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y your eyes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이 있어?“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아주 싸게....내 항복을 받아 낸거라...생각하고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상혁이 가고 나서 지현은 그 말을 곱씹었다.
뚝뚝..하고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물방울이 차가웠다.
하얀 투피스에 번지는 찬물의 느낌.
화장을 별로 하지 않아 다행이였다.
울지도 몰라서 그랬던건데..전혀 다른 이유로 잘한 일이 되버렸다.
항복...
이제 그만 포기 하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눈빛.
“....저..죄송한데 휴지 좀 주시겠어요?”
“아..네,네..”
남자에게 물세례를 받고서도 지현은 슬핏 미소를 머금고는
약간 놀란듯한 점원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색한 웃음. 억지 미소..
적어도 오종혁은 이런 억지 미소같은건 짓지 못하는 사람이였다.
왜 미리 알지 못했을까?
왜 예전에..눈치채지 못했을까?
...저 사람의 눈빛이 저렇게나 애절한데.
그때도 지금처럼 저랬을텐데..
“..괜찮으세요?”
“네...감사합니다. 계산서 좀 갖다 주세요”
“저..먼저 나간 분이 계산 하셨는데요..”
“............”
이 종업원이..상혁을 알아 봤을런지도 몰랐다.
아마- 멀리서 봤다면 자신이 그의 애인쯤으로 여겨 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현은 허탈한 웃음이 났다.
대충 핸드백을 챙겨들고.
휴지를 손에 쥐고는 그 카페를 나온다.
젖은 머리카락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
“....그만 마셔요, 상혁씨”
벌써 새벽 2시.
원래부터가 아는 사람만 손님으로 받는 바(Bar)였다.
사장이 이번에 상혁이 찍은 영화 조감독의 친구였다.
그래서 알게 된 곳.
이곳을 오는 이유는...정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였다.
연예인이라고 얼굴 가리지 않아도 괜찮고..
술마시고 어쨌다는 소문 같은거..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종혁이 몰랐다. 이 장소를.
혹시 술에 취해 불러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당초..
이 바에는 같이 오지도 않았다.
키핑 해놓은 양주를 다 먹었는데.
상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술이 센건 사실이였지만 오늘은 좀 취했다.
마음이 서글퍼서 그런가..분위기 때문인가.
“저기....나..카드 줄테니까 발렌타인...싸구려 말고..비싼걸로 한 병 내놔요..”
그러면서 내놓는다는 것이 하얀 봉투하나.
카드를 꺼내야 하는데..잘못 딸려 나온 것이다.
이 봉투에는 종혁에게 줄 돈이 들어 있다.
꽤 많은 돈이-
회사를 이적할 때 받았던 돈. 그리고 그동안 벌어 놓았던 돈..
대부분이 집의 생활비로 들어가고 없지만.
그래도 이럴 경우를 대비해 따로 모아둔게 있었다.
마치.
이런 피해보상을 해야 할 날이 오게 될거라는걸..미리 알았던 것처럼.
그게 종혁이든, 아니면 방금 만났던 지현이든.
아니면 또다른 누구던.
피해보상을 준비해야 하는 사랑이라니..
상혁은 통장의 돈을 정리했다.
물론 그가 알리는 없겠지만, 예전 종혁이 은행에 가서 자신의 예금을
정리했던 것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다.
그처럼 어리버리하지도 않고..
또 그처럼 돈에 대해 무감각하지도 않다.
돈.
돈을 벌려고 이 일을 시작한건 아니였지만,
너무 어려서부터 돈에 대해 알아 버렸다. 오종혁이야-
본성이 돈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고. 부모님이 다 계시니 그런 것에
무딜 수 밖에 없었겠지만..상혁은 처지가 달랐다.
‘...자기앞 수표로 만들어 주세요..’
기억속에 아버지란 없었다.
늘 힘들게만 일했던 어머니는 왜인지 되는 일이 없었다.
식당을 열면 1년도 안되 망했고, 언젠가는 무슨 피라미드판매에
빠져서 빚만 졌었다.
하나있는 형은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했다.
하루걸러 하루...경찰서로 형을 찾으러 가야만 했다.
그런 지긋지긋했던 생활.
집안의 정이라던가...가족간의 애정이라던가..그런거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더 그랬나.
마음 줄 곳이 없었던 그 때..내 눈앞에 나타난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좋아 보였는지.
[100000000원 일억]
내가 성공하자 어머니는 당신 인생의 유일한 행운이 나라고 하셨다.
집안이 어렵다고 이를 악물고 독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았으니까.
수표 한 장을 자켓 주머니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는다.
종혁이 말한 피해보상이..겨우 이런 것이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지는
상혁이었다.
“그만 마시는게 좋겠어요. 대리운전 부를게요”
“왜...내 말은 아무도 듣질 않는 거야...취하지 않았어...괜찮다고!!”
“...........”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야..
상혁은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는걸 깨달았다.
동시에 미안해지는 마음.
“...미안해요.” 짧게 대답하고 상혁은 그 바를 나와버렸다.
어디 하나 쉴 곳이 없다.
*
기다리다 꾸벅 졸았나보다.
쇼파에 앉아 있던 종혁의 몸이 스르르 옆으로 쓰러지더니..이내-
코오-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고 말았다.
그러다.
철컹-
잠결에도 문이 열리는 소릴 들었다.
눈을 떠야 하는데.
이 집에 올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인데..
한번 빠져든 잠은 종혁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상혁이 몰고 왔을 그 차가운 공기가 마치 냉장고를 열었을때처럼..
싸늘하다.
차가운 공기에 겨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으..술냄새.
“....술 마셨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리 묻는 종혁이 이젠.
당황스럽지도 껄끄럽지도 않은 모양으로..상혁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그 앞에 털썩 앉았다.
더 진한 알콜향기가 흐른다.
“술..먹지 말라고 했잖아. 진짜 중독자 같어, 너. 집에도 소주병만 뒹굴어 다니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마셔대는 거냐?“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벼대며 종혁은 잔소리를 들어 놓았다.
꽉 잠긴 허스키보이스.
저딴 목소리가 뭐 좋다고...6년이 넘게 목을 맺을까?
상혁은 멍하게 종혁을 바라보았다.
먹먹하게..시린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자켓 주머니를 뒤적거려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는 종혁의 무릎위에 던지듯이 봉투를 올려 놓았다.
나폴거리듯이 무게감이 없는 봉투에 종혁의 시선이 머문다.
“..뭐야?”
“...달라며”
달라며- 짜증섞인 한마디를 남기고 상혁은 벌렁 누워버렸다.
카펫하나가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에-
정신이 더 말짱해 지는 듯싶다.
역시 술을 더 먹었어야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침묵이 이어졌다.
보았을 것이다. 봉투 안에 담겨져 있던 돈을.
두 손으로 곱게 주었어야 했는데..그러질 못했다.
그렇게 예의바르게 행동할 정신이 있었다면,
아마 한강다리를 건너다가 뛰어 내려 죽었을 것이다.
“....부자네, 김상혁. 피해보상 해달라니까 바로 돈 내놓고”
그리고 다시 부스럭..소리.
툭-하고 하얀 봉투가 누워있던 상혁의 얼굴위로 떨어졌다.
이번엔 무게감이 좀 있게.
종혁이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무슨 삼류 드라마 보는 것 같네. 돈 많은 남자가 여자랑 헤어질때
척-하고 내놓는 하얀 봉투말이다. 근데 넌 진짜 재수도 없다. 여자도
아닌 나한테 성공한 남자역을 자처하다니“
상혁은 얼굴에 떨어진 봉투를 걷어 내며 일어나 앉았다.
종혁은 여전히 쇼파에 앉아 있었지만, 곧이라도 일어나
한대 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도 그 드라마처럼 봉투 던지면서 말하고 싶은거냐?
누가 돈 달라고 했냐고. 나는 진심이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이런 돈으로 뭘 어쩌자는 거냐고??“
“닥쳐, 김상혁! 누가 너한테 돈 달라고 했어? (달랬잖아, 종혁아..-_-;;)
하루만에 일억 만들어 와서는 뭐야...이제 그만 나가달라는거야?“
“니가 원했던 거잖아”
“내가 뭘 원했는데!!”
“피해보상!!”
“김상혁!”
“이게 그 피해보상이야!! 도대체 뭘 더 바라는데?? 원한다면 더 줄 수도 있어-”
“이 자식이!!”
퍽..
결국 종혁의 주먹이 날라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상혁도 그냥 맞고만 있지는 않다.
엎치락 뒤치락..
“내가 거지야?? 너는 바보야?? 왜 니 돈을 나한테 줘??”
'주면 그냥 받아!! 피해보상 하랬잖아!! 이렇게 밖에 더 뭘 하라고!!“
방바닥을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다...
힘이 먼저 빠져버린 종혁이 깔려버린 상태에서 둘 다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헉...헉........”
“허헉..........”
새벽에 웬 레슬링이란 말인가...-_-;;
술이 다 깨버린 상혁은 자신이 종혁의 배 위에 앉아(헉;)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난폭하게 흔들어 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켜. 숨막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종혁은 작게 말했다.
동시에 상혁은 천천히 그의 멱살을 놓고 옆으로 쓰러지듯
돌아...종혁의 옆에 누웠다.
원래 남자들은 싸우고 나면 더 친해진다던데.
영화 같은데서 보면 두 남자가 막 싸우고 나서 나란히 누워..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고..뭐 그런 얘기.
너랑은 절대로 그럴 수 없겠지.
상혁은 고개를 돌려 종혁을 바라보았다.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종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다.
그 옆얼굴이 참 예뻤다.
'.....예뻐, 넌“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다.
한번도 제대로 한적 없는거 같아서..
그러나 종혁은 상혁의 허탈한 그 말투에..
웃지고 않고..
'세상에서 제일 싫은 말이 그거야“
차갑게 대답했다.
“...돈..그냥 받아라. 넌..받을 자격 있어”
“...미친놈. 니네 형한테 맞아 죽으라고?
“...너한테 손대면 다 죽일거야”
“...웃기네..막상 일 터지면 도망부터 가는 주제에.”
“.................”
한참동안의 침묵.
고막이 터질 듯한 침묵 끝에. 상혁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종혁을 내려보면서.
“...나 어제 그 여자 만났다.”
원래 인생이란 again의 연속이니까.
이제 그만 널 놓아주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dry your eyes편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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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의 대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중 일부를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