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40-온조의 십제 세움>
溫祖, 十濟 建國 (온조 십제 건국)
[비운의 소서노 온조 때문 허망한 죽음]
☯ 형 비류에게서 독립한 온조 10제의 왕이 되다.
서기전 7년, 드디어 비류 천황의 승낙을 받아낸 온조는 백제의 10신과 백성들을 할애 받아 십제국을 건설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십제라는 국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동생 나라로 처음부터 그 관계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그를 버린 아버지의 고씨(高氏) 성(姓)을 버리고,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의미로 해씨(解氏) 성을 취하였다.
십제국(十濟國)의 시조 온조왕은 한산(韓山) 부아악(負兒嶽:지금의 용인 부아산負兒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안성천(安城川) 상류에 자리를 잡고, 외백제(外百濟)의 수도 이름을 본따 하남 오리골[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하니, 지금의 천원군(天原郡)이 그곳이다.
《10제의 위치》
0037
온조왕의 십제국은 가우리의 통치제도를 본따 5방군현[오방군현(五方郡縣)]의 중앙집권제도로, 형님 나라인 비류 천황의 백제국과는 처음부터 다른 정치제도를 썼다.
한편 메주골로 되돌아온 비류 천황은 즉각 그들을 싣고 왔던 대 선단을 외백제(外百濟)로 되돌려 보내, 그의 백제가 목지국(目支國)의 영토를 장악하고, 마한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음을 소서노 여왕에게 보고하고, 추가로 더 많은 백성과 병사, 그리고 장비들을 수송해 오도록 하였다.
기쁜 소식에 접한 소서노 여왕은 그 동안 외백제도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곧 제2차 수송선단을 직접 지휘하여 메주골로 들어오니, 서기전 6년 2월 초였다.
그러나 메주골에 도착한 소서노 여왕에게 예상치 못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온조(溫祖)가 협력을 거부하고 십제국을 세워 따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었다.
메주골에 도착한 소서노 여왕은 대단히 실망하여 비류를 크게 책망하였다.
♬(말풍선)
“어찌 하여 온조를 따로 떼어 독립시켰단 말이오? 별로 많지도 않은 신하와 백성들을 쪼개어 그나마 힘을 분산시키고서 어찌 대국 건설을 꿈꿀 수 있겠소?”
“이건 틀림없이 역신(逆臣)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의 꾐에 온조가 어리석게 속아 넘어간 것이오.” (소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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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저도 온조의 독립을 막았사옵니다. 그러나 오간과 마려의 무리들의 부추김을 받아 온조가 끝끝내 고집을 세우므로, 할 수 없이 어머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승낙하였으니, 지금이라도 다시 불러들이겠사옵니다.”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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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는 이미 천황이 부른다고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특히 오간, 마려의 무리들이 걸림돌이 될 것이오. 먼저 오간과 마려 무리를 제거한 후에 온조를 불러들입시다. 역시 이 일은 내가 직접 해야할 것 같소.”
“며칠간 쉰 다음, 오호장군(五虎將軍)들을 데리고 오리골로 가서 오간의 무리들을 소탕하고 온조를 데리고 올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나 해 두시오.” (소서노)
☯ 여걸 소서노, 온조의 독립을 부추긴 역신들 응징하다 허망하게 죽다.
실망과 분노에 찬 소서노 어라하는 오간, 마려의 무리를 제거하고, 갈라선 형제를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하여 비류의 오호장군들을 앞세우고 그 자신도 갑옷으로 무장한 채 십제(十濟)의 하남 오리골로 떠났다.
비류 천황의 오호장군들이 십제의 국경을 넘어 하남 오리골로 진격해 가자, 이미 국경수비대로부터 연락을 받은 오간과 마려는 대단히 놀라서 성병(城兵)들을 모아 방어를 굳게 하고 닥쳐올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호 장군들이 자신들의 목을 가지러 오는 줄 알았다.
♬(말풍선)
“마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오호 장군들이 온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일세. 소식에는 외백제의 소서노 여왕께서 메주골에 도착한 모양인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호 장군은 여왕의 명으로 우리를 잡으러 오는 것이 틀림없어.” (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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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온조왕을 부추겨 십제국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모든 죄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워 죽일거야.” (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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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 보고하여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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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안 돼! 온조왕이 어머님인 소서노 여왕이나 형님인 비류 천황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우리를 보해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우리는 이대로 처형당하고 말겠지.” (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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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에 죽을 바엔 한 번 싸워나 보세. 일단 성문을 열어 오호 장군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병졸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성문을 재빨리 닫고, 매복병을 시켜 일시에 활을 쏘아 죽여 버려야 해. 일단 일을 저질러 버리면 온조왕은 천황의 명을 어긴 죄로 우리와 같은 운명이 되겠지. 그 길이 유일한 희망이야.” (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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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자네는 머리가 좋군, 좋아! 한 번 해 보세. 온조왕을 끌고 들어가는 길이 유일한 살 길이야. 나도 동감이야.” (마려)
오간과 마려의 흉계도 모르는 채 오호 장군들과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갑옷으로 무장한 소서노 여왕 일행은 활짝 열린 성문을 바라보고, 안심하고 입성하였다.
♬(말풍선)
“하남 위례성의 문이 활짝 열려 있군. 우리를 환영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그렇지. 온조가 이 에미가 온 것을 눈치 챈 모양이군.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였다. 마려와 오간만 잡아오면 온조는 스스로 와서 협력하게 될 것이다.” (소서노)
소서노와 오호 장군들은 안심하고 하남 위례성으로 입성하였다.
♬(말풍선)
“성문을 닫아라!” (오간)
↔
“무슨 짓들이얏? 아, 속았구나!” (소서노)
오간과 마려의 명령에 따라 미리 잠복했던 궁사들의 일제 사격에 오호 장군과 늙은 소서노 여왕은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순식간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대제국 가우리[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 두 나라 건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전설적인 여걸 소서노의 최후로서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종말이었다.♣
☯ 왕위 보존을 위해 어미 소서노를 암매장하고 만 온조
뒤늦게 소식을 듣고 성의 서문으로 달려온 온조왕은 천황군의 오호 장군 시체들 앞에 경악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말풍선)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냐? 천황의 오호 장군들을 죽였다면, 앞으로 천황의 문책을 어찌 하려고? 경솔한 지고, 이것 참 큰일 났구나!” (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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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마마! 사실은 저 오호 장군들이 비류 천황의 명령으로 대왕을 체포하러 왔나이다. 그래서 저희들은 대왕을 보호할 목적으로 할 수 없이 일을 저질렀나이다.” (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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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앗! 크, 크, 큰일 났습니다. 대왕마마! 오호 장군들의 시체 속에 어라하 여왕마마가 계십니다.” (수하 장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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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머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떻게 어머님이 이들 속에 계십니까? 어째서 어머님이 무장을 하시고 아들을 보러 오셨습니까?” (온조)
아! 이 일을 어찌하랴! 뜻밖에 오호 장군들의 시체 속에 장군 복으로 무장한 어라하 여왕마마가 계셨던 것이다. 너무도 놀란 온조왕은 하늘이 꺼지는 듯 이 예기치 않았던 일을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망연자실하였다.
이미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오간은 성문을 열고 홀로 나가 성 밖의 천황 신군을 안심시켜 되돌려 보냈다.
♬(말풍선)
“용맹스러운 신군들이여! 나는 오간이다. 오늘 영광스럽게도 국모(國母)께서 온조(溫祖)대왕(大王)을 방문하셔서 당분간 이 위례성에 머무르시기로 하였다. 따라서, 오호 장군 역시 어라하를 모시고 있다가 돌아가실 것이므로, 오늘은 그대들만 되돌아가서 천황께 그대로 보고 드리길 바란다.” (오간)
성문이 굳게 닫혔다, 그 안에서 소동이 있었다고 느끼긴 했으나, 오간의 유창한 변명을 그대로 믿고 오호 장군 부하들은 말머리를 돌려 메주골로 돌아가 천황께 보고 드렸다. 보고를 받은 비류 천황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어느 땐가는 국모의 시해 사건이 밝혀질 것이고, 그리 되면 아무리 동생이라 하여도 비류 천황의 엄중한 문책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이렇게 판단한 온조는 사실을 변명해 볼 생각도 없이 오간과 마려를 시켜 어머니 소서노 여왕의 시체를 암매장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불안했던 온조는 5월에 북쪽으로 멀찌감치 천도하기로 마음먹고, 한산(韓山)의 새 영지 개발에 착수하여 7월엔 백성들을 한산지역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8월엔 북천(北遷)을 발표하였다.
온조왕은 하남 위례성[오리골]을 떠나기로 하고, 그의 북천을 엉뚱하게 마한(馬韓)왕에게 통보하여 하남 위례성을 마한이 점령하도록 비밀리에 교섭하였다. 이것은 혹시 국모 시해사건이 들통 날 경우, 그의 뒤를 추격해올 비류 천황을 막아주길 기대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서기전 5년 정월에는 그 자신마저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천도하여 버렸으니, 국모 시해사건 이후 불과 8개월 만에 한 나라가 다른 지역으로 완전히 이동해 버린 것이다.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
《온조 십제의 북천(北遷)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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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5 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