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인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를 발견한 순간 기대를 했다. 이제야 비로소 이 책의 ‘10장. 고난이 묻고 신앙이 답하다’라는 소제목과 같이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있겠구나 하고. 그러나 저자를 따라 함께 생각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도리어 당연하게 여겨진다.
우리는 악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의인의 고통에 대해서만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하나님의 ‘전능성과 예정, 예지’까지 따지고 나선다. 이러한 정직함이 다소 불경스러울지 몰라도 피조물로서 창조주께 마지막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이 땅에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아니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그날 고난 받는 자와 함께 계셨다”는 대답에 아직도 만족할 수가 없다. 차라리 “대통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든지, “우리는 고난 받는 자와 함께 하는가?”라는 물음의 답이 더 절실하다. 천재지변이 아닌 것조차 구별 없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려는 시도에는 화가 난다. 고난을 준 자와는 직면하지 못하고 침묵하시는 하나님 탓으로 넘기는 것 같아 속상하다. 게다가 ‘신정론’은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한 신학인 듯, 감히 주제 넘는다.
결국 이러한 불만들이 쌓이다보니 섣부른 답으로 위로하기 보다는, 고난을 통과 중인 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잠잠히 함께 하며 기다려주는 것이 더 정직하게 느껴진다. 다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기도는 여전히 내 몫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시다.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 인간을 세움으로써 인간을 보다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든다.”(p.17~18. 여는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