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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간 총리를 역임한 주은래
☞ 참고 ; 윤덕민, <21세기, 다시 쓰는 조선책략(3)> 신동아 1998. 9
1972년 중국을 방문한 후 닉슨은 주은래로부터 네 가지 깊은 감명- 비상한 기억력, 용의주도함, 뛰어난 교섭술 그리고 흔들림 없는 냉정함을 받았음을 이야기했다.
주은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로부터 다음과 같은 면박을 당한 적이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히 계급차이가 있다. 당신은 부르죠아 출신이고 나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다.
주은래 : 우리 사이에는 분명 계급차이가 있다. 그러나 계급과 관련하여 공통점도 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자기 계급을 배반했다.
1949년 건국 직후 외국기자의 회견에서 어느 서방 기자가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오늘의 중국에 창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대만에요
중국에 창녀가 있다고 말하여 그 의외성과 엉뚱함으로 관심을 끌고는 대만을 끌어들임으로써 중국대륙에는 창녀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대만은 엄연히 중국 영토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주은래(저우언라이, 周恩來, 1898~1976.1.8)는 강소성(장쑤성, 江蘇省)에서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3년 천진(톈진, 天津)의 남개학교(난카이, 南開 중학~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부인 등영초(1904년생)와는 이 남개학교 시절에 만나서 이별 없이 평생을 반려자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았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청강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하였다.
주은래와 등소평의 관계는 특별하다. 1920년 프랑스 유학시절에 만나 형제의 의에서부터 출발하여 평생동안 혁명이념의 동지가 되었다. 문화혁명 기간 중 주은래는 혁명동지들을 보호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등소평이 강서성으로 쫓겨날 때 여러 가지 현지에 지시를 내려 자상한 배려를 해 주었다.
주은래와 장개석의 인연은 중국혁명 지도자 손문이 1924년에 세운 광주의 황포(黃埔)군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임표와는 정치부 주임과 학생으로 만났다. (장개석은 1887년생, 모택동은 1893년생, 주은래는 1898년생 등소평은 1904년생 )
37세의 장개석 교장 밑에 26세의 주은래가 이 학교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여 모질고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민당은 손문의 국공연합 정신에 의해 새롭게 개조된 것이어서 공산당의 참여가 활발했었다.
1925년 3월 12일 국민당 최고지도자 손문이 서거하자 국공합작의 기반은 무너졌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반공노선을 확실히 하자 공산당은 7월 당 총서기 진독수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5명으로 구성된 임시 중앙정치국을 가동시켰다. 이 때 주은래는 그 5인 위원중 한 명이었다. 주은래는 공산토벌에 대항하여 우한(武漢)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남창(난창, 南昌)폭동을 지도하고, 광주(광저우, 廣州)코뮌을 조직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건군 기념일은 8월 1일인데 이것은 주은래의 주도하에 일어난 1927년 8월 1일 남창폭동을 기념한 것이다. 모택동의 주은래에 대한 신뢰와 배려였다.
장개석은 주은래만 없애면 중국 공산당은 끝장이라며 은화 1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주은래의 체포를 독려하였다.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의 소비에트구에 들어가서 전략을 지도하고,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大長征에 참가하였다. 대장정 도중에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이 지도적 위치를 확립하였다. 모택동을 지도자 위치로 끌어올린 것은 주은래였다. 당시 주은래는 모택동보다 당 사업이나 군사지도분야에서도 우세에 있었지만 주은래는 스스로 양보하고 모택동을 추대하였다. 이후 주은래는 모택동의 충직한 동지와 참모로서 때로는 노선을 달리하면서도 혹독한 인내로써 충심으로 모택동을 받들었다.
西安사건 때에는 대국민당 정치 협상력을 발휘하여 國共내전의 정지와 항일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1927년간 총리(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주은래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정반대노선인 4개 현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뒤 개혁개방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한 등소평은 바로 주은래 노선의 충실한 후계자였다. 1965년 주은래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택동의 후계자로 주저 없이 자신이나 유소기를 뛰어넘어 등소평을 공론화 하였다.
그의 검박한 생활은 잘 알려져 있다. 총리 집무실인 서화청을 손도 못되게 하자 근무원들이 주은래가 외국출장간 사이에 몰래 실내장식을 해버렸다가
우리 지도자들이 나를 본받아 저마다 집을 손질한다면 군중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는가 라며 크게 책망을 받았다.
총리가 된 후에도 그의 음식은 황포군관학교시절 장개석과 함께 먹던 그 검소한 식사 그대로였고, 친인척 관리도 철저했으며. 차림은 언제나 단정하였다.
1976년 1월 7일 밤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 한말은 의사에게
여기는 나 한 사람이고 아무 일 없어요. 괜찮으니 가서 다른 위급한 동지들이나 돌보십시오 그들은 당신들을 더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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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개석과 담뱃불
장개석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자 일본인 동기생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이것은 졸업 축하연이 열린 자리에 있었던 이야기다.
2등으로 졸업한 일본인 동기생이 불쑥 일어나
자 여러분! 본인은 오늘 수석으로 졸업한 장개석 동문에게 우정의 선물을 드릴까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스끼야끼를 끓이던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 하나를 쇠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청년 장개석에게 내어 미는 것이 아닌가. 장개석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주는 것을 그들이 말하는 무사도 정신을 봐서라도 비겁하게 거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불덩어리를 맨손으로 받는 만용을 부릴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순간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장개석은 서서히 일어나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어 불을 붙였다.
감사하오, 여러분의 우정을 가슴깊이 간직하겠소. 장개석을 골탕먹이려던 일본인들은 장개석의 기지와 유머로 닭을 쫓던 강아지가 담장위를 쳐다보는 멍한 꼴이 되었다.
장개석을 위기에서 구해준 담배 한 개비는 멀리 고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