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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호 ; 서울흥인지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다.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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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호 ; 서울보신각종
이 종은 조선 세조(世祖) 14년(1468)에 주조되어 원각사(圓覺寺)에 있다가 절이 폐사된 후 숭례문(崇禮門)에 옮겨지고 다시 선조(宣祖) 30년(1597) 명례동현(明禮洞峴)(현 명동성당 부근)에 옮겨진 뒤, 광해군(光海君) 11년(1619) 현재의 자리에 옮겨져 파루(罷漏:오전 4에 33번)와 인정(人定:오후 10시에 28번)에 울려 도성(都城)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다.
높이 3.18m, 지름 2.28m, 무게 19.66톤이며 이 종의 양식은 쌍두(雙頭) 용뉴(龍紐)로 되어 있고 종신복(鍾身腹)에는 3조의 굵은 띠를 돌리고 있다. 또한 종구(鍾口)에는 윗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2조의 띠를 돌리고 있어 이것이 하대(下帶) 역할을 하는 문양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종의 몸체에는 “성화 4년 월 일…”이라는 장문의 명문이 새겨 있어 주조년대가 확실한 임진왜란 이전의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종루(鍾樓)은 태조(太祖) 4년(1395)에 창건된 이래 네 차례의 소실과 여덟 차례에 걸쳐 중건이 있었고, 고종(高宗) 32년(1895)에 ‘보신각’이란 현판을 걸게 됨에 따라 이때부터 보신각이라 불리어졌다. 현재의 건물은 서울특별시가 1979년 8월에 동서 5칸, 남북 4칸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세운 것이다.
보물 제3호 ; 대원각사비
이 비는 원각사의 창건(創建) 내력을 기록한 석비로 성종(成宗) 2년 (1471) 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조선(朝鮮) 초기 조계종(曹溪宗)의 본사(本寺)였으나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官衙)로 사용하다가 세조(世祖)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세조는 회암사(檜巖寺) 사리탑(舍利塔)에서 사리를 나누어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각사에 13층의 사리탑을 세웠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 면의 비문은 김수온(金守溫)·성임(成任)이 뒷 면의 추기(追記)는 서거정(徐居正)·정난종(鄭蘭宗)이 각각 짓고 썼다. 반구형의 이수는 비신과 한개의 돌로 보주(寶珠)를 받든 형상의 쌍룡을 조각하였다. 이수 아래 쪽에는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 라는 전액(篆額)을 강희맹(姜希孟)의 글씨로 새겼다.
귀부는 둔중한 몸체로 일반적인 육각형 귀갑문(龜押文) 대신에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연잎 모양의 비좌와 물고기 비늘을 조각한 꼬리와 다리가 조선시대 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전체높이 4.7m, 비신너비 13m이며 비문은 현재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드나 그 내용은《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있다.
보물 제4호 ; 중초사지당간지주
이 당간지주( 幢竿支柱 )는 중초사지( 中初寺址 ) 삼층석탑( 三層石塔 )과 함께 남아 있으며 양 지주가 원상대로 85cm의 간격을 두고 동서( 東西 )로 대립하여 있다. 아무런 조각이 없어 장식적( 裝飾的 )인 의장( 意匠 )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상부( 上部 )에는 약간의 가공( 加工 )이 있어 고식( 古式 )을 보이고 있다. 양 지주의 상부( 上部 )는 내측면( 內側面 )의 면 위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활( 弧 )의 모양을 그리며 위로부터 굴곡 없이 깎여졌다. 당간( 幢竿 )을 고정시키는 간공( 杆孔 )은 양 지주 모두 상·중·하의 3곳에 간구( 杆構 )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는데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공( 長方孔 )을 마련하여 간을 장치하였고 중·하부는 관통된 원공( 圓孔 )에 간을 시설하게 되어 있다. 기저( 基底 )에는 장대석( 長臺石 )의 기반석( 基盤石 )을 지주 사이와 양지주의 외축에 각기 1매씩 깔아서 기대를 삼고 있으며 간대는 지주 사이의 장대석 중심부에 원공을 시공하고 그 주변에 원대( 圓帶 )로 돌려서 마련한 간단한 간대이다. 이곳을 중초사지( 中初寺址 )라고 하는 것은 서쪽 지주의 바깥에 각자( 刻字 )한 명문( 銘文 )에 의한 것이며 이 지주는 신라( 新羅 ) 흥덕왕( 興德王 ) 원년( 元年 )(826) 8월 6일에 채석하여 그 이듬해인 흥덕왕 2년(827) 2월 30일에 세운 조성년대( 造成年代 )가 확실한 명문이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이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원래 보물 5호로 지정되었으나 지방문화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격하되어 보물 5호는 현재 없습니다
보물 제6호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귀부및이수
이 귀부(龜跌)와 이수(이首)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碑身石)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신석(身石)은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서쪽화랑(西廻廊)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高達禪院)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원종대사(元宗大師)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에서 융제선사(融諦禪師)에게 사사(師事)하였다. 22세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藏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세에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서 자선화상(子禪和尙)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경명왕(景明王) 5년(921)에 환국(還國)하여 봉림사(鳳林寺)에 거주(居住)하였다.
그후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入寂)하니 왕이 애도(哀悼)하여 원종대사(元宗大師) 혜진(慧眞)이라 추시(追諡)하고 '진영일정(眞影一幀)'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大師)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귀부(龜跌)는 거대한 단일석(單一石)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龜甲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는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蓮華座) 위에 조출(彫出)되고 상면(上面) 둘레에는 복련문(覆蓮文) 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龜頭)의 면모(面貌)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龍形)이다.
이수(이首)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寶珠)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보물 제7호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이 탑은 고려(高麗) 경종(景宗) 2년(977)에 건조된 원종대사(元宗大師)의 부도(浮屠)이다. 원종대사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9년(869)에 탄생하여 고려 광종(光宗) 9년(958) 90세로 입적(入寂)한 당대의 고승(高僧)이다.
탑비(塔碑)와 같은 연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이며 각부 수법이 매우 섬세 우아한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대표적인 걸작품이다.
보물 제8호 ; 고달사지석불좌
이 석불대좌(石佛臺座)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덩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명쾌한 4각대좌의 수작이다.
이 대좌는 장방형(長方形)의 석재를 상·중·하대 등 3중으로 겹쳐놓은 이른바 방형대좌(方形臺座)이다.
상대(上臺)는 앙련(仰蓮)을 시원하고 뚜렷하게 조각했고, 중대(中臺)는 4면에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음각하였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하대(下臺)는 상대와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覆蓮)으로 새기고 그 아래로 안상(眼象)도 조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형(方形)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로 조화시킨 고려(高麗) 초기(初期) 역작(力作)의 석조대좌라 할 수 있다.
보물 제9호 ; 서봉사현오국사탑비
명종(明宗) 원년(元年)(1171)에 그에게 좌세(佐世)의 호(號)를 내리고 내전(內殿)에 불러 만수가사(萬繡袈裟)를 하사(下賜)하였다고 한다.
명종(明宗) 8년(1178)에 나이 53세로 입적(入寂)하였는데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를 삼고 시호(諡號)를 현오(玄悟)라 하고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비문의 자경(字徑)은 약 3.3cm의 해서(楷書)이며 비형은 위의 양 모서리를 귀접은 규형(圭形)이고 지대석도 간략하여 고려말(高麗末) 석비(石碑)의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다.
보물 제10호 ; 강화하점면오층석탑
이 탑은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형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 면석(面石)에는 양 우주(隅柱)가 모각되고, 갑석(甲石)은 부연(副椽) 없이 상면에 낮은 1단 괴임으로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옥개석 각 1석씩으로 각층 탑신에는 양 우주가 있다. 옥개석받침은 4단 또는 3단으로 불규칙하다.
현재는 탑신 2석과 옥개석 4석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건립연대는 고려시대(高麗時代)로 추정된다. 원래 도괴(倒壞)되었던 것을 1960년 보수 재건하였다.
보물 제11호 ; 사인비구주성동종
사인비구는 신라(新羅) 이래 사원 세습으로 내려오던 승장(僧匠)의 맥을 이은 마지막 거장(巨匠)이며, 전통수법의 재현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構築)하면서 창조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조명하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불교(佛敎) 공예미(工藝美)를 표출시킨 명장(名匠)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朝鮮) 현종(顯宗)·숙종대(肅宗代)의 뛰어난 주종장(鑄鍾匠)이었던 사인비구가 주성한 동종은 총 8구가 알려져 왔는데, 그중 "강화동종(江華銅鍾)"이 1963년 보물 제11호로 지정된 바 있다.
1999년 문화재청에서는 나머지 7구를 일괄 조사하였고, 각 동종의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모두 보물로 지정하였다.
보물 제11-1호 ; 포항보경사서운암동종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인비구(思印比丘)의 주성 종 가운데 조성년대(造成年代)가 가장 앞선 것으로, 비록 종의 규모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종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있다.
둥근 고리모양의 종뉴(鍾뉴)를 갖추었으며, 입상대(立上帶)에 이어 마련된 상대(上帶)를 비롯 네모꼴 유곽(乳廓)과 하대(下帶)가 잘 남아있다.
상대는 연화보상화문을 정교하게 돋을새김하였으며, 하대는 다소 간략한 형태의 당초문(唐草文)을 장식하였다.
입상대는 모두 40개의 세운 연꽃잎 모양으로 각 잎마다 인물상(人物像)을 안치하였으며, 유곽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9개의 유두 대신 5개의 유두를 설치하였다. 유곽 사이의 각 여백에도 보살상이나 위패(位牌) 모양이 아닌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을 배치함으로써 다른 종들과는 달리 '진언'을 문양화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보물 제11-2호 ; 문경김룡사동종
문경(聞慶) 김룡사(金龍寺) 동종(銅鍾)은 신라종의 전통양식을 계승하는 한편 조선후기 종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종으로, 특히 당좌(撞座)는 사인비구의 독창성이 엿보이는 새로운 형태로 같은 해에 만들어진 강원도 홍천군 수타사 동종의 예와 함께 2구의 종에서만 보이고 있다.
수타사 동종에 비하여 각 문양간의 간격이 조밀하지만 수타사 동종의 선행작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보물 제12호 ; 광주춘궁리오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에 5층의 탑신( 塔身 )을 형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상·하기단( 上·下基壇 )의 면석( 面石 )과 갑석( 甲石 )은 여러장의 석재( 石材 )로 구성되었고, 상층기단 갑석에는 얕은 부연( 副椽 )이 있다. 탑신부( 塔身部 )는 초층탑신이 5개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든가, 옥개석( 屋蓋石 ) 하면( 下面 )의 받침이 5단에서 4단, 3단으로 줄어든 것 등은 구조상 불규칙한 면을 보이는 점이라 하겠다. 각층의 체감률은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과 비슷하나 그 규모가 큰 데 비하여, 각부의 조화가 잘 잡혀 고려( 高麗 ) 초기( 初期 )인 10세기 후반의 미탑이라 하겠다.
보물 제13호 ; 광주춘궁리삼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한 높이 3.6m의 석탑이다.
하층기단 면석(面石)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으며,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 우주(隅柱)와 하나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었으며, 상층기단 갑석(甲石)에는 얕은 부연(副椽)이 있고 각형과 호형의 굄이 있어서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 옥개석(屋蓋石)이 각 1석씩이며, 각층 탑신에는 양 우주가 있고, 옥개석 받침은 1층과 2층은 5단, 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은 뚜렷하다. 각층 옥신의 감축비율은 1층 옥신이 지나치게 넓은 것에 비해 2·3층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옥개석도 함께 감축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건립연대는 고려(高麗) 초기(初期)인 10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1966년 보수시 탑 안에서 납석제 소탑들이 출토되었다.
보물 제14호 ;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이 탑비(塔碑)는 장방형(長方形)의 대석(臺石) 상면(上面)에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장방형 홈을 파고 비신(碑身)을 꽂았으며 그 위에 개석(蓋石)을 덮은 형식으로 되었다.
비좌는 별다른 조식이 없고 1단의 괴임뿐이며, 개석 하면(下面)에도 대칭으로 받침 1단을 두었다.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있다.
진각국사(眞覺國師)는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33년(1307)에 출생하여 우왕(禑王) 11년(1385)에 75세로 입적(入寂)하였는데 이 탑비는 입적 다음해인 우왕 12년(1386)에 광교산(光敎山) 창성사(彰聖寺) 경내에 세워진 것이다.
보물 제15호 ; 법주사사천왕석등
이 석등은 통일신라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8각의 하대(下臺)와 8각의 간주석(竿柱石), 그리고 네개의 화창(火窓)이 뚫린 8각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등을 구비하고 있다.
4매로 조합된 4각형 지대석 위에 8각의 기대 각면에 안상을 조각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 화창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다. 옥개석 정상에는 2단의 보주받침이 남아 있다. 이 석등을 중심(中心)으로 앞쪽에는 향로(香爐)를 머리에 인 '공양상('供養像)'을, 뒤쪽에는 '석련지(石蓮池)'를 배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치는 불경(佛經) 중 행원품(行願品)에 "제공양(諸供養) 중 최고(最高)의 공양은 법공양(法供養)"이라 하였는데 향(香), 등(燈), 다기(茶器)인 정수(淨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행원품(行願品)의 법공양의 의식을 실천하고 있는 예가 된다 하겠다. 높이 3.9m
보물 제16호 ; 억정사대지국사비
고려말(高麗末) 고승(高僧) 대지국사(大智國師)의 비로서 조선(朝鮮) 태조(太祖) 2년(1393)에 건립(建立)되었다.
국사(國師)의 속성(俗姓)은 한씨(韓氏), 법명(法名)은 찬영(粲英)으로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15년(1328)에 탄생하여 14세에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원증국사(圓證國師)에게서 5년 동안 수법(受法)한 후 충정왕(忠定王) 2년(1350)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고 32세 때부터 그가 입적(入寂)한 공양왕(恭讓王) 2년(1390)까지 고려왕실(高麗王室)을 가까이서 섬겼다.
국사가 입적한 후 4년째에 건립된 이 비는 여말(麗末)에서 조선초(朝鮮初)에 걸친 과도기의 작품으로 조형상 특색이 없는 매우 간략한 형식이다
보물 제17호 ;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이 비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26년(943) 법경대사(法鏡大師)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최언위(崔彦위)가 짓고 글씨는 명필(名筆)로 알려진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법경대사(法鏡大師)는 신라(新羅)·고려시대(高麗時代)의 고승(高僧)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정토사(淨土寺)를 창건(創建)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태조(太祖) 7년(924)에 국사(國師)의 대우를 받고 태조(太祖) 24년(941)에 63세로 입적(入寂)하니 시호(諡號)를 법경(法鏡), 탑명(塔名)을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이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보물 제18호 정산서정리 구층석탑
이 탑은 이중방형(二重方形)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석탑이다. 하대석(下臺石) 4면(四面)의 면석(面石)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있고, 지선중앙(地線中央)에 꽃모양이 솟아올라 고려시대(高麗時代) 안상의 특징을 여실히 나타냈다.
상층기단(上層基壇)의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1층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2층탑신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우아하게 체감되어 있다. 옥개석도 탑신에 따라 아름다운 체감비율로 되어 있으며, 1층옥개석받침은 5단이나 2층 이상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전부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보아 석탑의 형식이 신라시대부터의 전형형식(典型形式)을 따르고 있고, 상하(上下)의 비례가 아름답다. 단지 석탑 전체의 비례에 비해 옥개석이 납작하고 얇으며 탑신이 높직히 솟은 9층이라는 점에서 안정감이 결여된 점도 있으나, 고려시대 초기에 제법 균형이 잡혀간 거탑(巨塔)의 일종(一種)이다. 그 조성연대(造成年代)는 각부(各部)의 양식수법과 기단의 안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高麗時代) 초기(初期) 석탑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보물 제19호 ; 성주사지오층석탑
이 석탑은 층수(層數)가 다를 뿐 각부의 양식과 만든 솜씨가 같은 절 경내(境內)에 있는 3기의 3층석탑과 동일하다.
이중 이 석탑은 층수(層數)가 다를 뿐 각부의 양식과 만든 솜씨가 같은 절 경내(境內)에 있는 3기의 3층석탑과 동일하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5층석탑으로 하층기단에는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을 갖추고 각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새겼다. 또한 갑석(甲石)에는 윗면에 3단의 괴임을 새겼고, 상층(上層) 기단의 갑석에는 각(角), 호(弧), 각(角)의 탑신괴임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石)으로 되어 있고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 4단씩이며, 추녀 밑은 수평(水平)을 이루다가 살짝 위로 쏠려 올라갔고 낙수면(落水面)도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정상에는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을 뿐으로 형식과 모양 등이 아름답다.
석재(石材) 구성도 규율성이 보이고 있고, 각층의 체감비율도 아름답다. 이 탑의 조성 연대는 낭혜화상(郎慧和尙)과 관련지어 볼 때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0호 ; 성주사지중앙삼층석탑
성주사지( 聖住寺址 )에는 금당지( 金堂址 ) 전면에 5층석탑 1기, 후면에 3층석탑 3기가 일직선상에 건립되어 있다. 이 탑은 3기 중 중앙에 위치한 3층석탑이다. 나머지 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에 조성되어 있다. 상하층 기단 면석에는 우주( 隅柱 )와 탱주( 撑柱 )가 모각( 模刻 )되어 있으며, 갑석( 甲石 )은 상하가 동일한 형태이고, 추녀의 양끝과 중앙에 상하로 3개씩 6개의 구멍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갑석 윗면에는 탑신석( 塔身石 )을 받기 위한 별석이 놓여 있는데, 여기에도 1면에 10개씩의 작은 구멍이 한 줄로 뚫려 있는 것이 주목된다. 탑신부( 塔身部 )는 탑신석과 옥개석( 屋蓋石 )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고, 탑신의 1층석은 약간 크며 4면에 우주형이 있으며 남쪽 면에는 서쪽 3층석탑에서와 같이 문짝모양( 門扉形 )과 자물쇠모양, 수환( 獸環 )이 모각되었으나, 정두형( 頂頭形 )은 없다. 옥개석은 탑신에 비해 넓으며, 받침은 각층 5단이고,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각( 轉角 )은 반곡( 反曲 )되어 있으며 윗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상륜부( 相輪部 )에는 노반( 露盤 )이 있는데 상단 둘레에도 작은 구멍이 돌려 있고, 그 위로 복발형( 覆鉢形 )의 석재가 있다. 이 석탑은 서쪽 탑이 장중한 것에 비하여 경쾌하며 조각 수법도 매우 우수하고, 상하의 비례나 결구( 結構 ) 수법( 手法 )도 정제된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 석탑이다.
보물 제21호 ; 당유인원기공비
백제가 멸망한 뒤 진주한 당(唐)나라의 장수 유인원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 비문의 내용은 유인원의 생애와 공적을 기념한 것으로 건립연대는 문무왕 3년(663)으로 추정된다.
비신높이 3.35m, 이수높이1.14m이며 해서체(楷書體)로 비신(碑身) 앞뒷면에 글자를 새겼으나, 뒷변은 마멸(磨滅)이 심하여 알아 보기가 어렵다. 비신과 이수(이首)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를 가운데 받쳐 들고 있는 6마리의 반룡(蟠龍) 조각 수법이 매우 사실적이며 뛰어나다. 경주(慶州) 무열왕릉비(武烈王陵碑)와 비교되는 작품으로, 전형적인 당비(唐碑)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때의 석비 건립 양식을 밝히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비는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에는 의자왕(義慈王)과 태자(太子) 및 좌평(左平) 이하 700여 명이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압송(押送)되었던 사실과 백제부흥운동과의 전투및 신라와의 관계, 그리고 완전히 폐허가 된 도성(都城)의 모습 등 당시 상황이 새겨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보물 제22호 금산사 노주
명칭은 노주(露柱)라고 하였으나 실제 무엇으로 사용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로서 상부에 놓인 보주(寶珠)만 없으면 방형(方形)의 대좌(臺座)처럼 조성된 특이한 형태의 석조물이다.
형태는 상(上), 중(中), 하부(下部)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대(下臺)·중대(中臺)·상대(上臺) 등에는 안상(眼象)과 화형문(花形紋) 그리고 귀기둥 앙련(仰蓮), 복련(覆蓮) 등은 화려하고 다양하게 각부마다 장식하여 놓았다. 특히 상대석의 상면(上面)에는 일반 석탑의 상륜부(相輪部)를 구비하고 있는데, 상륜부는 원형으로 되었으며 기저(基底)와 정상(頂上)의 보주(寶珠) 사이는 간주(竿柱)형식으로 조성했다. 보주는 연봉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노주는 완전한 석조물로서 상, 하대석 각면(各面)에 조각된 안상이나 연판(蓮瓣)의 양식수법 및 각부의 조성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高麗時代) 초기(初期)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3호 ; 금산사석련대
이 석련대(石蓮臺)는 규모도 크고 그 형태가 희귀한 것이 특징이다. 높이가 1.67m, 둘레가 10m가 넘는 거대한 연화대로 대석(臺石) 전체가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 대석은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면서도 여러개의 돌로 구성한 것처럼 상·중·하대석(上·中·下臺石)의 구성이 정연하며, 하대석의 측면은 10각형으로 8개면에는 안상(眼象)을 음각(陰刻)하고 그 안에 서화형(瑞花形)을 조각하였으며 2개 면에는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윗부분은 복련화(覆蓮花)를 각변(各邊)에 따라 10판을 돌렸는데 힘찬 역동감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중대, 상대 등에는 안상과 화형(花形)무늬, 연화문(蓮花紋) 등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특히 상대석 윗면에는 중앙부분 두 곳에 네모의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여기에 석불입상(石佛立像)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조각 수법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양식을 보이고는 있으나 안상내의 무질서한 배치, 연꽃잎 속의 화사한 무늬나 중대석 안상 내의 귀꽃형 장식 문양 등으로 보아 나말여초(羅末麗初) 대략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4호 ;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
고려(高麗) 숙종(肅宗)(1095∼1105)의 법주(法主)였던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탑비(塔碑)이다. 비문에는 왕사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여 대사(大師)를 법주로 삼았고, 대사 사후에 왕사(王師)로 봉(封)했으며, 시호(諡號)를 혜덕(慧德), 탑명(塔名)을 진응(眞應)이라 했다.
이 비문(碑文)을 쓴 사람은 당대의 명필(名筆)인 정윤(鄭允)이라는 설이 있으며 대사 입적후 15년인 예종(睿宗) 6년(1111)에 해서체(楷書體)로 새긴 비문이다. 현재, 이수는 멸실되어 없으며, 비신 주위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새겼고 양 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나 장식도 없다.
전체적으로 비신은 크며, 두부가 작은 귀부(龜趺)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보물 제25호 ; 금산사오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세운 높이 7.2m의 5층석탑이다.
탑의 구조는 통일신라(統一新羅) 석탑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下層基壇)이 협소하고, 옥개석(屋蓋石) 추녀끝이 살짝 들려 있는 등 고려(高麗)시대 탑의 특징을 보여준다. 기단부는 10여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조립하였는데,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는 양쪽 우주(隅柱)와 중앙에 탱주(撑柱) 1주가 조각되었다. 탑신부는 1층은 여러개의 석재로 조립되고 2층이상은 각각 1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층별 체감비율은 완만한 편이며, 각 옥개석 상면에 1단의 각형 괴임을 하였다.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정상부의 보주까지 온전히 보존되었는데, 노반(露盤)이 크고 넓으며, 그 위에 특이한 형태의 복발(覆鉢)이 있고, 복발 위에 앙련이 새겨진 앙화석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보륜(寶輪)과 보주(寶珠)가 있다.
보물 제26호 ; 금산사방등계단
방형으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나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方等戒壇)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기단은 대석(臺石), 면석(面石), 갑석(甲石)으로 되어있고 상·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佛像)과 신장상(神將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 조각상에는 후대에 조각한 것도 끼어 있으며 하층기단 네 방형으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나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方等戒壇)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보물 제27호 ; 금산사육각다층석탑
이 탑은 고려초(高麗初)의 석탑으로 봉천원(奉天院)에서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높이는 2.18m이며,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든 방형탑(方形塔)인 데 비해, 이 탑은 점판암(粘板岩)의 육각다층석탑임이 특색이다.
이색적인 각층의 체감비례(遞減比例)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원래 이 탑에는 층마다 탑신(塔身)과 옥개석이 모두 1매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옥신석은 각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 중앙에는 원권내(圓圈內)에 좌불상을 선각하였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받침이 있고 이 중심에 용(龍)과 초화문(草花紋)등이 선각되어 이다.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의 탑신과 11개 층의 옥개석(屋蓋石)이 남아 있다.
보물 제28호 ; 금산사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높이 3.5m의 크기로 양 지주가 금산사 경내에 남북( 南北 )으로 상대( 相對 )하여 있다. 이는 기단석( 基壇石 )과 간대( 竿臺 )를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양( 兩 ) 지주의 각면에 장식된 조각수법이 현저하며 우리나라 당간지주( 幢竿支柱 )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식을 갖춘 것이다. 경내( 境內 )에 전해 오는 석련대( 石蓮臺 ), 석종( 石鐘 ), 석탑( 石塔 ), 석등( 石燈 ) 등이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高麗時代 )에 걸친 유물들인데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 성기( 盛期 )인 8세기 후반에 제조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29호 ; 금산사 심원암북강 삼층석탑
이 탑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석탑으로 높이 4.65m이며, 전체적으로 신라탑(新羅塔)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석(屋蓋石)이 넓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급한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는 노반1석만 남아있을뿐,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전체의 형태가 각부의 체감률이 적은 탓으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석재(石材)의 결구(結構)가 규칙성(規則性)이 없고 각부의 조각이 섬약(纖弱)하다. 그러나 심산(深山)에 위치하여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보물 제30호 ; 만복사지오층석탑
이 석탑은 고려(高麗) 문종(文宗)때인 11세기에 세워졌다.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으로, 옥개석(屋蓋石)과 옥신석(屋身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특히 1층 옥신석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의 옥신석부터 약 3분의 1로 감축되었다.
옥신석에는 우주(隅柱)가 조각되었고, 옥개석의 추녀끝이 약간 치켜들려 있으며, 2층부터 별개의 받침돌이 옥신석을 받치고 있다.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1층 옥신석에서 사리장치(舍利藏置)가 발견되었다. 현재 이 탑의 높이는 5.75m인데 5층 부분과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보물 제31호 ; 만복사지석좌
만복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 석좌는 절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는 낮으며,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넓어지고,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이며,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2호 ; 만복사지당간지주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고려(高麗)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불교의식(佛敎儀式)때 부처와 보살의 성덕(聖德)을 표시한 당번(幢幡)을 달던 깃대를 고정시켜 주는 장치이다.
장방형(長方形)의 석주(石柱)를 거칠게 다듬고 아무 장식(裝飾)이 없으며, 깃대를 고정시키는 구멍이 뚫려 있다.
보물 제33호 ;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
팔각원당(八角圓堂)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부도탑(浮屠塔)이다.
높이는 3m로 특히 옥개석(屋蓋石)에서 목조건축(木造建築)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각(模刻)하였으며, 탑신부(塔身部)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사(祖師)인 수철화상(817∼893)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에 입적(入寂)하였는데, 이 부도는 그 당시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물 제34호 ;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석비 상부의 이수(이首) 중앙에는 '능가보월탑기(楞伽普月塔記)'라 전자(篆字)로 새기고, 그 위에 쌍룡이 구슬을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높이는 2.9m이다. 수철화상(817∼893)은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제자로서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사(祖師)이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에 입적(入寂)한 수철화상의 부도탑비(浮屠塔碑)로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出生), 수계(受戒), 득도(得道), 세속 교화, 입적, 조탑(造塔)에 이르는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보물 제35호 ; 실상사석등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보물 제36호 ; 실상사부도
이 부도(浮屠)는 통일신라(統一新羅) 팔각부도(八角浮屠)의 양식(樣式)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高麗時代) 부도이다.
하대(下臺)에는 용틀임과 구름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되었고 팔각중대(八角中臺)는 무늬없이 간소하게 다듬었다. 상 이 부도(浮屠)는 통일신라(統一新羅) 팔각부도(八角浮屠)의 양식(樣式)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高麗時代) 부도이다.
하대(下臺)에는 용틀임과 구름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되었고 팔각중대(八角中臺)는 무늬없이 간소하게 다듬었다. 상대(上臺)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탑신(塔身)은 팔각인데 한 면에만 문(門)을 조각하고 다른 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다.
옥개석(屋蓋石)은 지붕면의 경사가 급하고 기와골은 조각하지 않았으며 팔각의 추녀 끝에 귀꽃이 장식되었다. 옥개석 상부에는 꽃무늬를 새긴 원형 석재가 있고 그 위에 보주석(寶珠石)이 놓여 있다. 전체 높이는 3.2m이다.
보물 제37호 ; 실상사삼층석탑
이 쌍탑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統一新羅) 정형탑(定型塔)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水平)이며 전체의 조형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륜부(相輪部)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통일신라 정형탑의 원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보물 제38호 ;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팔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9호 ;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
실상사에 있는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보물 제40호 ; 실상사백장암석등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가 선종9산 중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절 안의 백장암 남쪽 밑으로 울타리를 마련하여 몇 점의 유물을 보호하고 있는데, 석등은 백장암3층석탑(국보 제10호)과 함께 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각 부분에 새긴 세부적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보물 제41호 ; 실상사철제여래좌상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보물 제42호 ; 용담사지석불입상
불상(佛像)과 광배(光背)를 한돌에 새긴 일종의 높은(高) 돋을새김(浮彫)의 마애불적(磨崖佛的)인 거구(巨軀)의 석불입상이다
얼굴은 마멸 때문에 분명하지는 않지만 힘차고 박력있는 표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상은 장대한 체구, 상당한 어깨, 넓은 가슴, 강건한 하체 등에도 표현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모습은 괴량감(塊量感) 넘치는 석불입상인 것이다.
광배(光背)는 깨어진 곳도 더러 있고 마멸도 심하여 분명하지는 않지만 불꽃무늬의 흔적이 보이며, 대좌는 타원형의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이 불상은 거구 장신의 괴량감 넘치는 불상으로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거불상 계통을 따르고 있는 그 시대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물 제43호 ; 만복사지석불
이 불상은 얼굴, 몸, 옷무늬 등에서 원만하고 부드러운 작풍(作風)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타원형의 양감있는 얼굴, 바로 뜬 눈, 원만한 코, 알맞게 묘사된 입과 함께 특히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있는 표현, 유창하게 구사한 의문선(衣紋線) 등이 자연스러운 작풍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도(三道)나 의문의 형식적인 묘사, 당당하지도 않고 고졸(古拙)하지도 않은 어색하고 위축된 형태 등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만복사는 고려(高麗) 문종(文宗)(1046∼1083, 재위)때 창건된 사찰로서, 이 불상의 양식으로 미루어 만복사 창건때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44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
국보 제289호 익산왕궁리5층석탑 으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해제됨.
보물 제45호 ; 익산연동리석불좌상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百濟)때의 석불좌상이다.
불상의 현 신체높이가 156cm나 되는 이 불상은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下體) 등에서 고졸(古拙)한 활력을 나타내고 있지만 손가락을 구부린 두 손과 팔, 각진 무릎 등에서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무척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다소 느끼게 한 점이라든가, 듬성듬성한 凸형의 옷주름, 굽힌 손가락 등은 꽤 세련된 기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이런 점은 거대한 광배나 큼직한 대좌가 장중하고 고졸한 모양이지만 옷자락을 드리운 상현좌(裳懸座)의 주름이나 연꽃무늬나 불꽃무늬 같은 광배무늬 등은 상당히 정교한 것이다.
이처럼 이 석불상은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불상으로 그 의의가 자못 높다
보물 제46호 ; 익산고도리석불입상
이 불상은 200여m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이 불상은 200여m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二軀)의 석상(石像)인데,
양감(量感)없는 사다리꼴의 석주(石柱)에 얼굴과 손, 옷주름과 대좌(臺座)를 간신히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는 높은 관(冠)과 방형(方形)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 등의 소략한 모습은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이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괴체화(塊體化)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역시 그러한 일련의 작품중의 하나로 무척 친근한 인상을 주고
보물 제47호 ; 성주사지서삼층석탑
이 석탑은 9세기에 조성(造成)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석탑(石塔)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초층 탑신(塔身) 밑에 별도의 받침돌을 받친 것은 고려석탑(高麗石塔)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초층탑신 남쪽 면에는 자물쇠를 채운 문짝(門扉)을 조각(彫刻)하였다. 각층의 옥개석(屋蓋石)에는 4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추녀끝이 경쾌하고 아름답게 약간 치켜 들려 있다. 탑 꼭대기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지고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데 탑의 높이는 4m이다.
이 절에 동서로 건립된 3기의 석탑은 사적기(史蹟記)에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迦葉) 3여래(三如來)의 사리탑(舍利塔)이라 전한다.
보물 제48호;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
국보 308호로 승격 지정하여 보물에서 해제 되었음
보물 제49호 ; 나주동문외석당간
이것은 석당간(石幢竿)과 양지주(兩支柱)까지 완전히 남아 있는 귀중한 유물(遺物)이다. 하부(下部)를 철띠(鐵帶)로 돌린 당간(幢竿)을 지주(支柱) 안쪽 상단(上端)에 파놓은 간구에 끼워서 고착했다.
당간은 8각(八角)으로 다듬은 5개의 화강암(花崗岩)을 다듬어 연결시켜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옥간석(屋竿石)과 보주(寶珠)를 놓았다. 건조시기(建造時期)는 고려시대(高麗時代)로 전체 높이 11m이다.
보물 제50호 ; 나주북문외삼층석탑
원래 나주 북문 밖에 있던 것을 군청내에 옮겨 세운 것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의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된 일반형이다.
하대석(下臺石) 위에 중석(中石)에는 귀기둥(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조각된 4매의 판석(板石)으로 짜여 있으며 기단갑석(基壇甲石)은 2매의 판석(板石)으로 되어 상면이 경사져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탑신석(塔身石)에는 모두 귀기둥만이 있다.
2호 서울보신각종 |
3호 대원각사비 |
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 |
6호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귀부및이수 | |
7호 고달사원종 대사혜진탑 |
8호 고달사지 석불좌 |
9호 서봉사 현오국사탑비 |
10호강화하점면 오층석탑 |
11호 사인비구 주성동종 |
11-1호 포항보경사서운암동종 |
11-2호 문경김룡사동종 |
12호 광주춘궁리 오층석탑 |
13호 광주춘궁리 삼층석탑 |
14호 창성사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
15호 법주사 사천왕석등 |
16호 억정사 대지국사비 |
17호 정토사 법경대사자등 탑비 |
18호 정산서정리 구층석탑 |
19호 성주사지 오층석탑 |
20호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
21호 당 유인원 기공비 |
22호 금산사 노주 |
23호 금산사 석련대 |
24호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 |
25호 금산사 오층석탑 |
26호 금산사 방등계단 |
27호 금산사육각 다층석탑 |
28호 금산사 당간지주 |
29호 금산사 심원암북강 삼층석탑 |
30호 만복사지 오층석탑 |
31호 만복사지 석좌 |
32호 만복사지 당간지주 |
33호 실상사 수철화상능가 보월탑 |
34호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 탑비 |
35호 실상사석등 |
36호 실상사부도 |
37호 실상사 삼층석탑 |
38호 실상사증각 대사응료탑 |
39호 실상사증각 대사응료탑비 |
40호 실상사 백장암석등 |
41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
42호 용담사 지석불입상 |
43호 만복사지 석불입상 |
45호 익산연동리 석불좌상 |
46호 익산고도리석불입상 |
47호 성주사지 서삼층석탑 |
48호 대흥사 북미륵암마애 여래좌상 |
49호 나주 동문 외석당간 |
50호 나주북문외삼층석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