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을 나를 따른다.”(요한 10,27)
2024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 해 첫 번째 달의 마지막 날입니다. 시간은 정말 쏘아놓은 화살과 같음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오늘 교회는 특별히 오늘을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로 지냅니다.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어야합니다.”라는 말로도 잘 알려진 성인은 1815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성인은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뒤늦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되고 그와 같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제가 된 후, 가난한 젊은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갖게 됩니다. 성인은 토리노 뒷골목에서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과 교도소에서 만난 청년들,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에게 기술교육과 그리스도 신앙을 가르치며 그들을 보살필 목적으로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서약하고 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끌며 청소년들과 함께 사는 삶으로서 젊은이들의 아버지,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부모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라 불린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 마을로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는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활 가운데 자신의 고향집을 방문하셨다는 내용은 오늘 복음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 6장의 내용이 유일합니다. 복음의 내용 가운데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처음으로 고향마을로 돌아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기쁜 소식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병자들과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그 곳으로 가시는 길이었지만, 예수님의 마음 한 켠에는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 곳, 형제들이 모여 살고 있는 그곳, 어린 시절의 모든 추억이 서려 있는 그곳 고향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에 아마도 아이와 같은 들뜸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 마을의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이 기대와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평범한 아들로만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고향 마을의 사람들의 반응에는 특정 시점에 급격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 변화되는 그들의 반응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처음에는 모두들 놀라움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2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에 감탄하였습니다. 이제껏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은 모두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발견하고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그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남아있을 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을 발견하였지만 그 말을 전하고 있는 인간 예수님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 분의 말이 담고 있는 참됨과 그 가치를 순식간에 폄하시켜 버립니다. 그들의 이 같은 마음은 예수님을 가리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의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면 보다 더 자세히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당시 가부장 중심 사회였던 유대의 상황 속에서 보면 전혀 정상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 안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정상적 표현은 ‘아무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며 설사 아버지가 고인이 되었다할지라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누구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불렸다면 사람들이 그를 사생아로 보았다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성경적 예를 살펴보면 더욱 그러한데 구약의 판관기에서는 입타라는 인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길앗 사람 입타는 창녀의 아들었는데 힘센 용사였다.”(판관 11,1) 정상적이라면 입타는 어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려야 했으나 창녀의 사생아였던 그는 그렇게 불리지 못하고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면을 살펴보았을 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사생아로 보았다고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어디까지 폄하시키려 하였는지 그들의 인간적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이자 그 출생 과정 또한 분명하지 않는 사생아라는 이유를 들며, 또 예수님의 내세울 것 없는 가족들이 자신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과 같은 공간 안에서 보잘 것 없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참된 진리를 외면하고 그 말씀이 갖는 실제의 가치, 곧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하는 길의 시작임을 그들을 애써 외면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싸늘한 외면과 냉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곳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도록 만듭니다. 복음의 말씀이 분명히 전하듯, 예수님은 그들의 싸늘한 외면과 냉대로 인해 그들을 위한 기적을 일부러 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비롯되는 모든 기적의 치유와 은총일지라도 그것을 희망하고 따르는 믿음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줍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 독서의 다윗의 모습 안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간적 욕심에만 사로잡혀 인구조사를 감행하는 다윗은 결국 그 안에 담긴 인간적 속내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는 모습을 오늘 독서의 사무엘서의 말씀이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말씀이 전하듯,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온전히 이루어져 우리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분의 사랑을 바라는 간절한 희망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불가능이 없으며 하느님은 약한 것을 통해 당신의 강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간절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자신들과 함께 생활하였던 아기 예수의 모습만으로 예수님의 말씀의 가치를 폄하시켜버리고 그 분의 말씀의 진리를 외면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일지라도 믿지 않는 그들에게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인간적 야욕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다윗이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흑사병이라는 참혹한 벌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을 지니게 되시기를, 그리하여 그 믿음을 통해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충만히 체험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 34(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