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베리니 궁전
산 피에트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을 완성한 교황 우르바누스 8세(재위 1623~1644년)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가족을 위해 지은 궁전. 현재는 국립 고전 미술관으로 이용 되고 있다
들어가자마자 이 조각품 앞에 선다
안토니오 코라디니(1688~1752년)의 1743년 대리석으로 제작한 230센티의 실물 보다는 조금 큰 사이즈의 조각 작품
제목은 '라 벨라타'인데 그냥 베일을 쓴 여인을 칭하는 말.
원래는 베스타 여사제 투치아라고 했지만 보통 라 벨라타라고 한다.
작가인 코라디니는 베네치아 태생이지만 예술가로서의 활동은 대부분을 드레스덴, 프라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유럽전역이 무대.
이 작품은 그가 로마에서 짧은 기간을 보낼 때 제작, 마지막은 나폴리에서 사망.
로코코 양식의 대표적 예술가라고 하는데
언제 로마네스크- 고딕-르네상스-메너리즘-바로크-로코코로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 축적이 되는데로 연구 해보지요
베일을 썻음에도 불구하고 가슴과 배들의 육체적인 특징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대단히 육감적.
베스타 여사제 투치아 이야기입니다
고대 로마 (포로 로마노에서 가이드 설명에서 본 것으로 기억한다)에 베스타(vesta) 신전의 불이 꺼지지 않게 불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여사제가 있었는데,
이 불이 꺼지면 로마에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는 믿음으로 로마의 안보상 중요한 임무.
사제에 대한 예우는 대단했습니다.
고대 로마 배경의 영화를 보면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결투들을 할 때 황제 옆 한쪽은 왕후, 한 쪽은 여사제(힌 옷을 입고),
복무 기간 동안 두 가지 큰 임무로서 첫째 불을 끄지말아야 하고,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위반할 경우 산 채로 매장을 당하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부당하게 고발된 여사제 투치아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로마 시내를 흐르는 테베레 강의 물을 채로 모아야 하는 실현 불가능한 시험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다행이 베스타 여신의 도움을 받아 강에서 체로 물을 모아서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은채 베스타 신전으로 옮김으로서 처참한 형을 면할 수 있었다는데 모티브.
석상의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이 일화를 묘사하기 위해 채를 들고 있다고 한다
자~ 이제 이 국립미술관에 온 한 가지 목적 이 그림을 보러 왔다
라파엘로(1483~1520년)의 '라 포르나리나'
이 그림은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할 때 그의 작업실에 있었다고 하는데( 1518~1519년 사이에 그린 그림)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조금의 수정을 하고서 판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분분한 이야기들이 많다.
흔히 미술사 전통이나 설들에 의하면 이 여성은 라파엘로의 로마 연인인 포르나리나 (제빵사 또는 제빵사의 딸) 마르게리따 루티로 판단하지만 신원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창녀, 마녀, 여러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라파엘로는 메디치가의 비비에나 추기경의 조카딸과 약혼한 상태였지만 워낙 여자를 밝혀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었든 터에 인맥상 약혼만 하고 결혼을 미루었다는 이야기,
그기다가 이 아름다운 마르게리따를 만났으니 더욱 결혼을 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둘은 비밀리에 사랑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세상에 들어내 놓을 수가 없었는데 오랜 지인인 추기경과의 관계, 교황청의 신임, 이런 것 들이 이 여인과는 결혼 진행이 불가한 상태.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라파엘로를 힘들게 한다고 여긴 마르게리따가 떠나버림니다( 사실은 12년 동안 몸과 마음 다 바쳤는데 세상 체면에 걸려 결혼을 안해주니 뿔따구 나서 획 떠나버렸다는 것이 맞겠지요).
그러나 라파엘로에게는 뒤늦게 그녀 밖에 없다는 심연의 울컥임을 깨닫고 사랑하는 그녀에게 마음의 징표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죽기 전에 또 그림을 내놓지도 못하는 등신. 그 뒤로 마르게리따도 따라 갔다고 함.
가슴을 들어내 놓고 배는 매미 날개 같은 천으로 배꼽을 덮고 있는데 왼손은 진한 붉은색 천으로 아래를 가리며 중요부위에 손을 얹고 있으며 얼굴은 붉은 홍조가 보이는 건강한 빛을 띠면서 팔에는 '라파엘로 비너스'라고 선명히 쓴 띠가 있는데 라파엘로의 여인이라는 징표이고 관능이 숨겨진 정숙한 여인의 모습
엄청 유명한 카라바조 그림이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칼을 목에 깊숙히 찔러넣은 여성의 얼굴 표정이 리얼합니다
1958~1599년 그림
이야기는 이렇다.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항복할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상황에서 신앙심 내지 애국심 깊은 부유한 과부인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서고,
아름답게 몸을 치장하고 적장에게 하녀 아브라와 함께 계획, 접근하여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구약성경 이야기.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많은 다른 화가들도 그림을 그렸다
카라바조가 이 처럼 참혹한 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든 이유는,
1599년 친딸인 자신을 성폭행한 부도덕한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로마 산탈젤로 성(앞서 소개했다) 앞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참수를 당했든 베아트리체 첸지라는 모습을 직접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래 그림도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 1597~1599년)
열여섯 살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여러 여성들의 사랑에 무관심으로 일관.
그런데 무관심도 죄악이다. 그의 무관심에 수치심을 느낀 한 요정은 기도를 했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느는 그에게 벌을 내린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든 나르키소스는 샘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아름다움에 빠져 사랑에 빠졌다.
안타깝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 결국 그는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다는.
그림에서 카라바조는 숲이고 님프 에코도 생략한 채 결정적인 한 상황에만 집중해서 모두 검은색으로 처리했다
여기서는 그의 명암법이 단순한 빛과 어둠이 아니고 빛의 변화, 반사각, 흡수, 역광, 그림자 등을 통해 사물의 질감, 촉감, 부피, 나아가 심리 상태까지 다양한 효과를 연출했다고 한다(전문가들 이야기)
한 마디로 극적이다.
어둠의 의미를 강조한 명암대비화법( 테네브리즘)이라고도 한단다.
지오바니 랑프랑코 (1582~1647)
크레오파트라의 자살,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들에게 차례로 애인이 된 그녀가 몸매도 과장되고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