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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31주일이면서 위령의 날이다. 위령의 날은 앞서 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데 있다.
삶의 여정에서 죽음은 지금까지 걸쳤던 의상과 분장들이 모두 벗겨지고 지워지는 삶의 마지막 변화가 결정되는 아주 처연한 순간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그 죽음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드리게 된다. 그렇게도 대단하게 보이던 돈과 권력, 지식과 건강이 꺼져가는 생명과 죽음 앞에서 결국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그 빛을 잃고 퇴색해지고 말 때, 인간은 결국 하느님을 찾게 되고. 진실하게 된다. 그러나 아둔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기보다 그 죽음을 잊으려고 자기부정과 자기기만에 빠져 몸부림치지만 결국 죽음은 그가 원치 않는 때 그에게 다가온다. 그 때에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간과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 설 때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되고 진실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가정과 사회 안에서 연대를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에, 자녀의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이 되며 그것은 가정과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영광으로 연장된다. 실패와 고통, 보속도 마찬가지다. 연대는 그 어떤 나눔과 相通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사랑과 생명, 은총과 같은 것들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연대적 관계를 “통공”이라 가르치며, 이것을 통해 사랑과 정, 德과 功을 나누게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 연대관계를 바탕으로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기도를 권하고 바친다.
우리가 앞서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확인일 뿐 아니라 자기 실존에 대한 인식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연대와 상통을 통해, 나와 죽은 이의 사랑과 나눔을 대신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며. 죽음으로 끊어졌던 너와 나의 관계를 극복하는, 영원한 세상을 향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감사송에서 우리의 삶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옮아가는 것이라 고백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이란 삶의 여정에서 한 과정의 마감일 뿐, 허무가 아닌 새로운 삶의 출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서로의 관계를 물리적으로 끊어 놓지만, 우리는 기억이라는 은총과 생각을 통해 이 끊음을 부단히 잇고 있다. 끊음과 단절을 잇는 작업, 이것이 곧 기억이며 우리에게는 기도다. 기억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되살아나는 하나하나의 추억들을 통해, 그때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생전에 서로 느끼지 못했던 삶의 체취와 아쉬움, 안타까움 등을 우리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누구나 못 다한 아쉬움과 잘못, 부끄러움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우리는 서로 세상을 떠난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그리고 서로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을 위령의 날로 정해, 특별히 기도를 당부하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은 있어도 나누지 못했든 사랑을,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뿐 아니라, 특히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잊혀진 사람들, 전쟁과 테러, 고문, 폭력에 희생된 영혼들 - 이들을 위해 이 한 달 동안 열심히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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