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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과 가정예배|말씀 산책
나는 1960년 봄에 기전여자중‧고등학교에 교사로 취직해서 처음으로 ‘다락방’이라는 말씀 묵상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첫 시간이 시작되기 전, 직원회의 때 이 책을 읽고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 교사들은 솔직히 교회에서 집사 직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었지만 대중기도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직원회 때 자기가 기도할 차례가 되면 너무 떨려서 옆에 동료에게 기도문을 하나 써 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 한 교사는 기도문을 받아서 읽었는데 기도가 끝났는데 아무도 “아멘”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기도 끝.”이라고 말해서 모드 낄낄거리고 웃은 일도 있다. 기도문을 작성해 준 사람이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써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써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락방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예수를 영접한 각 신도에게 대중기도의 훈련을 시켰고 다락방에 나오는 묵상들은 예수를 처음으로 알게 된 초신자들에게 말씀을 새롭게 보는 영의 눈을 뜨게 하는 멘토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책자는 각 군 부대, 병원, 교도소, 연구소, 교육기관 등에 보내지는 선교지로 40여 개 국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묵상집이다. 따라서 각 나라 사람들의 여러 형태의 사소한 간증 같은 것도 실려 있어 평신도도 이와 같이 이웃에게 주님을 소개할 수 있다는 전도의 담대한 확신도 갖게 했다. 당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소속된 모든 기관에는 이 책자로 직원들이 말씀 묵상을 하는 것 같았다. 후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에 옮겼는데 거기서도 아침 첫 시간이 시작되기 전, 교수들이 모여 이 다락방으로 아침 기도회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60년 가까이 꾸준히 이 책자로 은혜를 받고 있다.
나는 이 책자로 가정예배도 드리기 시작했는데, 먼저 책에 나와 있는 성경 본문을 읽고, 기고자의 간증문을 읽은 다음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치는 그런 순서였다. 초 신자였을 때 주인 장로님 댁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 신앙이 부러웠지만 나는 가정예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 밤은 여름이었는데 모기장을 치고 갓난애와 함께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촛불을 켜고 뜨개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잠들어 버렸는데 내가 눈을 떠 보니 화염이 모기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숭늉을 떠 놓은 것이 머리맡에 있어 물을 붓고 모기장을 걷어내어 겨우 진화하였는데 하마터면 주인집에 불을 낼 번 하였다. 너무 놀라서 정신을 가다듬자 아내와 함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때부터 우리의 이 돌연한 사고로 가정예배는 시작 되었다. 얼마동안 장난기 있던 애들 때문에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애들이 장성하자 부정기적이던 가정예배가 이제는 이 ‘다락방’이 우리 내외의 정기적인 가정예배의 지침서가 되었다.
나는 1994년부터 2012년까지 5차례 정도 이 ‘다락방’의 필자가 된 일도 있다. 내가 옳게 말씀 묵상을 하고 있는지 검증해 받고 싶어서 보낸 원고였다. 그 뒤로 ‘다락방’은 내 사랑하는 애인처럼 더 친근해졌다. 그러나 내가 ‘다락방’을 사랑하게 된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다. 우리 부부는 애들이 다 집을 떠난 뒤 둘이서 이 책자를 통해 아침예배를 드리면서 유익한 점을 한 둘 찾아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홀수 날은 내가, 그리고 짝수 날은 아내가 ‘다락방’을 통해 기도를 하는데 아내의 기도를 들으면서 내가 아내를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부부는 비밀이 없다지만 서로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평소 깨닫지 못한 아내의 놀라운 신앙의 깊이와 자녀들이나 이웃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아내와 더 가까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또 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어서 사이가 서먹해져 사과하고 용서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막상 마주 대하면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 가정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내 잘못을 회개하고 내 마음을 열어 고백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는 기쁨이 있다.그 땐 내 마음이 홀가분해 지는데 아내도 말없이 나를 받아주는 것 같아 두 사람이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 나는 나이가 들자 기도하다가 애들의 이름, 이웃 병자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머뭇거릴 때가 있다. 그러면 말없이 기도하던 아내가 서슴없이 소리를 내어 그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를 가르쳐주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기쁘다. 또 두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그럴 때 이 땅에서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늘나라를 체험하는 기쁨이 솟는 것을 느낀다.
이번 2018년 9월 7일에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기독교 대한감리회의 종교(宗橋)교회에서 다락방 한국어판이 발행되어 배포된 지 80년을 맞아 ‘한국다락방80주년 기념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다락방을 위한 기념감사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대전에서 저녁 4시 반의 예배에 참석하러 발품을 팔았다. 그곳에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다락방 사역자들과 미국 다락방 본부 관계자들이 자기나라 복장을 하고 참석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다락방을 사랑하는 신도들과 장기 구독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을 발행하고 있는 대한기독교서회와 한국기독교신도연맹에서 많은 임원들이 와 있었고, 병으로 출석하지 못한 정기구독자가 대신 사람을 보내고, 다락방을 계속 필사하고 있었던 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0년 이상 정기구독한 분들도 많이 참석한 것을 알고 흐뭇했다. 특히 미국 다락방 본부의 상무로 있는 피터(Mr. Peter Velander)는 내가 수년 전 다락방 묵상을 보냈을 때 다락방 편집자(Managing editor)로 있던 메리(Mary Lou Redding) 여사를 잘 알고 있는 분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그녀가 벌써 은퇴했다니 세월은 무상하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데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말씀을 삶으로 옮겨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중 가장 진정한 성경의 번역본이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을 회상하며 다락방이 우리 신도들에게 미친 큰 영향을 실감한다. 다락방 본부 상무(Mr. Peter Velander)와 함께 |
나는 1960년 봄에 기전여자중‧고등학교에 교사로 취직해서 처음으로 ‘다락방’이라는 말씀 묵상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첫 시간이 시작되기 전, 직원회의 때 이 책을 읽고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 교사들은 솔직히 교회에서 집사 직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었지만 대중기도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직원회 때 자기가 기도할 차례가 되면 너무 떨려서 옆에 동료에게 기도문을 하나 써 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 한 교사는 기도문을 받아서 읽었는데 기도가 끝났는데 아무도 “아멘”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기도 끝.”이라고 말해서 모드 낄낄거리고 웃은 일도 있다. 기도문을 작성해 준 사람이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써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써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락방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예수를 영접한 각 신도에게 대중기도의 훈련을 시켰고 다락방에 나오는 묵상들은 예수를 처음으로 알게 된 초신자들에게 말씀을 새롭게 보는 영의 눈을 뜨게 하는 멘토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책자는 각 군 부대, 병원, 교도소, 연구소, 교육기관 등에 보내지는 선교지로 40여 개 국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묵상집이다. 따라서 각 나라 사람들의 여러 형태의 사소한 간증 같은 것도 실려 있어 평신도도 이와 같이 이웃에게 주님을 소개할 수 있다는 전도의 담대한 확신도 갖게 했다. 당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소속된 모든 기관에는 이 책자로 직원들이 말씀 묵상을 하는 것 같았다. 후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에 옮겼는데 거기서도 아침 첫 시간이 시작되기 전, 교수들이 모여 이 다락방으로 아침 기도회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60년 가까이 꾸준히 이 책자로 은혜를 받고 있다.
나는 이 책자로 가정예배도 드리기 시작했는데, 먼저 책에 나와 있는 성경 본문을 읽고, 기고자의 간증문을 읽은 다음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치는 그런 순서였다. 초 신자였을 때 주인 장로님 댁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 신앙이 부러웠지만 나는 가정예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 밤은 여름이었는데 모기장을 치고 갓난애와 함께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촛불을 켜고 뜨개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잠들어 버렸는데 내가 눈을 떠 보니 화염이 모기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숭늉을 떠 놓은 것이 머리맡에 있어 물을 붓고 모기장을 걷어내어 겨우 진화하였는데 하마터면 주인집에 불을 낼 번 하였다. 너무 놀라서 정신을 가다듬자 아내와 함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때부터 우리의 이 돌연한 사고로 가정예배는 시작 되었다. 얼마동안 장난기 있던 애들 때문에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애들이 장성하자 부정기적이던 가정예배가 이제는 이 ‘다락방’이 우리 내외의 정기적인 가정예배의 지침서가 되었다.
나는 1994년부터 2012년까지 5차례 정도 이 ‘다락방’의 필자가 된 일도 있다. 내가 옳게 말씀 묵상을 하고 있는지 검증해 받고 싶어서 보낸 원고였다. 그 뒤로 ‘다락방’은 내 사랑하는 애인처럼 더 친근해졌다. 그러나 내가 ‘다락방’을 사랑하게 된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다. 우리 부부는 애들이 다 집을 떠난 뒤 둘이서 이 책자를 통해 아침예배를 드리면서 유익한 점을 한 둘 찾아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홀수 날은 내가, 그리고 짝수 날은 아내가 ‘다락방’을 통해 기도를 하는데 아내의 기도를 들으면서 내가 아내를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부부는 비밀이 없다지만 서로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평소 깨닫지 못한 아내의 놀라운 신앙의 깊이와 자녀들이나 이웃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아내와 더 가까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또 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어서 사이가 서먹해져 사과하고 용서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막상 마주 대하면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 가정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내 잘못을 회개하고 내 마음을 열어 고백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는 기쁨이 있다.그 땐 내 마음이 홀가분해 지는데 아내도 말없이 나를 받아주는 것 같아 두 사람이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 나는 나이가 들자 기도하다가 애들의 이름, 이웃 병자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머뭇거릴 때가 있다. 그러면 말없이 기도하던 아내가 서슴없이 소리를 내어 그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를 가르쳐주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기쁘다. 또 두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그럴 때 이 땅에서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늘나라를 체험하는 기쁨이 솟는 것을 느낀다.
이번 2018년 9월 7일에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기독교 대한감리회의 종교(宗橋)교회에서 다락방 한국어판이 발행되어 배포된 지 80년을 맞아 ‘한국다락방80주년 기념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다락방을 위한 기념감사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대전에서 저녁 4시 반의 예배에 참석하러 발품을 팔았다. 그곳에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다락방 사역자들과 미국 다락방 본부 관계자들이 자기나라 복장을 하고 참석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다락방을 사랑하는 신도들과 장기 구독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을 발행하고 있는 대한기독교서회와 한국기독교신도연맹에서 많은 임원들이 와 있었고, 병으로 출석하지 못한 정기구독자가 대신 사람을 보내고, 다락방을 계속 필사하고 있었던 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0년 이상 정기구독한 분들도 많이 참석한 것을 알고 흐뭇했다. 특히 미국 다락방 본부의 상무로 있는 피터(Mr. Peter Velander)는 내가 수년 전 다락방 묵상을 보냈을 때 다락방 편집자(Managing editor)로 있던 메리(Mary Lou Redding) 여사를 잘 알고 있는 분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그녀가 벌써 은퇴했다니 세월은 무상하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데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말씀을 삶으로 옮겨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중 가장 진정한 성경의 번역본이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을 회상하며 다락방이 우리 신도들에게 미친 큰 영향을 실감한다. 다락방 본부 상무(Mr. Peter Velander)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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