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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창곡
잎도 없이 바쁘게 꽃을 피워대는 나무가 있다. 개나리와 목련 꽃이다. 나도 딱 그 꼴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에는 수업이 없는 쉬는 시간에도 한눈팔 사이가 없다. 점심시간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식사 후 졸음이 몰려올 때 이를 이겨내기 위해 즐기는 나의 방법은 애창곡을 듣는 것이다.
마침 자주 들리는 카페에 ‘백만송이장미’ 노래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동영상으로 올려져있었다. 유명 악단의 감미로운 반주가 노래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로 시작되는 애절한 가사는 내 심정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심수봉의 노래다. 어느 정도 귀에 익은 노래였었지만, 러시아 민요를 우리말로 부른 것인 줄은 전혀 몰랐었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나의 애창곡은 지다연이 부른 ‘동반자’였다. 제목이 뜻하는 바가 아내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고, 때론 신앙의 절대자까지 포함할 수 있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서 좋았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배경 음악도 심금을 울렸고, 온 힘을 다해 부르는 가수의 음성도 마음에 쏙 들었다. 초지일관 오래오래 우려먹었으니 이젠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되던 참이었다.
퇴근길,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멋쩍은 표정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나의 애창곡을 ‘동반자’에서 ‘백만송이장미’로 바꾸어보겠노라고.
주방에서 저녁상을 준비하던 아내가 정색하며 “그 노래 부르기 쉽지 않을 텐데요?”라며 걱정하는 눈치다.
“자꾸 들으면서 따라 부르면 할 수 있겠지, 뭐”라는 말로 무안을 피한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노트북 컴퓨터를 식탁으로 옮겨놓고 카페에 스크랩해둔 음악을 틀었다. 음량을 높였다.
노래방에 잘 가지 않는 편이지만 새 애창곡을 부르기 위해서라도 이젠 자주 드나들어야 할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다. 되풀이해서 들으며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즐겨 부르는 노래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초등학교 어렸을 때 나의 애창곡에는 ‘과수원 길’과 같은 동요였고, 중학생 때는 ‘그 집 앞’ 같은 가곡이었다. 대학생 때는 ‘모닥불’, 군 복무 때는 ‘전선 야곡’, ‘비목’, ‘곡예사의 첫사랑’, ‘모모’ 등이었다. 소먹이로 가고 올 때나, 밤늦은 길 집으로 돌아올 때, 군복을 입고 고향 생각날 때 별 쳐다보며 불렀다. 글로 표현 못 할 그 어떤 위로와 힘을 느꼈던 노래였다. 소속 단체의 노래 예를 들면 교가나 군대에서의 중대가 등을 유별나게 즐겨 불렀던 나였다.
한편, 백만송이장미 노래에 감동하였던 바로 그 다음 날 점심시간이었다. 1학년 어느 반에서 여학생에게 얼굴을 한 대 맞은 한 남학생이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맞은 아이의 부모가 마음이 상해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현장의 소식도 함께 알려주었다.
우리가 경험하였던 시대와 많이 다른 요즘의 모습이다. 어떻게 행동하였기에 여학생한테 멱살을 잡힌 채 한 대 얻어맞았을까? 입술이 터져서 피를 철철 흘리며 보건실로 황급히 찾아갔을 남학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침 오후에 부장교사 회의가 열렸다. 불과 얼마 전 학교폭력 예방 특강이 있었음에도 오전에 일어난 사건에 참석자 모두가 한동안 말을 잃었다. 혈기가 넘치는 아이들에게 장난이 불거지면 비슷한 사건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재발을 막는다는 것이 꿈같은 소리일 수 있지만, 폭력 없는 학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찾는 논의가 잠시 있었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백만송이장미 노래를 부를 줄 알게 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노래에 담긴 고운 가사가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그와 비슷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백만송이장미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만들자'라는 내 이야기를 들은 참석자 모두가 한시름 놓고 웃었다.
다가오는 스승의 날에는 춘계 교내체육대회 날로 잡혀 있다. 운동 경기를 한 가지 줄여서라도 강당에서의 뜻있는 의식행사에 뒤이어 학반 자랑 합창 경연이라도 시행해보고 싶다. 노래 제목은 ‘동반자’ 혹은 ‘백만송이장미’로. 한 달이 짧아서 어림없다면 가을에 있는 종합 예술축제 때도 좋을 것 같다.
삼월에는 너나없이 분주하다. 할 일도 많고 꿈도 많다. 나의 또 다른 애창곡이 낳을 사연들을 미리 그려보면서 잠시 행복한 생각에 빠져본다. 비 오는 날 교실에서도 학생들과 함께 나직이 불러보리라. 그 노래를 부를 줄 아는 학생에게 상점이라도 당장 주고 싶다.
경험(經驗)
경험의 중요성을 아는 것은 나이와 비례하는 것 같다. 여러 가지 행동을 선택하는 일에 큰 힘을 미친다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나이 값을 한다는 말도 한편으론 이와 같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지난해였다. 몇 십 년 교직 생활을 해오면서 처음으로 학교 뒷산 둘레 길을 뛰거나 걷는 수업을 해보았다. 체육 시간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비좁은 운동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이기도 하였거니와 제자들이 사계절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건강한 심신이 되기를 원했다. 몇몇 학생들은 그 뜻을 공감하며 좋아하였으나 대다수의 학생은 숨을 헐떡거리며 산을 올랐다가 결국에는 다시 내려오는 것에 불만이었다. 체력과 마음을 동시에 길러주겠다는 애초의 결심이 고작 두세 번으로 그쳤었다.
새 학기를 맞으면서 나의 그런 경험에 개의치 않고 올해 또다시 시도해보았다.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였다. 힘이 절로 났다. 산 중턱까지 힘들게 올라와서 땀 흘리고 나서의 성취감을 만개한 꽃처럼 활짝 핀 웃음으로 보여주었다. 문제는 내려올 때였다. 몇몇 학생들이 크게 비탈진 곳이 아닌데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지 않는가.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가를 물었더니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 사연을 알아보았다. 산을 오르고 내린 경험이 없었단다.
우리 세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뒷동산과 친구처럼 놀았던 우리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소 먹이러 산을 탔고, 조금 더 자라서는 지게를 걸머지고 겨울에는 땔감 나무를 여름에는 마구간에 깔아줄 소 풀을 져 날랐던 산길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봄나물 하러, 머루 다래 따러, 혹은 산도라지 캐러 이 산 저 산을 산토끼처럼 뛰어다녔던 것과 비교하면 요즘 학생들의 하루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학교와 학원 사이를 오가기에 바쁘고, 집안의 독방에서 사이버 세상에 빠져 사는 아이들이다.
남들이 비웃을까 두려웠지만, 산악달리기 체력 정도를 수행평가에 넣었다. 휴일을 이용하여 가족과 자주 산에 오르며 속옷을 땀에 흠뻑 젖어보는 동기를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문을 출발해서 산 중턱 무덤가에 있는 큰 소나무 반환점 돌아오는 코스를 누구나 잘 알 수 있도록 사전 답사를 경험시켰다.
경험과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는 엊그제 다녀온 중학교 2학년 현장체험 학습 중에서의 일이었다.
장기자랑을 마치고 나서 한 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취침 인원파악을 앞둔 시간이었으므로 같은 건물 내의 매점에 가보았다. 계산대에서 판매하고 있는 직원이 한 사람뿐이었다. 밤새 노닥거리며 먹을 간식거리를 사려고 많은 학생이 몰려와서 혼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부 학생들은 선택한 물건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그 물건들을 고스란히 몸에 지닌 채 매장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다른 물건들을 한 참 고르는척하다가는 어떤 물건을 더 가져가는지 모르게 계산대 옆의 또 다른 통로로 태연히 나오는 것이었다.
보자니 몇몇 학생들이 이미 재미를 본 낌새였고, 장난기를 얼굴 가득 머금은 학생들이 소문을 들은 양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문득 지난해 가을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외국여행에서 보인 추태 사건이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에 무심코 재미삼아 해보았던 경험이 별 죄의식 없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일들이라 생각되었던 낯부끄러운 사건이었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에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한 시간 이상 학생들의 구매 행동을 지도하는 뜻밖의 일을 했다. 몰려온 학생들의 상당수가 상황이 바뀐 현장을 살펴보곤 아쉬워하며 되돌아갔다. 장난치려는 아이들 얼굴에는 그들의 의도가 성사되지 않은 것이 서운한지 야릇한 눈초리를 주며 떠났다.
당장엔 내가 미웠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부모인들 자신의 자녀가 매장에서 산 물건을 계산하지 않고 나오는 것을 바라겠는가? 작은 쾌감을 추구하는 철없는 장난이 자칫하다가는 나쁜 습관이 되어버린다. 사소한 장난이 자신도 모르게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탓일 것이다.
장래에 부모가 될 아이들이다. 좀 더 철이 들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라는 뜻을 충분히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 ‘단맛 쓴맛 다 겪어보는 것도 교육적으로 괜찮을 일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을 쌓게 해주어도 모자랄 판인 지금의 세상이 아닌가.
현장학습 동행에서 보여주는 학생들의 행동들이 각양각색이다. 부모의 삶을 보고 크는 자녀다. 그들의 행동이 다른 것도 그들 부모의 경험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모들의 여러 가치관과 현시대가 요구하는 행동윤리가 뒤섞여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하기야 청소년들의 서리 장난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허용되었던 인심 좋은 시절도 있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무인 카메라가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했던 때를 살았던 중장년 세대였다. 그 때가 더 행복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일까?
경험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나이다. ‘가르침이란 것도 선험자의 경험 중에서 무엇을 끄집어내어 제자들의 마음에 담아주는가’ 로 가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자녀를 품안에서 다 내보낸 뒤에, 가르칠 년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이제서야 말이다.
우포늪과 달성보
분주한 봄날이 계속되었다. 몸살을 크게 앓았다. 나이를 잊은 채 건강을 과신하며 몸을 아끼지 않는 탓이었다. 고향 집에서 그럭저럭 지내셨던 어머님을 기어코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시골소식이 더 몸을 상하게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내일 모처럼 우포늪에 물 구경을 가보고 싶다고. 돌아오는 길에는 달성보에도 들러보자 권했다. 아내는 기왕 갈 바에는 새벽 일찍 출발해서 아침때의 우포늪을 구경하자며 마음을 보탰다.
깊은 잠을 자고 동이 틀 무렵에 출발하였다.
고향의 옛길을 연상시키는 비포장 산책 도로를 걸으며 나지막한 언덕을 내려서니 우포늪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적이 드문 고요함이 어우러져 태고의 신비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레길을 걸으며 우포늪의 비경에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이름 모를 야생화와 찔레꽃,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하여 이런저런 사진을 찍어대며 천천히 걸었다.
창녕군에 있는 우포늪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다. 1억 4천만 년의 신비 자연 생태를 그대로 품고 있다. 그곳 주민은 ‘소벌’이라고 말한다.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인근 우항산(牛項山)을 위시한 지세가 마치 소와 같다는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낙동강으로 유입되던 소하천의 폭이 좁아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가로 약 2.5Km, 세로 약 1.6Km 정도가 되며, 면적은 약 70만 평이다. 그 중 7만 평이 담수 지역으로 원시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연생태계보전지역과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이후, 예전보다 훼손이 훨씬 줄어 이곳에 살아가는 생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계절마다 독특한 풍경을 나타내 보인다.
우포늪은 아무 말 없이도 온몸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하늘 품은 나를 보았느냐는 외침이었다. 발걸음 소리에 놀란 물고기들과 온갖 새들도 저마다의 몸짓과 소리로 우리를 반겼다. 바람을 이겨낸 왕버드나무들의 자태에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월의 반나절 우포늪 구경은 이런저런 풍광으로 내 마음을 채워주었다.
돌아오는 길은 국도를 선택하였다. 둘러보기로 예정하였던 달성보에 가기가 쉬울 것 같았다.
강변 주차장에 도착하여 건너다본 모습은 그럴듯했다. 어릴 때 돌다리를 건너뛰며 학교에 다녔던 경험으론 쉽게 상상이 되지 않을 웅장한 모습이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는 인공적인 시설물에 대한 비난 여론도 드세었지만,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을 감상하기에 편리하도록 여러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마냥 다리를 건넜다. 남쪽 난간에 기대어 폭포소리를 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 굽이굽이 흐르던 냇물들이 모여서 더 넓은 강폭을 자랑하며 위세 당당하게 흐르고 있었다. 떠밀려온 물이 큰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시원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진한 아픔을 느꼈다. 자리를 반대편으로 옮겼다. 떨어지기 전의 물을 거슬러 보았다. 물 위에 어머님의 모습이 어른거려 한동안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이 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드셨던 어머니셨다. 여덟 번째 들어선 자식임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걱정을 하자 어머니는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보았단다. 탄생의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나름대로 수십 년 어머님께 정성을 다해왔지만 늘 뭔가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왔다. 곁에서 모시지 않는 불효가 가장 가슴 아팠다. 집을 떠나 요양원에 입원해서 이 세상과의 작별을 오늘내일 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힘을 보태드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사는 내 모습이 보였다. 옛 선비들은 이때 관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낙향해서 지극한 효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나도 한두 해 휴직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옳은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늘 나들이는 핑계가 물 구경이었지 어디에선가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우포늪의 물은 요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연상케 하였고, 달성보에서의 물은 바다로 가려는 나 자신과 똑같아 보였다.
그렇다. 모든 생명은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백수를 채우지 못하고 사그라져 가는 어머니의 생명을 내가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다시 되살릴 수는 없다. 흐름을 멈춘 우포늪도 실상은 죽지 않고 당당히 살아 있듯이 육신이야 흙이 되겠지만, 생생히 보여주신 어머님의 고귀한 삶은 길이길이 가슴에 살아 숨 쉴 것이다.
물처럼 살고 싶다. 하지만 물의 삶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지 않은가. 강물처럼 바다를 향해 내달리는 삶이 있고, 호수의 물처럼 그저 하늘을 쳐다보며 드러누워 사는 삶이 있다.
물 구경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내 마음은 슬픔을 밀어냈다. 막힌 코도 뚫렸다. 흐르는 물로 살아야 할지 고인 물로 살아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내가 바다에 이르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하늘에 가는 또 다른 여행길에 불과하겠지만 새나 물고기들과 노니는 고인 물보다는 불을 밝혀주는 물이 되고 싶고, 배도 띄워보는 바닷물이 되고 싶다.
그 누군가 가슴이 답답할 때 우포늪과 달성보에 가보기를 권한다. 모두가 우리 삶의 모습이다.
감자떡
비가 추적거리는 토요일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는 하루를 푹 쉴 수 있겠다 싶어 침대에 도로 누웠다. 집안일을 마친 아내가 살며시 방문을 열어 햇감자를 사오겠다며 집을 나선다. 감자떡을 만들어주려는가 보다. 문득 어릴 때의 감자 추억에 잠겨본다.
모내기를 끝내고 돌아서서 보리 베기를 하였고, 보리 베기가 끝나면 장마가 닥칠까 서둘러 감자를 거두었다. 탄성을 지르며 어느 놈이 가장 큰지를 알아보는 놀이로 감자 대를 뽑아내는 일은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강변의 모래밭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으며, 보이지 않는 감자들은 어려운 일을 서로 거들어주는 동네 아주머니와 엄마가 캐냈다. 눈깔사탕만 한 것 이상이면 비료 포대나 큰 고무 대야에 담아서 집으로 옮겼다.
이삼일을 그늘에서 바람을 쐰 감자는 크기에 따라 골라 담겨 보관되었다. 선택되지 못한 잔챙이들과 볕을 보고 자란 푸른 감자들은 마당 한구석 감나무 그늘에 나뒹굴다가 바깥일을 할 수 없는 날에 몸을 씻겼다. 헌 장독에 담긴 감자는 물에 잠겨서 세월을 익혔다.
노란 마대 종이로 덮은 장독 뚜껑은 까만 고무줄로 꽁꽁 동여매었다. 그럼에도 한 여름철 우리 집 골목 우물가에 들어서면 감자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하였다. 늦둥이 어린 감자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제 몸을 삭히는 아픔이었다.
그러기를 한 달, 독에 든 감자는 엄마 손에 주물러져서 제 모습은 사라지지만, 육신의 건더기들이 채를 통해 걸러져서 맑은 물속에 가라앉는다. 며칠을 우려낸 다음 삼베 보자기에 담아 물기를 짜내고 햇볕에 말리면 희뿌연 감자녹말이 만들어진다.
엄마는 장맛비가 오거나 점심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날이면 곧잘 감자떡을 찐다. 갈무리해놓은 뒷방의 감자녹말을 꺼내어 물을 붓고 알맞게 반죽을 한 다음 가마솥 나무 채반에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올려서 풋양대를 듬성듬성 뿌려서 찐다.
출가한 딸과 사위가 손자, 손녀를 앞세워 찾아오는 날에도 엄마는 아낌없이 감자떡을 준비하였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엄마 곁에서 불을 지펴드리곤 했다. 불에 타는 보릿단 소리가 축포소리를 들려주었다. 점차 흥이 돋우어져 내 얼굴이 빨개질 무렵에는 무쇠 솥뚜껑 사이로 하얀 김도 덩달아 화음을 보탠다.
한참을 뜸들인 후 솥뚜껑을 열어보면 까무잡잡한 감자떡이 특유의 냄새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김의 열기를 피하며 부엌칼로 이리저리 열십자로 칼질한 후 조각들을 채반에서 떼어내어 그릇에 담아내면 윤기가 반지르르한 고운 빛깔의 감자떡이 군침을 돌게 한다. 젓가락을 찾을 겨를도 없이 맨손으로 냉큼 잡아서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알싸한 맛은 잊을 수 없다. 감자떡의 진미는 엄마의 땀방울이 알알이 베인 맛이었다. 집은 손에 묻은 떡 찌꺼기까지 아까워서 쪽쪽 빨아먹었던 추억이 새롭다.
지금도 감자떡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엄마의 옛 모습과 나의 어린 시절들이 선하게 회상된다. 한 시도 쉴 틈 없이 일하며 자식들의 먹을거리를 준비해주시던 우리 엄마와 별다른 간식이 없었던 그때 그 시절을 음미할 수 있는 살아있는 소리다. 하지만 더는 엄마의 감자떡을 먹어볼 수 없다. 무심한 세월이 엄마의 손발을 묶어놓았다.
아내가 해주는 감자떡은 시장에서 굵고 큰 감자를 사와서 강판에 갈아 즉석에서 만들어준다. 어릴 때의 그 감자떡 냄새를 전혀 느껴볼 수 없다. 내 인생 첫 키스와 같았던 쌉쌀한 맛의 엄마가 해준 그 옛날 감자떡을 다시 맛보고 싶다.
오디나무
출근길이 아주 멀었던 전임 학교에서의 일이었다. 어느 날 학교 뒷산에 묵은 오디 밭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근무한 지 일 년을 지내고 나서야 그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수업이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그곳에 가보았다.
키보다 높은 축대벽을 기어올라 비탈길의 잡풀들을 헤집고 길을 만들며 올라갔다. 꽤 넓은 터가 나왔다. 신설 학교가 들어서면서 오디 밭주인은 보상을 받고 어디론가 멀리 이주한 것으로 보였다. 사람 손길을 벗어난 여러 그루의 오디나무들이 아카시아, 미루나무, 살구나무, 벚나무, 이름 모를 다른 잡목들과 함께 빽빽한 숲을 이룬 채 생존의 힘겨운 싸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 한 그루의 큰 오디나무가 나의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아카시아 나무와 복숭아나무 사이에서도 넓은 자리를 차지해서인지 유달리 큰 오디를 탐스럽게 매단 채 우람한 자태를 뽐내었다. 바로 아래의 산비탈에는 칡덩굴들이 무성하게 기어오르며 또 다른 어린 오디나무들을 통째로 뒤덮고 있었다.
잽싸게 학교로 뛰어 내려와 낫과 톱을 챙겨서 올라갔다. 오디나무 주위의 잡목들을 훤히 정리하여주었다. 주위가 밝아지자 칡덩굴과 아카시아 나무가 심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산비탈을 깎아서 공사한 뒷모습의 흉한 흔적을 빨리 감추고 싶었던 것이었다. 산사태를 예방하며 푸른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보였다.
그 이튿날은 현충일의 공휴일이었다. 큰 비닐과 오디 담을 그릇을 준비하여 다시 찾았다. 바닥에 비닐을 넓게 깔고 오디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흔들었다. 우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해간 그릇들이 모자랄 정도로 오디를 거두어 집에 왔다. 아내는 수확해온 오디 손질에 힘들어하면서도 재바른 손놀림으로 과일즙과 술을 담갔다.
그 일 이후 학교 운동장에서도 남다른 시선으로 예의 그 오디나무를 자주 올려다보았다. 다른 나무와 확연히 다르게 넓은 잎으로 손짓하며 생기가 넘쳤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징표였다.
각별한 정분을 나누었던 오디나무와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집 가까운 곳으로 전근하였다. 유월이 다시 돌아왔어도 그때의 추억을 곱씹고 지냈을 뿐 다시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그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오디를 거두고 있을 줄 알았고, 만나면 서로 부끄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알이 유별나게 굵고 탐스러웠던 오디가 혹여 어머님의 노환 증세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오디는 비타민 E가 풍부할 뿐 아니라 세포의 노화를 막아준다는 신문기사를 읽고는 더욱 참을 수 없었다.
며칠 전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학교에 나와서 제때 처리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자니 오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은 차차 하면 될 일이지만 오디 수확은 때를 놓치면 안 될 일이었다. 서둘러 집에 와서 소쿠리와 같은 그릇들을 챙겨서 현장엘 가보았다.
내가 만들어 놓았던 오솔길은 흔적도 없었다. 훌쩍 자란 잡목들로 마냥 낯설었다. 그 오디나무에도 칡덩굴이 기어 올라가 이곳저곳의 가지를 칭칭 기어오르고 있었다. 왜 이제 왔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대추보다 굵은 씨알을 달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던 나무는 여느 오디나무와 다르지 않게 고만고만한 열매를 매달고 살랑 부는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시때때로 오디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차, 연장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오디나무 밑에 이곳저곳 수북이 솟아난 찔레꽃 덤불들을 당장 베어주지를 못함을 깨닫자 치밀하지 못한 자신의 대처를 탓하였다. 문득 발아래 돌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알맞게 생긴 두 개를 골라 양손에 단단히 집어 들었다. 오디나무에 오르는 칡넝쿨 줄기들을 모조리 찾아 모질게 두드려 잘라주었다.
나무도 이처럼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평범한 나무가 되는가 보다. 사람도 그 어떤 나무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그 누구에게 칡덩굴, 찔레꽃 덩굴로 살고 있지나 않은지 내 주위의 삶들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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