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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전
김 이 연
청이는 산을 내려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내려갔다.
돌아다보지 않아도 뒷쪽의 광경을 본 듯이 알고 있었다.
머리 굽은 할머니가 타월로 눈물을 닦아내며 손을 흔들고 서 있을 테고, 그 옆에 바지 입은 중년 여자가 할머니를 양로원 쪽으로 돌려세우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청이는 눈물이 어려 발밑이 보이지 않았다.
넘어질 테면 넘어지라지.
청이는 굴내리는 수레바퀴처럼 비탈진 길을 뛰어내려갔다.
이젠 할머니의 시야 밖으로 벗어났다 했을 때, 청이는 길옆의 나무를 잡고 걸음을 멈추었다.
청이는 눈물을 닦고 호흡을 골랐다.
그러고 나서 청이는 가만히 뒤돌아보았다.
숲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믈한 살의 나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였다.
아직도 청이가 자기자신을 숙성한 여자라고 자신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은 할머니 탓이었다.
지금껏 오냐 오냐 하며 청이를 보살펴준 할머니 탓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스스로 청이를 포기하였다.
청이는 할머니를 되삭여보았다.
지금까지 겨우 지탱하여왔던 전세집을 정리했다.
판단력이 흐려지기 전에, 새로운 전환점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머니가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집 판 돈을 할머니와 청이가 딱 반분하여 가졌다.
할머니의 양로원에 넣고 청이의 몫은 은행에 넣었다.
“넌 젊고 희망이 있으니까 부득이한 경우에만 이 돈을 꺼내 써라. 없는 돈으로 여기고 견디는 거다 알았느냐? 그리고 이 핼미도 없다고 생각하거라.”
“할머니!”
청이는 몸부림 처며 울었다.
“그럴 수 없어요.”
인간 이하로 멀어지는 일이라고, 이것은 타락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 달 통안 세간을 정리하며 결단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슬픔도 낡았다.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의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를 부축하고 양로원을 향해 올라가는 도중에, 청이는 다시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일정하게 걸음을 옮겨 짚으실 뿐이었다.
양로원이 보이는 숲길에 잠깐 멈추었다. 할머니는 길섶에 앉으셨다.
“울지 말아라.”
청이는 돌아서서 더욱 크게 흐느꼈다.
“청아, 거지를 봤냐?”
할머니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통 들리지 않았다.
“청아, 듣고 있냐?”
“네.”
청이는 할머니 결에 앉았다.
할머니의 반들거리는 손을 잡고 볼에 가져다 대어봤다.
가엾은 할머니였다.
“거지가 동냥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아냐?”
청이는 귀를 기울였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자꾸만 바람에 흩어져버렸다.
아니 듣지 않아도 할머니가 말씀하시려고 하는 뜻을 알 것 같았다.
빈 동냥 바가지에다간 동전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할머니는 무어 번 다리에 반동을 주다가 일어섰다.
청이는 이미 할머니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나도 건강할 떼 양로원엘 들어가야지.”
이는 아직도 할머니의 말씀이 귓속에서 맴돌아, 미칠 듯이 안타까왔다.
덩 빈 통속에서 울려나오듯 수백 번씩 에코되어 들려왔다.
청이는 귀를 두 손가락으로 꽉 막고 걷기 시작했다.
손목의 낡아빠진 시계가 뿌연 유리 안에서 밝은 아침을 알렸다.
아홉시 반이었다.
청이는 쫏기듯 서울로 올라갔다.
전쟁이나 천재지변므다 더 무서운 것은 가난이었다.
가난은 겁쟁이에게 더옥 달려들었다.
달아나는 자를 쫓아왔다.
쓰러져가는 자를 짓밟았다.
청이는 노량진역에서 내렸다.
약도를 꺼내들고 길을 물었다.
서울, 그 넓은 곳에서 청이와 머리칼처럼 가느다란 인연을 가지고 있는 데라곤, 약도에 적힌 푸름재활원뿐이었다.
그저 막연히 학교라고만 알고 있을 뿐, 청이는 무틱턱고 찾아갔다.
청이는 버스에서 내려, 그 건물이 크고 산뜻한데에 놀랐다.
조금씩 자신감이 줄어 갔다.
주춤거리며 수위실을 향해 비탈길을 올라갔다.
“무슨 일로 오셨읍니까?”
“학생을 만나러 왔어요.”
“사무실로 들어가보시오.”
“사무실이 어디죠?”
“안으로 가보면, 써 있읍니다.”
청이는 일요일같이 조용한 학교 운동장을 건너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 냄새가 건물 안에서 풍겨왔다.
〈사무실〉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그리고는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청이는 문을 도로 닫아두고, 복도에서 기다렸다.
시야에 닿는 곳 깊숙이 기웃거려봤지만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조금 뒤, 몇 사람을 데리고 푸른 사무복을 입은 남자가 이층서 내려왔다.
계단이 없고, 평평한 비탈로 이루어진 길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헤어지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무복을 입은 남자가 청이를 보고 다가왔다.
"누굴 찾아오셨읍니까?”
진득하게 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학생올 만나러 왔어요. 윤선이라고 했어요.”
“윤선이요 ? 잠깐 사무실로 들어갑시다.”
청이는 비닐 의자에 앉았다.
비닐 의자는 군데군데 칼로 찢긴 듯 찢겨져 있었다.
푹석 빠지는 게, 스프링마저 쓰러져버린 의자였다.
탁자도 라카 칠한 겉쪽이 자기의 균열처럼 짝짝 갈라져 있었다.
남자는 손수 엽차를 따라주었다.
“더운데 찬 보리차라도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윤선이요.”
“윤선이라.”
남자는 학생 명부를 들고 와서 손끝으로 짚어가며 찾았다.
“없는데. 그러니까 내 기억에 없지.”
“있을 텐데요. 제가 한번 다시 찾아볼까요?”
남자는 선뜻 명부를 청이 쪽으로 돌려놓았다.
“친구요?”
“아뇨.”
“그럼?”
“지난해, 여름에 만났어요.”
“어디서 만났소?”
“제가 살던 고향에서요.”
“고향이 어디요?”
“남해요.”
“남해? 거길 어떻게 갔다는 거요? 이곳 학생들은 알다시피 지체가 부자유스
런 사람들인데.”
“네, 알고 있어요. 엄마와 가족들과 함께 내려왔었어요. 아마 휴양하러 왔었
겠죠.”
“여자아이였소?”
“네. 저하고 동갑이라는 건 그 아이 엄마가 말했어요. 그러니까 올해는 스물하나가 되었겠죠.”
청이는 남자가 묻는 발에 대꾸하면서 명부를 체크해내려갔다.
그들은 모두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훌륭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 있어요.”
빨간 볼펜으로 그어버린 아래로 깔려 있었다.
“빵간 줌로 그어버린 이름은 뭐죠?”
청이는 섬뜩한 예감을 안고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 봅시다.”
남자는 한참 그 이름을 들여다보더니 기억을 더듬어냈다.
“아, 윤선이. 죽었읍니다.”
“언제요? 왜요?”
“하늘나라로 가는 거죠.” ˙
남자는 아주 담담했다.
청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이곳에선, 죽음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없는 천국으로 갔다는 걸
확신하니까요.”
“그럴는지도 모르죠.”
청이는 망막에 크게 어른대는 윤선이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처럼 만나보려고 왔는데 안됐읍니다.”
“친구가 되어주러고 왔는데, 너무 늦게 왔나봐요.”
청이는 일어섰다.
“그런 각오로 오셨다면, 다른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잖겠읍니까?”
“그렇게 허락해주시겠어요?”
“제가 부탁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웬만한 각오로는 하루도 못 견딜 겁니다.”
“노력하겠어요.”
“월급도 많지 않습니다.”
“네.”
청이는 감사했다.
서울에 발 붙일 곳을 구할 수 있었다.
“그건 모두 그렇게 얘기하지요.!
“저는 갈 데가 없으니까요.”
“누구나 한 달을 못 넘깁니다.”
“저는 안 그래요.” :
“죽을 각오로 덤벼들어도 소용없읍니다.”
"아무리 맹세해도 지금 현재는 어쩔 수 없겠죠.”
청이는 입을 다물었다.
구차한 변명 같아서 였다.
남자는 이력서 용지를 서랍에셔 꺼내왔다.
“소용없는 일인 줄 압니다만, 한자 적어주시겠읍니까?”
그가 소용없다는 의미는 이력서가 필요없다는 것인지, 이력서를 적어놓았댔자 곧 떠나버릴 텐데라는 것인지 애매했다.
어떻든 청이는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한 칸씩 꼼꼼히 메꾸었다.
유 청(柳靑). 여.
1961년 4월 25일생.
경남 남해군 송정리.
진주여고 졸업.
외조모.
청이는 처음으로 자기자신을 종이 위에 서술했다.
이름, 생년월일, 본적, 현주소, 출신학교, 호주.
남자는 간단하게 이력서를 훑어보았다.
별로 자세하게 읽어둘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앞으로 선생님을 어떻게 부르면 되죠?”
“난, 사업부장이니까, 부장이라고 부르면 될 거요. 차차로 이곳 식구들을 소개하겠읍니다만, 우선 원내를 돌아보겠읍니까? 유 선생?”
청이는 가방을 들고 부장을 따라나섰다.
이층으로 안내했다.
침침한 분위기가 학교도 아니고 병원도 아니었다.
부장은 교실의 뒷문을 열어젖혔다.
작은 교실엔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불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거기에 누운 것처럼 의자에 앉은 아이들이 보였다.
홈이 패인 테이블에 의자가 붙어 있었고, 그 구멍에 틀어박힌 상태였다.
그 아이들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칠을 하고 있었다.
그냥 찍찍 왔다갔다 긋는 동작이었다.
어떤 형태가 아니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에 크레파스를 끼고 같은 동작을 맹목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 가느다란 여선생이 붙어서 아이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허옇게 초점 없는 시선으로 청이를 바라보았다.
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아니,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의도였겠지만, 반 정도에서 정지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머릿속이 꼭 막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청이는 교사의 시선을 붙잡았다.
아주 고마운 뜻을 담아 인사했다.
교사는 거의 기계적으로 답례를 할 따름이었다.
부장은 교싶을 먼저 나갔다.
청이는 자꾸만 돌아다보면서 교실 문을 닫았다.
아이들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줄 것을.
부장은 또 다른 교실 문을 열었다.
각자, 따로 떨어져 있는 책상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었다.
역시 책상과 의자가 같이 붙어 있는, 책상에는 높은 턱이 있어서 물건이 밖으로 떨어지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 아이들은 아주 양호한 상황입니다. 보십시오. 글씨도 쓸 수 있읍니다.”
글씨를 쓸 수 있다는 말을 청이는 그대로 믿었다.
그들의 공책 을 들여다보았다.
공책 한 페이지에 두서너 글자를 메꾸어놓았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아이들은 연필심도 안 보이게 바짝 내려잡은 손으로 열심히 획을 긋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어깨를 귀에 대고, 반쯤 의자에 누워서, 그러나 한 가지 행위를 끝내겠다는 필사적인 노력을 쏟고 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죽음을 각오한 동작보다 더 집중했다.
적어도 그 아이들에겐 잡념이 없기 때문이었다.
청이는 한 아이의 손등에 입을 맞춰주었다.
아이가 웃었다.
울 것처럼 찡그렸다.
그게 웃음이었다. 그게 감사의 표현이었다.
복도에 나왔다.
부장은 청이를 날카로운 눈으로 마주봤다.
“위선은 안 통합니다.”
먼데서 들려오는 듯 복도 공간에 목소리가 떠돌았다.
청이는 아직도 찡그린 미소를 지워버릴 수 없어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시 유리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은 비탈에 선 나무들처럼 비뚤게 앉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글씨를 익혀서 학자가 되려는 듯.
부장은 한층을 올라갔다.
복도엔 휠체어가 뒹굴어다녔고, 이층보다 좀더 짙은 냄새가 풍겨왔다.
넓은 홀로 되어 있는 교실이었다.
바닥에 비닐로 씌운 매트가 깔려 있었다.
마치 권투 링 위와 같았다.
링 위에서 뒹구는 선수처럼, 아이들이 뒹굴었다.
서너 명의 보조교사들이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청이는 먼저 교사들한테 미소를 보냈다.
들어가도 괜찮겠느냐는 양해 대신이었다.
그들은 할일을 묵묵히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이는 가방을 문밖에 두고 신발을 벗었다.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기어다녔다.
누운 채로 몸을 밀고 다녔다.
지옥이라는 생각이 얼른 머리를 스쳐갔다.
커다란 머리를 바닥에 질질 끌고, 움직이는 아이가 있었다.
청이는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비닐 바닥에 침을 흘리면서, 얼굴을 밀어갔다.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걸까.
청이는 아이를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서 멈추고 말악았다.
손이 뻗어지질 않았다.
청이는 깊은 죄의식을 느끼며 일어섰다.
청이는 벽을 기어오르는 아이에게 눈을 주었다.
번번이 굴러 떨어지면서도 자꾸만 기어올랐다.
나가동그라지면, 누운 채로 버둥거렸다.
다시 기어갔다.
벽을 향해서, 벌레들의 동작과 다름없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여김 없이 조금 전에 나가동그라진 모습으로 떨어졌다.
그 반복되는 동작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없는가.
청이는 그만 눈을 꽉 감았다.
더이상 관찰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위장이 뒤틀렸다.
토할 것 같았다.'
세상을 아름답게 찬조하신 하느님이 어떻게 이렇게 추한 보습의 인간마저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청이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복도 유리창을 열고 얼굴에 내밀었다.
화끈한 여름의 열기가 얼굴을 덮어씌었다.
매슥거리는 느낌을 더욱 돋구었다.
청이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쉬지 않고, 변기 앞까지 다다랐다.
왈칵 토해버렸다.
그러나 텅 빈 위에선, 시디신 위액만 기어올랐다.
눈물이 나왔다.
청이는 울렁대는 가슴이 멈출 때까지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차라리 화장실 냄새가 훨씬 좋았다.
청이는 수도물로 입을 씻어냈다.
세수도 했다.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았다.
청이는 부장이 기다리고 있을 복도로 얼굴 내밀기가 부끄러웠다.
웃거나 빈정댈 게 뻔했다.
청이는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복도엔 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방과 신발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청이는 신발을 신고,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장은 책상에 옆드려서 일하고 있었다.
청이는 소리 죽이고 부장한테로 다가갔다.
부장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죄송해요, 부장님.”
“괜찮소. 인사 없이 그냥 가도 좋은데, 일부러 들렸소?”
부장은 되도록 청이의 멋적어하는 얼굴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는지, 하던 일을 계속했다.
“부장님 용서해주세요.”
“별 용서하란 말이오?”
부장은 아주 낯선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반문했다:
"전, 그 아이들을 다만 구경했던 것뿐이에요.”
“쇼나 영화처럼 재미있을 줄 알았소? 전쟁 도큐멘터리나, 밀림 야생동물의 생존 전쟁을 찍은 필름처럼 흥미진진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단 말이오?”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뭐란 말이오?”
“말씀드릴 수 없어요.”
“내가 정확하게 얘기해볼까요? 한마디로 구역질나는 인간들이란 의미가 아니오?”
“부장님.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뭐란 말이오? 화장실에다가 마음껏 토해버리고 나왔으면서, 하여튼 부담 느끼지 말고 가시오. 난 조금도 유 선생을 욕하지 않겠읍니다. 열 사람 중에 여덟 사람은 그런 반응을 보였읍니다. 당연한 겁니다.”
“부장님. 저는 가지 않아요.”
“억지로 있을 데가 없기 때문에 있겠단 생각이면, 처음부터 허락하지 않겠읍
니다.”
“부장님, 저는 떠밀어도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 하셌어요.”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속에서 쏟아져나온 구역질을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제가 노력으로도 저를 이기지 못한다면, 제 자신이 패배하는 것이에요. 일을 시켜주세요.”
“좋습니다. 오늘 일을 영원히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청이는 조금도 자신 없었다.
그 아이들을 돕는 일은, 나 자신이 불행을 극복하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이
었다.
청이는 자신을 극복하는데는 자신 있지만, 남을 도와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밤에 잠을 못 이루었다.
고통은 어둠을 타고 오는가.
그러잖아도 비틀어진 몸을 비비 꼬아댔다.
신음소리는 더욱 가슴을 찢었다.
희열이나 고통의 표현은 거의 같은 소리였다.
청이는 눈썹 위로 무겁게 내려오는 잠을 손으로 씻어냈다.
부벼서 가루로 부숴버렸다.
잠을 눌러버리고, 내부에 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청이를 내세우며, 청이는
견디어냈다.
살을 말리는 듯한 노동이 청이의 정신과 육체를 강철로 만들었다.
청이는 세상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학함으로서 더욱 강인한 힘을 생성해내는 정신력을 인정할 수 있었다.
청이는 며칠 전부터 청이의 관심을 끌고 있는 소년 상수에게 다가갔다.
상수의 얼굴에는 언제나 희미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있었다.
상수는 어둠을 두려워했다. 어두운 곳에선 열을 내고, 떨며 신음하곤 했다.
눈을 감고 표정을 지워버리면, 보통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청이는 상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열일곱 살 난 소년.
한참 자라고 대견스러운 남자의 모습으로 자랄 나이였다.
그런데 상수는 지금도 쉬지 않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평균 수명이 스무 살 내외라는 그들의 절망의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위해서 그들은 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죽을 힘을 다하여, 기어오르고 있었다.
상수는 눈을 떴다.
한참, 청이의 시선을 찾아서 눈을 굴렸다.
시력마저 변변치 않은 그가, 청이의 다정한 시선까지 알아보기엔 십분 이상
걸렸다.
그렇 지만 상수는 온몸으로 느꼈다.
청이가 자기를 깨우지 않게 하려고 조심스레 다가간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눈을 뜬 것은 상수가 알아차린 뒤, 늦은 반응이 그때야 나타난 것뿐이었다.
상수는 일그러뜨린 입가에 그 나름의 미소를 보였다.
"착하지. 자, 어서.”
청이는 낮은 소리로 그의 귀에 대고 소근댔다.
상수가 그대로 조금은 자유스러운 오른쪽 팔을 혼들었다.
“누나도 자.”
청이는 알아들었다.
상수가 하고 싶은 얘기면 무슨 얘기든지 알 수 있었다.
"누나는 괜찮아. 상수가 푸욱 자야지 누나도 잘 수 있는데.”
“나는 밤이 없었으면 좋겠어, 누나.”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있어야 하는 거야.”
청이는 상수의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어주었다.
"왜 ? 나 같은 사람도 없었으면 좋겠어.”
"밤이 없으면 사람들은 내일 낮에 일할 수 없지. 만약, 상수가 이 세상에 없다면 건강한 사람둘이 고마운 줄을 알 수 없잖니?”
“그건 싫단 말이야.”
상수는 싫다고 울었다.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아이가 어째서 슬퍼야 하는 것인가.
청이는 상수의 마른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주었다.
아마, 상수는 청이와 이런 얘기들을 하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상수는 마비된 손가락 끝으로 상상의 체온을 느꼈다.
따스할 것이다.
촉촉할 것이다.
그리고 보드라울 것이다.
“자는 거야, 상수야. 꿈에는 상수도 뛸 수 있어. 새처럼 날아다닐 수도 있어.
그렇지 않니? 상수야, 꿈을 꾸는 거야.“
청이는 끊임없이 말했다.
그가 알아듣는다고 마음먹었다.
상수는 청이가 거짓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진실하지 않으면 상수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상수는 눈을 감고 있긴 했지만, 눈꺼풀이 흔들렸다.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청이는 그들의 침대 아래서 잠깐 졸았다.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깨어나면 청이는 또다시 생생해졌다.
청이는 그때부터 샤워를 했다.
깨끗한 몸으로 아이들과 새로 만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그들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상수가 모로 기어나왔다.
머리를 간신히 들고, 가느다란 하체를 오른쪽 어깨로 지탱하면서 움직여왔다.
청이는 상수가 청이에게 아침 인사를 하려고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했다.
청이가 깜짝 놀래며, 더욱 요란스러운 표정으로 반길수록 상수는 기뻐했다.
어쩌면 그가, 지금 청이의 행동이 그리리라고 미리 알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청이는 상수한테 들키지 않도록 다른 일에 열중했다.
상수는 기어오고 있다.
기다란 전차(戰車)들의 행렬이 산길을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겨우 움직이고 섰는 정도로 미세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다.
상수는 세상의 종말을 예감하면서 표현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청이는 상수의 무언의 언어를 알아듣노록 노력했다.
마음이 통한 얘기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것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상수는 머리로 청이의 발목을 들이받았다.
청이는 조금 더 기다렸다.
상수는 더 큰 힘으로 밀어냈다.
청이는 깜짝 놀란 듯 허겁스레 소리질렀다.
흐릿한 상수의 시선이 청이를 보았다.
하얀자위와 눈통자가 잘 구분되지 않는 눈이 무엇을 발견했단 말인가.
청이의 위선에 찬 시선을 알아보았겠지.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돈을 벌어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보았겠지.
청이는 상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잤어?”
“꿈을 못 꾸었어.”
“깊이 잠들면 꿈을 안 꾸는 거야.”
“비닐병 줘.”
상수는 소변기를 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청이는 상수가 원하는 것을 대개는 알아차렸다.
상수와 청이는 마음으로 통했다.
그것이 거의 일치하곤 했다.
상수는 앞이 터진 바지 속으로 비닐병을 눕혀 넣었다.
제대로 맞추지 못했을 때, 상수는 벌써 오줌을 누고 있었다.
청이는 다급하게 소변기를 잡아주었다.
뜨거운 오줌이 청이의 손등으로 흘렀다.
아직도 제대로 맞춰대지 못했다.
청이는 상수의 바지를 열고 들여다보았다. 소변병을 잘 꽂았다.
“고마워.”
“다음엔 잘 눌 수 있을 거야.”
“늘 안되는걸.”
“잘될 수 있어. 상수는 착하니까.”
어젯밤에 갈아입힌 바지를 또 벗겨냈다.
상수는 벌렁, 바닥에 누웠다.
바지를 갈아임힐 때 상수는 기분 좋아했다.
시원하게 벗어버리는 게 좋았는지, 청이의 관심을 혼자 받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지.
그 어느 쪽이라도 청이는 고마왔다.
마치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 있는 아이의 피부처럼 허옇게 불어 있는 듯 피부에 탄력이 없었다.
사지가 흐느적거리며 따로따로 흔들렸다.
과연, 타인들의 헹복감도를 높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인가.
언젠가 상수한테도 기쁨이 있었을까.
상수의 오른쪽 엉덩이는 하도 바닥에 끌고 다녀서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옆구리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했다.
상수는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이만하면 행복한 것을.
상수는 세상에 감사했다.
하나씩 하나씩 감사한 것을 머리에 넣어두었다.
청이는 내면에서 커다란 갈등이 생겼다.
모든 아이를 똑같은 사랑으로 보살펴야 하는 의무감과, 상수한테만 특별히 기울어지는 애정을 누를 길 없었다.
편애는 독이었다.
그 아이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미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
아이들은 오래 살고 싶다고, 고통 받지 말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세상 밖에 있는 사람은 어서 그 아이들이 죽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고통 받는 아이들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길 원했다.
그 아이들이 세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행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아이들은 음(陰)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곳은 어둠에 가리워져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늘의 부분까지도 본 것처럼 느꼈다.
청이는 상수를 안아 일으켰다.
물로 가득 채운 고무침대를 안는 느낌이었다.
흐물대는 게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부분에 힘을 넣어야 바로 안을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다.
힘이 가지 않는 곳으로 체중이 흘러갔다.
청이는 열일곱이란 햇수를 상수의 어느 한 부분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검게 그어진 듯 자란 그의 눈썹이었다.
상수는 말할 줄 모르는 아이였지만, 그와의 대화가 가능했다. 그것은 육체를 넘은 정신과의 만남을 실현시킨 결과였다.
청이는 문득, 상수가 청이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거부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셈치고’라는 감정이 통하지 않을 줄을 알고 있었다.
영혼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상수는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청이는 안정을 잃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스물한 살의 여자가, 그것도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그리고 상큼한 여자가 이
제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청이는 처음으로 다른 인간들이 같이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청이는 흐물대는 상수를 안고 햇빛이 닿는 창가로 갔다.
밖의 나무를 보여주었다.
밖엔 움직이고 있는 것보다는 정지되어 있는 것이 많았다.
납작한 짐들의 지봉, 간판들, 전주, 나무, 담.
상수는 움직이는 것에 대한 동경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움직이는 게 싫다.
“그래, 조용히 꽂혀 있는 꽃이 얼마나 예쁘니?”
상수는 청이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조금씩 조심스럽게 청이의 체온을 익혀갔다.
떨어지지 않고 싶어하는 상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청이가 다른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움직이면, 그 걸음의 방향으로 우둔하게
따라다녔다.
하루종일, 상수는 청이의 발꿈치를 응시하며 방향을 바꾸었다.
청이는 오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사무실 의자에서 앉은 채로 잠을 잤다.
청이는 선 채로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일이 분 동안에도 한두 시간 잔 것처럼 숙면할 수 있었다.
코끝에서 감도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커피 한 잔 드시겠읍니까?”
건너편 책상에 놓인 커피 향기였다.
“부장님, 드세요.”
“함께 합시다.”
부장은 커피잔에 커피를 따랐다.
“피곤하지요?”
“아뇨.”
"즐겁습니까?”
“보람을 느껴요.”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여기에 있을 동안만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게 잘못인가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비록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이곳에 머물러 일하면서도, 가엾은 아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악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자신이 아이들보다 우월하다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감사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남의 불행에 비교해서 감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방법? 없읍니다.”
“그럼 왜 이런 쓸데없는 말장난을 시작했어요?”
“유 선생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시작했던 겁니
다."
“고마와요.”
청이는 그제야 의자에 깊숙이 들어앉아, 등을 기댔다.
커피잔의 반쯤, 한꺼번에 들이마셨다.
“상수 아시죠?”
“압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는 거예요?”
“일년 정돕니다.”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어요?”
“더욱 나빠지고 있읍니다.”
“좋았을 때는 어느 정도였어요?”
“잠도 잘 자고, 기억력도 좋았었읍니다.”
부장은 청이를 말없이 한동안 바라보다가, 외면하면서 던지듯 말했다.
“어느 아이한테건 특별하게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저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
보다 민감해서, 큰 반감을 살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유 선생이 일하기가 아
주 어려워질 겁니다.”
“알고 있어요.”
청이는 수도물에 커피잔을 닦아 엎어놓고 삼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상수는 온 방안을 기어다니며, 청이의 발꿈치를 찾는 중이었다.
청이는 가슴에 뜨거운 불길 같은 열기를 느꼈다.
청이는 상수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아래층에 잠깐 내려갔었어. 커피 마시고, 상수 얘길 하다가 올라온
거야.”
상수는 낑낑댔다.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충분히 전달되어왔다.
“알았어. 상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약속할께.”
상수는 험악한 외모를 가진 천사였다.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천사는 청이라는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따스한 타월로 목욕시키는 청이의 이마에 방울진땀을 보았다.
상수는 땀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청이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 말도 전할 수 없었다.
“알아, 모든 걸 알고 있어.”
“어떻게 알아?”
“사랑한다는 것.”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야?”
“말해 봐.”
“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러니까 마음으로 안다고 했잖니?”
“필요없어.”
상수는 벌렁 바닥에 드러누웠다.
무거운 머리가 쿵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쳤다.
그 아픔은 청이의 몸으로 전해왔다.
“그러지 말어.”
청이는 상수를 안아 일으켰다.
상수는 무거운 머리를 바닥으로 깊숙이 박았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청이는 말이야. 상수를 누구보다도 제일 좋아한다니까.”
청이는 가슴이 저려왔다. 어떻게 상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가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떻게 해주는 것인가.
청이는 안정되지 않았다.
잠시도 상수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상수의 침대 곁에 꿇어앉아, 밤을 새웠다.
이것이 위선이거나 건강한 자의 거드름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기도―一마음을 정리하는 작업.
청이는 엉뚱한 험의 작용을 믿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
기도하는 것도 충실히 사는 길을 막는 일이라 믿고 있었다.
청이는 생존하기 위한 생활의 밭판으로 상수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밟고 있는 악인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청이는 기도하고 있는 시간만큼 더욱 악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화한다는 것,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질 수 있을 것인가.
다이아몬드 같이 순수해 질 수 있는가.
충분히 그것은 동정이었고, 위선이었다.
청이는 방에 틀어박힌 채 이틀 동안 교실에 나가지 않았다.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 아이들로부터 떨어져나갈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청이는 아예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문이 열렸다.
“유 선생, 잡니까? 어디가 편찮은 것 아니요?”
어깨를 흔드는 손에 이어 부장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청이는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한꺼번에 힘을 쏟으면 피곤해서 쓰러지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그들은 청이가 쓰러지기라도 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는 일 밖에 잘되어 간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
었다.
청이는 멍한 눈으로 여전히 변함없이 창가로 비쳐드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상수가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줄달음쳤다.
청이는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3층에요.”
“면회하고자 하시는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요?”
“예. 사무실로 곧 내러오시지요.”
부장은 기분 언짢을 정도로 정중했다.
청이는 면회 온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한 채로 3층으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구멍 뚫린 아이들, 청이의 위선적인 미소라도 굶주림으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상수가 보이지 않았다.
청이는 상수의 침대로 뛰어갔다.
비어 있었다.
청이는 정신없이 비탈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사무실 문을 어깨로 밀고 안으로 쓰러질 듯 들어섰다.
잠시, 아무것도, 어떤 음향도 없는 진공상태에 빠쳤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청이의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청이는 숨을 몰아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앉으시지요, 유 선생.”
부장은 건너편 빈의자를 권했다.
여인, 상수를 안고 있는 여자가 청이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묻혀서, 상수의 영혼이 달려왔다.
“괴로움이 많으셨겠읍니다.”
하얗게 창백한 손이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청이 앞에 나타났다.
청이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마주잡았다.
“상수의 아빠 되는 김형운입니다.”
“네.”
청이는 그 형운의 시선에서 왜 그리도 짙은 슬픔을 만났는지 모르겠다.
금방 청이한테로 물들어올 것 같았다.
“당신은 무슨 죄로 우리 상수를 만났단 말입니까?”
청이는 눈물 고인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상수의 나이만큼이나 두터운 슬픔의 앙금이 가슴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상수와 약속한 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제, 상수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우리들 가족이 상수 때문에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읍니다. 그.래서 한 일년 상수한테서 휴가를 얻었읍니다. 될 수 있으면 그 어둠속에서 벗어나 있고 싶었읍니다.”
형운은 청이 외에도 여러 사람 앞에 죄인처럼 변명하지 않으면 안심되지 않았다.
청이는 상수가 서지 못하고 기어다니는 고통을 받는다면, 형운은 설 수 있어도 서지 못하는 괴로움을 똑같이 당하는 두 사람을 만났다.
“상수는 이곳에 더 있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요.”
“상수가 그처럼 제 의사를 표시할 수 있기라도 했으면 오죽이나 좋겠읍니까?
자기도 훨씬 수월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상수의 마음은 제게 알아듣도록 말하고 있었어요. 제가 하는 말도 상수는 알아들어요.”
“아닙니다. 당신의 얘기를 믿어본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내 자신을 속이고 있는 짓밖엔 되지 않을 겁니다. 상수를 이곳에 떼어놓고 가기 위해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상수는 지금 여기에 남아 있고 싶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고맙습니다. 일단 제 계획대로 상수를 퇴원시키겠읍니다.”
형운은 그렇게 결단을 내리면서도, 또 죄인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어쩌면 상수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보이고 있는 걸까.
청이는 상수를 차에 실려보내고 종일 우울했다.
피곤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사이사이로 상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수의 침대가 비어 있던 날, 첫 밥엔 청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끄지 못했다.
새로 옮긴 집, 생소한 침대에 불빛이 꺼져 있을 것 같았다.
청이는 희끄무레 동이 틀 무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청이는 안개 자욱한 새벽을 좋아했다.
청이는 바다에서 하늘로 기어오르는 안개를 보며 자랐다.
안개를 보면 편안해졌다. 걱정없던 어린아이로 돌아가 동네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원으로 나갔다.
제법 시작되는 날의 냄새가 풍겼다.
시작되는 날, 출발을 예감케 하는 향기는 아침 안개 속에서 맡을 수 있었다.
청이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높이 들고 천천히 걸었다.
이제부터, 목적을 세우고 살아야겠단 생각이 떠올랐다.
이만하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힘이 내재해 있음을 알았다.
“유 선생은 잠이 아주 없으신 분입니다.”
“부장님께서도 그러시네요.”
“나야, 죄 많은 사람이라 잠을 잘래야 잘 수가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마당이나 쓸고 있지만, 유 선생이야 한창 잠잘 나이가 아닙니까?”
“부장님은 무슨 죄가 있으세요?”
“내가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줄 아시요?”
“글쎄요? 저처럼 먹고 자는 일에 얽매이신 분 아니시겠죠.”
“유 선생도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현재, 정말 그래요.”
“그런 분은 쉬이 피로를 느끼고, 이겨내질 못합니다. 뒷 모습만 보아도 알지
요.”
“저는 아직 희망이라든가 욕망을 가져본 일이 없어요.”
“헛된 꿈이라든가 터무니없는 욕망을 가지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편이 훨씬 선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로 유 선생은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천사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읍니다.”
“아니에요. 천사는 저 안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이에요.”
“그 말씀도 옳습니다.”
부장은 언제나 겉으로 보기엔 청결하고 아늑해 보이는 건물을 건너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고통이 눌리고 눌린 곳이 아닌가.
“유 선생은 언제까지 이곳에서 있을 겁니까?”
“제가 무얼 해야겠다는 목척이 생길 때까지 있겠어요.”
“그 어느 쪽을 택한다 해도 저로서는 말릴 수가 없겠읍니다.”
“부장님, 제가 바보인가요? 이 나이에 희망이나 욕망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죠?”
“서둘러 얼룩진 캔버스보다, 차라리 깨끗한 캔버스가 새 그림을 그리기에 좋
을 겁니다.”
“아까 잠깐 말씀하시다가 그만두신 얘길 듣고 싶은데요. 부장님께서 이곳에 계신 이유가 있으시다고 하셨던가요?”
“그만둡시다. 들으면 우울한 일입니다.”
“혹시 이 안에……아니겠죠?”
청이는 물음보다, 더 강하게 부정하며 말을 끝냈다.
그리고는 더 듣고 싶지 않은 듯, 먼곳으로 달아났다.
부장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청이는 안개로 막을 닫아버렸다.
남의 불행에 끼어들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만큼, 청이는 똑똑해지고 있었다.
나지막한 담장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넝쿨창미의 꽃 한두 송이가 조화처럼 매달린 듯 피어 있었다.
담장 밖으로 넝쿨이 기어나가고, 식물조차도 갇히는 걸 싫어하는가.
청이는 장미꽃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가 제 머리를 자꾸만 벽에 부딪쳤다.
아프면, 더욱 아프게 들이받았다. 그러고도 울지 못했다.
말리지 않으면 종일이라도 계속했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도 아이는 그 동작을 반복했다.
아니, 반복한다고 그것이 그 아이의 의지는 아니었다.
무슨 힘으로든지, 멈출 수 없도록 채찍질 당하고 있었다.
청이는 아이의 머리를 끌어안고, 아이가 몸부림치면 청이도 몸부림쳤다.
함께 울었다.
아이가 끙끙대며 울었다.
몸부림치다가, 끙끙대다가, 아이는 기진맥진하여 잠들었다.
청이는 잠든 아이의 성글게 돋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다가, 문득 상수 생각이 났다.
―그래. 아이들은 모두 머리를 박박 깎았었구나.
―여자아이도 남자아이도 맨머리였구나.
―똑바로 긋는데도 자꾸만 비뚤게 그어지는구나. 아이야.
―오똑이도 일어서는데, 아이야.
―들리는데도 듣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마음대로 떠들어대었지. 아이야.
청이는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자꾸 되풀이하면서 아이들을 일으켜주었다.
종일, 일으켜주는, 똑같은 일을 몇백 번 하는지 청이는 세어본 일이 없었다.
상수가 자기집으로 살러간 지 사흘째 되는 날.
청이는 상수의 침대를 정돈했다. 되돌아오리라고 막연히 기대했었던 마음을 접어버렸다.
상수는 오고 싶어도 혼자서는 돌아올 수 없는 아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상수를 잊었다.
역시, 그것은 건강한 자의 거드름이었다.
청이는 삭여버릴 길 없이 무거운 고뇌가 가슴에 얹히는 것 같았다.
오후.
형운은 퇴근길에 들렀다.
청이가 아이에게 죽을 먹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열 숟가락을 떠넣으면 아홉 숟가락을 되뱉아내는 걸, 끈덕지게 참아냈다.
끝내, 먹여야 할 분량을 다 먹이고 나서야 일어섰다.
그제야 청이는 형운을 발견했다.
형운은 상수처럼 마음으로 인사를 보내는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청이는 문 앞으로 나갔다.
“좀 쉴 수 있지 않습니까? 식사시간이라고 들었읍니다만.”
형운은 가까이에서 두번째 보았을 때의 느낌은 첫인상과 아주 달랐다.
열일곱 살짜리 상수의 나이거니 하고 보았던 첫인상과는 달리, 형운은 아주 젊은 남자였다.
“제가 저녁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아니에요. 상수아빠께서 저의 식당에서 함께 드셨으면 좋겠어요.”
“부장님 허락도 이미 받아놓았읍니다.”
“일부러 식사시간을 맞춰서 달려왔으니까, 함께 나가시죠.”
“한 시간 내로 돌아와야 해요.”
“약속 지키겠읍니다. ”
형운은 재활원 건너편에 있는 식당으로 청이를 안내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어서, 쉬고 있는 식당 같았다.
그들이 들어서서야 식탁 위의 전등을 켰다.
그제야 음악도 시작되었다.
청이는 상수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구태여, 형운이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사양했다.
“여긴 생선 종류도 있고, 고기 종류도 있읍니다. 바닷가에서 오셨다지요? 생선을 좋아하시겠군요?”
“네.”
청이는 되도록 간단하게 대답을 줄였다. 모르는 사람과 밀폐된 듯 좁은 칸 안에 마주앉아 있는 건, 몹시 불안했다.
비록 형운의 의도가 사은의 뜻밖에는 없다 하더라도 사교에 세련되지 않은 청이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형운은 별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가끔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오는지, 한숨을 뚝 끊어버리고는, 담뱃불을 붙였다.
그러다간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부벼 꺼버렸다.
청이는 고개를 폭 숙이고, 접시 위의 음식물을 잘게 부쉈다.
바짝 마른 생선살이 가루가 되어버렸다.
청이는 시계를 테이블 아래에서 살폈다.
벌써, 식사시간으로 정해진 한 시간이 거의 다 달아나버렸다.
“잘 먹었어요.”
“오히려 폐가 된 것 같습니다.”
형운은 다시 정상적인 남자로 되돌아와 제법 도시인답게 말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몇 살쯤 되었을까.
서른서넛 안되어 보였다.
재활원 현관까지 청이를 바래다주곤, 형운은 차를 몰고 나갔다.
청이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커피 한 컵을 자동판매기에서 따랐다.
창가에 기댄 채, 줄곧 형운이란 상수아빠를 생각해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깨끗한 얼굴에 짙은 그늘.
청이는 빈컵을 꼭꼭 접어들고, 삼층으로 올라갔다.
두 팔로 바닥을 잡고 온몸을 끌어당기고, 이마엔 땀이 맺혔다.
종일 누워만 있는 아이의 눈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인간은 원래 약하게 태어난 것인가.
스텐레스 난간을 겨드랑이에 끼고 걷는 연습을 하던 아이가 며칠째, 열을 내
며 앓았다.
연습과다라는 진단이지만 아무도 그가 걷고자 하는 욕망을 막을 수 없지 않은가.
청이는 열이 끓어오르는 아이를 또다시 보행연습 난간으로 데리고 갔다.
껍질을 깨는 고통 없이는 날개를 펴고 신비로운 세상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영원히 걸을 필요도 없는 천국으로 가버렸다.
“다행이지.”
“더 살아 뮐해.”
청이의 귀에 들리는 말은 똑같았다.
청이는 죽음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깨달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이들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청이는 ‘다행이지, 더 살아 뭘해.’라는 두 음절을 장송곡의 후렴
으로 들었다.
내일 죽더라도, 그들은 잘 걷기를 갈망했고, 더 똑똑히 말하고 싶어했으며, 더 예쁜 구두를 신고 싶어했다.
청이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행이지, 더 살아 뮐해’라고 하는 말은 건강한 자의 거드름일 뿐인 것을.
청이는 그들 부모보다 더 슬퍼했다.
그 아이들의 피맺힌 걸음마를 더듬어가며 밤새워 울었다.
그렇다.
어둠 속에 일어나 앉아 있을 때, 청이의 머리를 스쳐가는 빛―이곳에 있는 아이들과의 이 별은 반드시 죽음이란 방법밖엔 없었다.
청이는 아이들의 신음소리밖에 들리는 게 없는 방에서, 아이들과의 또 다른 이별을 예감했다.
차라리 상수와의 이별은 다행한 것이었다.
청이는 상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가 처음으로 만난 이성이었다.
어떤 형태였건 청이는 그에게 사랑을 품었던 이성이었다.
청이는 멋진 야구모자 하나를 샀다.
상수의 S자가 모자 가운데 박힌 빨간 것으로 골랐다.
모자만큼은 멋지게 씌워줄 수 있었으므로, 청이는 그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달려갔다.
높은 담에 거태한 대문이 달린 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동네였다.
청이는 늦은 여름날 더위에 지쳤다. 더이상 더듬어낼 기운이 없었다.
정해진 외출시간을 모두 길에서 허비해버렸다.
청이는 집을 찾지 못하여 무척 애썼다는 얘기와 함께 상수의 야구모자를 우편으로 보냈다.
편지가 사람보다 낫다는 결론을 쉽게 얻었다.
청이는 형운의 답장을 받았다.
언젠가 청이를 집에 초대하겠다는 형식적인 편지였다.
초대하기 전엔 아무때나 불쑥 찾아와서는 안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이는 편지를 찢어버렸다.
불행 앞에서는 평등했지만, 행복 앞에선 평등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그러나 청이는 상수를 위해서 또 다른 모자를 샀다.
우송할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상수가 쓰고 있을 모자도 아닌 바에야, 보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청이의 방에 걸어두었다.
언젠가 기회가 있거든 전해주리라 마음먹었다.
청이의 간절한 사념의 끝에 끌러온 듯이 형운이 나타났다.
형운은 언제나 청이가 일하는 모습을 소리없이 지켜보곤 했다.
청이가 형운을 찾아낼 때까지 부르지 않았다.
형운은 청이가 아이들을 닦아주며, 일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때 묻지 않은 천사 같았다.
청이는 긴 그림자를 보고, 허리를 펐다.
거기에 형운이 입을 꾹 다문˙ 채, 눈빛으로 청이를 끌어냈다.
청이는 방에 걸어두었던 상수의 모자를 안고 형운을 따라나갔다.
“타시지요.”
“멀리 나갈 시간이 없는 걸요.”
“한 시간 내로 돌아올 수 있읍니다.”
“약속 지켜주세요.”
“물론이지요.”
형운은 산업도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거칠게, 속력을 내어 달렸다.
청이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수의 아빠라는 가느다란 인간관계를 믿고 싶었다.
대여섯 개의 모자를 잔뜩 움켜 안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편히 앉으시지요.”
“네.”
“그 모자 하나, 내게 씌워주시겠읍니까?”
형운은 불안을 감추려고, 여유를 보였다.
“어떤 모자가 좋으세요. 카우보이 모자, 보안관 모자, 베레, 방한모자, 운동모자, 썬캡 중 어느 것으로 드려요?”
“카우보이 모자가 멋 있겠읍니다. ”
청이는 카우보이 모자를 형운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끈도 묶어줘야지요. 벗겨질 텐데. 바람이 세게 들어오거든요.”
“네. 알았어요.”
청이는 끈을 묶었다.
손등에 형운의 까칠한 턱수염 자욱이 와닿았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소, 차의 속력을 내렸다.
솔밭이 우거진 사잇길로 꺾어들어갔다.
“내립시다. 더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읍니다. 조금만 걸으면 됩니다.”
형운은 먼저 내렸다.
청이는 차 안에 모자를 두고, 머뭇거리며 내렸다.
“모자를 가져갑시다.”
“상수가 이 근처에 있어요.”
청이는 별장 같은 집을 찾아보았다.
산속이었다.
형운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청이는 더이상 걸을 수 없었다.
섬뜩한 예감이 왔다. 숲 사이로 형운의 모습이 보였다.
“다 왔읍니다. 조금만 더 걸어와보시요.”
청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운은 머리에 썼던 카우보이 모자를 벗어, 나무에 걸어놓았다.
“이게, 상수의 나무니까 여기에 걸어둡시다.”
나무 뒤로 작은 봉우리가 있었다. 새 무덤이었다.
“왜요? 어떵게 된 거죠?”
청이는 주저앉으며 중얼댔다.
“당신에겐 차마 알릴 수 없었읍니다.”
“상수는 열일곱 살밖에 안되었어요.”
청이는 소리질렀다.
상수는 살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어했다.
“누가 죽였어요? 가족인가요? 언젠가 온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상수 아빠가 그러셨죠?”
이는 형운의 눈을 쏘아보며 다가갔다.
“이제 행복하신가요?”
“아무도 우리 집안에서 상수가 세상 떠난 일을 당신만큼 슬퍼한 사람이 없었읍니다. 소위 피를 나눈 우리 혈족 중에서 말입니다.”
“그래요, 다행이지요, ‘더 살아 뭘해. ’라고 말했겠죠?”
형운은 날카로운 비수에 찔린 듯, 당황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놀래실 것 없으세요.”
청이는 차갑게 비웃어주었다.
죽은 뒤에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형운은 풀위에 앉았다.
“좀 앉으십시오. 구태여 여기까지 모시고 오지 않아도 될 텐데, 당신이 상수의 모자를 또 사러다닐 것 같아서 이렇게 단념시키려했읍니다.”
청이는 상수의 묘를 향해 앉았다.
―다행이지, 더 살아 뭘해.
청이의 귀에 물의 파문처럼 되울려왔다.
“제 옛날 얘기를 좀 할까요?”
“상수 얘기겠네요?”
“당신은 상수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묘에 관한 내력을 알고 있는 분이니까요.”
“자격은 없음니다만, 소중하게 기억해두겠어요.”
형운은 오랫동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몹시 주저했다.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 떼, 그러니까 십칠년 전 얘기가 되겠읍니다.
나는 사대독자로 여자들만 와글거리는 집에서 연약하게 자랐읍니다.
학교에선 계집애라는 별명까지 내게 붙일 정도였지요.
숙성한 친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사내가 아니고 중성일 거라고 놀려
댔읍니다.
점점, 내 자신도 그 의혹에 빠져들기 시작했지요.
어떤 방범으로든지 실험해봐야 한다고 결심했읍니다.
부엌일하는 계집애한테 며칠 동안을 졸랐읍니다. 제 일 만만했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뒤, 며칠 안 되어 도망쳐버렸읍니다.
그대신 무서운 아줌마가 들어왔읍니다.
나는 도둑질하려고 염탐하러 다니는 도둑놈처럼, 모든 생각을 그쪽으로만 쏟
았읍니다.
점점 성적도 떨어졌고, 우울한 아이가 되어갔읍니다.
학교에서도 이상한 아이로 따돌림 받을 정도였읍니다.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소꼽친구를 만났읍니다.
어렸을 때의 예쁜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긴 했지만, 짙은 화창을 한 게 야릇한 냄새를 풍겼읍니다.
나는 그 여자의 연락처를 적어두었읍니다. 어쩌면 나를 실험할 수 있는 기회
가 될 수 있을 것을 기대했읍니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용기를 못 내고 있을 떼, 전화가 걸려왔읍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여자에게 묶여버렸읍니다.
내가 자신만만한 남자임을 친구들에게 증명 할 필요도 없었읍니다.
나는 집을 나갔읍니다.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서 학교도 집어던졌읍니다.
역시 계집애라는 내 멸명이 맞는 모양이었읍니다.
뭔가 한 가지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비공식적인 부부로 일 년을 지냈읍니다.
임신을 했고, 출산할 메까지도 집에선 그 여자를 인정하지 않았읍니다.
나도 어린 나이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읍니다.
여자고 뭐고, 이젠 이생 활을 떨쳐버리고 편안한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음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생활을 동경하기 시작했읍니다.
철없던 시절을 후회했읍니다.
그러나 완고한 부모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읍니다.
그 여자는 매우 착한 여자가 된다고 어렵게 끊었던 술담배를 다시 시작했고, 나는 매일 굶다시피 했읍니다.
그 여자는 알콜, 영양실조, 임신중독 등으로 병원에 입원했읍니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결국 나는 그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 그 여자를 버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들어갔읍니다.
나는 집 안의 평온함에 감사하며 악몽 같았던 지난 한 해를 잊어버리고 싶었읍니다.
내겐 알리지도 않고, 죽은 산모의 뱃속에서 아이를 꺼내 최고의 의사진으로 구성된 병원에서 살려냈다는 얘기였읍니다.
그때, 그 아이가 아들이라고들 떠들썩했읍니다.
죽은 여자는 묘지도 없이 화장되어버렸다는 것조차 멀리 돌아서 내 귀에 들려왔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바로 상수였읍니다.
올바른 아이가 태어날 수 없었던 모체의 조건에다, 죽었던 아이를 되살리는 동안에도 어떤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집안의 냉혹한 피에 대한 벌이었을 겁니다.
나는 지금도 의심스러운 것은, 아버지가 내 대신 병원으로 달려가 산모와 아이 중에서 어느 한 쪽을 포기하라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아이가 필요하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것이든, 상수의 불완전한 탄생은 모두 내가 만든 죄의 대가였읍니다.
그 뒤, 우리 집은 상수 때문에 흉가처럼 음침해졌읍니다.
상수가 열일곱에 죽은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죄를 짓지 않았읍니까?
당신에게 배운 사랑으로, 이젠 상수를 아끼고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상수는 죽었읍니다.
영원히 나는 후회해야 하며, 죄를 씻지 못할 겁니다.
형운은 후회한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 집안 식구밖에 이 얘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란 당신뿐입니다.”
청이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바늘 꽂힌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생활해온 형운을 구경할 따름이었다.
그 고난의 옷은 언젠가 저절로 벗겨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형운은 카우보이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새어나오는 모양이었다.
희멀건 눈빛으로 희망도 절망도 아닌 아침이 그래도 약속하지 않았으면서도 꼬박꼬박 찾아왔다.
그 아무 쓸데도 없는 스물네 살이 그들 벌레 같은 존재들에게 주어졌다.
꿈틀거리며 살고 있을 뿐인 그들에게 아침이 그림 속의 계란처럼 놓여 있었다. 깨지기 쉬운, 그러나 생명과 아름다움을 단단한 껌질 속에 감춘 모습으로 그들 앞에 아침이 다가왔다.
아침이 있으나마나한 그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연장된 호홉과 배설기능의 삶일 뿐이었다.
청이는 아침에 솟는 태양을 보았다. 가로질러가는 구름 바로 위로 잘리우듯 드러나는 열화로 같은 태양을 두려운 시선으로 보았다.
또 오늘 하루를 그들은 어떻게 보낼 것인가.
얼굴을 마룻바닥에 끌면서, 머리를 휘이휘이 내두르면서, 침을 질질 흘려가며 스물네 시간을 어렵게 채워갈 것이다.
세 끼니 밥 먹고 잠잘 자리를 얻기 위해서 노동하는 청이마저 우월한 인간으로 살게 하여주는 이곳은 그야말로 청이에게나 그들에게도 천국이었다.
청이는 담요를 돌돌 말아서 캐비닛 속에 구겨넣고, 아직 회색빛 어둠이 밝음과 섞여 물러가지 않은 마당에 나갔다.
매콤한 아침 공기를 피부로 느꼈다.
청이에겐 아침이 있었다.
아침마다 청이는 기도했다. 어떤 곳엔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능력있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들이 고통을 고통으로 알지 못하도록 하여달라고 기도했다.
행복이나 만족을 주지 않은 대신, 불행도 불만도 주지 말아야 했다.
아니 고통일지라도 감각이라도 주길 기도해야 했다.
무감각한 그들에게 고통의 한순간을 느끼도록 해줄 수 없느냐고 기도했다.
청이는 태양을 정면으로 안고, 버티어섰다. 빛이 가슴에 이마에 직사광선으로 닿을 때, 청이는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건강한 몸뚱이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병들어 있는 세월을 살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언어도, 미소도, 통곡도 아닌 그들의 일상의 표현으로 청이의 인생은 물들어
갔다.
뭉뚱그려진 무딘 감각으로 변해 갔다.
청이는 사람들이 죄짓고 허덕이는 세상 밖으로 떨어져나간 채 그곳을 그리워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잠든 듯이 지냈던 아이 하나가 갔다.
나의 상수처럼 천사가 되어 날아갔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의 부모가 그를 앰불런스에 태워가지고 데려갔다.
자꾸만 삐져나오는 만족의 웃음을 감추고, 그 아이의 부모는 머리를 숙였다.
손수건으로 마른 눈시울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청이는 그들의 웃을 수 없는 불행을 함께 아파해주며 그 아이의 침묵을 가슴에 안았다. 침묵은 드디어 죽음으로 이어져갔다. 더 무거운 침묵으로 간 것일는지도 몰랐다.
앰불런스의 뒷문이 닫혔다. 메마른 돌층계 밑에 서서 청이는 그 아이의 침묵
을 대신하는 뒷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의 침묵처럼 문소리는 두번 다시 울리지 않았다.
톡톡, 청이의 어깨를 두들기는 느낌이 아득하게 전해졌다.
청이는 조용히 돌아다보았다. 그게 누구, 사람이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스르르 스쳐지나버 리는 바람결이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곳엔 여인의 얼굴이 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낯선 얼굴로 청이를 보고 있었다. 낯선 얼굴이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 밝은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요.”
청이는 아무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건 내 작은 성의니까 받아줘요. 또 찾아올께요. 정말 고마웠어요.”
상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거란 막연한 생각을 해보았다.
청이의 주머니에 돈을 꿍져넣어주곤 앰불런스로 달아났다.
청이는 그 아이의 죽음 대신에 몇 장의 지폐가 들어와 메꾸어지는 듯한 묘한 감정에 빠졌다.
빈자리도 보이지 않게 깨끗이 잦아들고 말았다.
종일 혈액을 교환한 뒷맛 같은 께름칙한 마음으로 지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푸푸대며 침을 품어대는 아이의 꼴이 오늘만큼은 미워보였다.
마치 저 아이가 청이의 즐거운 인생을 빼앗아버린 거라고 생각되었다.
청이는 점심시간에 시내로 나갔다.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게 되자 어지러웠다. 어느 가게 앞에 털모자가 걸려 있었다.
문득 상수를 생각했다. 노란색 털모자 하나를 샀다. 눈 오는 날 아니면 눈쌓인 스키장에서 쓰면 썩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유리창에 모습을 비춰보며, 모자를 머리에 얹었다.
모자 위로 벌거숭이 상수의 묘가 보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했다. 낮은 겨울 하늘뿐이었다.
맑게 비치는 유리 꽃병 한 개를 샀다.
꽃은 꽂을 수 없었지만 웬지 가지고 싶었다.
남은 돈을 은행에 넣으려다가 청이는 주춤 발길을 멈추었다. 남길 필요 없었다. 고난은 되도록 빨리, 완전하게 잊어야 했다. 죽음이 행복이 되어 옮겨간, 아이의 기억 대신 들어온 돈을 오래 간직할 것 없었다.
청이는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도시의 회색 냄새가 어둠과 불빛이 교체되면서
몸과 머리로 스며들었다.
첫번째 가게, 그건 가발 가게였다. 목만 따로 떼다가 그 위에 굵은 머리카락을 짜서 세팅해놓았다. 모양만 완성되어 있는 머리는 뇌성소아마비아들의 머리만도 못한데 똘똘한 얼굴이었다.
청이는 그 앞에 오래 서서 머리카락을 보았다. 인간의 것보다 훨씬 우수한 것이니까 좋을 텐데, 그 물건엔 가짜라는 말이 붙었다.
가발이란 말이 뭔가 나쁘다는 느낌이 드는데도 사람들은 그걸 즐겨 쓰고다녔다.
지금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은 탓인가.
하기야 흑인이 백인이 되고 싶어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황인종은 차라리 흑인이라도 되었으면 한다는 얘기가 있다. 청이도 진열장에 있는 짧은 머리, 거의 삭발이 되다시피한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쌍둥 잘라버리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자를 수는 없었다.
자기를 보호해주는 의미의 변신이라면 가발로써 효과는 두 배로 얻는 셈이었다.
청이는 가발 가게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알루미늄 문틀이 일그러지면서
힘의 균형을 잃은 채 밀렸다.
부서질 듯 안으로 밀리자, 안에선 김치찌개 냄새가 청이의 얼굴을 덮었다.
짙게 화장한 여점원이 불룩 볼을 불린 채 돌아다보았다.
점심시간이었는지, 김치를 넣고 전열기에 끓여 먹고 있는 중이었다.
청이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일이 추하고,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저변에 있는 저질의 욕망이란 느낌이 들었다.
배를 불리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 배를 불리기 위해서 남에게 좋은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여점원의 추한 모습을 마주보고 선 청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점원은 입을 열지 못한 채 눈짓으로 물었다. 어떻게 왔는지, 잘못 찾아 들어온 게 아니냐는 듯한 의미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청이는 벽에 걸린, 마네킨이 쓰고 있는 가발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무게 없는 질감이 느껴졌다. 기름기가 없어 부드러운 느낌이 없는 탓이었다.
가발에 볼을 대보았다.
체온이라든가 체취가 묻어 있지 않은, 그보다 전혀 죽어 있다고조차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촉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이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체온이라든가 체취라든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증오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무생물, 심리적인 직접교환이 없는 것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일까.
임의로 도망치거나 미워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건 재활원 아이들과 얼마동안 함께 생활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청이는 코를 차단시키고 입으로만 숨을 쉬었다.
여점원은 라면남비를 비우고 나서 청이한테로 다가왔다.
“가발 쓰시게요?”
“얼마죠?”
“모두 값이 달라요. 어면 것으로 쓰시게요? "
“글쎄요. 우선 돈이 모자랄지 어떨지 몰라서요.”
“싼것, 비싼것, 예산에 맞춰 쓰시면 돼요. 얼마나 예산하셨어요?”
“글쎄요.”
청이는 핸드백에 들어 있는 돈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눈으론. 가발을 고르는 걸 쉬지 않았다.
여점원은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팔기를 단념하는 몸짓이었다.
청이는 오히려 편안해졌다. 쫓기고 감시당하던 눈을 벗어난 듯 숨을 몰아쉬고, 가게 구석에 놓인 둥근 의자에 앉았다.
“진열장에 있는 짧은 가발은 얼마죠?”
“그건 누가 맞춰놓은 건데요.”
“전 자주 외출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저한테 팔고 다시 만들어주면 되잖아요?”
“그렇잖아도 약속날짜에 못 만들어서, 두 번이나 찾으러 왔던 물건이에요. 다른 걸 고르시죠.”
“주문하면 얼마나 걸리죠?”
“일 주일 정도면 충분해요.”
“얼마냐니까요?”
“이만 오천 원이에요.”
또 다른 벽에 부딪쳤다.
가발 하나 사서 머리에 쓰려는 하찮은 일인데도 제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세상 일이 이 작은 일처럼 청이에겐 어렵고 뒤틀려가고 있는 징조라고 생각되었다.
청이는 후욱 두번째 한숨을 쉬었다.
벽에 걸린 것들을 돌아다보았다.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건 어때요?”
어느 사이에 여점원은 가발을 뒤집어쓰고 청이를 불렀다.
청이는 푹, 테가 꺼지는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잡고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도깨비가 나타난 것 같았다.
여점원은 게다가 함께 웃었다. 더욱 웃음을 못 참게 했다.
“왜 웃어요?”
“우스우니까요.”
“어디가요?”
“내가 써도 그렇게 우스울까요?”
“써 봐요.”
여점원은 자기 머리에 썼던 가발을 뜯어내어 청이한테 씌워주려고 가까이 왔다.
“이왕 써보려면 진열장에 있는 저것을 써보겠어요.”
“그건 팔 수 없다니까요.”
“좀 써봐요.”
청이는 거울을 향해 서 있고, 여점원은 진열장 안으로 목을 들이밀고 짧은 가발을 꺼냈다.
몇을 들고 다가오는 것 같아 청이는 두 손으로 여점원이 들고 있는 가발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써볼께요. "
“그러세요.”
여점원은 뒤로 물러섰다. 거울 속으로 청 이를 지켜보았다.
청이는 멋적어 하며 가발을 써보았다.
조금은 도시 여자 같아뵈는 것 같았다. 여점원이 썼던 가발처럼 희극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참 잘 어울리시네요. 똑같이 맞추세요. 더 잘 만들어드릴께요.”
“난 또다시 못 나온다니까요.”
“억지부리지 말고 하나 맞추세요. 기성품값과 똑같이 받을께요.”
“기성품?”
“그냥 사가는 가발 말이에요.”
사람도 기성품과 주문품이 있다.
청이는 분명히 주문품은 아닐 거란 확신이 섰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을 걷는 걸음마도 이렇게 맞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추 크기와 단추 구멍이 맞지 않거나, 얼굴과 그것이 보여주는 인간 자체의
내용과도 맞지 않았다.
약아빠지게 생겼으면서도 어수룩했고, 겹 많게 생겼으면서도 검이 없었다. 그것은 미련하고 둔해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구태여 구체적으로 따져본다면 그랬다.
청이가 끈질기게 졸라댄 탓인지 팔고 싶은 욕심에선지, 짧게 깎은 머리 스타
일의 가발을 사고야 말았다.
긴 머리카락을 꿍져 올리고, 그 가발을 썼다.
머리 감고 타월로 매어둔 것처럼 거뜬했다.
머리가 가벼워서 오뚜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청이는 지하상가에서 맞뚫린 백화점으로 올라갔다.
지나치는 거울마다 머리를 비쳐 보았다. 점점 희극적 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할인이란 깃발이 붙어 있는 판매대에만 시선을 멈추었다.
그래도 만만하게 살 만한 물건이 없었다.
가발 위에다 노란 스키모자를 썼다.
또 거울에 비쳐 보았다. 이젠 그게 어떤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커피 한 잔과 파이 한 조각을 주문했다. 커피도 파이도 모두 맛이 없었다.
갑자기 가발 가게에서 역겹게 느꼈던 김치 조각을 넣어 끓인 라면남비가 떠올랐다.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남겨두고 계산을 치렀다.
버스를 타려고 길로 나갔다.
언제나 길 모르는 서울 거리에 서면 청이는 산길을 내려오던 그 아득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어쩔까.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갑자기 열리면서 허공에 뜬 상태, 우주로 떨어져나갔다.
어쩔 것인가 하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 생각대로도 움직일 수 없는 우주로의 비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우주가 순식간에 꺼져들고 청이는 또다시 지구 위에 발을 붙이고 서있게 되었다.
버스 팻말을 읽으려고 발돋움을 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동네 이름이 깨알만큼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어릿어릿거리는 게 부끄러워서 청이는 파란 신호가 떨어진 횡단보도를 사람들의 등에 코를 댈 듯이 바짝 붙어 건넜다.
다른 버스 정류장에 섰다. 이번엔 팻말을 읽지 않았다. 바로 팻말 옆에 연인 사이로 뵈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팻말을 읽으려면 그들의 시선 안에 자신의 얼굴을 들여넣어야 할 것 같았다.
그들과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방금 건너온 횡단보도와, 건너
편 백화점의 선전휘장을 읽었다.
그때, 그 휘장을 타고 내려오듯이 한 사람이 백화점 옥상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 저것 보세요.”
청이는 무심코 겉에 서 있던 남자, 아이의 팔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사람이 떨어지는군.”
그렇게 짧은 대화를 끝내기도 전에 건너편 길엔 오고가던 움직임이 갑자기 끊어졌다.
횡단보도엔 빨간 신호였다.
“왜 그래?”
여자아이가 그제야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도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옥상에서 투신한 사람이 지상에 딱 닿는 순간의 정지감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뭔데 그래?”
여자아이가 화난 말투로 물었다.
청이의 얼굴을 바라볼 뿐, 남자아이는 입을 떼지 못했다.
청이는 자기가 지금 가발 쓴 위에 스키 모자까지 쓰고 있는 것도. 까맣게 잊었다.
천사의 승천을 가끔 보아온 청이에게, 그것은 악마의 착지처럼 보였다.
그때, 투신자의 표정을 상상으로 보았다. 눈과 입이 옆으로 찢길 듯 늘어났고, 이마엔 굵은 주름이 그어졌다.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청이는 남자아이의 눈을 빤히 보았다.,
“왜 죽었을까요?”
남자아이가 물었다.
아이라 했어도 청이보다 한두 살 위인 것 같았다.
목에 두른 분홍빛 털목도리가 충분히 보호받고 있는 아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청이는 입을 꼭 다문 채, 조용히 눈알만 굴렸다.
그래도 남자아이는 청이가 시원하게 대답해주길 기다리면서 아예 몸을 청 이한테로 돌렸다.
그때 파란 신호로 바뀌었다.
“건너가볼래요 ? 우리?”
남자가 청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청이는 고개로만 싫다고 말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제로로 바꿔버렸다.
기껏 돌려놓았던 인생의 태엽이 죽는 순간에 모두 풀려버렸다.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물체가 땅위에 놓일 뿐이었다.
죽은 뒤엔, 모든 상황이 죽은 자와 아무 관계없이 그대로 움직여갔다.
결국 죽기 전에도 제로였고 죽은 뒤에도 제로 상태였다고 말해야지.
“궁금하지 약아요? 이대로 짐에 돌아가면 잠도 안 올 거예요.”
남자아이가 깜박거리는 파랸 신호를 보며 재촉했다.
청이는 다급한 상황이란 착각이 생겼다. 그의 팔에 끌려 힁단보도를 건넜다.
겹겹이 둘러싼 인파 때문에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다.
뒤로 새어들어오는 말엔 맥화점 청소부란 말도 있었다.
여자란 말도 있었고 남자란 말도 있었다.
경찰이 달려왔다. 구경꾼들을 쫓아버렸다.
흩어지는 구경꾼 중의 몇 사람을 붙들고 경찰이 증언을 들었다.
남자아이는 쫓기는 구경꾼들을 헤치고 안으로 뚫고 들었다.
“내가 똑똑하게 봤는데, 이 백화점에서 떨어졌어요. 이 여자도 봤어요.”
청이는 자꾸만 뒷걸음질쳤다.
구경꾼 틈에 몸을 숨기며 도망쳤다:
왜 죽었을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청이는 뛰었다. 죽는 것이 무서웠다. 아적 더 살아야 할 테니까.
빌딩의 시계는 벌써 두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억지.
고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에 젖은 휴지.
이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머리깎기.
청이는 묘한 악취가 풍기는 강당 창가에서 햇빛을 쪼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꿈틀대기를 정지한 듯, 낮잠을 잤다. 해가 비치자마자 꿈틀대기 시작한. 아이들은 꼭 이맘때쯤 되면 지쳐버렸다. 기진맥진 바닥에 온몸을 떨구고 죽어버 리는 상태였다.
피곤하고 지쳐버리면 통증도 멈추었다.
더이상 움직이려들지 않기 때문에 온몸으로 스며드는 나른함이 마약처럼 번졌다.
그동안만이라노 아이들은 천국에 놀러가는 것이겠지.
그곳에선, 이 아이들은 축구하며 마구 뛰어놀 수 있을 거야.
천국에도 햇빛이 있을 테지만 구름에 가리워지는 날이 없올 테지. 후우욱.
이 아이들에게 천국의 문이 열릴 것이라乎 확신했다. 확약은 아니었지만, 억지라도 써야겠지.
사람은 모두 죽는다. 오래 살든 짧게 살든, 훌륭한 사람이든 쓸모없는 사람이든 죽는 날을 맞이한다.
문득 청이는 고향에 남은 할머니가 생각났다. 뜨거운 철판 위에 맨밭 벗고 올라선 듯이 안절부절이었다.
청이는 가까운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시외전화를 신청했다. 남단의 먼 섬 남해는 전화 연결도 꽤 어려웠다.
두 시간 넘어서야 겨우 선이 닿았으나, 할머니는 이미 귀가 멀어 청이의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청이는 목소리가 옆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손으로 막았다. 그래도 역시 절벽이었다.
목이 아프고 땀이 흘렀다.
청이는 양로원에 있는 사무원과 몇 마디 통화를 했을 뿐, 가슴은 더욱 무지근했다.
할머니의 건강이 하루하루 악화하고, 게다가 즐거움이라든가 희망이 없는 축 늘어지는 게 큰 병이란다.
귀도 멀고, 답답하여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거의 죽음 속에 누워 있다고 했다.
청이는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연하려 해도, 재활원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힘없이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을 때, 재활원 쪽에서 마주 내려오던 승용차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요란한 금속성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승용차가 급정거했다.
청이는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무심코 길을 비켜주며, 급정거한 승용차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할머니를 만나러 남해로 내려가야 할까를 주저하고 있었다. 재활원 아이들을
내동댕이치고 떠날 수 있다면, 그건 청이가 기껏 찾아가진 사랑의 길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또다시 청이는 인간으로 돌아가고, 욕심 많은 속인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다가 정말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바로 귀옆에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해주는 사람이, 곧 형운임을 안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청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사했다.
아무와도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아뇨.”
그제야 오히려 형운의 관심을 끄는 것이라고 느끼며, 일부러 밝게 대답했다.
“어딜 다녀오시오?”
“그냥, 좀 돌아다녔어요.”
“바람났소?”
“어째서요?”
“직장을 한시도 비우지 않던 사람이 두 시간씩이나 연락도 없이 나가 있다니 말입니다.”
“여기 오신 지 오래되셨군요?”
“꼭 두 시간.”
“고향에 전화 걸고 왔어요.”
“고향? 고향이 어디요?”
“남해요.”
“저, 남쪽 섬?”
“네.”
“거긴 누가 삽니까?”
“할머니 한 분 계세요. 양로원에요.”
“그래 건강하시답디까?”
“아뇨.”
청이는 그만 주루룩 눈물이 쏟아졌다.
재활원 쪽으로 올라갔다.
형운은 차를 뒤로 달려 재활원 정문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형운은 차에서 내려, 청이가 걸어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내가 고향엘 언니 대신 다녀와줄까요?”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얼굴도 모르는 분이 우리 할머니를 만나서 무슨 달씀을 하시려구요?”
“손녀딸의 안부를 전해드리고, 며칠 거기서 묵고 올라오겠읍니다.”
“그만두세요.”
청이는 형운의 헛된 친절이 메스껍기까지 했다.
형운이가 가엾게 살다가 죽어버린 상수의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못한 남자거니 하고 그를 쳐다보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아주고 싶은 충동이 가끔 일었다.
“아니면 같이 갑시다. 친구해드리지요.”
“뭣때문에요? 저 같은 사람을 위해 그런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시려는 거
죠?”
“내 기쁨입니다. 내가 속죄하는 방편이니까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청이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자학하는 형운을 뜰에 버려두고, 재활원 이층 큰 방으로 단걸음에 올라갔다.
언제나 큰방 문을 열면, 청이는 깊은 지옥에 빠진 듯 캄캄한 느낌이었다.
불길 위에서 비틀며 아우성치는 죄인들의 모습이, 다만 함성 이 들리지 않을 뿐, 자욱한 연기속에서 선명하게, 또다시 연기속으로 감추어지곤 했다.
청이는 문에 기댄 채, 멍하니 그들을 한참 보고 있으며, 그들의 가리워진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제야 청이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플라스틱 오줌통에 오줌을 받아들고, 히쭉 웃는 아이한테 오줌통을 받아들었다.
“아이, 착해. 뽀뽀.”
청이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청이는 플라스틱 오줌통을 버리려고 화장실에 갔다.
그때까지도 형운은 복도 유리문에서 청이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청이는 얼핏 그를 보았지만, 그대로 화장실로 건너갔다.
소독약품으로 소독하고, 뽀얗게 닦은 플라스틱 오줌통을 들고 나갔다.
“언제 끝납니까?”
“끝은 없고, 다만 교대시간이 있어요.”
“그게 언젭니까? ”
“여덟 시요.”
“그 시간에 맞춰 다시 오지요.”
“오시지 마세요. 왜 자꾸 오세요?”
“나도 모릅니다.”
형운은 가끔 상수를 닮은 인상이었다가, 더할 수 없는 슬픈 미소를 띤 표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청이가 자주 빠지곤 하는 고독의 골짜기에서 만나는 짙은 그늘과 같
았다.
청이는 단호하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자르지 못했다.
그건 가엾게 세상을 뒹굴며 몸부림치다 간 상수 때문이었다.
상수가 이어주는 어떤 인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청이는 아무런 선택이라든가 망설임이라든가 할 필요가 없었다.
청이는 자주 시계를 들여다봤다.¡
여덟시에 교대하는 미스 김이 한 시간이나 이르게 올라왔다.
“내려가 식사해.”
“아직 여덟시가 안되었는데, 왜 벌써 올라왔어?”
“아래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
“언제부터?”
“한 서너 시간 되었을 거야.”
“어쩌지?”
“우리 원생이었던 상수 아빠라면서?”
“음.”
“미쓰 한을 좋아하는 것 아냐?”
“내가 상수를 좋아했었거든. ”
청이는 갑자기 비닐 바닥 위에 기어다니던 상수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그
리움에 젖었다. 그 어떤 형태의 삶이든 죽음보다 가치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키우는 존재였다.
결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을 수유하다 간 소년이 청이한테 준 교훈은 바로 생명의 가치였다.
청이는 완전한 육체를 가진 여자이면서 상수한테 아무것도 준 것이 없지만, 상수는 흉한 벌레처럼 바닥에 머리를 끌며 기어다니던 사람이면서 비할데 없는 큰 선물을 주고 갔다.
살아 있다는 고마움과, 삶의 가치를 청이한테 심어주었다.
청이는 형운을 무시하고 근무시간을 고집스럽게 채웠다.
동료는 청이가 사람을 그렇게 기다리게 버려두는 것을 보고 잔인하다고 느꼈는지 내려가든 말든 간섭하지 않았다.
청이는 살짝 꼬리를 감추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무실에 들어가 업무일지에 근무상황을 기록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형운이
를 건너다보았다.
형운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청이를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청이를 두렵게 생각했다.
“오래 기다리셨다면서요?”
“아닙니다.”
“뭣때문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버리세요?”
청이의 얘기는 형운의 마음을 부드럽게 숨죽였다. 비록 청이는 화를 내고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형운의 마음은 편안했다.
마치 쓴 독배를 마신 뒤의 죽음 같은 잠이라고도 생각되었다.
“남해에 갑시다.”
“이 시간에요?”
“밤새 달리면 새벽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안돼요. 내일은 또 어쩌시려구요?”
“난 괜찮습니다.”
“저는 일해야 해요.”
“내가 대신 허락을 받아놓았읍니다.”
“고맙지만, 고향에 내려가기가 두려워요.”
“그러니까 같이 가면 좋지 않습니까?”
“상수아빠하고 청이네 고향하고 무슨 상관있어요?”
청이는 점점 형운을 괴롭히는 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전혀 청이답지 않은, 다른 인물이 형성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석하면 불행하게 자라온데 대한
분노라고도 볼 수 있었다.
청이는 할머니의 살아 있는 모습을 만나러가는데, 그 동행이 누구라도 괜찮았다. 동행하는 사람이 없어도 좋고, 있어도 또한 좋았다.
형운의 성능 좋아 보이는 승용차는 잘 달려줄 듯이, 청이를 유록했다.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불질렀다.
차의 임자가 누구든, 청이를 실어다준다면, 눈 딱 감고 타고 앉을 수밖에 없
었다.
청이는 그동안 틈틈히 짜놓았던 할머니의 스웨터와 보드라운 속옷을 가방에
챙겨넣었다.
뜻하지 않게도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는가. 청이는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채 부장실로 건너갔다.
“참 오랜만에 그렇게 생기있는 얼굴을 보는 것 같군.”
“그래요? 좀 흥분했어요. ”
“얘기 들었소. 상수아버지가 미쓰 한을 고향에 데려다주겠다고 합디다.”
“네. 그분이 왜 제게 친절한지 모르겠지만요, 그냥 생각없이 받기로 했어요.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사흘이면 되겠읍니까?”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그동안 미쓰 한은 우리 재활원에서 고생 많았읍니다. 진작 휴가를 주었어야
하는 건데, 미처 생각지 못했읍니다."
“아뇨.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그건 자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부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부장은 쿵 하고 땅에 머리를 고꾸라뜨린 듯 충격을 받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청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분명 자학하며 이곳에 일생을 묻어가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청이는 애초의 목적이 세월 보내는데 있었다 해도, 재활원 아이들을 만난 뒤로는 아이들의 아픔을 함께하며 건강한 몸을 가진 행복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이 일었다.
청이도 부장만큼 나이가 들면 자학하는 마음으로 일하게 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청이가 차에 오르기 전부터 엔진이 걸려 있었다.
“타십시요.”
“어디에 타죠?”
“뒷좌석에 타시요.”
“제가 사장님 같잖아요?”
“그게 서로 편할 겁니다. 길게 누워서도 갈 수 있고, 나도 옆에 사람이 타고가면 안정이 안되니까요.”
형운은 뒷문의 로크장치를 풀어주었다.
청이는 서툴게 문고리를 젖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누구나 쉽게 멋지게 여닫는 문이 청이의 서툰 손맛엔 익숙하지 못했다.
청이의 승차를 거부하듯, 문은 꽉 다문 채였다. 형운은 운전석에서 내려 돌아왔다. 청이가 만지길 겁내는 뒷문을 가볍게 열어젖혔다.
청이가 편안하게 자리잡을 때까지 밖에서 지켜보았다.
“구두도 벗고, 아주 안방에 앉듯이 털썩하게 앉으십시오. 긴장하면 더 피곤합니다.”
형운은 조심스럽게 문을 걸어잠그고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청이는 밀폐된 상자 속에 갇히는 듯 가슴에 깊이 금이 남았다.
곧 평온으로 메꾸어지긴 했어도, 그 불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구적인 홈
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청이는 고향에 가고 싶다고 욕망 때문에 꾹 참았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는 서울거리를 지나 고속도로를 찾아나섰다.
고속도로 주변의 공기와 아스팔트가 온통 회색빛이었다. 곧 어둠이 덮이고,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차가 수원을 지나도록, 형운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청이는 형운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엄청난 친절을 베푸는지 묻고 싶었지만 청이 나름대로 대답을 얻었다. 그것이 결코 맞는 답일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묻는다 해도 청이가 만족할 만한 대답은 얻기 어려웠다.
그냥 여행하고 싶어서.
이렇게 형운이가 대답해주길 원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었다.
청이는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앉은 작은 마을의 불빛을 보았다. 그곳에도 역시 청이가 부러워하는 평화가 있었다.
다시 태어나려고 애쓰는 인간의 억지도 없는 평화, 자연에 뒹구는 작은 돌멩
이처럼 풀 한 포기처럼 그대로의 평화가 그곳에 있어 보였다.
청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그 상대를 거부하는 여자로 첫 걸음마를 시작
했다.
그만큼 청이에겐 만들어친 평화가, 남의 말에 그렇게 보일 뿐인 평화만이 주어졌다.
불빛도 잠시였고 또다시 헤드라이트가 중앙분리대 위에 꽃힌 향나무 사이로 마주 반짝이는 고속도로만이 남았다.
어둠이 짙어지고, 시야가 정리되면서 형운은 편안한 자세로 핸들을 가볍게 잡았다. 왼손을 창가 손잡이 턱에 올려놓고, 어깨를 낮추고, 오른손을 핸들에 살짝 올려놓았다.
왼손은 오른쪽으로 심하게 세울 때 잡아줄 만한 위치에 놓아두었다:
평안할 만큼 형운은 청이한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시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별로 할 얘기가 없어서요.”
“지금부터 찾아가고 있는 고향 얘기라도 합시다.”
“저에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는 고향이에요.”
“준 게 없는 게 아니라, 받은 게 없다는 말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그거죠.”
형운은 마지막 짧은 한마디에서 청이의 본디 모습을 발견했다.
철없이 곱게 자랄 나이에 청이는 죄인처럼 인내해야 하는 재활원에서 살고 있었지만, 청이의 모습은 때묻지 않은 산나물 같았다.
형운은 풀섶에 앉은 고추잠자리를 구경 하듯, 그 풋풋한 한마디의 말을 소중하게 되씹었다.
다음엔 청이가 무슨 말이든지 걸어오길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천안을 지났다.
형운은 라디오를 켰다. 청이가 말을 걸어오길 기다리는 시간은 형운의 사고력과 앞으로 달려야 하는 방향표시를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형운은 뒤로 당기는 힘을 막으려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를 껐으면 좋겠어요.”
청이는 전혀 자신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형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라디오 스위치를 껐다.
다시 차의 엔진 소리 속에 두 사람이 갇혔다. 시야에 커다란 표지판이 들어왔다. 주유소, 포크와 나이프 그림이 하얗게 반사되어 구들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오산 휴게소로 빠져나갔다. 졸린 표정으로 종업원이 그들을 마주보았다.
종일 그들은 사람의 시선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 시간쯤엔 거의 반 수면상태였다.
그들에게 음식을 주문하기도 죄스러워졌다. 형운은 백원짜리 동전 스무 개 정도를 바꿔왔다.
형운은 동전을 끝없이 집어넣었다.
반환구로 굴러나오면 또 넣고, 또 나오면 다시 집어넣었다.
청이는 곁에서 보고 있다 못해서, 보턴을 눌렀다. 라면 컵과 물을 누르고, 다음엔 또 한 컵을 눌렀다.
커피 두 잔과 껌 한 통을 눌러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넓은 주차장 너머로 주유소가 보였다.
두어 대 멈추어둔 차가 보였지만, 그들은 차 안에서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차로 갈까요?”
“여기 좋아요.”
“벤치가 찹니다. 이 벤치가 나무가 아니라 시멘트라서 말입니다.”
“앉아 있으면 따스해져요.”
“그렇게만 살고 있읍니까?”
“제가요?”
“보는 사람들은 안타깝습니다. ”
“제가 누구를 안타깝게 만들고 괴롭혔다고 생각지 않는데요.”
“어서 듭시다. 라면 좋아하십니까?”
“몇 번 먹어봤어요.”
후루륵 소리를 서로 죽이며 차가운 시멘트 벤치에 앉아 라면을 먹었다.
“저 때문에 별 고생을 다 하시는가봐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
이제야 그 질문이 나왔다.
형운은 몇 발작 뒤로 물러났다. 이 말을 물고 덮칠 수는 없었다.
“청이란 시골뜨기가 첨벙대며 세상 사는 구경을 하시는 것도 즐거우실 거예요.”
“즐겁지 않습니다.”
“그럼 왜?”
“비로소 서른다섯에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자요?”
청이는 빤히 형운의 눈을 파고들었다.
형운의 흠없는 얼굴 속에서 상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갑자기 핑그르르 눈물이 돌았다.
벌레처럼 큰머리를 땅에 끌면서 열일곱 해나 살다 죽은 상수의 불행이 형운의 얼굴에 삭여 있었다.
형운도 마찬가지로 가엾은 남자였다.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절대로 혼자 있고 싶지 않지만, 아무도 남지 않은 텅 빈 주변을 돌아다보며 외롭다는 것을 절감했다.
“춥지 않습니까?”
“아뇨.”
“무리한 여행이 될는지도 모르겠군요.”
“이 세상에서 꼭 적당한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어요.”
그 뒤 그들은 다시 대화가 단절된 고요속으로 빠져내려갔다.
어깨 위에 내리는 밤이슬이 축축했다. 한기가 등을 타고 피곤한 몸으로 스며
들었다.
“자, 출발합시다. 앞길이 머니까요.”
“아무래도 상수아빠께서 쓸데없는 자선을 베풀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그게
고맙다기보다 무척 부담스러워 죽겠어요.”
“그런 얘긴 이제 그만 합시다. 우리가 갈 길은 남해에 도착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서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야 할 길이 남아 있읍니다. 벌써 후회하면 그 길이 더욱 멀게 느껴질 뿐입니다.”
다시 세상은 차의 엔진소리르 가득찼다. 청이는 의자의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채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앞쪽을 응시했다. 그가 한잠 자고 나면 남해에 도착할 거라고 말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 못 이루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꿈틀대는 재활원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밤엔 그들의 고통이 더욱 선명해지고, 대조적으로 청이의 건강한 잠이 더욱 두드러지곤 했다.
마치 그것이 죄악처럼 느껴지곤 했다.
특히 상수한테 받은 대칭적인 고통을 청이는 아직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상수는 밤낮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겠죠?”
“천국엔 그렇답디까?”
“인간에게 불편했던 모든 조건을 빼낸 곳이 천국이니까요.”
“허허허.”
그의 웃음소리가 도무지 천국의 설명하곤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청이는
금방 그가 몹시 피로하다는 걸 직감했다. 억지로 버티고 있는 체력의 한계가 눈에 보였다.
“차를 좀 세워주세요. 몹시 거북해요.”
다급하게 창문을 열 듯이 행동으로 보였다.
고속도로변, 허리띠 같은 좁은 길에 차를 세웠다.
고속으로 달리던 차가 급정거했다. 아직도 엔진은 푸드득거리고, 청이의 귀엔 바람소리가 철사고리를 흔드는 소리처럼 이어졌다. 땅을 맨발로 디뎌보고 다리를 한두 번 굽혔다 폈다 운동해보았다.
아무래도 이 여행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고향의 할머니도 아직 뵈러갈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불쑥 낯선 사내가 포는 차에 실려서 내려온 손녀를 반길 할머니가 아니었다. 이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의욕을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결과가 될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끔 가물거리는 트럭의 불빛이 지나가고 그 소리는 소용돌이처럼 돌아가면서 멀어졌다.
고속도로 위에 있는 모든 재앙을 휘감아가지고 사라져가는 것 같은 흡입력을 느끼게 했다.
초라한 청이의 스물한 해 동안의 인생마저도 그 소용돌이치는 트럭의 소음속으로 빨려드는 것이었다.
형운은 운전석에 앉은 채로 핸들에 이마를 대고 잠시 수면을 취했다. 앞으로
도 대여섯 시간 달려야 한다는 중압감이 벌써부터 그를 압박했다. 조금 눈을 붙이고 쉬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나른한 육체가 깊은 잠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커다란 폭음을 들었다.
트럭 한 대가 맞은편에서 무서운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고, 찰나에 충돌할 듯한 위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핸들을 힘껏 꺾어서 트럭을 피하며 비명을 질렀다. 꿈속이어서 밖으로 목소리가 터져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까지 머리로 생각하면서 충돌하였다.
공중으로 치솟는 그의 차와 도로 중앙분리대의 콘크리트 벽을 할퀴고 저만큼 미끄러져 가는 트럭을 보았다.
멋지고 그럴 듯한 창면을 꿈에서 보는 게 영화보는 것보다 즐겁다고까지 혼자 생각했다.
“왜 그러세요. 상수아빠.”
그는 이마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멋적게 웃었다.
“꿈을 꾸었군. 예전엔 꿈도 없었는데, 상수가 떠나고부터는 꿈을 여러번 꾸었지요. 잠을 지나치게 자는 모양입니다. 수면시간이 길어서 숙련하지 못하는 증거일 거요.”
“무서운 꿈을 꾸신 거 아니에요? 마치 지구가 상수아빠를 향해서 칼을 던지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비명이었어요.”
“꿈은 곧 잊어버립니다. 아무 기억도 남기지 않아요. 난 핸들에 기대고 잠시 눈을 감고 쉬던 상태에서 깨어난 것뿐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요?”
“약속을 해주신다면, 부탁이 있는데요. ”
“난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드리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오.”
“서울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
“어째서요? 피곤해서? 아니면 내가 즉흥적으로 단행한 게 기분나쁜 겁니까?”
“그. 어느 쪽도 아니에요.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어떤 결심을 할 수도 있잖아요?”
청이는 차에 몸을 올렸다. 그의 대답을 당장 듣지 않더라도 청이를 억지로 끌고 남해로 달려갈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쉬이 잊어버렸다. 청이의 머릿속에 살아 있듯 생생하던 재활원의 죽은 영혼들이 리무버로. 지운 듯이 잊혀졌다.
고통받던 그들의 불행조차도 낡아버리고 청이는 다만 오늘 살아 있는 사실에 눈을 줄 뿐이었다.
청이는 닷새의 휴가를 얻었다. 이틀을 숙소에서 뒹굴며 소일했다.
거울을 보며 가발도 써보고 웬 여자가 투신자살하던 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났던 청년도 생각해보고, 상수아빠 형운도 떠올려보았다.
온몸이 등나무 가지처럼 비비 꼬이기만 하는 아이들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모두가 어두운 그늘뿐이었다.
청이는 그동안 모아둔 돈을 은행에 저금했다.
저금통장을 들여다보며 문득 앙상한 볼에 슬픔 같은 웃음으로 청이를 전송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이는 무턱 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고속이 아니라도 남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면 충분했다.
연결되는 버스가 끊어지고, 청이는 알지 못하는 도시에서 하루를 묵었다.
낯선 여관 방에서도 푹 잠을 자두었다. 할머니와 헤어지던 날부터 청이는 마구 뒹굴며 세상을 걸었다. 높은 베개도 얇은 포대기도 무거운 이불도, 냄새나는 변소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백학처럼 깨끗하게 가지고 살 수 있기를 소원했다.
아직 산에 햇빛이 파고들기 전, 청이는 할머니를 맡기고 온 양로원을 찾아 산길을 기어올랐다.
할머니와 헤어지던 소나무 아래에서 한참 서서 눈물을 닦았다.
피란 무엇이기에 생각만 하여도 이렇게 가슴이 저려오는 것일까.˙
청이는 두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명치 위 앙상한 가슴뼈 위로 아픔이 스며 나왔다.
얼얼한 가슴의 떨림을 가라앉히곤 청이는 다시 산을 올랐다.
양로원으로 오르는 오솔길엔 잔디가 기운좋게 자랐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지 아예 지난 여름의 무성했던 풀잎에 그만 오솔길은 혼적만 남았을 뿐, 그저 올라가는 방향으로 발을 옮겨놓았다.
다홍빛으로 붉은 새마을 기와가 햇빛과 바람에 낡아, 가라앉을 듯 나지막한 양로원이 엉성한 마당 위에 뎅그머니 놓였다.
울컥 또다시 아픔이 올라왔다. 단걸음에 양로원 마당으로 달려갔다. 지금 막 할머니가 신음하며 운명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청이를 이 시간에 이곳에 오도록 불렀는지도 몰랐다.
급한 마음에 왈칵 아무 방문이나 열어젖혔다. 이리저리 누워 있거나 앉아서 졸고 있는 노인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완만한 행동선이 다 스러져가는 생
명의 잔영 같았다.
휘둘러보았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달래고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퀭한 눈빛이 청이의 시선과 닿기 전에 꺾였다.
“박순네 할머님 안 계세요?” :
“박 순네가 누군가.”
앵무새처럼 반문하는 메마른 목소리가 방안 쪽에서 들려왔다.
할아버지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할머니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늙으면 성별도 사그러지는 모양이었다.
청이는 방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단단한 장판바닥이 발바닥으로 전해왔다.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집, 할머니와 함께 살던 온돌의 기억이 한꺼번에 잠에서 깨어난 듯 숨쉬며 되살아났다.
잃어버린 엄마가 그리워서 눈물을 홀리며 돌아누워 있으려면, 할머니의 거친 손바닥이 볼에 와닿곤 했다. 막대같이 서걱대는 할머니의 손바닥에서 청이는 따뜻한 체온을 전해받으며 감사했다.
할머니는 한시도 쉬는 틈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던 할머니가 쓰레기처럼 방구석에 던져져 있다니.
“누굴 찾소?”
바로 청이의 발치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가 목쉰 소리로 물었다.
“박 순네 할머니요. 혹시 이방 말고 다른 방이 있나요?”
“아, 이제야 알겠구만. 그 노인네가 아닌가? 노망든 할망구 말이요.”
“그런 분들은 어느 방에 계시죠?”
“뒷방에 가보쇼.”
청이는 잠시 아득하였다. 눈에도 귀에도 솜방석으로 막아놓은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할 자신이 없는 청이는 순간적으로 할머니를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드는 환각을 보았다.
베니어판으로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벽으로 보아, 이곳은 방이 아니라 창고였다. 밖으로 잠겨진 문에도 유리창 하나 뚫어놓지 않았다.
감금상태로 수용되어 있던 할머니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모시고 나왔다.
그들을 미워하지도 말자고 마음먹었다. 다 죽어가는 노구가 쓰레기통 속에 던져진 소뼈다귀처럼 쓸모없다면, 어면 대접도 무효라는 걸 쉽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고속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청이의 손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다.
할머니는 실어증과 영양실조에 걸려 살아 있는 송장처럼 보였다. 곁에 앉은 승객이 힐끔대며 청이네를 쳐다보았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던지기도 하면서 조금씩조금씩 부자유스럽게 속박의 끈을 조였다.
나중엔 청이는 고개는커녕 시선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할머니는 죽은 듯이 늘어져서 잠이 들고, 깨어 있을 때도 그랬지만 주위의 시선에 전혀 관심 없었다.
할머니는 이미 천국에 다달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아픔을 씻어내는 명약일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청이는 조금씩 반듯한 집들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서울에 떨어지게 되어서, 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할머니의 건강으로 보아선 시골 고향 근처에 남아 있는 게 좋을 거란 생각도 해보았다.
할머니가 회복되리란 건 희망하지도 않았다. 체력도 달렸지만 그보다 먼저 정신력이 파열된 상태였다. 이렁저렁 청이는 세월을 보내면서 할머니의 종말을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담요 두 장을 덮고 따스한 온돌에 누워 할머니는 죽은 듯이 며칠을 계속해서 잠을 잤다. 팔십일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젠 땅속으로 잦아드는 종말을 곧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이는 할머니와의 흐름이 완전히 단절된 쯤에 앉아서 몇 밤을 꼬박 새웠다. 미음물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죽어버리기로 결정한, 어떻게 보면 의지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짐승이든 식물이든 의식 없는 환자, 청이는 그들과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비록 흐름이 단절한 의식에까지도 청이는 손을 들이밀어보았다.
할머니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려고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러나 워낙 체력이
기진한 탓인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들어 청이에게 닿도록 뻗고 싶었으나 역시 아무 행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움직이는 할머니의 눈꺼풀을 보았다. 아주 작은 반응이어서 놓치기 쉬웠다.
청이는 손가락 끝으로 할머니의 눈꺼풀을 올려주었다.
방향 없는 시선이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으리라던 예감을 덮고 역시 이미 끝나버린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청이가 불행한 탄생을 극복하고 그 불행위에 즐거움으로 춤을 추듯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런데 청이는 받은 용기조차도 할머니한테 되돌려줄 수 없었다.
그러기가 보름 정도 계속되었다. 가끔 의식이 돌아오긴 했지만 바람에 쓰려진 나무가 풍향이 바뀌면서 잠깐 곧바로 서게 되는 순간과 같은 것이었다.
하루에 두 번 맞는 죽은 시계 같은 것이었다. 청이는 재활원에서 숙식하던 생활 사이클을 바꾸었다. 단 한 분밖에 없는 할머니를 여의는 순간, 청이는 모든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재활원에서 일하는 것도 할머니의 희생을 대불받기 위한 봉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뼈와 가죽이 따로 밀려다니는 가엾은 모습으로 자리에 누워있다. 머리를 감겨드려도, 얼굴을 씻겨드려도 무감각이었다.
점점 끝마침 점으로 다가갔다.
순간순간 그 위기감이 더욱 커감을 체감했다. 이젠 설마 할머니의 콧김에 호흡이 사라진다 해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호흡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목숨은 칡뿌리처럼 질긴 것이어서 좀
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청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어서 빨리 할머니의 숨을 덮고 있는 고통을 거두어가달라고 기도했다. 그것이곧 할머니의 임종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를 위한 마지막 기도가 이런 것이 되었고, 상수를 위한 기도도 그랬다. 청이의 기도는 하느님이 들어주기 어려운 기도가 통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 하느님 이 보기에도 비극이었다. 그래서 그는 금방 응답을 해주지 않았다.
생명은 생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생명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동안만 가치가 있다. 주인은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귀찮은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자기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어느 누구도 비록 그 가치없는 생명 일지라도 자를 수 없다.
생명과 영혼을 동일시한다면 영혼은 지워지지 않는 것, 지울 수도 없는 것, 따라서 그 어느 자리도 차지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영혼이 어떤 자리에 위치하든,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안타까와 할 필요가 없다.
청이는 이제 좀 졸아들던 마음의 줄이 이완되면서 할머니와의 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미이라 같은 할머니의 메마른 살갗이 낙엽의 잔해처럼 방구석으로 밀려가 돌돌 말린 상태로 누워 있었다.
고통받는 육체쯤이 야 한 귀퉁이가 닳아빠지는 구두 뒤꿈치 정도가 될 것 이다.
청이는 할머니의 곁에 가슴을 밀착시키고 누웠다.
한여름 날, 마당에 놓인 평상에 배를 깔고 엎드린 것처럼, 단단한 물체의 맛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단단한 할머니의 고목의 밑둥이었다. 팔십 일 년 동안 버티어온 나무 밑둥이 뻥하게 구멍이 난 채로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앙상한 어깨뼈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죽죽 밀리는 두터운 표피, 이것이 옛날 청이를 등에 업어 키우며 땀을 홀리던 어깨였던가. 눈을 들면 작은 아이 청이의 시야엔 아득하게 멀어 안개로 자욱히 덮혔던 넓은 밭 사이 길이 있었고, 그. 길이 끝나는 곳쯤엔 대추나무가 있었다.
할머니의 어깨는 늘 땀에 젖어 축축했다. 청이는 할머니의 어깨에서 자랐다.
그때 할머니의 어깨는 든든했고 기운이 넘쳤다. 그러던 어깨가 지금 사그러져가는 것이었다. 산화된 전쟁터의 탱크처럼 만지기만 해도 파스스 땅으로 부서져내릴 것 같다.
청이는 할머니의 어깨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들었다.
툭툭 트우―욱·.
잠시 멈추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투둑특.
이렇게 꺼질 듯 이어지는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청이는 문득문득 살아 있는 인간과 죽어 있는 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할머니의 영혼을 보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경련이 일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꺼풀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경련이 아픔의 반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 없이 마음으로 통할 수 있다던 자신도 모두 없어져버렸다. 그것은 청이의 환각일 뿐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이만분의 일도 헤아릴 수 없음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고통스럽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청이는 조금씩 단단한 나무 밑둥이 차가운 시멘트에서 쇳덩어리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잠속에서 깨달았다.
청이가 눈을 떴을 때, 할머니는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숨져 있었다.
빳빳한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밀려갔다.
청이는 벌린 입을 두 손으로 힘껏 모았다. 굳어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끝내 청이는 할머니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걸 슬퍼했다. 그것은 청이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찌꺼기를 남기는 것이고, 다시는 못 만날 사람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고.
청이는 할머니를 화창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던 날 처음으로 지독하게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넓고 살기 힘든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시시한 외로움이 아니라, 청이가 언제든지 달려가서 손을 마주잡고 울면 체온을 나누어주며 영원한 고향으로 있어주리라고 믿었던 커다란 둥지가 하루 아침에 바람에 날아가버렸다는 외로움이었다.
한번도 둥지로 돌아가본 적이 없어도, 막상 그 둥지가 없어져버렸다는 것은
충격척인 고통이었다.
청이는 허술한 집 대문 앞, 할머니가 누워 있던 방의 창문이 보이는 곳에 쪼그리고 앉았다. 쫓겨난 아이같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
그저 육체가 타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 자체일까.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속에 살아남는 것처럼 그. 기운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믿는 청이에게 커다란 의문을 남겼다.
할머니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청이의 영혼과 대화할 수 있어야 했다.
적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임을 벌린 채로 세상에 육신을 남겨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좁은 골목길에 사는 몇 집의 이웃들이 청이를 위로하느라고 자기집에 가서 따끈한 밥을 같이 먹자고 권했다.
청이는 사양했다.
심학규가 용궁에서 만난 딸 청이는 그의 환각 속의 청이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얼마나 마음 아파했으면 생시처럼 생생하게 나타난 것이었을까.
일종의 정신통일.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청이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앰불런스에 실러들어와 끝내 장의차로 실려나간 할머니가 맵시있는 한복에 하얀 고무신올 신고 바쁘게 찾아들어오길 고대했다.
어두워져도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교통이 복잡해서 일까.
청이는 실없이 혼자서 피식 웃었다.
아픔을 구분해보면, 상수의 죽음과 할머니의 죽음 어느 것이 더 아픈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똑같지, 죽어버린 사람들이야 할머니든 남의 아이든 이 세상에서 사라지긴 마찬가지지.
청이 하고의 끈을 풀어버리고 띠나버린 사람들인데.
끈이라¡
청이는 대문에 드리워져 있는 끈을 보았다. 이게 무슨 끈인가. 안으로 연락하는 초인종도 아니었다.
연을 날리다가 끊어져 끈만 남아 이집 대문에 걸려 있는 무명실인가.
날아가버린 연을 영혼이라 하자. 어 딘가 날아가다가 떨어져버 리지. 눈앞에서 사라질 때, 그때는 어딘가로 한없이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떨어져버린 뒤, 하루도 그 연을 볼 수 없게 되면 연은 더 멀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갔다고 생각하겠지.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고 알 수 없논 것을 신비의 선반 위로 올려두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영혼이 연처럼 파괴되어 흩어져버렸는지 누가 아나.
기계가 모든 기능의 조화를 잃고 쓸데없는 기계로 푸대접 받다가 버림당한다.
인간도 그와 같다.
모든 기능이 제구실을 할 때 기계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 조화가 깨진 뒤에 영혼과 같은 구실을 하던 기능의 가치가 작용할 것인가.
인간의 사고능력을 기계의 기능으로 친다면 육체의 쇠잔과 동시에 그 영혼이 마비된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영혼이 이 대문 앞에서 나를 위로했어야 한다.
청이는 텅팅 빈 세상에, 이젠 영혼이 살아 있을 거란 희망조차 잃어버렸다.
슬플 것도 없었다.
속대를 키우는 떡 잎은 언제나 더럽고 보기싫은 법이니까.
재활원에 사는 아이들의 얼굴이 떡잎인가.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키우는 더러운 떡잎인가.
종일 대문 앞에 앉아 청이는 이것저것 사념에 끌려다녔다. 그렇게 앉아 있기도 고된 노동에 비할 만큼 피곤했다.
그 자리에 쓰러지도록 아무도 청이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청이도 새벽녘 겨우 잠이 깨어났지만 온몸은 차가운 땅으로 파묻힐 듯 무거웠다. 히끄무레한 새벽빛에 움직이는 개미떼들이 보였다. 시멘트로 단단하게 덮어놓은 틈으로 흙을 파내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그들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그들이 그 긴 행렬을 지어 걸어가고 있는 그곳엔 무엇이 있는 것인가.
살아야 한다는 의욕이 점점 밝아오는 어둠과 햇빛 사이로 빗살같이 뻗었다.
청이는 할머니와의 행복한 만남을 위해서 궂은 일을 일부러 맡아 해왔다.
벌레만도 못한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헤벌어진 입에서 흘러내리는 다액을
따스한 손바닥으로 닦아주었다.
그 아이들이 죽어갈 때의 맥없음을 청이는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했다.
그래서 그 아픔이 할머니의 가슴아픔을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하고 염원했다.
아이들의 부자유스런 몸짓에 팔을 빌려주면서, 청이는 할머니의 굽으신 허리
의 통증이 없어지라고 기원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대신 받은 것 없이 할머니는 한 달을 고목처럼 누워서 고통을 온통 안으로만 받고 세상을 떴다.
안으로 안으로 삼켜버린 고통이 불덩이같이 견디기 어려운 아리움으로 할머니의 팔순 넘은 육신을 굵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청이는 가슴이 얼음 속에 잠긴 듯 저려왔다.
청이가 대신 받은 고통과 아픔으로 할머니의 평강이 약속된다고 누가 말한 적이 없었지만, 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할머니가 천국을 얻을 수 있었을 거란 막연한 마음으로 바뀌긴 했어도 청이는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개미의 움직임을 구경하며 굳게 다리의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다시는 그 어둡고 침침한 재활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청이는 방에 닿은 담벽을 기대어 등으로 밀어가며 겨우 문턱을 넘어들어갔다.
할머니의 차가운 몸을 뉘었던 요위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나선 며칠 동안 잠에 떨어졌다.
꿈도 없이 죽어서 시간을 지냈다. 할머니를 잃은 슬픔도 잠속엔 존재하지 않
았다.
날짜를 가늠할 수 없는 어느 날, 오후쯤에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귀가 열리고, 방향을 잡았다.
눈을 뜨고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들려올 방문객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계십니까?”
그러나 청이의 목은 아직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눈썹만 약간 위로 올렸을 뿐이었다.
“며칠째죠? 흑시 무슨 사고가 난 게 아닙니까?”
“너무 고단하면 이럴 수도 있을 거예요. 젊은 사람 혼자서 이렇게 큰일을 치렀으니까요.”
청이는 주인아줌마와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주고받는 얘기를 들었다.
귀에 선 남자의 목소리가 누구일까 하는 의문보다, 그게 누구이든 청이는 반
겨 맞고 싶었다.
문을 열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팔을 뻗을 수가 없었다. 어깨에서부터
팔꿈치 까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문이 자동문처럼 열렸다.
누군가 청이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열어주는 것 같았다.
햇빛을 등지곤 주인아줌마의 주홍빛 모습이 문 사이에 나타났다.
눈부신 듯 청이는 눈을 도로 감았다.
“잠을 덜 잤는 걸 내가 깨웠나?”
청이는 그렇지 않다고 손을 흔들다가 아니라고 대답을 했어야 했다.
“쯧쯧 지쳤구료. 이러다간 이대로 쓰러지겠네. 뭘 좀 먹고 자도 자야지. 안되겠어요. 누굴 만날 수 없겠는데요.”
“아니죠. 병원에 입원시켜서 빨리 회복되도록 해야죠. 좀 도와주시겠읍니까?
밖에 차가 있으니 거기까지만 함께 태웠으면 좋겠군요.”
여러번 그 목소리를 반복해 듣고 나서야 그게 형운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형운의 등에 업혀서 병원 침대로 옮겨지도록 청이는 나른한 솜뭉치 위에 던져진 얼음조각이었다.
혈관 속으로 떨어져 흐르는 포도당 주사액으로 소생된다고 믿지 않으려고, 청이는 의식을 똑바로 세웠다. 그래도 자꾸만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고, 또 가라앉았다.
눈을 뜰 때마다 형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꼬박 그는 청이의 침대 옆에서 이틀 밤낮을 지켜주었다.
“바쁘실 텐데, 병원에 오래 머무르시면 어떻게 해요?”
“그런 걱정 말고, 인제 좀 정신이 드시요? 이렇게 허약한 몸으로 지금까지 너무나 힘에 겨운 일을 해왔다는 얘기였읍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병원에 입원하면 안되는데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집니다.”
“안돼요.”
첨이는 웃몸을 일으켰다. 혈관에 꽂았던 주사바늘이 빠져나갔다.
“당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니까. 말하자면 상수가 남긴 내 빚인 셈이지요.”
“천만에 말씀이지요. 이제 모든 관계가 끝났어요. 지는 상수뿐만 아니라 벌레처럼 살아가야 하는 빠진 인간들을 도와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것뿐이죠. 고양이한테 잡혀먹히는 쥐가 가엾다고 생각하는 모순이랄까요.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오래 살아라 하고 열 명을 도와준 것도 따지면 죄가 되겠죠.”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 때문이 아니겠읍니까?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악인이라고 그 거울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 앞에 나타난 여인입니다.”
“시인처럼 달콤한 말씀을 하시네요.”
청이는 병원 옷을 벗었다.
“나가주세요.”
형운은 청이가 흥분할수록 역비례로 침착해졌다. 돌아선 채로 청이의 원피스를 전했다. 그는 청이보다 어른이었고, 청이가 처음으로 느끼는 남성이었다.
문득 할머니한테 돌려드리지 못한 대가를 자기가 받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병원이 싫으면 퇴원합시다. 내 마음대로 입원시켜서 미안합니다.”
“잘못했으면 그 방에서 죽었을지도 모르죠.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음 사이는 아주 근접한 것이었어요. 살아 있는 듯한데 죽어 있더라구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나 형운의 말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이란 의미를 실감할 수 없었다. 청이는 계속 그릇 밖으로 몰려나가는 비누거품이었다.
그가 초대하는 그 어느 자리에서도 청이는 비누거품이 되었다. 밖으로만 흘러
넘치는 존재임을 더욱 뚜렷이 확인할 뿐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찾을 때까지 재활원에 있겠어요. 그게 마음 편하겠어요.”
“그건 위선이오. 아니면 살아가는 소극적 도피구란 말입니다.”
“그래요. 위선이나, 도피가 이첸 몸에 배었어요. 가짜 왕자 노릇을 하다 보면 진짜 왕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 연극배우 같은 거죠. 전 이대로 있을래요. 그 가엾은 아이들을 도우면서.”
“나도 그 아이들만큼 정신적으로 장애자입니다. 나도 좀 도와주십시오.”
“농담 마세요. 상수아빠는 제가 만난 분 중에서 가장 강한 분이신데요. 소유한 신체적인 조건으로나, 재산의 크기로나, 이제 상수까지 이 세상에서 없어져주었으니 말이죠.”
“아닙니다. 그 세 가지가 모두 아닙니다. 나는 당신처럼 강한 여인이 필요합니다 ”
“필요하다뇨?”
“내 아내가 되어주십시오. 상수의 정신적인 엄마가 되어주셨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상수가 이 세상을 떠나버린 뒤로 정신적인 엄마 노릇도 끝나버렸죠.”
“아닙니다. 절대 끝나버릴 수 없읍니다. 처음엔 나도 상수란 내 어깨의 십자가가 떨어져나간 뒤에, 이제부터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나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읍니다. 상수의 존재도 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죽었으나 마찬가지로 나를 묶어놓는 것이었읍니다. 정신적인 형별이라 할까요?”
“싫어요. 어떻게 저를 설득하신다 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퇴원하는 길에 형운의 차는 자꾸만 외딴 곳으로 달렸다.
서울에서 멀어갈수록 형운은 청이의 적이 되었다. 형운은 청이의 도움이 필요한 약자가 아니었다. 약한 자, 못난 자를 더욱 약하게, 못나게 두드러지도록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는 고통을 만드는 쪽에 서 있지, 고통을 당하는 쪽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청이는 형운의 위장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전체로 확대되어 청이를 정면으로 압도시켰다.
그것은 형운의 넓은 가슴일 수도 있었다.
청이는 막대한 압력에 저항했다.
차안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고, 진공 상태가 되듯 청이는 질식할 것 같았
다. 차체는 출렁였다.
어디로인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듯하더니 차는 가벼운 충격으로 볼처럼 튕기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내렸다.
청이는 그의 가슴을 힘껏 떠밀고 있는 힘의 방향에 착각이 왔다.
아래쪽에서 위로 향한 방향인지, 위에서 아래쪽으로 향한 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청이는 형운의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것도 잠깐 동안이었다.
골짜기에 틀어박힌 뒤,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시간도, 호흡도, 소음도 모조리 끊어졌다.
감각조차 굳어졌다.
청이는 조금씩 눈꺼풀을 움직여보았다. 뿌우연 유리 밖으로 커다란 물체가 보였다.
조금씩 차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형운은 의자에 고개를 파묻고 기울어진 채였다. 청이는 그의 고개를 들어올리려고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차체는 배가 혼들리는 것처럼 기우뚱거렸다. 순간, 이곳은 물속이란 느낌이 들었다.
물이 차안으로 새들어 왔다.
물속에 가라앉는 차체 속에 갇혔다.
청이는 형운에게 몸을 던지듯이 접근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몸의 균형이라든가 행동의 방향이 생각대로 가지 않았다. 배처럼 물에 떠 있는 차체가 떠내려가면서 아래로 가라앉아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힘과 지혜를 합쳐서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러나 형운은 그 충격에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청이는 무의식 중에 그를 살해할지도 알 수 없었다.
자동차가 물속에 곤두박질된 이 순간 이전 몇 분 사이의 기억이 절벽 암흑이었다. 벽지라고 해야 될까.
완전한 공백 기간이 블랙홀처럼 청이를 안타깝게 했다.
형운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자기자신이 가해자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차안의 수위는 이미 허리를 넘고, 가슴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물위에 떠오를 수 있을까.
청이는 그만한 자신도 없었다. 생매장되어버렸다는 짐승들, 애완동물을 연상
했다.
물 밖으로 헤엄쳐 나갈 자신이 있든 없든 갇힌 상태에서는 벗어나고 싶었다.
청이는 차문을 밀어내고 열었다. 그러나 막대한 물의 압력으로 차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차창 유리를 내리고 나갈 궁리를 해보았지만 쏟아져들어올 물이 무서워서 유리를 내릴 수 없었다.
이대로 기다리나.
청이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스물한 해를 살아오면서 자기자신을 위해서 남을 해롭힌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스승을 밀고하는 죄를 지었듯이 구태여 청이를 사랑하고 싶다는 형운을 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어떤 힘이 마련해놓은 청이의 스케줄처럼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이가 형운을 해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청이가 괴로와하는 이 세상의 약하고 상처받은 모든 것을 청이한테서 제거시켜주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미 쓰여진 드라마 각본대로 청이는 움직였을 뿐이었다.
청이는 체념했다. 살인자로 어두운 멍에를 쓰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좋을 것이라는 청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순간적으로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죽음으로 전환되었지만, 청이가 지금까지 본 죽음의 형태로 보아선 꽤 행복한 방식에 낀다고 느꼈다.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가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팔순이 넘어선 노망한 채 손녀의 눈조차 거부했던 할머니의 임종보다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형운의 죽음은 역시 벌레처럼 마룻바닥을 기어다니다가 종래엔 땅속우로 파묻히고 만 상수의 삶보다 행복한 방법이었다.
가슴 위로, 목으로 수위는 코에까지 올라왔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집 채를 연상했다.
물속에 잠긴 이 차체는 어디론가 물결을 따라서 내려가고 있었다.
형운을 보았다. 거의 코를 넘어 그의 머리는 물속에 잠겨버린 상태였다.
청이는 천정 위에 머리를 올리고 최대한으로 시간을 연장했다.
그제야 청이의 머리를 스쳐가는 단 한 가지 지혜가 있었다.
차창을 마주 열고, 물살을 통과시켜보면 물에 흽쓸려 밖으로 나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더듬어서 유리를 내렸다. 나머지 한쪽 문을 열기도 전에 차창 압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청이는 퍽퍽거리며 물살을 막았지만 그 힘은 청이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거대한 힘이었다.
다음엔 아주 짧은 동안에 차체의 방향이 물살에 의해서 돌아가더니, 떠내려갔다.
여행이었다. 심학규가 수중 궁궐로 가는 거북의 잔등에서 겪은 여행과 같았다.
용궁에 가는 길인가.
청이는 얼굴위를 한 꺼풀씩 덮었다가 사라지는 물살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다.
청이에겐 이미 용궁은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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