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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519호 | |
| 포덕 158년 |
8월 넷째주 화요시일 | |
발행처:천도교 동천교구 / 발행인:강병로 / 편집인: 배영진/ 주소:부산남구못골번영로105(대연동) /전화(051)628-1300 FAX : 624-0519 |
시 일 식 순
집례 : 중암 김대석 교화부장
▶ 청 수 봉 전
▶ 개 식 심 고
▶ 주 문 3 회 병 송
▶ 경 전 봉 독 - 동경대전 ‘수덕문’(50~56쪽) --- 이찬용 학생동덕(2)
▶ 천 덕 송 합 창 ---------제6장 도수사(천덕송 16쪽, 1~2절)
▶설 교-------‘3.1운동과 우이동 봉황각’--------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 천 덕 송 합 창 ---------송가, 동학의 딸(천덕송 71쪽 1~2절)
▶ 폐 식 심 고
* 음악준비 : 김창훈 학생동덕(2)
시 일 설 교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2학기 개학을 하고 맞는 첫 시일입니다. 아직은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입니다. 개학을 하면 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의 달콤한 휴식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 겁니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새로 시작하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방학 동안에 멀리 다녀오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강원도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 개원 35주년 기념식에 다녀왔습니다. 올해 92세를 맞은 은성당 조동원 원장님께서 건강하게 수련생을 맞는 모습을 보면서 더 열심히 수련을 해야 하겠다는 자극도 받았습니다. 그 전주인 13일에는 서울의 중앙총부에서 열린 의암기념관 건립을 위한 학술대회에 발표자로 다녀왔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민족대표 의암 손병희 성사님의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와 함께 3‧1운동의 발상지인 우이동 봉황각을 국가기념물로 승격시키기 위한 학술대회가 같이 열렸습니다. 저는 의암성사의 생애와 우이동 봉황각에 관해 연구해서 대중들 앞에서 섰습니다. 오늘 설교는 그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이동 봉황각(鳳凰閣)은 서울 강북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30리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동네 입구에 초가 한 집 정도만 있는 인적이 드문 곳이 우이동이었습니다. 이곳과 의암성사와의 인연은 191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 여름에 피서차 지금의 봉황각 개울 건너편에 있던 이봉천의 사랑방을 빌려 한 달간 머물렀습니다. 성사께서는 한 달 동안 우이동에 머무르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바위와 나무까지 만져보면서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의친왕 이강(李剛)공과 같이 우이동에서 밀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이동을 찾는 일이 잦아들자 성사께서는 아예 우이동을 매입합니다. 국권이 쇠락하는 시기를 맞아 인적이 뜸한 한적한 곳에 교인들을 양성할 도장을 건립하고자 했던 성사께서는 1911년 10월 박인호, 오지영, 정광조, 나용환, 윤구영 등 교회 간부를 대동하고 우이동 일대를 두루 돌아보면서 매입 의사를 밝혔고 교단에서는 현재 봉황각 일대의 밭과 임야[田林野] 28.382평을 800원에 매입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912년 4월 2일 상량식을 갖고 건축을 시작한 봉황각은 6월 19일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대 누각의 이름을 봉황각이라고 정했습니다.
봉황각이라는 누명(樓名)은 수운대신사의 동경대전의 「영소(詠宵)」의 ‘봉황대역봉황유(鳳凰臺役鳳凰遊)’에서 따왔습니다. 봉황각 현판은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썼는데 한암 오세창이 3명의 명필의 글자를 각각 집자해 모사하였습니다. 봉(鳳)자는 당(唐)대의 명필 안진경(顏眞卿)의 서체이고, 황(凰)자는 역시 당대의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이고, 각(閣)자는 송대의 명필 미불(米芾)의 서체입니다.
건축학적으로 봉황각은 을(乙)자형 형식을 건물양식이며 팔작지붕의 형태입니다. 천도교의 궁을 사상을 건축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건물은 평면상 민간풍(民間風)을 나타내고 있으나 격식(格式)은 궁전 부속건물 양식을 많이 모방한 흔적을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봉황각은 목조 기와집으로 건평 28평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각지붕 집으로 재료는 석조 기단과 목조로 되어 있습니다. 건물 한 가운데에 정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정면 1칸, 왼쪽에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왼쪽에 전퇴를 둔 정면 2칸의 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가운데 칸 처마 아래에는 <봉황각> 현판이 또 오른쪽에는 <강선루>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봉황각을 건립한 이듬해인 1913년 봉황각 앞에 60여 칸의 부속건물을 지어 수련장으로 사용하였으나 3‧1운동 이후 철거되었습니다. 소봉황각이라 불렸던 이 부속 건물은 일부 사진에 나타나고 있으나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만 현재 경내 여기저기에 주춧돌만 남아 있어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사께서는 봉황각이 건립되기 이전부터인 1912년 4월부터 시작해 건립된 이후인 1914년 3월까지 7차에 걸쳐 481명의 교단의 두목을 불러 49일 특별 기도를 시켰습니다. 제1회 수련은 봉황각이 완공되기 이전이라 도선암을 빌려서 사용하였습니다. 제1회 연성회에 참여한 21명의 두목 중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한 박준승, 나인협, 임예환, 홍기조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2회 수련회부터는 봉황각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시의 수련회는 표면적으로는 천도교인들의 신앙 고취에 있었지만 그 내용은 천도교인으로 하여금 독립 정신을 고양해 독립에 이바지하는 인물로 양성하는데 있었습니다. 성사께서는 수련회에서 각 두목에게 자아를 완성시켜 생명을 주의화하여 보국안민을 위하려면 일치단결로서 주의에 살고 육체로서 살지 말자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성사께서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단련된 지도자를 배출하여 3‧1운동을 준비하였다.
봉황각에서 연성을 마친 교역자들은 270여 개 지방의 교구로 돌아가 교인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봉황각에서 성사로부터 지도받은 두목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교인들을 독려하였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총궐기하였다. 그리고 1918년 중앙대교당을 건축한다는 명목으로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이 자금의 대부분이 3‧1운동에 쓰였습니다.
성사는 3‧1운동 이후 일제에 취조를 당하면서 천도교를 하면서 국가에 대한 관념, 민족에 대한 관념이 성장하였다고 하면서 이러한 의식이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이동 봉황각에서 성사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천도교의 간부들도 민족적 관념과 국가 관념을 습득하였고 국권이 피탈된 이후 불평들을 벗어나는 길은 독립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성사께서 주도한 민족자결의 3‧1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성사께서는 일제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앞으로도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느냐는 물음에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천도교인은 누구든지 독립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1919년 1월 5일부터 시작된 기도도 3‧1운동의 성공과 독립 달성을 위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을 정로로 독립에 대한 의지가 굳건했습니다. 이러한 성사의 정신을 우이동 봉황각에서 배웠던 간부들은 몸을 불사르지 않고 3‧1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성사께서는 천도교인들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3‧1운동 이후에도 봉황각은 민족운동에 활용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한 표준어 제정과 우리말 사전의 편찬 작업을 위한 표준어사정위원회의 회의를 3‧1운동의 요람인 봉황각에서 개최하였습니다. 표준어사정위원회는 1935년부터 1년간 3차에 걸친 회의를 진행했는데 8월 5일부터 8일부터 4일 동안 30명의 수정위원들이 봉황각에서 표준어 및 우리말사전의 편찬을 위한 제2차 표준어사정위원회를 열었습니다. 이처럼 봉황각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장으로서 꾸준하게 활용되었습니다.
현재도 봉황각은 천도교인의 수련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강북구에서는 3‧1운동의 발상지로 매년 이곳에서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의암기념관이 건립되어 의암성사의 독립정신이 바르게 알려지기를 심고하면서 마칩니다.
사계명(四誡命)
1. 번복지심(飜覆之心) 두게 되면 이는 역시 역리자(逆理者)요,
2. 물욕교폐(物慾交蔽) 되게 되면 이는 역시 비루자(鄙陋者)요,
3. 헛말로 유인(誘引)하면 이는 역시 혹세자(惑世者)요,
4. 안으로 불량(不良)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이는 역시 기천자(欺天者)라.
임사실천 십개조(臨事實踐 十個條)
1. 윤리를 밝히라. 2. 신의를 지키라. 3. 업무에 부지런 하라. 4.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 5. 빈궁한 사람을 서로 생각하라. | 6. 남녀를 엄하게 분별하라. 7. 예법을 중히 여기라. 8. 연원을 바르게 하라. 9. 진리를 익히고 연구하라. 10.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금하라. |
☞ 중국 내 항일유적지탐방 참가(7/24~28) :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4박 5일간 실시된 중국 내 항일유적지탐방에 본교 한국정신문화탐구부 학생 5명이 참가하고 돌아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천도교중앙총부가 주관하여 실시한 이번 탐방은 전국에서 천도교 대학생 10명과 고등학생 10명 등 모두 20명의 천도교 학생들이 참가하였으며, 백두산, 두만강 조·중 접경지역을 비롯하여 청산리전투유적지, 봉오동전투유적지, 용정의 동흥학교(천도교학교), 윤동주 시인 생가와 모교,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의 투옥지 여순감옥 등을 탐방하였다. 한편 최민국 선생님은 본교 학생들을 인솔하여 인솔교사로 다녀왔다.
☞ 성강현 종학실장 3.1운동 관련 학술세미나 논문발표(8/13) : 성강현 종학실장은 8월 13일(일)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린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관 건립 추진 기념 학술대회 ‘우이동 봉황각과 3.1운동’에 참석하여 「3.1운동 민족대표 손병희와 우이동 봉황각」이라는 주제로 논문 발표를 하였다.
☞ 성강현 종학실장 가리산수도원 개원기념식 참석(8/20) : 성강현 종학실장은 8월 20일(일) 강원동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원장 조동원) 개원 제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 3.1운동 라인협 선생 기념비 건립 추진 협의(8/21) : 강병로 교구장과 성강현 종학실장은 8월 21일(월) 남구청에서 열린 라인협 선생 건립비 추진 회의에 참석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인이었던 라인협 선생의 기념비는 3.1운동 100주년(2019년)을 맞이하여 라인협 선생 묘소 표지석이 있는 대연교구 신축예정지(대연동)에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현재 남구청과 협의 중에 있다.
■ 다음 화요시일 안내 ■
집 례 | 경전봉독 | 천덕송 합창 | 설 교 | |
봉독자 | 내용 | |||
석암 유석운 경리부장 | 김현우 학생동덕(2) | 동경대전 ‘불연기연’(57~64쪽) | 제7장 권학가(기1)(천덕송 18쪽, 1~2절) | 노암 강병로 교구장 |
송가, 청년회가(천덕송 72쪽 1~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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