연료는 상온에서는 점도가 높아서 그대로 기관에 공급할수 없기 때문에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에선 연료탱크와 기관사이 중간탱크를 설치하여 연료를 가열시켜 액상화시킨후 기관에
보내는 구조로 되어있었으니 특히 고위도저온의 해역에서는 이 연료처리가 필수불가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간탱크의 보일러에서 증기를 공급하는 파이프 일부가 비장갑으로 상갑판에 노출되어
있어 6인치 포탄 한발이 명중해 연료처리 시스템이 파괴되고 말았으니 그 결과 풍부한 연료의
대부분은 가열할수 없어 사용불능이고 중간탱크에 남아서 처리가 끝난 연료는 16시간 짜리에
지나지 않았으니 본국귀환은 물론이요 영국 순양함대와의 지속전투조차 할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손상된 중간탱크의 수리에는 2주간이 걸린다고 여겼는데.... 72시간 이내로 출항하도록
우루과이 정부가 통고하였고 그라프슈페를 움직일 수 없었던 이 때 우루과이에서의
체류를 허가받지 못한 란돌프 함장은 자침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2006년 2월 그라프슈페 함미에 장식된 하켄크로이츠를 쥐고 날개를 펼친 독수리를 새긴 400
kg의 주권문장을 건졌으니 2006년 8월 민간 인양회사가 이 나치 심볼을 판매한다는 의지
를 발표했을 때 네오나치그룹에서 300만 달러에 구입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고.....
타이타닉 인양 다큐멘터리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은 인양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는데
우루과이 정부는 함을 복원해서 몬테비데오시의 국립해사박물관에 전시할 계획이라 합니다.
우루과이는 1954년부터 1967년까지 대통령제를 없애고 스위스의 연방평의회를 본따 9명으로 '정부
국가평의회' 제도를 실시해 직접 민주제와 근접한 정치 체제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정치권
의 결속력 약화와 여러가지 단점들이 초래되면서 1967년에 다시 도로 대통령제로 개헌하였습니다.
1980년대의 군부 독재나 그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민주투쟁 등 대한민국과 비슷한 점이고 독립을 하기
위해 망명정부를 세운 요인의 숫자까지 33명으로 똑같으며 그리고 대통령 임기도 5년 단임제로
게다가 한국의 맨 반대편에 있는 나라이기도 하니. 여수시에서 직선으로 파고들어가면 몬데비데오
의 앞바다가 나오며 심지어 컬러 텔레비전 방송 시작한 시기도 1980년 12월로 한국이랑 동갑입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차이가 많이 나게 되었는데 1990년대 후반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경제가 무느지면서 같이 무느졌고 거기에다 2001년에 구제역까지 돌면서 우루과이산 축산물의
수출이 격감하는 바람에 우루과이 경제도 파산했으니 2004년 대선에서 바스케스가 당선되면서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좌파가 집권했고 그 동안 소흘히 했었던 복지를 대대적으로 확충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인접대국이면서 같은 백인이 주류에 같은 언어권 국가인 아르헨티나의 영향이 크서
닮았는데 브라질은 국경을 넘는 순간 확 달라지는 정도의 큰 차이를 보이니 표지판의 언어도
포르투갈어에서 스페인어로 바뀔 정도인데 남부 브라질의 경우는 우루과이 처럼 백인이 대부분
인데다가 아열대 팜파스라 그렇게 크게 차이는 안나지만 좀더 북쪽은 다르니 깔끔하고 조용합니다.
우루과이는 이코노미스트 선정 2013년 최고의 국가로 선정됐으니 민주주의 지수 17위
(2013), 언론자유지수 23위(2015), 부패인식지수 21위(2014)로 소득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선진국에 준하는 안정도를 갖추고 있으니...... 평균적으로
프랑스 보다 높은 수준이지만 총 병력은 2만 5천명에 모병제로 군사력은 약합니다.
3. 파라과이(1-A : 미션으로 유명하며 자력으로 독립)
파라과이인들은 자신들을 과라니족 인디언의 후손이라 하여 과라니라고 부르고 있는데 하지만
진짜 과라니족은 극소수이고 인구의 대부분은 스페인인 혈통 백인과 과라니족의 혼혈인
메스티소인데도 국민의 90% 가 과라니어를 할줄 안다는게 놀라운데 이는 파라과이가 독립
당시 자국민 혈통 전반에 섞인 과라니 부족들의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내세운 덕분 입니다.
1536년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으니 스페인 왕실이 이탈리아인 탐험가
들로 구성된 원정대를 과라니 부족 지역을 탐사하는데 활용했는데 과라니족은
백인들의 통치를 전면 거부했으며 1607년에는 과라니족 인디언들의 계속된 반란
에 지친 스페인 제국 정부는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 파라과이의 통치를 맡깁니다.
파라과이에 있는 에수회의 레둑시온(reduccion)들은 제국의 핵심적인 은 광산이 있던
페루의 안데스 산맥 지대와 경계를 맞댄 동부 지역을 지키는 과제를 수행했는데
스페인인들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이 지역을 특히 브라질 남부의 상파울루에서
온 팽창주의적인 노예사냥꾼(파울리스타; Paulista) 에게서 지키는 임무였습니다.
예수회는 1609년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 마을인 '레둑시온(reduccion)'
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과 노예제도를 폐지했으며 콩키스타도르와
노예무역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한 뒤에, 예수회의 레두시온은 강력한 원주민
민병대의 비호를 받으며 마테(찻잎) 의 수출로 국제 무역의 강호로 떠올랐습니다.
파라과이 경제의 번영은 차츰 지역 독립성 강화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이 달가울리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두시온 제도를 금지하자 이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예수회까지 동조하자, 스페인 정부 역시 무력진압으로 맞서 1756년까지 피로 점철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끝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으니 영화 “미션” 이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1986년 개봉한 롤랑 조페 감독의 영국 영화로 종교를 초월해서 인류애와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가를
묻는 작품이니 1986년에는 칸 영화제에서 대상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을 수상하였는데 줄리안 신부의 순교 장면후 첫 등장은 로드리고 멘도사니 용병이자 노예
상인 로드리고는 자신의 애인과 바람을 피운 이복 동생과 펜싱으로 결투를 벌이다가 죽이게 됩니다.
죄의식에 시달리던 로드리고는 가브리엘 신부에게 감화되어, 선교에 동참하기로 하는데 이전에
과라니족을 사냥하여 노예로 팔았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죄를 참회한다는 의미에서 필딩 신부,
가브리엘 신부와 함께 과라니족을 찾아가니 로드리고를 알아 본 과라니족은 처음에 흥분하며
로드리고의 목에 칼을 들이대지만, 용서하고는 그물망에 싸인 갑주와 무기구를 강물에 버립니다.
로드리고는 세 신부와 함께 정글속에 살던 과라니족을 이끌어내어 마을을 설립하며 성당을
짓는데 십자가가 천천히 지붕으로 올라가는 장면은 가히 감동 그 자체이며 로드리고는
성경을 배우게 되는데 극중 읊은 구절은 사랑절이니 신앙심이 깊어진 로드리고는
예수회에 입회하게 되고 마을에는 교황 특사 알타미라노 추기경이 도착하니 임무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국의 이익을 상호 존중하며 교황청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 경계선의 위치한 과라니족과 예수회 선교 사제들이 골치였던 셈이라 이때 "원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라 미개한 짐승, 동물이므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철수하라" 는 식민지 지배자측
입장과 "원주민들도 영혼을 가진 사람이며 신앙 전파의 대상" 이라는 사제들의 주장이 첨예
하게 대립하니 원주민이 동물이 아니라는 증거로 어린 원주민 소년에게 성가를 부르게 합니다.
식민지 지배자 측은 원주민들을 "인간의 말을 잘 따라하는 짐승" 이라고 일축하니 가브리엘
신부는 "이들은 짐승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라 맞서자 영적인 존재들이라는
말에 발끈한 식민지 지배자 측이 "자식을 죽이는데도?" 라고 말하자 가브리엘 신부는
"셋째부터 죽이는 것이며 그것은 부모 각자가 1명씩 업고 도망가기 위함, 즉 종족
보존을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누구로 부터? 바로 우리로 부터!" 하며 일갈합니다.
'유럽 국가들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기에, 이곳의 예수회원들에게 권위를 보여줌으로써
유럽에서도 그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음을 알았으나, 우리 중 누구도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더 좋았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알타미라노 추기경의 독백.
경계선 영토문제를 해결하는 결정권자는 교황특사(추기경)였으니 가브리엘 신부 안내를 따라 추기경이
돌아본 선교사업은 훌륭한 것이었으며, 조직과 운영 등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교 이념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니 추기경은 고뇌하나 국가와 교회의 정치적 관계로 인해 어쩔수없이 식민지 지배자측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직접 과라니족의 영역에 가 떠나라 말하고 선교사들에게도 복귀명령을 내립니다.
가브리엘 신부, 필딩 신부, 로드리고 수사는 불복하고 원주민들과 함께 남아 싸우기로 결심
하는데 이때 가브리엘 신부와 나머지 둘의 입장이 갈리게 되니 가브리엘 신부는 비폭력
과 평화로, 나머지 둘은 적극적인 저항으로 입장이 갈리게 되며, 필딩 신부와 로드리고
수사는 그들 스스로 무장하여 그것이 폭력적인 방법이 될지라도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하느님은 곧 사랑" 이라 말하며, 폭력이 있는곳에 하느님도 계실수 없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럽과 미국, 서양인들 사회에서는 "하느님은 머물수 없으니 벌서 떠나버린" 것이라???
결국 지배자측 공세가 시작되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남미의 첫 구심점이 된 신앙
의 본거지가 쑥대밭이 되고, 이어 과라니족 마을이 공격받으니 이 과정에서 세 선교사 모두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순교하는데, 촐탄에 쓰러진 로드리고 수사는 확고한 신념으로
성체 현시대를 몸 가운데 들고 아이들과 함께 행진하는 가브리엘 신부를 그윽하게 쳐다
보다가 가브리엘 신부가 총탄에 맞아 죽자 눈을 지그시 감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파괴의 장면이 지나가고 알타미라노 추기경은 자신이 내려야만 했던 결정을 되돌아보는데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추기경에게 처음부터 압력을 넣었던 포르투갈측 대표
혼타르가 위로하듯 말을 건네니 “추기경 전하께는 처음 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현실 속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원래 이런걸 어쩌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알타미라노 추기경은 씁쓸하게 내뱉으니.... “아니오, 세뇨르 혼타르.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거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장면이 전환되며,
살아남은 원주민 아이들이 카누를 타고 더 깊은 정글로 들어가는 모습이 나오며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한 아이가 불타고 남은 성당에서 바이올린을 집어듭니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신부들이 원주민들과 나누었던 교감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
하는 장면이며 그리고 알타미라노 추기경의 독백이 배경으로 깔리는데, “그리하여
사제들은 죽고, 저만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저이고, 산 자는 그분들
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중요한 상징물은 십자가 목걸이니 영화 초반, 추기경의 나레이션이 나오면서 원주민 추장
의 얼굴이 나오고 다음 순간 목걸이의 십자가가 클로즈업 되는데 줄리안 신부는 십자가에 메어
진채 바닥에 뉘여져 있고 가브리엘 신부와 필딩 신부가 폭포 밑으로 와서 줄리안 신부의 무덤
옆에서 기도하며 참배할 때, 가브리엘 신부가 무덤에 입맞추고 유품인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겁니다.
영화 후반부 목걸이는 다시 등장하는데, 로드리고 수사가 폭력으로라도 원주민과 함께 싸우겠다고
말하며 입장 차이를 보이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후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왔을 때, "수사님이
옳다면 하느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수사님이 틀리다면 내 축복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축복할 수 없다고 거절한후 포옹하며
가브리엘 신부는 줄리안 신부의 유품이었던 목걸이를 넘겨 주니 거룩한 순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파라과이를 놓고 서로 자기 권리라고 싸우게 된 근원은 1492년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포르투갈 에스파냐 양국은 1493년에 교황
칙령(파란색 점선)에 의해 세계를 분할했지만 포르투갈의 항의로 1년후 다시
경계선을 재설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파란색 실선) 입니다.
이 조약에 의해 로마 교황에 의해서 브라질 해안 지대가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붉은색
실선은 조약 당사자들이 기대했던 지구반대편 조약선인데, 당시에는 이 경계선이
인도 근처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훨씬 동쪽에 걸쳐 있는데 그로부터 무려 6년
이나 지난 1500년에 에스파냐의 비센테 야네스 핀손이란 사람이 최초로 아마존에 상륙합니다.
그럼 남아메리카를 발견하기도 전에 이미 그 땅의 소유자가 정해진 황당한 상황이었던 셈인데
이 시기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명시한 "케이프베르데 군도에서 서쪽으로 360해리" 에
기준한 분할선이 남아메리카 동쪽 튀어나온 부분을 관통하는 것으로 드러나니 아마존 하구는
포르투갈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고 이때는 아직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
라플라타강에 닿지 못했지만 후에 포르투갈은 이 지역들에 대해서도 권리를 확보하게 됩니다.
비록 짓밟히긴 했지만 예수회에 의한 17세기~18세기의 레둑시온 체제는 신앙을 통해
토착민족인 과라니족을 보호하고 생존하고, 심지어 국제무역 체제에서 한 몫을
챙길수 있도록 만들었으니 토착민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매우 극적이며, 스페인 식민 역사상 매우 드문 예에 속합니다.
실제 주민들은 메스티소임에도 인디언 언어 과라니어가 널리 쓰이는 것인데 아즈텍, 마야 인디언이
원주민인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만 쓰이고, 잉카문명 인디언이 원주민인 페루, 칠레, 콜롬비아 등
에서도 아이마라어등 잉카 언어는 소멸 직전까지 갔으며 캐나다등 앵글로아메리카도 인디언 언어
대부분이 유실되고 영어가 국어로 쓰이는 걸 생각해보면 아메리카 대륙에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는 스페인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으니 1814년부터 1840년까지
파라과이는 이른바 "영원한 독재자" 라는 별명을 받은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박사의 독재를 받게 되었는데 프란시아 박사는 파라과이가 브라질
이나 아르헨티나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습니다.
그의 제위기간 동안 파라과이와 외국의 여행이나 우편은 통제를 받았으니 파라과이로 유입
되었던 외국인 상당수가 마치 전근대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파라과이에 정착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예수회 시설 및 성당들을 공격
하여 약화시키고 대신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군국주의 국가를 세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864년의 3국동맹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은 이 작은 나라 파라과이가 대담하게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3국 동맹군과 맞장뜬 전쟁이니 앙숙이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협조해 파라과이를 징벌하는데 적극 협조했을 정도로 파라과이가 노골적
으로 두 나라를 자극하여 자초한 자업자득이었고 당연하지만 국력 차이가 커서 패합니다.
아순시온에 있는 파라과이 기록 보관소가 브라질 제국군에게 털려서 모든 문서, 역사서
기록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 국립도서관 지하창고에 150년이 넘도록
방치되었으며 공개하지를 않는데...... 부분적으로는 용케 칠레 등으로 빼돌린
것들이 조금씩 있어 칠레 대학들이나 멕시코 UNAM 대학 등이 연구하기도 합니다.
3국 동맹전쟁 패전후 파라과이의 경제와 사회는 초토화되었으며 돈이 없었던 파라과이
정부가 재건을 위해 국가소유였던 토지를 팔아 넘기면서 불평등이 매우 심각해
졌으며 자유당 집권기 동안에도 내란이 빈발하면서 정치가 안정되지는 못했습니다.
패전과 내란으로 인해 남자들이 거의 대부분 죽은지라... "전국민의 90% 가 여성" 인
엄청난 "여초 국가" 가 되었으니..... 1950년대 까지 "일부다처제" 를 해야만 했습니다.
첫댓글 소중하고 멋진
사진/글
다른카페로
복사하여 옮겨도 되겠는지요
아? 예......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야... 영관이지요! 별거 없는 글을......
@은혜 ...
감사합니다
옮겨도
은혜님의 글이라는걸 반드시 표시하겠습니다
@보헤미 고마운 말씀 이십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