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머리로 나타난 추상미는 “지금이 가장 좋다”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5년 만에 연극 <은밀한 기쁨>으로 컴백한 그녀에게는 그동안 어떤 기쁨이 있었을까.
“사람들이 저를 볼 때마다 물어요. ‘왜 방송에 안 나와요?’ (그게) 되게 이상한가 봐요.”
추상미는 지난 2009년 드라마 <시티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다. 1996년 데뷔 후 매년 한두 작품에 출연하며 늘 시청자 곁에 있었던 그녀였다.
“제가 ‘아기 키워요’라고 답해도 뭔가 미심쩍어 해요. 아기 키워보니까, 이게 되게 힘든 일인데….”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그녀의 팬들이 ‘미심쩍게’ 생각하는 이 공백 기간에, 그녀에게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됐고,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으며, 두 편의 단편영화를 발표했다.
트라우마, 영화가 되다
추상미가 만든 두 편의 단편영화에는 그녀의 삶이 담겨 있다. 첫 번째 단편영화인 <분장실>은 제목 그대로, 무대 뒤편의 배우 이야기다. 두 번째 영화 <영향 아래의 여자>에는 아이를 낳고 나서의 경험이 담겼다.
“늦게 출산해서 그런지 아이에 대한 애착이 있었어요. 아기가 잘못되는 꿈도 꿨죠. 그러다보니 ‘아이를 잃은 부모는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영향 아래의 여자>에는 실제 모델이 있어요.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인데, 보험설계사로 능력을 발휘하는 분이죠. 물론 영화 속 삶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어요.”
<영향 아래의 여자>는 아이를 잃고 웃음도 잃은 엄마가 등장한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삶은 계속되고, 보험 실적을 위해 불법 영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다.
“큰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사람들 중에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분들은 성공을 위한 경쟁이나 그 어떤 탐욕 같은 것들이 삶에서 제거가 되죠. 아프긴 하지만 정결해지는 느낌이요. 그렇지만 사회는 잔인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죠.”
최근 배우가 영화감독으로 나서는 경우가 꽤 늘었다. 유지태는 첫 장편영화 <마이 라띠마>로 프랑스 도빌 아시아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구혜선, 김남길에 이어 박중훈도 감독으로 나섰다.
그러나 배우 프리미엄을 기대했다가는 낭패다. 추상미는 “못 만들면 참혹한 심판을 받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영향 아래의 여자>로 부산영화제에 참가했는데, 첫 상영 날 공황장애가 올 뻔했어요. 연기도 처음 하면 떨리잖아요. 작품에 처음 들어가도 그렇고.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떨리더라고요. 배우라는 타이틀이 있으니까, 의식도 되고 평가에 대한 불안도 (속에서) 올라왔어요. 그럴 때면, 연기가 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배우라는 직업도 좋았지만, 오래전부터 창작을 하고 싶었다”는 추상미는 현재 대여섯 개의 시나리오를 이미 써놨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찍고 싶은 장면도 많은 천생 감독이다.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외모 지상주의도 하나의 유행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트라우마, 열등감, 불안이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그것들이 집단 무의식으로 작용하고, 개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죠. 저는 사회현상을 현미경으로 점점점 확대해나가서 아주 개인화시킨 이야기를 좋아해요.”
아빠에 대한 동경으로 서는 연극 무대
이번에는 연극이다. 한동안 영화감독으로 살던 추상미가 다시 연기자로 돌아온다. 연극 <은밀한 기쁨>으로, 5년 만의 컴백이다.
“다른 곳에 갔다 오니까 역시 집 밥이 맛있는 것 같아요. 식어도 집 밥이 맛있다고 하잖아요. 감독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모두 무대에 배설할 생각이에요.”
<은밀한 기쁨>은 영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의 작품으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벌어지는 가족 간의 균열과 갈등에 관한 이야기다. 이 연극에서 추상미가 맡은 이사벨은 가족이 우선인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나타난 언니와 형부가 알코올중독 새엄마를 교묘히 떠넘기고, 자신을 이용해 세금 포탈까지 하려고 하면서 갈등을 겪는다.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내면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데, 보고 나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이사벨은 가족을 생각하고 약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불편한 존재로 받아들여져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들춰내는 양심의 기준 역할을 하니까요.”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손가락질을 당한다고 했던가. 현대사회에서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은밀한 기쁨>은 풍자한다.
“저도 이사벨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이사벨처럼 훌륭한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예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물질을 좇고 돈을 좇고 그러지는 않았죠. 누가 명품 가방을 살래, 책을 100권 살래? 하면 당연히 책을 택하는 쪽이었으니까요. 그건 환경 탓인 것 같아요. 제가 잘나고 못나고가 아닌, 어릴 때부터 받은 영향이 아닐까요.”
추상미는 많은 명배우들이 롤 모델로 꼽는 연극배우 추송웅의 딸이다. 추상미의 두 오빠 추상욱, 추상록 역시 연극배우다. 이제껏 한 작품 편수로 치면 드라마가 훨씬 많지만, 연극 무대에 1~2년에 한 번씩 꼭 서는 이유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무대에 대한 마음 때문이다.
“작품 편수가 많지 않은데 무대 위의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이겠죠. 연극에서는 신인 축에 속해요. 아버지를 보면서 배우와 무대에 대한 열정을 키우며 자랐어요. 그걸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연극이 들어왔어요. 연기면 다 같은 연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무대에 서는 감흥과 카메라 앞은 다르거든요. 아빠 무대에 대한 동경, 다시 그것을 회복하고 싶어서 연극 무대에 서요.”
추상미는 14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때는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어렸으니까 공부하고, 학년 올라가고… 정신이 없잖아요. 잠재의식 속에 묻혀 있었던 거죠. 그 트라우마를 아기 낳고 나서 알게 됐어요. 너무도 소중한 존재가 죽어버리는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죠. 아기가 없어지는 악몽을 꾸면서 깨닫게 됐어요. 평소에는 모르다가 비슷한 환경에 처하면 툭 튀어나오는… 그게 트라우마인 것 같아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추상미는 ‘어느 날 아이가 사라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영향 아래의 여자>를 만들었지만, 아이를 온실 속에서만 키우는 엄마는 아니다. 이제 25개월 된 아이는 15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고, 최근 두 돌이 지나면서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어린이집에 위탁한다.
“그저 바라만 봐도 예쁘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엄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부모가 배우지만 너무 주목받고 자라는, 주목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아이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거든요. 인성이 제대로 된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그러려면 조금 엄해야 하거든요. 사랑을 줄 때는 듬뿍 주고, 엄하게 할 때는 엄하게 하고.”
그렇지만, 아이 자랑은 여느 엄마 못지않다.
“어린이집 다녀오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좋은지 다 이야기해요. 한글은 모르지만 동화책은 읽어요. 엄마가 읽어준 것을 흉내 내서 재연하는 거죠. 언어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요.”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추상미와 뮤지컬 배우인 남편 이석준 모두 책을 좋아한다.
“석준 씨 팬들이 책 선물을 많이 해서, 지금은 남편이 저보다 많이 읽어요. 현대 소설, 캐주얼한 소설까지 빨리 많이 읽더군요. 저는 고전이나 조금 무게감 있고 깊이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고요. 제 독서는 편협한 편이죠.”
이석준은 한 인터뷰에서 “아내가 아이를 낳고 육아 서적을 50권 읽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추상미는 “그저 쌓아놨을 뿐”이라며 겸손해한다.
“육아 책을 통해 정보를 알아가는 것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 ‘내일부터 이렇게 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겨요. 육아는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매일매일 지치거든요. 책을 통해 엔진을 가동시키는 셈이죠.”
5년간의 공백기를 지나 컴백하면서 조금은 조바심을 낼 만도 하련만, 추상미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편안하다.
“예전보다는 굉장히 편해졌어요. 나의 가족, 울타리가 생겨서죠. 아내로서 엄마로서 내 몫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고, 내 편이 있다는 충만함이 있어요. 앞으로 좋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좋은 역할이 들어오면 할 거고, 기본적으로는 연극 무대, 그리고 창작을 하면서 엄마로서의 삶을 병행할 때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