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더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문학과 사회』1999년 가을호)
최근의 정보이론들은 전달 과정에서 대화 상대방간에 주고 받는 정보가 동일하지 않다는 근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수신자는 송신자가 보내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가능한 경우는 송신자의 코드와 수신자의 코드가 정확히 일치할 때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상황은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 송신자와 수신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진 체험, 독서량, 언어에 대한 경험은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자가전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일이나 읽은 책을 기억 속에 떠올릴 때도 시간적인 경과로 인한 코드의 차이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18세에 읽은 「국화 옆에서」와 40대에 읽은 「국화 옆에서」가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코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화 과정에서 이해란 상대방의 코드를 자신의 코드로 번역해낸 결과로 얻어진다. 이 과정에서 정보는 질적으로 변화되며 새로운 정보는 자아의 구조를 변경시키고 사물과 세계를 해석하는 새로운 코드로 작용한다. 새로운 정보와 기존의 코드가 합쳐지면서 새로운 전체를 형성, 기존의 코드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을 그가 가진 언어능력과 문학능력에 의해 정의한다면 새로운 정보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우리의 자아는 끊임없이 재구조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는 복숭아나무라는 텍스트에 대한 시인의 해석 과정을 담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복숭아나무라는 낯선 텍스트를 접한다. 복숭아나무의 코드와 시인의 코드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시인은 복숭아나무가 너무나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멀리 지나치기만 한다. 둘 사이의 만남이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시인은 복숭아나무의 코드에 접근하게 된다. 즉 복숭아나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겹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복숭아나무의 코드를 시인의 코드로 번역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복숭아나무의 마음을 읽은 시인에게 그늘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그 그늘 속에 들어가 복숭아나무의 외로움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된다. 이 번역과정에서 시인은 복숭아나무의 세계를 이해하고 자아의 질적인 재구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시에서 복숭아나무는 어떤 사람과 비유되어 있다. 그것은 첫 행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복숭아나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물이나 복숭아나무가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음을 가진 복숭아나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사람에 비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숭아나무는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어떤 사람 이야기가 된다. 시인은 복숭아나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어떤 사람 곁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한가지 색깔이 아닌 흰색과 분홍색, 두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아마도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 즉 나무 그늘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변덕스러움과 까다로움을 지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그 사람과 멀리 지나치기만 했을 뿐 어떤 마음의 교류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시인은 복숭아나무의 눈부신 빛깔 때문에 그 나무가 흰색과 분홍색 두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수천의 색깔들이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게 된다. 두 가지 색깔을 가진 것으로 본 것은 시인의 기존의 코드에 의한 해석이다. 복숭아나무의 눈부신 빛깔을 보는 순간 시인의 코드는 질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복숭아나무의 코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복숭아나무가 수천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피우고 싶은 빛깔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을 낳는다. 둘 사이의 대화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편견 때문에 그 마음을 읽는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멀기만 했던 그 사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흩어진 꽃잎들", "저녁이 오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의 인물은 청춘을 다 보낸 노년의 인물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그 그늘 아래 쉬면서 그에게 다가오는 어둠을 본다. 복숭아나무의 세계를 의미하는 그늘은 이제 두 코드, 즉 시인과 복숭아나무로 형상화된 인물 사이의 완벽한 이해와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나희덕의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를 읽으면서 정현종의 「노시인들, 그리고 뮤즈인 어머니 말씀」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김광섭 시인의 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기념하는 시제(詩祭)에서 즉흥적으로 쓴 시로 알려진 이 시는 당시 30대 젊은 시인 정현종과 70대 노시인의 관계를 상상해보게 한다. 아마도 필자의 짐작으로 그 당시 정현종 시인이라면 평소에 김광섭 시인을 선배시인 정도로 생각했지 시인으로서 존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제에서 정현종은 노시인에 감격하여 즉흥시를 쓰게 된다. 이 시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라는 감탄사가 붙은 구절이다
『고통의 축제』라는 시집을 낼 당시 젊은 정현종 입장에서 생은 그야말로 고통스런 축제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절망감 때문에 시를 썼고 그러던 중 우연히 김광섭 시인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70이 되기까지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을 보고 그 나이까지 절망적인 세상을 바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에 시인은 놀라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그들이 시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용기가 아닌가. 이 세상에 노인들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삶에 절망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현종이 김광섭 시인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에 대한 깨달음과 연민, 그리고 노시인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설득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고 한다. 앞에서 본 부모의 엄격한 얼굴보다 쓸쓸한 뒷모습을 발견할 때 인간적 성숙이 이루어진다. 부모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내 세계를 넓혀 가는 것이다. 부모뿐이겠는가?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고 시가 그러하다. 시는 이해하려고 해야지 비판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내 코드)를 고집하고 시가 나에게 다가오게 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사물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들에게 가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미성숙한 어린애일 뿐이다. 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사랑을 담고 있는 시이다. 가자,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유재천(현대시학, 1999년 10월호, 내가 읽은 이 달의 작품)
■ 프로필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김수영문학상 수상
현재 '시힘' 동인
■ 작가 이야기
뿌리로부터 길어올려진 따뜻한 교감
나희덕 시인은 첫 시집 '뿌리에게'에선 전교조 탈퇴 서약서를 둘러싸고 벌이던 갈등과 양심적 고뇌를 시로 육화(肉化)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이 시집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분위기는 사회적 모순과 한심한 교육 현실에 대한 죄의식과 분노였다. 그 내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시인은 "깎아도 깎아도 가벼워지지 않는 형벌"(「손톱」)이라 부르짖는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서부터 시인은 무표정하고 덤덤한 일상 속에서 삶의 쓸슬함과 고통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길어 올리기 시작한다. 커다란 시적 변화를 감행한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시집에서 하루 일과가 아침과 저녁이란 시간대에 따라 이중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점은 주목에 값한다. 신예 평론가 허정의 예리한 지적처럼 혼돈과 분열을 겪는 아침의 시간대와 안정감과 자아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저녁의 시간대, 이것은 근본적으로 직장 여성과 어머니라는 그녀가 처한 환경의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여기서 시인은 저녁의 시간대를 지향하는데, 그 선택은 해뜬 후에 비웠던 모성의 자리를 채우는 부단한 움직임을 상징한다. "이제 나 종일 밭을 갈다가/집에 돌아오면 문득 몰매기인 나를 보네./젖무덤 아래 울고 있는 아기를 보네"('몰매기를 기억함'). 해가 뜬 시간이 아기와 가정을 떠나는 불안의 시간이라면, 어둠이 깔려 외부와 차단되는 황혼녘은 안정과 평안의 시간일 터이다.
세 번째 시집 <그 곳이 멀지 않다>의 해설을 쓴 평론가 황연산은 나희덕의 시에 잘 어울리는 꼬리표 하나를 달아 주었다. '단정한 기억'! 대상에 대한 따뜻한 응시와 교감이 기억이라는 집 속에 정갈하게 담겨져 있는 그의 시세계를 잘 요약한 말이다. 그녀는 벗어 놓은 스타킹을 하루 동안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고 표현한 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 놓은 욕망의/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며 삶의 실천과 욕망의 건겅한 외화(外化)만이 사물에 그 기억의 날을 세운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저녁이란 시간대는 삶을 반추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나희덕 시인의 쉼 없는 시적 행보를 기다려 보자. 어쨌든, 그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닌가. (류신/문학평론가)
■ 대표작
「 어두워진다는 것 」 창작과비평사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창작과비평사
「 뿌리에게 」 창작과비평사
첫댓글저는 시를 읽을 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제게 와 닿는 느낌 그대로 그 시를 취하는 편인데 님이 곁들여 주시는 작품 소개말들을 읽고 다시 한번 그 시를 음미해 보면 또 다른 감동이 느껴집니다. 특히 이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란 시가 그러하네요. 덕분에 많은 공부를 하게 되는 점 늘 감사해요.
첫댓글 저는 시를 읽을 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제게 와 닿는 느낌 그대로 그 시를 취하는 편인데 님이 곁들여 주시는 작품 소개말들을 읽고 다시 한번 그 시를 음미해 보면 또 다른 감동이 느껴집니다. 특히 이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란 시가 그러하네요. 덕분에 많은 공부를 하게 되는 점 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