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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새벽에 출근하여 폐쇄병동에서 6시부터 환자와 면담을 시작하면 11일간 밤을 병원에서 잠자며 다음주 금요일 새벽5시17분 한대앞역에서 첫차로 3호선 전철에 오르면서 퇴근합니다. 무악재역에 내려서 집에 도착하면 아침7시가 됩니다. 4개월전부터 안산연세병원에서는 금요일 오전진료를 쉬라며 근무를 빼주었으니 2주마다 3일간 푹 쉬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 최근에는 휴가를 자주 얻은 기분이 듭니다. 거의 종일 점심때의 잠시 쉬는 시간도 없이 면담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정신과의사로서 환우들의 삶에 대한 여유와 안정보다는 일상으로 돌아기 위하여 약물조절에 급급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입니다. 회원이 24600명을 넘어가는 [조현병을 이겨낸 사람들] 카페를 운영하다보니 스스로 만든 덫으로까지 여겨집니다.
금요일 오전엔 아내와 함께 안산 자락길로, 메타스카이어 숲길에 다녀왔습니다. 요즘 뜬 눈으로 유튜브 뉴스를 듣다가보니 선잠을 자는 편입니다. 언젠가부터 문프의 언행이 자살자 노무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려가 많은 트럼프조차 대한민국을 문 행정부(Moon's Administration)라 지칭하며 문프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여기지 않는 행태를 자주 보여줍니다.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노익장들이 광화문에 토요일마다 모인다고 하니 가보고 싶어졌었고, 와보니 70대, 80대 노부부들의 나라를 위한 근심어린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삭발의 원조였다는 박찬종 변호사의 아내가 '당신도 다시 삭발을 해야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서 '생각해 보겠다' 대답했다며 조갑제 티비에서 청중들을 웃겼습니다. 조갑제가 10월3일에는 꼭 나와서 100만명 인간띠로 청와대 에워싸기에 동참하라니 벌써부터 한번은 가보고 싶은 맘으로 의과대학 시절 종강파티를 자주 했었던 <대성집>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28일 토요일 아침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는 <양자물리학> 영화를 보러 아내와 함께 대한극장으로 갔더니 요즘 세태를 비꼰 코메디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대한극장은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조조가 아니어도 항상 5천원이니 자주 충무로로 나가보실 것도 권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안국역에 내렸습니다. 조계사 뒷길로 걸어서 광화문 가까이 가자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의 축제장 같은 분위기입니다. 원조30년전통이라는 <무교동낙지> 식당을 하나 찜해두었습니다. 교보빌딩으로 더 다가가자 마이크로 떠드는 소리는 아마도 전희경 국회의원 목소리로 들렸습니다. 길을 건너서 동아일보 건물을 보니 50년 전의 모습 그대로여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여백을 사려고 뒤가 캥기는 모습으로 몇 번이나 들렀었던 1층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난데없이 넓은 커피숖이었습니다. 44년전 1975년1월 1층의 긴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습니다. 고등학고 2학년 여름방학때 해인사에서 알게 되어 오랜기간 조우했었던 당시 김순경 사진기자 생각이 났는데 지금은 생사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나 해직기자가 되었고, 이후에 소생은 한겨레 신문사의 소액 주주가 되었지만 1985년 방배동에 <권영탁신경정신과의원>을 개업하면서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을 6개월간 비교하며 구독하다가 결국 한겨레신문을 끊었습니다.
청계천광장에서 청계천의 맑은 물줄기를 보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서린동의 허름한 <유림낙지>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옛날 명동 할머니집 낙지 맛은 없었습니다. 장수막걸리를 4천원 주고 1통을 마셨으니 지금껏 마셨던 막걸리 중에는 가장 비싼 막걸리였습니다. 길을 건너 신신백화점 옆골목의 한일관을 찾아보려 했으나 어디에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길을 건너 인사동 골목길로 접어들자 인파에 조금전 광화문의 분위기는 사라졌습니다. 늙은이의 우려보다는 젊은이의 청춘은 그 자체로써 아름답고 보기에 좋습니다. 그러나 저런 아름다움도 베트남이나 미얀마나 캄보디아 같은 꼴이 난다면.. 생각만 하여도 끔찍합니다.
갈증을 느꼈는지 인사동 길거리에 줄을 서서 사먹는 아이스크림 3천원짜리를 빨면서 안국역으로 올라오다가 이쁜 꼬깔모자을 파는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순간 2주마다 모친의 휠체어를 밀며 안산동산교회로 향했던 모친의 머리에 씌워드리고 싶어서 2만원 카드결제로 샀습니다. 안국역에서 올라오자마자 보였던 붕어빵을 안 사고 지나쳤다가 점심을 먹을 때까지 생각이 났었습니다. 2천원만 주머니에 있어서 현금이 다라며 주었더니 붕어빵 6개를 담아 주었습니다. 붕어빵의 맛나는 팥맛을 음미하며 막걸리 2사발에 약간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오는데 머리가 안 보일 정도로 잠바를 뒤집어쓴 채 엎드려 떼묻은 두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어서 따스한 붕어빵 한개를 무심결에 놓고 한발작 내려오며 뒤돌아봤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자동적으로 도로 올라가 또 한개를 놓았는데 금세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에휴, 내가 뭘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지나쳤다가 무악재역에 도착하는 내내 맘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앵벌이가 아님을 느꼈으면 남았던 2개를 다주고 왔어야 했었다는 자책이 계속 들었습니다. 앞으로 내민 스스로의 똥배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연일 떠드는 조국 같은 폐족이 우리 의과대학동창 주변에는 1명도 없음이 다행입니다. 문프와 이인영이 부추긴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조국을 지지하는 관제데모 뉴스를 보며 '그래, 10월3일에는 또 광화문 무교동에 나가 볼꺼야..' 함께 떠들 친구들도 오겠다니 소아과 병해도, 내과 인권이도.. 다시 얼굴이라도 보러 가야지.. 10월3일 오후3시에 <무교동낙지>(02-720-3025 청진동 원일빌딩 1층)에서 번개팅을 제안합니다. 광화문역에서 종로구의회쪽으로 오면 더 가깝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아도 혼자서 막걸리 1통을 마시고 안국역으로 향할 것입니다. 제발 100만 국민이 청와대를 에워싸더라도 폭동화되지 않기만을 기원합니다.
2019.9.29 새벽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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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도서출판 나단, 1993 - 4부 10월유신과 이 땅의 지성인들
1974년 7월말 학생회에서는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율치리로 하계 무의촌 봉사를 떠났다. 본과 2학년의 대표는 동시에 학교 대의원회의 부의장이었으므로 함께 따라갔다. 3,4학년 형들은 전공의 선배, 교수님과 함께 환자 진료를 담당했고 하급생인 우리는 아직 임상을 배우지 않아서 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소독하고 뒷간에 우글거리는 구더기 위에다 살충제를 뿌리는 일을 맡았다. 아마 하얀 디디티(DDT) 가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더러운 대소변이 아니라 전부 바글바글 거리는 구더기 덩어리였다. 농민들이 기생충검사를 하기 위해 가져온 소량의 대변을 현미경에 대면 지난 학기 실습시간에 보았던 회충알 그대로였다. 충란 검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고 구충제를 부지런히 나누어 주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게걸스럽게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잠시 배드민턴을 치는데 한쪽에서는 봉사단장으로 따라오신 한용철 교수님께서 소설을 읽고 계셨다. 황혼이 깃드는 산골 초등학교 교정에서 잠깐 틈을 낸 한 교수님의 모습은 여유 그 자체였다. 나중에 무슨 책인가를 봤더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시골에서 하계봉사로 느낀 것은 환자 진료보다 기본적인 보건에 대한 예방문제가 시급하다고 느꼈다. 정신과를 전공하려고 했으면서도 그 당시에는 의사가 되고 나면 무의촌에 가서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학기는 새로운 학사 일정에 따라 내과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임상을 처음 맛보며 기초와 연결시키는 블록(BLOCK)강의였다. 신장학, 내분비학, 순환기학, 호흡기학, 소화기학, 혈액학. 1학년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방법으로 수업을 거부하면 2학년도 동참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대표라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신집단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짓은 하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1학년이 수업거부를 결정하자 나는 과총회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집단의 결정이란 항상 뻔한 것이었다. 1학년 뒤를 따라 2학년의 수업거부 결정을 학생과에 가서 통보하자 학장실로 안내되었다. 학장은 재떨이를 집어던질 몸짓을 하며 화를 냈다. “권영탁이가 학교를 말아먹고, 또 너 혼자 다칠까봐 그런다.”고 고함을 치셨다. 내 뜻도 아니고 학교를 봐서는 죄송스러운 결론이 났지만 학장님이 과대표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느냐고 겨우 조그만 소리로 항변했다.
학장실을 나온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외로웠고 교문 밖에는 동대문 경찰서에서 누가 와서 기다렸다가 잡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지도교수인 고창순 선생님 방으로 갔다. 일어났던 일을 말씀드렸고 잡아가겠다면 피할 수 없겠지만 우선 교문 밖으로 퇴근길에 날 좀 태워 주십사 하고 부탁드렸다. 흔쾌히 응낙해 주셨고 고 교수님의 피아트 승용차를 같이 타고 교문을 빠져 나왔다. 그런 고창순 교수님의 태도는 비굴한 학생과장과 학장에 비하면 너무 대조적이었다.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세배를 드리러가는 참 스승으로 나의 가슴속에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 2학년 초 160명 중 갑자기 10명만 지도교수가 바뀌었는데 내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 분이 바로 고창순 교수님이셨다. 처음에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들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군의관이 되고서야 내가 오랜 세월 정보부의 추적을 받아왔고, 고창순 교수님께서 전임강사 시절 내과 학회 일로 외국에 나갈 때 신원조회로 시비가 있었던 일이 있어서 지도교수가 왜 옮겨졌는가를 생각하게 했다. ‘총장님께 드립니다’라는 편지 이후 조금만 더 활동했으면 나도 고창순 교수님과 함께 간첩으로 발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학생과장은 대구에 계시던 부모님을 호출했다. 학생과장은 부모님 앞에서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과대표를 징계할 수밖에 없다고 공갈 반 진담 반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 개인적으로도 원하지 않고 유신철폐에도 별 의미가 없는 수업거부 같은 토론은 다시 열지 않겠다고 학생과장에게 말씀드렸고 부모님도 안심시켰다. 실제 수업거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실력 없는 의사를 만드는 일에 일조할 뿐이었다. 정보부 압력을 받고 있던 교수님들을 생각하면서, 중립적인 입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는 대표가 아니라 다시는 수업거부, 시험거부의 결정이 안 나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는 대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몇 주 후쯤 수업이 재개되었고 연일 신문에는 유신에 대한 찬반론이 크게 실리고 있었다. 1학년에서 다시 수업을 거부할 테니 2학년에서도 과총회를 열어 달라고 했으나, 이번에는 쓸데없는 뻔한 결정에 도달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며칠 후 수업거부 결정을 내린 1학년생들이 2학년 강의실로 몰려와서 수업을 방해하며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았다. 호흡기학을 한창 강의 중이던 한용철 교수님은 총이 있으면 네놈들 다 쏴죽이겠다고 흥분하시며 1학년은 나가라고 했지만 수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인 내가 나서서 회의를 열어야 할 순서였으나 나는 앞에 서서 만감이 교차되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동급생들을 보았다. 암울한 시대에 그래도 우리는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수업 방해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시는 한용철 교수님을 보면서 용기 있는 참 스승이 또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부모님께 약속드렸던 일도 떠올랐다. 회의를 하나마나 수업거부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같은 결론이 날 이 일에 또다시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이 정보부의 협박과 학생과장의 공갈을 받게 할 필요는 없었다. 끝까지 묵묵히 서 있었고 약속대로 회의만 열지 않았지 결과는 또 수업거부를 지속했다.
민주정치를 제대로 배운 양심대로 한다면 나는 멍청히 앞에 서서 그냥 있을 일이 아니라 뻔한 결론이 날 이 일에 더 이상 회의를 주제할 수 없다고 사퇴했어야 했다. 그러나 곧 2학년이 끝나가는 마당에 언제는 멋대로 대표하겠다고 나서더니 이제는 멋대로 그만두겠다는 소리까지 다 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아무리 같은 결론이 날 일이었지만 두고두고 그날 멍청히 앞에 서 있었던 과대표로서의 내 모습은 많은 동급생들을 실망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수치스럽게 느낀다. 그런 지적을 하는 성환이를 보면서 더욱 부끄러워졌었다. 후일, 그래도 그런 공포시대에 정보학생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하던 내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는 규갑이도 있어서 조금 안도했을 뿐……. 최대의 수치는 지금도 빚으로 남아 있다.
유신철폐에 대한 여론은 무르익어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드문드문 백지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유신정부는 압력에 굴하지 않는 동아일보를 말살하기 위해서 광고주에게 압력을 넣었다. 공포정치 시대의 광고주들은 광고를 취소했고 갑자기 광고 물량을 잃은 동아일보의 광고란은 연일 온 국민의 애국적인 외침으로 조각조각 매워지게 되었다. 아예 기업의 광고는 거의 사라졌다. 드디어 언론이 일어섰다. 언론이 일어선 독재정권은 결코 지탱하지 못한다. 신나는 한판이었다. <一陸軍中尉>라고 적힌 난도 있었다. 아! 얼마나 기대했던가! 학기 도중 수업거부로 1월 말까지 연장된 블록강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나는 앞에 나가 우리도 동아일보의 백지광고의 한 여백을 사자며 갑자기 모금을 했다. 예고 없는 모금이라 3만 원정도 모여서 며칠 후 시험이 끝나는 날 재차 걷어서 한꺼번에 갖다 주기로 했다. 너도나도 동참하던 시절이라 큰 압력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과잉충성을 일삼는 학생과장은 가만있지 않았다. 정보부로부터 얼마나 큰 압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매일같이 나를 불러 백지광고에 서울 의대 이름이 나간다면 큰일이라고 나를 회유했으나 나는 그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교수님이 지금 나처럼 과대표라면 누가 내었는지도 모르는 그 돈을 일일이 어떻게 돌려주시겠습니까? 학생과장님께서 동아일보에 백지광고를 내라고 돈을 갖다 주어도 요즈음은 괜찮을 분위기인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며칠째 나를 달래던 J 교수는 작전을 바꾸었다. 마지막 시험 보는 날 새벽에 밤차로 어머니가 연락도 없이 상경하셨다. 망할 놈의 J 교수가 권영탁이는 부모 앞에서만 약하더라고 생각했는지 전날 대구로 장거리 전화를 하여 큰일이라도 생기는 양 또 공갈쳐서 어머니께서 갑자기 상경하신 것이었다. 웃었다. J 교수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인간일 줄은 몰랐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나라라도 팔아먹을 인간이었다. 당시 상황은 누구든지 돈을 동아일보에 갖다 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정보부 압력을 받는 학생과장 자리라 하더라도 일단 광고가 나간 뒤에는 ‘학생들을 회유해도 하는 수 없었다.’고 보고하면 그만일 그런 분위기였었다. 어머니께 상황을 말씀드려도 이해해 주시지 않았고, 나는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날만 종일 내가 어머니와 같이 있어야한다고 우기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로 가서 학생과장실로 갔다. 시험이 끝나는 대로 학생과장 방으로 내려와서 어머니와 함께 광고 마감시간까지 있다가 집에 가겠다고 약속해 주고는 시험장으로 올라와 학생회 간부들을 찾았다.
모금한 첫날 적은 돈 일지라도 동아일보에 갖다 주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웃기는 일이 벌어져서 나의 모친이 학생과장 방에 와 있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나 대신 돈을 걷어서 동아일보에 갖다 주고 무교동 낙지골목에 있는 <대성집>에서 종강파티를 하기로 했다. 우리는 시험을 보았고, 나는 학생과장실에서 어머니와 J 교수와 같이 두세 시간 잡담을 하다가 광고 마감시간을 넘겨서 종강파티 하러 가야 한다며 무교동으로 갔다.
본과 2학년을 무사히 마쳤고 그 기분에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며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다음날 우리들의 광고를 보고 우거지상이 될 학생과장을 욕하며 주거니 받거니 취했고 통쾌하게 웃으며 2학년이 끝났다.
이튿날 동아일보를 펴든 내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나쁜 새끼들!” 제법 큰 백지광고란에 <의과대학 2학년 일동>이라고만 적혀 있지 않은가! 내가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학생회 간부들이 겁이 났는지는 몰라도 앞에 서울대학교란 학교 명칭을 빼버린 것이었다. 학생회 간부는 학생과장의 수족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곧 내가 한 그 욕은 내가 들을 욕임을 깨달았다. 믿을 놈 한 놈 없는 정보정치 시대의 책임성은 엘리트 집단에서 항상 그 정도가 보편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재시험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고 지난 1년 과대표도 이제 그만 지긋지긋했다. ‘잘난 놈들, 잘 먹고 잘살아라.’하며 스키를 둘러메고 진부령으로 가려고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지난해 만성간염 진단을 받으신 아버지께서 토혈이 심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상경해야 한다는 전화가 왔다. 1월 말에 입원하신 아버지가 3개월 후 운명하실 때까지 아버지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 만감이 다 교차가 되었다.
우선 아버지의 입원 소식을 알게 된 학장님은 화분을 보내 주셨고 교무과장과 학생과장을 대동하고 병실까지 찾아오셔서 나를 황송하게 만들었다. 부대표들을 만나서 과회비가 조금 남았고 우리 학년이 처음으로 블록강의를 거의 다 받았으니 기념메달을 여섯 개 만들어 2학년 담임 교수와 모더레이터 교수님들께 보답하자고 제안하여 교수님 방마다 전해 드렸다. 교수님들은 참으로 좋아하셨다. 그러나 학생과장은 2학년과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고 OO학은 나중으로 미루어졌으므로 J 교수에게는 메달을 주지 않았다. 토혈이 겨우 수습된 아버지 곁에 눈을 감고 누워 있자니 이번에는 연일 계속 되고 있는 동아일보 백지광고가 자꾸 생각났다. 묘안이 떠올랐다. <제 2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2학년 일동> 처음 광고까지 되살릴 수 있는 기발한 발상이라고 자찬했다. 동급생들의 제 3탄, 제 4탄이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1학년, 3학년, 4학년에서도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나의 잡비를 털어서 5만 원을 들고 동아일보로 갔다. 동아일보에서는 메달을 만들어 기념으로 주기 시작했다.
광고가 나가자 학생과장이 호출하는 전화가 아버지 병실로 와서 학생과장실로 불려갔다. “아버지가 위독하신 마당에 무슨 동아일보 광고입니까? 제가 부모님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보고 누가 또 광고를 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만 아버지께 올라가게 내버려 두십시오.”하고 나오는데 “너 말고는 동아일보에 돈을 갖다 줄 놈이 없을 텐데…….”하는 소리에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J 교수는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무학인 나의 아버지에 비해서도 1/100의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 교수라니……. 실제로 광고가 되풀이되어 나가도 경찰이나 정보부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일단 광고가 나가면 그 이후에는 정부로서도 크게 간섭하지 않을 분위기였는데 J 교수만 과잉충성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의과대학에서 무슨 일만 생기면 J 교수는 내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디선가 ‘권영탁이는 데모하지 말라고 앞에 나서서 말리고는 뒤에 숨어서 조종하는 브레인이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일주일을 기다렸다. J 교수 말대로 제 3탄은 없었다. 또 돈을 들고 동아일보로 가서 두 번째 메달을 받았다. <제 3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2학년 일동> 2주일 후 또……. <제 4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2학년 일동> 아! 스크럼을 짜고 연건동 교정을 뒤흔들던 함성을 생각하면 몇 백 탄으로 이어질 줄 알았건만 동급생도, 후배도, 선배도 백지광고란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란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어떠한 경로로 유신에 굴종해 갔는가? 5공 청문회 때 텔레비전에 비춰진 언론사 사주들의 더듬거리던 얼굴들이 대변해 주었다.
J 교수는 최근까지 몇 번이나 경선으로 뽑힌 의과대학 학장이 되고 싶어서 출마했다. 그러나 모교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는 우리 동문들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계속 J 교수를 떨어뜨리고 있어서 지극히 다행스러웠다. 내가 대학에 남았더라면 공개적으로 출마하지 말라고 설득했으련만……. J 교수가 이런 글을 본다면 좀 분수를 알고 그만 조용히 정년퇴임을 준비하시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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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컴 실력이 모자라 사진을 바로 세우려니 안 되네요.. ㅎㅎ..
선생님 오랜만에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은 한번 찾아뵙고 싶지만 저는 시국보다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왜 자신의 생각과 삶이 분열된 양상을 보일까 고민하며 지냅니다. 매일 인터넷으로 조선일보 글을 보며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했었지 하다가 한겨레 신문을 가끔 열어보며 그래도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돌이켜보기도 합니다. 건강하시고 젊은 친구들이 생각보다 자신의 정체성이 약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현실과 대부분 타협을 해야하기도 하구요. 조금 더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연방제로 사회주의, 공산화만 되지 않는다면 잘난 넘들의 정치로 남겨두고 장가갑시다.
좋은 학벌과 좋은 직장을 가지고.. 와 그라노? 대한민국 인구가 모자란다는데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애국합시다.
나이 40이 다되었을 터인데 성적인 문제는 어케 해결하고 사노? 혼자 사는 엘리트들이 독신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사회적인 죄악으로 봅니다. 위의 수필집에디엔가 오랜 세월 독신은 음성적인 매춘에 동참하는 꼴이라고까지 했었는데..
주변의 지인들과 10월3일 오후3시에 <무교동낙지>(02-720-3025 청진동 원일빌딩 1층)에서 번개팅을 제안합니다.
에그머니~~ 10/3일이 지나 갔네요. ㅎㅎ ㅎ 담에 번개 함 더하시죠?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의 여유로운 사색의 추억에 즐거우셨겠습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들어와서 글을 봅니다.
80년대와 군에 다녀와 호헌을 할 때 어눌한 정의감으로 최루탄 가스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이제 386세대도 기득권이되어 초심을 잃어가고 그들이 지키려는 정의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음을
느끼면서 많이 슬퍼집니다.
10월3일 열정친구들이 동대구역에 만나서 광화문으로 갈때 저는 그냥 잘 다녀오라고만 했습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셔야 합니다.
나라를 걱정하시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선생님을 바라보는 많은 환우들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