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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른 섣부른 봄이지만 칠닥이는 작년 가을에 얻은 성희네 비탈밭에 올라 밭두렁에 엉덩이를 깔고 물끄러미 동네 길을 내려다본다.
마주 보이는 야산이 꿈의 새, 파랑새가 날아오른 곳이고 그 아랫자락에 종진네의 농가와 외양간 있다. 그 앞집이 칠닥이가 농가로 얻은 50년 된 토담집이다.
토담집 뒷마당 감나무에 파랑새가 날아 온 것이다.
그 집의 원주인인 순창댁 오두막이 앞에 한 채 있다. 칠닥이네 앞은 수산시장의 활어차 운전하는 동갑내기 봉환네 그 오른쪽에 날건달 같은 성희네, 그 옆집은 귀농하여 친구가 된 갑장, 영철이가 산다.
길 왼쪽은 소격마을인데 산자락 밑에 이장인 충신이 집이다. 그 집 앞으로는 종암 호수가 넓게 펼쳐지고 파랑새는 호수를 건너 날랐고 칠닥이 겨드랑에 날개가 솟게 하였다.
호수 건너편에는 정경식의 농장 있고, 호수를 끼고 돌아 나가는 농로를 주위로 해서 말 못 하는 용후 씨네 집을 지나 용식이네, 이사남 씨, 송형섭 집을 지나면 유동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는 성진네 구멍가게가 격포로 가는 여행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삼거리 오른편은 부안 전주로 나가고 왼쪽 길은 격포해수욕장과 내소사, 곰소항으로 뻗는다.
비탈밭 옆에는 조각공원이 산자락을 차지하고 그 옆에 오건의 묘소가 있다. 묘소 밑에는 미망인 이준희 씨가 이쁜 정원을 가꾸었고 정원은 웬만하게 큰 방죽을 끼고 있다.
방죽을 주위로 도청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유기농 하는 백연의 집과 닭 농장이 있고, 같은 동네에서 복원이가 두부를 삶아 낸다.
도청마을은 다시 격포와 이어지고 격포에는 채석강이 있으며 그 정상의 팔각정 너머로 파랑새는 날아가 버렸다. 파랑새가 멀어진 저 먼 곳에는 석양이 아름다운 섬, 위도가 있을 터이다.
저 밑으로 영철이가 시티 100 오토바이를 타고 유동 쪽으로 달려간다. 뻔할일이다. 삼거리의 성진네 가게에 소주 마시러 갈 테지. 영철이는 안주를 아주, 먹지 않는다. 2홉 소주는 컵에 두 번 나눠서 마시는데, 유리컵은 냄새난다고 종이컵만 고집한다.
칠닥이가 소격마을에 이주를 와서는 정경식을 따라 동네에 떡을 돌리던 날, 저녁 늦게 마지막에 만난 이가 삼거리 성진네 가게에서 그렇게 소주를 마시고 있던 영철이었다.
어둑하고 칙칙한 코구녕만 한 구멍가게에서 성 난 곰처럼 웅크려 앉아 깡 소주를 비우던 영철에게 칠닥이는 흠칫했다.
“뉘여?”
하는 그는 동면하는 곰이 본거지가 탄로 난 듯이 표정이 사나워 보였다.
정경식은 돌아오면서 뭐라 뭐라 영철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칠닥이에게 전하며 이웃에 살더라도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러는 영철이를 칠닥이는 이사 왔다고 집들이하는 마당에서 또 만나게 되는데, 오토바이에 싸구려 화장지를 싣고 온 그는 삼겹살에 몇 절음에 소주 두어 잔 마시더니 얼마가 채 지나지도 않아서 송형섭과 사소한 시비가 붙었다. 그리고는 고래고래 욕설을 뱉어내고는 오토바이를 휑하니 몰고는 가 버린다.
"저런, 미친놈이 다 있당가." 송형섭은 황당해했다.
이렇게 대면하게 된 영철이가 어느 날 혼자서 일하는 칠닥이를 시커멓게 내려다보고 있다.
"아이고, 왔니 껴?”
뒷산에서 생솔을 잘라서 오리 우리를 만들고 있는 칠닥이 어깨 너머의 좀 높은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서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 짓는 곰 같은 이는 영철이었다.
“뭣이, 집에 이씅께 뚝딱거려 싸 궁금 하제. 집에 소주 있는가아?”
초면부터 대뜸 반말이다.
어둑한 부엌 아궁이 앞에 앉은 영철이는 컵에 소주 한잔을 커억하고 비우고는 안주 없이 그냥 입을 손등으로 쓰윽 훑고는 만다.
(하이고, 아 새끼하고는 만만찮네. 술 처먹는 꼬라지하고는 보통 술꾼이 아니다. 앞으로 꽤나 귀찮겠데이~)
영철이는 술을 입에 대면 꼬박 삼일 낮, 밤을 마신다. 삼 일째 되는 날에는 심하게 구악 질을 하며 눈동자가 발갛게 익어 있는 것이다.
“있는 가아?”
새벽바람에 영철이 부르는 소리 나면 칠닥이는 술상을 준비해야 했다. 토악질하지 않는 아직은, 그치가 술 먹는 첫날이나 이틀째라는 상황이다. 술상이라야 됫병 소주 내 오고 젓갈 같은 짠 안주 한 가지에 풋고추나 마늘쪽이면 된다. 종이컵 두 개에 한 잔씩 붓고는 단숨에 들이키는 영철이를 따라 칠닥이도 잔을 비운다. 식전이라 속은 비어 있었다. 꼬들꼬들 밤새 뒤틀린 식도 아래로 싸하게 소주가 내리치면 등뼈를 따라 내리는 짜릿한 느낌이 그대로인데, 밥통이며 창자가 화들짝 놀라 살아나면서 정신이 잠시 팽하니 혼돈스러운 것이 해장술은 그 맛이다.
칠닥이와 영철이는 그렇게 친구가 되어 갔다.
197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칠닥이는 이듬해에 성수동의 시계공장에서 하루 일당이 600원 하는 공돌이가 되었다.
영철이는 그해에 면목동에 있는 제재소에서 일꾼으로 일했었는데 1,500원을 하루 일당으로 받아 성수동 공돌이 보다 두 배가 넘는 일당을 받을 만치 고된 힘을 기본으로 하는 노동이었다. 영철이는 신접살림을 차리고 있었던 때다.
칠닥이가 고향에서 샘터서림이라는 책방을 하다가 대운이 형에게 불러와서는 서울 생활을 했다면 동갑인 영철이는 당시에 결혼을 반대하는 여자의 집에 항의하며 각시와 함께 야반도주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영철이 보다는 두 살 위인 종진이가 계화도에서 머슴을 살고, 성희는 덕섭이 양반네 정미소에서 기술을 배운답시고 일할 때요, 성실이는 산내의 술도가에서 막걸리 배달할 때였다. 성실이는 짐 자전거에 양쪽으로 막걸리 통을 걸고 출발하기 전에는 꼭 점방에서 껌 한 통을 산다. 한 통에 여섯 장이 들은 껌을 담뱃갑 옆에 가지런히 찔러 박고는 자갈이 험한 신작로를 내 달린다. 땀이 비 오듯 하여도 발길이 가벼운 성실이의 짐 자전거다.
“우~메! 니미너 헐~ 어따가.”
그가 지나가는 무렵을 미리 짐작하고 삽잡거리에 나와 있는 어린 차자의 뽀얀 가슴에 그 껌을 푹 찔러 박고는 삐쩍 거리며 유유히 사라지는 성실이다.
처자는 짐짓 놀란 듯 가볍게 속삭이듯 항의를 하지만 어쩌면, 한 통에 여섯 장이나 들어 있는 후레쉬민트에 중독되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봉긋이 세웠을 것이다.
성실이는 그렇게 원포에 있는 젖가슴이 부푼 아가씨에게 껌을 갖다 바치며 공을 들였다. 처자는 나중에 성실이의 아내가 된 원포댁이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 후에는 원포댁은 기가 센 딸애를 영철이의 색시같이 여린 조카, 정기에게 시집을 보내게 된다. 한 동네 지척에서 격자를 짠 듯이, 사돈이 된 셈이다.
“어~이 영철이, 일 가세나~”
국민학교를 3학년으로 학교의 끝을 낸 영철이는 벌써 그때 성희 아버지와 같이 품을 팔러 다닐 정도로 힘이 좋았고 솜씨도 야무졌다. 그러다가 영철이 아버지가 지금은 영후 형님이 소를 키우는 헛간에 가마니 기계를 들이자 그 일을 도맡아 하는 이가 여러 형제 중에서도 기계 다루는 재주가 있는 영철이었다.
농사가 끝난 가을철부터는 들판에 쌓아 둔 짚을 하나하나 사들인다. 경운기에 한 차 짚을 사 오면 영후 형님이 솜씨 좋게 마당에 반듯하게 쟁인다. 그러면서 기계를 돌려 가마니를 짜서는 산내며 격포며 혹은 더 멀리 곰소나 상서면의 정미소에 배달하기도 하고 필요한 농가에서는 사러 오기도 하였다. 때때로 광주로 출장을 가서 필요한 재료나 기계의 부속품을 사 오기도 했는데, 이런 일 대부분을 영철이가 도맡았다. 그러다 보니 영철이 주머니에는 항상 현금이 있었고 이웃의 종살이하는 종진이나 정미소 일꾼 성희, 술도가의 성실이 등 이런 부류에 비해 상대적인 어린 부자가 된 셈이다.
“그때는 참말로 신세가 좋았지라우.”
“그라이, 자네가 가마니 공장에 사장이 된 셈이 아이라? 어린 게.”
“그라제, 아부지는 본시 놀기 좋아하는 양반이라 맹 산내에 나가 계시고 기계고 돈이고 몽땅 내 수중에 있었네! 그려.”
영철이와 칠닥이는 깡소주를 두고 마주 앉으면 저마다 자란 환경에서 옛날이야기를 서로 털어놓는 게 큰 안주인 셈이다.
“성실이가 껌으로 원포 댁 꼬신 이야기도 재미있다마는 자네도 불알에 털이 솟자마자 은순 어메 만난 사연도 깊을 듯하다 어이?”
성실이가 껌으로 원포의 가슴 큰 아가씨에게 공양하고 성희가 격포 정미소에서 일하며 힐끗힐끗 해수욕장 관광 온 여자들을 히야까시할 때 영철이에게는 오로지 한 여성이 있었다.
유동 삼거리에 경숙이는 영철이 보다도 두 살 위였다.
가톨릭 신자인 그녀의 부모는 주변보다도 좀 깨서인가 당시로는 드물게 여식을 중학교에 보냈다. 또래의 머슴애들도 국민학교를 마치면 생활전선에 들 때였다.
누나 같은 경숙이는 일찍이 영철이의 눈에 들었다.
그가 성희 아버지를 따라 모내기 품 팔러 다닐 때 본 경숙은 새하얀 교복에 단정한 단발머리, 풀 먹여 날이 선 칼라와 그 끝을 타고 내려오는 곳에 가슴이 수줍게 봉곳이 내밀어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끝이 예쁘게 둥근 까만색의 단화에 역시 하얀 양말에서부터 곧게 솟은 뽀얀 정강이와 두툼한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는 치마 속으로 아련히 숨어 버린 그 모습이, 이른 아침 일을 나가는 길에서 목격되는 여중생 경숙이었다. 어쩌다 경숙이네 집에도 일하러 가게 되는데 영철이는 종일 그 댁 일에는 다소 혼란스러움에 평소와 같지 않게 매끄럽지 가 못 했다. 성희 아버지가 냅다 소리를 지른다.
“어~혀~ 아가, 여 엉철아~ 오늘은 어찌 그런 겨~ 영, 손발이 안 맞는당 께~”
오로지 그녀가 학교를 파하고 다시 볼 시간만 기다려지는 영철이다.
경숙이를 가까운 동네에서 살면서 영 모르지는 않지만 다소곳한 어린 여식이 깨끗한 옷차림으로 부모를 따라 마포의 성당을 나다닐 때나, 또는 달리 고상한 교복 차림의 등굣길에 나선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설렘으로 이미 성숙한 여자로 보였다.
영철이는 알 수 없는 욕망이 일고 새삼 결심이 선다.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솟았고 끙,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금세 커 가는 봄 병아리는 알을 깬 지 한 달이면 그 크기가 알 무게의 몇 곱절이 된다. 아무래도 수평아리의 성장이 빠르다 보니, 몇 개월이 지나면 만날 쫓기던 사내놈이 어른이 되어 버린 누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장닭의 꼬리털이 제법 모양새를 갖출 만할 때쯤에 성에 일찍 눈을 뜬 어린 장닭은 누나 주위를 맴돌며 시위를 하는데, 한 날개를 쭉 넓게 펴서는 한쪽 다리에 울타리 치듯이 위용을 보이며 꾹꾸 꾹하는 소리와 함께 땅을 긁으며 나 여기 있소!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소롭다는 듯이 덤비는 어린 수놈을 향해 마구 부리를 쪼아대는 어른 암탉도 날이 갈수록 그 위세에 뒤지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덮치는 놈에게 억울한 분노를 거칠게 행사하기는 하지만 한 번 몸을 허락한 누나는 빠르게 어린 장닭의 여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내가 말임 시, 여즉 살면서 딴 여자들에게는 함부로 해도 암시렁 않는데, 은순 어메 대한다는 것은 늘 어렵단 말임 시. 그러던 여자가 말이여 그쪽 처가 반대가 있고 해서는 서울로 야반도주하자고 손목을 끌 당시는 그저 말업시 따라나서더란 말임 시.”
“그기이 지금도 그렇지만 한창때 자네 힘이 좋아서 그런 거다 조으이 그런가 보제.”
“아, 이 사람아 당시는 만나면 부둥켜안고는 그저 주물럭거리기만 했제, 거시기 맛도 몰랐지라우. 불알이 채 영글기나 행능 강?”
영철이는 소주 한 글라스를 꿀꺽 삼키고는 그것을 마치 뱀처럼 식도 안으로 밀어 넣듯이 꺼억 꺼억 목줄기에 힘을 주더니, 눈알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눈알이 익어가는 모양새가 오늘이 술버릇 삼 일째 되는 고비인 셈이다.
“어째, 첨부터 날 보듬어 주는 어메 같은 여자라는 느낌이였제. 면목동에 제재소 노가다 하믄서 아기들 낳고, 그러면서 공사판에 배관이나 용접이나 노가다 십장이나 해서 맹 벌어서 다 술 푸고 여자들 집적대고 그랐제. ”
일단 여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부터는 나다니기만 하고 가정 살림은 각시가 온전히 책임진 상황이 줄곧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칠닥이가 성수동 시계공장에 막 취직했던 때이던가 종로의 한림출판사에서 월부책 장사로 서울의 변두리 골목을 누리던 그 당시이었다.
"꺼 어 억~"
영철이 취기가 이제는 목에 찬 모양이다. 쉼 없이 술을 마시는 날이 삼 일째가 되면 유난히 힘들어한다. 도가 더 지나쳐 죽은 듯이 뻗어야 만이 또 한 삼 일을 술을 쉬는 것이다.
영철이는 힘이 좋아 아무 일이나 척척 잘해 냈지만, 그의 짓궂은 생활 습관이나 바람기에 누나 같은 아내 경숙이는 늘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여자가 둘이 있다면, 말이쎄. 게 중에 못생긴 여자를 막 좋아하는 것이여~”
“아이, 왜, 이쁜 여자를 놔두고?”
“암싸~ 그라제~ 이쁜 여자가 열 받는 것이제, 뭐가 부족해서 저 여잔가 해서는 자존심 상해 나 좀 봐 하며 막 덤벼든다 말임 씨~”
영철이가 자기 경험을 칠닥이에게 한 수 가르친다는 듯이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이다.
영철이에게는 여성 편력의 천성적인 끼가 있었는가, 어린 시절부터 연상의 경숙에게 그 장닭과 같이 집적대기 시작하여 술집에 가면 주모에게, 공사장에서는 일 나온 여자일꾼에게도 그냥은 지나치지 않았다고 한다. 귀향해서는 소 장수 마누라나 순창댁 하며 병준이 각시며 안산의 순해 씨 등 그 여자를 향하는 의욕은 칠닥이가 보기에는 끊임이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철이가 여자에게 관심 있는 부분은 그들의 젖가슴을 만져 본다든가 음부를 살펴보는 것에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약간은 변태적인 부류라는 점이다. 그의 경험담 대부분이 섹스 자체보다는 만지고, 보고했다는 이야기다.
“아, 병준이 각시가 젖탱이 한번 만져 보라 하두만~ 담에는 밑에도 보여 준다고 않하던가아~” 그런 그것에 대단히 만족하고는 하였다.
그렇게 근 이십 년을 서울 생활하던 영철이가 오랜 노동으로 허리가 편치 않다는 핑계를 대고는 홀연히 시골로 낙향하였다. 그는 동생 인철이의 빈집을 인수하기까지는 큰형인 영후 형님네 머슴방에서 생활하게 된다. 기골이 장대한 그가 고향으로 내려오자 그냥 두지 않고 밤마다 소 장수 마누라와 순창댁이 번갈아서 찾아오고는 하였단다. 소 장수 마누라를 즐거이 대하고 보내고 나니 살포시 방문을 열어젖히는 이는 순창댁인데, 온몸이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다.
"워찌, 몰골이 그 모냥이던가?"
"하고메~ 말도 마소 잉. 인자 초저녁인디 봉당에 소 장수 마누라 고무신이 있잖는가? 화들짝 놀라 도망가다가 논두렁에 엎어졌지라우."
그러나 순창댁은 그 여편네가 돌아가기를 여즉, 기다렸노라며 우쭐하며 영철이가 덮고 있는 이불자락으로 몸을 비비며 들더라는 것이다.
"그랑께 나 좀 마니 사랑해 주소 이 잉~"
그렇게 세 꼭짓점을 이루던 그들의 삼각 사랑 놀음도 서울서 두 딸애의 학교 바라지 하던 은순 어메가 결심을 굳히고 귀향함으로써 끝이 났다. 소 장수 각시와 순창댁도 한동안 보신으로 맞던 살 주사가 아쉽게 중단되고 만 것이다.
"하고메야 하던 짓거리를 못 하게 되었쓰이 어쩨쓰까?"
"그라제, 이유 없이 몸이 쑤시고 밥맛도 없제으 이?"
두 아낙은 아쉬움에서 억울해 까기도 했고 인철이 처 은순 어메의 손아래 동서가 그동안의 영철이 근황을 낱낱이 그 형님께 일러바쳤으나 은순 어메는 묵묵부답이다.
은순 어메의 침묵은 병이었다.
어린 나이에 야반도주하듯이 영철을 따라나서서 코 베어 간다는 서울 생활하면서 자신은 오롯이 희생의 표상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들어 오는 영철의 모습에서 가정 살림을 책임지려는 기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오지 않는 날이면 그날은 색시가 있는 술집에서 마시는 날이다. 이런저런 기술을 좀 익히자 공사판으로 나돌았는데 갑자기 일꾼들을 몰고는 들여 닥쳐서 돼지고기도 삶아야 했고 생닭도 고아야 했다. 신새벽 어질러진 술판을 설거지하며 동시에 출근 준비를 해야만 하는 영철이 처는 남편과 함께 산 세월이 아니라 철부지 큰아들을 두 어린 딸과 함께 키워야 했다. 일터에 나가는 어미를 울부짖으며 쫓아오는 은진이를 육교 밑에서 따돌리고 아이가 포기하고 집으로 가는 걸 확인하고야 발걸음을 일터로 향하고는 했었다.
영철은 그렇게 평생을 의지하던 제 각시가 신병을 앓게 되고, 남편조차도 귀찮다고 소원해지고 하더니 한 번은 잠적해서는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하는, 과정을 몇 년 겪더니 영철이가 심각한 심적 충격을 받았다. 2007년 스스로 농약을 마시고는 저승의 사람이 되고 만다. 먼저 마음의 병을 앓은 아내를 봄으로써 병을 얻어 견뎌 내지 못한 남편, 불행한 부부관계가 끝을 본 것이다.
도로 도시에 노동자로 전락한 칠닥이가 우연히 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 그 이듬해 서울 구로구 구로동 옥탑방에서이다.
"오형! 내가 없어지면 우리 은순 어메와 은순이, 은진이를 자네가 좀 맡아주게.”
언젠가, 한겨울 사랑방에서 영철이가 술에 취해서 내뱉는 말에 은순 엄마나, 칠닥이는 주정 소리로 듣고는 같이 웃었지만, 칠닥이는 날 선 칼날의 선뜻함을 느꼈었다.
이른 아침에 영철이 감자 두 박스를 오토바이에 싣고 불이 나게 내 달린다.
이미 가랑비가 촉촉이 뿌리는 터라 몸을 잔뜩 낮추고는 얍삽하게 비를 피해 보자는 자세이다.
영철이의 처세술이다. 요즘 배 탄다더니 선장이나 해녀들에게 제집에서 캔 감자를 퍼다 나르는 것이다.
낯선 땅에서 칠닥이가 영철이와 친해지면서 이 친구가 곧, 잘 산 내 山內의 변산반점에서 간짜장을 사 주거나 격포항 회 센터에서 주꾸미나 횟감, 뭐 그런 것을 얻어 주곤 하는데 희한한 것은 영철이가 그 값을 한 번도 치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례 주지 않거나 어쭙잖게 일부러 값을 건네도 주인이 한사코 받지를 않는 것이다.
"먼 소리여, 갑슬 다 치루고 그런당가~ 내가 원지 돈 받던가?"
"물견 주고 돈도 안 바드라우?"
그뿐만 아니라 그 집에서는 수시로 수산물 같은 봄 주꾸미나 가을 전어나 철마다 뱃사람들이 집에다 어획물을 한 방탕이 쏟아붓고 가곤 하는데, 영철이는 그저 시큰둥하게 간단한 인사만 할 뿐이다. 보는 칠닥이가 다 고마울 뿐이고 무던한 영철이 대신에 미안할 지경이다.
"고맙심더! 고맙……."
"어!, 따, 물견은 내가 받고 인사는 자네가 하는 강?"
영철이는 그렇게 생긴 가을 전어, 한 다라이를 칠닥이네 우물가에 쏟아붓는다. 다소 난감해하던 칠닥에게 영철은 손질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요로 코로, 요로코 장만 해설랑 냉장고로 집어 넘 됨씨."
한 바켙스, 밤새 그놈을 배를 따고 비늘을 치며 손질하다 보면, 다음날 일찍 영철이 뭘 가져오는데 이번에는 손질이 다 된 깨끗이 한 전어 한 바가지 또 가져온다.
“우와~ 미치겠다. 저 많은 것 우리 세 식구가 언제 다아~? 먹노.”
영철이는 공짜로 뭘 얻거나 먹거나 할 때마다 칠닥이에게 으쓱거리며, 변산 바닥에 제 위치를 확인시켜주려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는데, 새로 사귄 친구에게 뭔가는 보여 주고 싶은 위용이 귀여웁다 해야겠다.
영철이가 그렇게 칠닥에게 위용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부지런한 그가 제집에서 나는 농산물 중 다소 처지거나 넘쳐나는 것을 마구 산내나 격포 바닥의 알만한 이에게 미리 뿌려 놓는 것이다. 제 것뿐 아니라 형님네 꺼나 동생네 꺼나 그런 농산물 있다면,
“성님, 저 밭에 마늘쫑 피는 거이 쎄지는 구마~ 몇 단 뽑아 가야겠소!”
그렇게 얻어서는 필요한 집에 필요한 농산물 정확히 배달해 두는 것이다.
짜장면집에, 양파나 대파를, 횟집에는 깻잎이나 풋고추를 날려다 줬다면, 까짓것 짜장면 한 그릇이나 얼마큼의 횟감 정도야 대수겠는가.
칠닥이 또한 고추장이며 된장, 생김치를, 여름에 통수박하며 안 얻어먹는 게 없는지라. 영철이 버릇이 칠닥이에게 뭘 주면 반드시 다음날이나 다음, 다음날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먹었는가 안 먹었는가? 하고는 친절히 확인하고서는 성적이 불량하면 어김없는 잔소리가 따른다.
“아! 이 사람아 어영 머거~”
칠닥이네 식구는 부지런히 먹어야 하는 사역 使役을 해야 했다.
특히, 기술이 필요한 허드렛일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포장마차 제작까지 돈 한 푼 받지 않고 깔끔히 해결해 주니 칠닥은 그의 꼬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하는가? 차 가지고 부안 좀 갔다 오세~"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처세가 대단한 그를 그의 아내는 그윽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흐뭇해하고 대견스러워 하기 때문에 영철이 맨 날 술에 찌들어 씰데 없는 물건을 마구 사다 날라도 굳건히 남편의 자리는 지키는 갑다.
언제부턴가 영철이가 아쉬워지고 보고 싶어지면서 그 둘은 친구가 되어 가는 것이었다. 요란스럽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영철이는 계산하지 않는 물물교환, 정을 바탕으로 한 나눔의 미덕을 생활로 보여 주는 것이다. 배웠다는 사람들, 티브이에 나오는 강좌에서나, 책에서 인간성 회복이 어쩌고 조상의 미덕이 어쩌고 하는 빤질거리는 낯짝보다는 영철이의 시커먼 얼굴에 더 정이 가는 이유이다.
칠닥이는 영철이와 친해지기까지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얼른 대하기에 그는 그리 수월한 성격이 못 된다. 칠닥이가 귀농하여 소격포에 정착하기까지는 영철이에는 사실상 친구가 없었다. 그러다가 비위를 맞춰주는 동갑내기가 생겼으니 여간 좋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종종 칠닥이에게 집착하는 행동도 보이기도 한다.
"지, 마누라 어 여~"
누가 둘의 관계를 물어 오면 숫제 마누랍네 하면서 자랑스러운 듯 입을 씰룩거리고는 하였다.
깊이 사귀어 보면 그 성격도 이해할 만하고 그저 적응할 만하지만, 초면에 대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꽤 곤란스러운 그런 존재이다.
"야 아는 말이래, 첨 만나는 사람이 보면 말이래 디기 시건방지고 싸가지 없게 생겼글랑."
"헤 헤 헤 내가 그래 보이니껴?"
"그래, 우리하고는 아래윗집 사랐쓰이 칠닥이하고 친구가 되었지 안 그라믄 니는 친구 사귀기가 힘들었을 께다."
익준이와 칠닥이, 개동이가 소금 집의 상진이가 하는 포장마차에서 마주치자 인사도 불손하게 하는 익준이더러 개동이가 하는 말이다. 익준이 성품은 그랬다. 누가 손 잡고 끌어서 악수라도 시켜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친구 한 명을 맺기 힘들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영철이나 익준이가 많이 비슷한 성격이라는 게 칠닥이의 느낌이다.
소격포에는 영철이와는 동갑내기가 딱 한 명 유 충신이가 있다. 충신이는 소격포 이장이다.
"나는 놉 얻으려 이장 한당께?"
충신이는 농사 규모가 크다. 그 때문에 인력을 빌려 쓰는 게 농사의 성패를 좌우할 만치 중요한 점인데 그래도 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동네에서 놉을 얻는데 상당히 유리하는 이야기다.
"쟈는 놉 쓰자고 이장한당께!"
결정적일 때에 매번 인력을 충신에게 뺏기는 영철이의 불만이다.
"순창덕, 낼 뭐하시는 강?"
"이장덕에 꼬치 딴 당께!"
영철이는 쓴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영철이가 채 수급 못 한 인력을 주로 그의 장모가 메꿔 주었다. 동네에서는 이장 충신에게 놉을 빼앗기고 유동 삼거리에 사는 연로한 장모가 딸이 걱정되니 놉을 대신하여서 한여름 담뱃잎 따는 철에는 아예 와서 살 듯이 하는 것이다.
칠닥이가 비록 초보 농사꾼이기는 하지만 영철이에게는 든든한 우군 友軍인 셈이다.
1979년 10.26 당시에 노태우는 9사단장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노태우에게 전화한다. 10.26 사건을 알리고 범인은 차지철이라고 말한다. 사건 당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현장의 몇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10.26을 보내고 12·12사태 때 노태우는 9사단 특수병력을 청와대와 총리공관으로 보내는 동시에 29연대 병력은 중앙청 앞으로 집결시켜서 대통령 최규하와 정부를 장악한다. 9사단은 일산, 파주지역에 있는 전방부대이다. 이런 전방부대 병력을 위수령 이탈시킨 것은 전시에는 총살감의 엄청난 사건이다. 안보를 팽개치고 정권찬탈이 목적인 이 행동으로 전두환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노태우는 전두환을 잇는 2 인자의 몫을 차지하게 된다. 12·12사태와 5.17 계엄 확대 조치 후에 김종필은 부정축재 자로 구속이 된다. 노태우는 그를 보안사 안가로 불러 선배 대접을 한다. 당시 신군부 무리 중에서 김종필을 선배로 대우해 주는 이는 노태우가 유일하였다. 이는 노태우의 처세가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이때 김종필이 노태우에게 2인자로써 길을 충고 한다. 이 교훈은 노태우가 끝까지 발톱을 숨기고 허삼수, 허화평이나 권정달이와 같은 경쟁자를 따돌리고 결국은 후계자가 되는 지혜가 된다. 전두환으로는 노태우라면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며 막후 정치를 할 수 있겠다고 믿었다. 1987년 6월 3일 민정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서 만장일치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결정한다. 전두환에 이어서 체육관 대통령으로 당선이 보장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민주화운동으로 저항에 부딪힌 집권 세력은 6.29선언을 하게 된다. 6.29 발표 일주일 전에 전두환은 청와대로 노태우를 호출하여 직선제개헌을 꺼낸다. 처음에는 반발하던 노태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노태우는 6.29를 자신의 구상으로 해 달라는 것과 김대중을 사면복권 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을 계산한 것이지만 언론, 국민, 야권은 물론 김영삼, 김대중 조차에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큰 사람, 노태우로 인식된다. 노태우의 62.9선언의 영향력과 보통 사람의 기치를 걸고 1노 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선거전 막바지에 접어들어 12.12의 피해자 정승화가 김영삼을 지지하는 기점으로 가장 유리한 쪽은 김영삼이었으나 이 현상의 반전을 일으킨 것은 KAL기 폭파사건이었다.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파사건으로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다.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가 대통령선거 하루 전에 김포공항에 입국하면서 유권자의 안보 심리를 크게 흔들면서 노태우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어 갖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당초 상왕 정치를 꿈꾸던 전두환은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그 꿈은 산산이 무너진다. 여소야대의 국정운영에 주도권을 뺏기자 야당은 일제히 5공 청산을 주문했다. 급기야 전두환은 백담사로 유배를 당했다.
나중에 김영삼에 의해 내란죄로 노태우와 나란히 구속된 전두환은 담당 검사에게 한마디 한다.
“김 부장, 당신도 동기생을 조심하시오! 당신이 높은 곳에 오르더라도 동기생을 중요한 자리에 앉히면 안 돼~”
장례식장을 떠돌던 칠닥이의 영혼이 다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분주한 동생들과는 달리 고상한 자세로 눈을 내리깔고는 구석 한 자리를 차지한 금자를 발견한다.
“하이고 금희야, 금미야. 너그 형부도 좀 챙기그라이. 저 양바이 우짜자고 술만 마시노 어이? 우리는 벌써 이틀째 가게를 비워 두고 있네. 아까워래이, 아까워.”
‘저런, 돈만 그리는 싸가지 하고는.’하다가
칠닥이가 울컥 측은지심이 든 것은 금자의 과거 서러운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칠닥이의 아내는 첫아이 강하를 출산하자 더 없이 유세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장모는 숫제 딸 옆에 붙어 있었고 가게를 하는 처형이 다녀가고 서울서 대학원 다니는 처제가 내려오고 안동고등학교 교사인 처남과 처남의 댁이 처조카들을 이끌고 올라왔다. 노산을 염려한 끝에 온 집안의 축하가 봇물 터진 것이다. 칠닥이는 두루두루 유복한 그 가정에 이상하리만큼 괴리감을 느꼈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유복하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생경함이다.
칠닥이가 내키지 않는 새로 이사를 한 번 가 本家를 찾아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 오 부자는 제재소 뒤에서 세 사는 집이 매매 買 賣 되므로 서 쫓겨나 옛 금선옥이라는 술집을 새로운 고물상 터로 얻었는데 기생집 妓生 屋답게 정원이 있고 술방 廚房이 여러 개 있는 것이 고물상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터였다.
그 집 방문에 빠끔히 얼굴은 내민 이가 누나 금자였다.
금자는 둘째를 출산하기 위해서 명색이 친정에서 몸조리하고 있으나 그녀를 수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휴업상태인 고물상 형편에 어머니 봉순이는 생계를 위한 날일을 다니고 금자 혼자만이 집에 남아서 스스로 몸조리를 하고 있었다.
“아는?”
“아? 젖 잘 묵고 건강타.”
“머로, 미역국은 낄여 먹고 있나?”
“그래, 엄마는 일찌가이 일 나가고 내가 낄여 먹꼬 있다.”
칠닥이는 돌아서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방문을 여는 금자의 얼굴이 형편없이 부어서 핏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몰락한 친정을 제 신랑에게 보이기 싫어서 신랑의 방문을 마다했을 금자였다. 습하고 어두운 동굴에서 출산과 생존을 위해 몸서리치던 암 짐승의 모습이 떠오른 칠닥이는 오만한 금자가 오만함 그 조차가 오히려 측은해져서 영혼의 발길을 조용히 돌렸다. 아들과 조카가 비슷하게 태어났지만 산모 産母의 처지는 처와 누나가 확연히 달랐다.
칠닥이의 장례식도 이틀째 접어들었다.
낮에는 문상객으로 번잡하다가도 밤이 되면 한결 한산해졌다.
첫날 밤부터 노름판을 주도하던 찐구와 그 무리는 날이 새고 잠시 주춤하더니 초저녁에 아예 주변의 여관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판돈도 몇 곱절이 커졌다. 막내는 부조 계의 중간 결산을 해 본다. 개동이는 술에 절어서 중국 영화에 등장하는 강시의 모습을 해서는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는 하는 것이다.
"원망하지 마! 원망하지 말라꼬~ 응? 나를 원망하지 말거래이…. 음…." 눈빛이 풀려서는 허공에다 중얼거리다가는 쓰러져 잠들면 대여섯 시간이나 시체처럼 굳어 있다가는 일어나 국밥 한 그릇에 소주를 한차례 몇 병이고 들이키면 또다시 쓰러졌다.
아들 강하도 아버지의 죽음에서 충격에서 벗어난 듯 다소 평온해 보였다. 딸 하정이는 칠닥이의 장례식장에서 성심껏 봉사를 이어가는 지하 방 여인을 쫄 쫄 따라다니며 시비를 하고 있다.
"아니 육개장 솥에 그렇게 물을 부으면 어떻 해욧?"
"호 호 얘야 이제 손님이 뜸하지 않니? 그냥 두면 졸아서 짜진단다. 호 호"
(얘야? 썅, 지 딸 대하듯 하네. 아빠의 미망인이나 되는 듯이 휘젓고 다니는 저 여자가 너무 재수 없어!)
다른 형제들도 제각기 자리를 찾아서 한숨을 쉴 즈음에 부조 계에서 약간은 소란스러웠다.
"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소! 말이."
"마 마 막내야, 파 판이 크다니까? 미 미 미 밑천을 드리대면 바 바 반드시 때때 때 땡긴다이 카이!"
노름판을 키우고 사기 도박꾼을 부른 찐구가 막내에게 노름 밑천으로 부좃돈을 빌려 달라는 것이다. 하이에나, 사자가 먹다 남긴, 파리 떼가 왱 왱 거리는 동물의 사체 찌꺼기를 뜯고자 한다. 야비한 눈빛이 번들거린다.
장례식장은 고요 속에서 밤이 깊어 간다.
"어이, 보게. 어머니가 쓰러졌네. 자네 누구한테도 말을 말고 조용히 어매집으로 좀 오소!"
칠닥이가 받은 영철이 전화는 엄중하였으나 이상하리만큼 그 목소리가 조용조용하였다.
칠닥이가 영철이 어머니가 사는 영후 형님네 집에 부리나케 들어서니 영철이가 부르는 소리는 집체의 뒤꼍에서 들려왔다. 그곳에서 쓰러진 어메를 영철이가 부여안고 있고 어메의 손에는 농약병이 쥐어져 있는 것이다.
"어메가 약을 잡섭네. 자네, 오토바이 타고 소문 안 나게 우리 형님하고 은순 어메를 조용히 불러오게. 형님은 격포 정미소에 왕겨 담을 것이고, 은순 어메는 우리 집 하우스에서 고추 말리고 있을 터이네."
어메는 시커멓게 영철이 무릎에 누운 채로 고개가 뒤로 젖혀져서 눈을 무겁게 감고 있다.
영철이 어메의 장례식은 부안병원 장례식장에서 병사 病死로 삼일장으로 치러졌다.
"형님은 모르겠소 잉. 영철이 형, 저세상으로 갔어."
"갔다니 그기 몬 소리고?"
"약 먹었우라우! 크라막숀으로다."
크라막숀은 제초제 중에서도 가장 독한 농약이다.
2007년 칠닥이는 안산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의 구로구 구로동에서 마을버스 운전자로 자리를 잡는 번잡했던 몇 개월을 보내고 나서 간간히 편치 않은 전화를 해 오던 영철이 생각이 번쩍 들었다. 웬일인지 연락이 닿지 않자 유동 삼거리의 점방 店房집 성준에게 소식을 물어본 것이 뜻밖에도 그는 영철이의 자살 소식을 전해 오는 것이다.
지 어머니가 손아귀에 움켜잡고 돌아가신 그 약으로 어메 뒤를 쫓은 것이다.
칠닥이는 어릴 때부터 소 떼라던가 양 떼나 말이라던가. 개 그리고 마차, 괭이, 삽 장화…. 대륙, 평야 그런 것을, 영화라던가 풍경으로 대하면 마음이 설렜다. 형성된 취향도 그러하겠지만 중학 시절에 대하게 된 할리우드의 영상에서 문화적인 영향이 겹친 것 같다. 70년대에 텔레비전이라고 하자면 부잣집 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분은 만화방에서 구경할 수 있던 첨단 문명이었다"
미국 티브이 드라마 (로-하이드)는 드넓은 초원을 동경으로 키워 주었다. 카우보이의 흉내 내기에 빠져들었던….
중학 2학년 때 동네 아이들 기헌이와 승학이랑 토끼를 공동사육해 보기도 하였고 아버지가 오부자의 양계업에다 양돈으로 이어지면서 칠닥이 스스로 축산에 흥미가 생성되었다. 수 마리로 시작한 토종닭 치기는 칠닥아가 세 개 학년을 오르는 동안에 백여 마리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자연스레 동물을 좋아하게 되었던 칠닥이는 동물의 왕국이나, 네쇼널 지오. 그래픽의 아프리카 이야기는 봤던 거 또 보고 보고해도 재미있어한다.
도시에 살면서도 잠재되어 있던 그런 취향이 우연히 비봉출판사의 "한국 농업 이 길로 가야 한다."를 탐독하고는 불이 붙었다.
"출판사이지요? 하이고, 이런 책을 출간해 주어서 고맙니더"
중년에 접어든 칠닥이를 다시 옛꿈으로 돌아가는 계기를 만들어 준 책의 출판사에 일부러 고마움을 표시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은 혹독한 군사독재의 압박이 다소 완화된 시기였다. 사회에서는 의미 있는 시민운동으로 대표적인 단체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환경운동연합이었다.
칠닥이는 경실련에 가입하고 활동하면서 김성훈, 장원석, 김완배 교수 등 혁신 농학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의 논리에 크게 공감한다. 그런 계기로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고는 이어서 귀농본부에 교육도 받고, 이러한 일련의 진행 중에서, 전라도 변산의 유기농 생산 단체에서 농산물 운반차를 운전하면서 실무를 볼 수 있는 간사를 구한다기에 그곳에 투신하기로 했다.
물론, 이상일 뿐이라며 주위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면서 어릴 때부터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했던 것이 돈도 땅도 없는 귀농을 감행하게 된다."
그곳 변산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들과 상견례를 가지고 다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마뜩잖던 그들이지만, 어디 시골서 박봉에 일할 사람이 흔하기야 하겠는가 해서 어쩔 수 없는 승낙에, 안산 살림을 정리하게 되었다.
근 한 달 정도의 그쪽 빈 농가의 수리며 무엇이며 하면서 두 아이를 거닐고 변산반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두려움과 생소함에도 빠르게 적응해서 갔고 특히나 딸아이는 잘 왔다 싶을 정도로 시골 생활을 즐기기조차 하였다.
단체의 실무를 인수 받는 중이었다. 동네의 품을 팔면서 그쪽 사람이 되어가는 한여름 어느 날, 농일 農事를 마치고 술에 취해서 자는 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 통화가, 칠닥이의 귀농생활의 첫 시련이자 가장 어려운 현실을 안겨 주는 계기가 되고야 말았다.
느닷없이 밤중에 전화를 건 사람은 귀농본부에서 교육을 받았던 교육 동기였다.
실상사를 다녀오던 길인, 동기는 늦은 시간에 부안에 도착했고 차편이 끊긴 그는 취해서 자는 칠닥이를 깨우게 되었다.
무심코 마중에 나선 그는, 그것이 음주운전이었고 설마 차 몇 대 다니질 않는 시골구석에서 단속이 있으리라는 생각이나 짐작조차도 하지 않았다.
결과는 황당한 면허취소였다.
이 상황은 도대체 대책이 서지를 않는 일이 되고 말았다.
농사하기 위해서 농촌으로 이주했고 그동안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생산지의 차량 운전인데, 낯선 객지에서 두 아이 아빠의 손과 발이 잘린 움직일 수 없는 빈 몸뚱이일 뿐이다.
면허취소 행정절차를 진행 중이던, 부안경찰서에서도 그의 처지와 형편이 안쓰러웠던가 어느 날 민원실로 불러서 간혹, 생계형인 경우에, 총리실로 진정을 넣으면 구제되는 예도 있다며, 방법을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초면의 동네 분들에게 읍소를 하며 진정서를 받아 여러 가지 다소 복잡한 절차를 밟아 전주에 있는 도 道 경찰국 무슨 부서로 구제요청을 접수하고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음주운전 근절을 강조하던 때여서 불안했었는데, 두 달을 기다려 받은 행정 우편의 내용은 "귀하의 개인 사정이 아무리 다급할지언정 사회기강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재고할 수 없음"이었다.
그맘때쯤, 총리 김종필은 정치자금 100억 수수설이 불거졌드랬는데, 그런 일이야 사회적인 기강과는 별개였던 모양이다.
아이들까지 전학시킨 마당에 생활을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생계 수단을 잃어버리고 시골구석에서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이르고 말았다.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번 겪은 시련 중에도 첫 번째였을 뿐이다.
운명의 여신은 칠닥이의 몸에 바짝 붙어 있었다.
14쪽, 201매.
(현대사- 노태우 2 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