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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봄, 경성에 잡지 한 권이 나왔다.
표지에 적힌 이름은 '동원(同源)'.
창간을 이끈 사람은 일본인 한국학자 다카하시 도루였다.
창간호에는 단군 전설을 정면으로 다룬 그의 논문이 실렸다. 일본어 논문, 같은 내용의 한문 번역, 그리고 그해 3월 매일신보에 국한혼용체로 연재한 글까지. 한 가지 단군론을 세 가지 문체로 펼쳐 보인 것이다. 한국인 독자를 노린 이 구성은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3·1운동 직후였다. 잡지가 나온 계기 자체가 그 운동이었다. 조선 민중이 거리로 쏟아진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았고, 단군을 민족의 시원으로 받드는 대종교의 교세는 만주 일대까지 뻗어 있었다. 다카하시는 이 상황을 정확히 읽었다.
논문 서두에 그가 쓴 말은 솔직했다. "배우지 못한 조선인이라도 단군을 모르는 이는 없고, 단군교는 그 이름 하나로 사람을 단번에 끌어모은다는 것."
그는 이 현상을 학술과 역사의 잣대로 검증하겠다고 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단군이 조선 민족 전체의 시조라는 관념, 그 논리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결론은 이랬다. 단군은 북조선 일부 지역 전설 속 조왕(祖王)일 뿐, 남조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니 단군교(대종교)가 단군을 전 조선 민족의 시조로 세운 것은 근거가 없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남조선 사람들은 신라 시조 혁거세를 조왕으로 삼아야 마땅하다고까지 했다. 민족을 북과 남으로 가르는 이 논리는 학술 주장이 아니었다. 단군을 중심으로 뭉치는 민족주의를 뿌리에서 끊으려는 시도였다.
그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단군 기록을 모두 후대의 첨삭으로 봤다. 단군과 제석(帝釋)을 결합한 것은 불법을 펴기 위한 방편이었고, '단군이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여왕 부루를 낳았다'는 대목은 고려 충렬왕 무렵부터 조선 초에 걸쳐 전설이 덧칠된 흔적이라는 것이다. 결론만 보면 앞선 일본인 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논문이 눈에 띄는 까닭은 비판의 과녁에 있었다. 그는 선행 일본인 학자들의 단군론이 아니라, 대종교가 단군 기록을 집대성해 펴낸 사료집을 정면으로 겨눴다.
그 사료집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 대종교 2대 교주 무원 김교헌이다. 성균관 대사성과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유학자였다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며 이름을 김헌(金獻)으로 바꿨다. 1916년 홍암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명한 뒤 교주 자리를 이어받아,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으로 옮기고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1914년에 엮은 '신단실기(神檀實記)'는 단군의 사적과 옛 신교 사상의 자취를 안팎의 문헌에서 모은 책이다. 환인·환웅·환검(단군)의 삼신일체를 뼈대로 한민족의 역사적 연원을 밝힌 이 책은 종교서를 넘어, 식민지 시대 민족 정체성 서술의 한복판에 놓인 자료였다.
다카하시는 이 책에서 한 대목을 직접 검토했다. 이규보의 '이상국집'에 단군의 사적을 적은 시구가 있다고 한 부분이다. 실제로 '이상국집'을 뒤져도 그런 시문은 없었다. 이 지적은 문헌학적으로 옳았다. 단군 제사가 조선 으뜸가는 풍속이라는 주장도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두 번째 비판이었다.
그러나 비판의 밑바닥에는 식민지 조선의 한국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 있었다. 그는 조선의 민족성을 전근대적이고 정체된 것, 근대 국민국가에 걸맞은 고유 문화를 갖지 못한 사대주의로 규정했다. 이 관점은 1921년에 펴낸 '조선인(朝鮮人)'에 집약됐다. 단군론은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나왔다.
같은 무렵, 같은 사료집을 접한 한 서양인은 정반대로 반응했다. 캐나다 출신 개신교 선교사 게일이다.
1888년 조선에 들어온 뒤 마흔 해 가까이 이 땅에서 살았다. 성서 번역자이자 한국 고전 번역가였고, 동시에 한국의 종교와 문화를 서구에 소개한 연구자였다. 성서를 한국인이 알아들을 말로 옮기는 일에 매달리던 그가 부딪힌 가장 큰 벽이 있었다.
성경의 'God'을 한국어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1890년대 초부터 1920년대까지,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 논쟁은 좀처럼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상제(上帝), 천주(天主), 신(神), 하느님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게일은 '하느님' 편이었다.
1913년 첫 한글 성경전서 출판 기념식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하느님'은 여러 신에게 두루 쓰이는 일본의 '神(Kami)'이나 뭇 신 가운데 으뜸일 뿐인 '上帝'와 달리, 유일신 개념을 가장 알맞게 담아내는 말이라고.
이 판단에 결정적이었던 사람이 주시경이다.
게일이 한국인의 유일신 관념을 묻자, 주시경은 '하나(one)'를 뜻하는 '하나'와 '주·임금(lord, king)'을 뜻하는 '님'으로 이뤄진 '하느님'을, 한국인은 천지창조와 이어 붙여 '옛 창조자, 조화옹(造化翁)'이라 부른다고 답했다. 이 한 낱말에 '크신-한-하늘' 세 뜻이 함께 살아 있었다.
대종교에서 '한(桓)'은 "더없이 크고 더없이 밝다"는 뜻이다. 환인의 桓이 그렇고, 환웅의 桓이 그렇고, 한배검으로 불리는 단군의 '한'이 그렇다. 크기로 더할 데 없고 밝기로 더할 데 없는 것. 대종교가 말하는 한민족의 시원적 속성이다.
주시경이 훈민정음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 자리에서 읽힌다. 그는 감리교 신자로 출발했으나 끝내 대종교에 귀의한 사람이다. '한글'의 '한'이 그저 '크다'나 '한국'을 뜻하는 데 그쳤다면, 굳이 대종교인이 그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그가 담으려 한 '한'은 한배검의 '한', 더없이 크고 더없이 밝다는 그 뜻과 다르지 않다. 민족의 가장 오래된 신성한 이름에서 글자를 가져와, 이 겨레의 글에 이름을 단 셈이다.
이렇게 보면 한글은 단순한 문자의 이름이 아니다. 한배검에서 이어진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글자 이름 안에 새겨 둔 것이 된다.
게일은 바로 여기서 개신교 유일신 관념을 담을 그릇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단군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1900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학술지 창간호 논문에서 그는 단군을 아예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국 고대사에서 그가 가장 먼저 거론한 인물은 기원전 1112년의 기자(箕子)였다. 기준으로 삼은 책이 '동국통감'이었는데, 이 책에서 단군은 기자에 견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존재였다. 단군은 정치적 군장으로, 기자는 한국 유교 도덕의 시조이자 문명의 시원으로 보는 '동국통감'의 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같은 창간호에 이어 논문을 낸 헐버트는 달랐다.
중국과 구분되는 한국 고유의 흔적, 곧 '한국적 유풍(Korean Survival)'을 따지면서 단군을 끌어들였다. 한국 최초의 문명인은 태백산 기슭에서 난 토착인 단군이며, 그가 야만 부족에게 군신의 관계와 혼인의 예법, 요리법과 집 짓는 기술을 가르쳤다고 했다. 단군 기록이 전설의 성격을 띤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기자 이야기 역시 사료의 신빙성으로 따지면 다를 게 없다고 맞받았다. 단군이 전설이면 기자도 전설이라는 것이다.
헐버트가 '동국통감'과 다른 서술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다른 사료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가 근거로 삼은 '동사보유(東史補遺)'에는 삼국유사 속 단군 기록이 담겨 있었다.
두 논문에 총평을 맡은 존스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짚었다.
단군이 오늘 갖는 의미는 '종교적 기원'에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들어오지 않은 한국 고유문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귀신 혹은 샤먼 숭배이며, 그 자취는 한국 역사의 여명기부터 나타난다고 했다. 단군은 주요 샤먼 신령 중 하나인 제석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샤머니즘은 기자 이전부터 있어 오늘에 이른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1910년대 들어 게일의 단군 인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김교헌이 1914년에 엮은 '신단실기'였다. 그의 전환이 또렷이 드러나는 때가 1917년과 1918년인데, 공교롭게도 김교헌이 교주로 있던 1916년부터 1923년 사이, 대종교 교세가 만주 전역에서 절정에 이르던 그 시기와 겹친다.
게일은 '신단실기'에서 다카하시가 후대의 가공으로 본 대목 이후를 모두 덜어내고, 단군의 신이한 자취와 그에 대한 숭배의 기록, 후대 문인들의 단군 예찬 일부만 골라 옮겼다. 그리고 1918년에는 이 책을 "믿을 만한 한국 역사가들의 기록"으로 인정하고, 단군을 한국 유일신 개념의 시원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글에는 이렇게 적혔다. 단군 곧 신인(神人)은 하늘에서 태백산 위로 내려와 한국 민족에게 첫 종교적 가르침을 준 인물이라고. 단군은 기원전 2333년, 중국의 요(堯) 임금,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서구보다 더 오랜 연원을 지닌 한국 종교의 존재를 증언한다고 했다.
게일이 단군사화를 읽는 방식은 선교사들 사이에 이미 자리 잡은 해석의 전통과 닿아 있었다. 헐버트는 환인과 환웅을 각각 창조주(Creator)와 신(Spirit)으로 옮겼다. 언더우드는 한발 더 나아갔다. 환웅이 신령으로서는 세상을 다스리기 어려워 성육신(incarnation)을 바랐고, 단군은 마리산에 옛 제단을 세워 창조주 환인을 예배했다고 적었다. 환인-환웅-단군의 관계가 성삼위일체를 암시하는 계시의 흔적으로 읽힌 것이다.
게일은 이런 번역을 한국인 스스로 전한 단군사화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가 받아들인 단군 사화의 출처는 삼국유사의 '고기(古記)'가 아니라 '신단실기'의 '고금기(古今記)'였다.
그 구절은 짧다. "桓因은 天也오 桓雄은 神也오 檀君은 神人也니 是謂三神이라." 환인을 불교의 제석천이 아니라 천(天)으로 못 박은 이 서술이, 한국 유가 지식층이 품어 온 천신(天神) 관념에서 유대·기독교적 유비를 찾던 게일의 탐구와 맞아떨어졌다.
게일이 자신의 책을 쓰면서 주시경, 최남선, 김교헌에게 자문을 구한 흔적이 문헌에 남아 있다. 주시경에게는 세종의 한글 창제를, 최남선에게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두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근대 지식인들과의 교유가 게일의 단군 인식 전환과 무관했을 리 없다.
다카하시의 방법은 게일의 것과 뿌리부터 달랐다.
게일이 원전을 옮기며 저자의 뜻을 존중했다면, 다카하시에게 한국 문헌은 해석하고 가져다 쓰는 대상이었다. 그에게는 문헌 비평으로 먼 과거의 지식을 얻고, 그 차이를 사회의 진보로 이론화하는 근대 역사담론이 깔려 있었다. 번역가와 해석자. 같은 사료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완전히 달랐다.
1927년, 다카하시는 이 현상을 이렇게 정리했다.
병합 뒤 해마다 조선인의 민족정신이 일어나면서 갖가지 민족 역사서술이 나타났는데, 그중에서도 기이한 것은 줄곧 기자를 개국의 성군으로 받들던 흐름이 돌연 끊기고, 그 자리에 단군을 세워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와 같은 지위를 주고 민족의 기원적 우상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인이 중국에 맞서, 천오백 년의 문화적 종속에서 단숨에 벗어나려 한다는 진단이었다.
이 대목은 뜻하지 않게 중요한 진실을 드러낸다.
단군에게 아마테라스와 같은 지위를 준다는 표현은, 대종교 중광의 의미를 일본인 학자가 가장 정확히 짚어낸 순간이기도 했다.
나철이 일본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일본 민족의 근원과 신교의 본원, 신사의 삼보한궤(三寶韓几), 궁내성의 오십한신(五十韓神), 의관문물과 전장법도가 모두 어디서 왔는가"라고 되물었듯, 대종교는 처음부터 일본 신도를 조선 신교의 아류로 보는 주장을 품고 있었다. 일본이 1915년 포교규칙으로 대종교를 유사종교로 묶어 사실상 불법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게일은 1919년 3월 10일, 전 주미 영국대사 브라이스에게 비밀서한을 보냈다. 한국이 독립하면 스스로 나라를 지탱할 수 있는 민족임을 전하려 했고, 그 근거 중 하나로 한국 민족이 단군 시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점을 들었다. 단군이 한국의 첫 위대한 조상이자 '조선'이라는 국명을 처음 전한 인물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3·1운동이 터진 지 열흘째 되던 날, 선교사가 외교 서한에 단군을 불러들인 것이다.
최남선은 1926년 3월 3일부터 그해 7월 25일까지 동아일보에 「단군론: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연원연구」를 연재하며 다카하시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의 단군론을 비판적으로 따졌다. 그는 삼국유사가 불법을 펴려는 방편으로 단군과 제석을 결합했다는 다카하시의 견해는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단군을 산신으로 규정하지 못한 것을 그 한계로 봤다.
결국 이 세 겹의 이야기가 펼쳐진 자리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대결만이 아니었다. 서양인·일본인·한국인이라는 세 주체가 저마다의 언어와 방법으로 단군을 해석하던 역동적인 지적 공간이었다. 여러 언어를 원천으로 삼은 근대 한국학이 빚어지던 현장이자, 한국의 근대어가 솟아나던 과정과 깊이 얽힌 자리이기도 했다.
다카하시와 게일이 함께 선 지점도 있었다.
둘 다 대종교의 사료집을 핵심 참조 자료로 삼았다. 둘 다 삼국유사 속 단군사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이 갈렸다. 다카하시는 문헌 비판으로 단군의 역사성을 허물려 했고, 게일은 같은 책에서 원시 유일신 관념의 흔적을 읽어 냈다. 한쪽은 민족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고, 다른 한쪽은 그 정체성을 기독교의 언어로 다시 짜려 했다.
대종교 입장에서는 두 시선 다 절반에 머문 것이었다. 김교헌이 '신단실기'에서 말하려 한 것은 단군이 사실이냐 전설이냐가 아니었다. 한민족의 뿌리가 단군에서 비롯한다는 것, 환인·환웅·환검의 삼신일체가 한민족 고유의 신교 사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위에서 일제에 맞서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거를 세우는 일이었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 북로군정서가 대종교 조직을 모체로 삼았고, 무오독립선언서(1918년)에 서명한 39인의 주축이 대종교인이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 인물들이 대종교와 깊이 이어져 있었다. 이 신앙이 단순한 종교를 넘어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단군을 둘러싼 1920년대의 다툼은 학술 논쟁이 아니었다.
조선이 누구인가를 묻는 싸움이었다. 다카하시는 그 답을 허물려 했고, 게일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세우려 했으며, 대종교는 그 답을 총과 붓으로 직접 써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