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도올 김용옥의 첫 책은 어디서 나왔을까? 지금은 그가 차린 통나무 출판사에서 모든 책이 나오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도올에게도 "뜬 계기"가 있었던 것.
그의 첫 책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1985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원래 책 제목은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다소 밋밋한 느낌이었는데 이를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로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바꿨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서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설날의 꼬까옷을 기다리는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순수하고 또 열정적으로 나의 책의 출판을 고대하며 모든 주선에 심혈을 기울여 주셨던 민음사 박맹호 사장님께 감사드리며 (…) 다음과 같은 중국인의 명구가 생각난다. 천하무불핍출래적문장(天下無不逼出來的文章, 하늘 아래 쫓기어 나오지 않은 명문이라곤 없다)."
이야기 둘. "건국 이래 최대 베스트셀러"로 기록된(지금까지 1800만 부가량 팔렸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는 1988년 민음사에서 첫 권이 나왔다. 이 역시 박맹호 회장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1983년 연재 시작 당시만 해도 신인에 불과했던 순수문학 작가 이문열에게 박맹호 회장은 과감히 대중 문학 집필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뜨악한 반응을 보였던 이문열은 나중에 <평역 삼국지>를 쓰게 된 경위를 이렇게 밝혔다.
"<삼국지> 연재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겨우 등단 3년차였다. 내가 언제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시 직장을 가질 수도 없으니 뭔가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었다. "노후의 양식"이 될 거라던 박맹호 회장님의 예측은 결과적으로 정확했다."
▲ <박맹호 자서전 책>(박맹호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상의 이야기들은 모두 <박맹호 자서전 책>(민음사 펴냄)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다. 도올 김용옥과 작가 이문열의 뒤에는 박맹호라는 거대한 출판인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책 속에는 이외에도 김수영 시인의 사후에 나와 출세작이 된 <거대한 뿌리>를 "오늘의 시인 총서" 첫째 권으로 출간한 일, 이 시집의 판매로 만들어진 "김수영 문학상"을 통해서 스물다섯 살의 무명 시인이었던 장정일을 발굴한 일, 당시 동양권에서조차 생소했던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번역 출간하게 된 경위(번역본의 애초 제목은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는데 박맹호 회장이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 등 한국 출판 역사의 획을 그은 문화적 사건들을 역사 뒤편에서 만들어온 출판인 박맹호의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다.
<박맹호 자서전 책>은 개인사이지만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다. 이 책은 "한국 출판의 대항해 시대"를, 그것도 가장 한복판에서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책의 대륙들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책을 쓰고 만들고 읽고 있다. 30절 판형과 가로쓰기라는 시집의 형태, 세계 문학 전집이라는 문학의 소비 형식, 우리가 기억하는 무수한 작가들의 이름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확립된 것들이다.
한 개인의 선택이, 저자나 독자가 아니라 역사에 드러나지 않았던 한 편집자의 선택이 한 나라의 문화사와 어떻게 얽히고설켜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한 사람의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한국에서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정말 놓치기 아까운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디에 가서 책에 관한 이런 비사와 야사를 들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사람의 보편적 독자가 아니라 이제 3년차 편집자인 다소 특수한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편집자라는 직업과 책의 미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동네 서점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에 따라 서점에 들어가는 책의 배본량이 점점 줄어들고, 당연히 책의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그리하여 동네 서점의 매출이 떨어져 서점이 멸종 상태에 이르게 된 상황에서, 고도 성장 시대의 출판을 경험한 대선배의 전기를 읽는 것은 어떤 절실함과 맞물려 있었다. 대체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그 어려운 시기에 출판에 임했는가 하는 물음의 답을 찾고 싶었다.
"출판은 어떤 어려움도 책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다. 출판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더 책을 찾았다. 책은 위기를 맞은 인간에게 가장 값싸면서도 가장 유익한 재생의 도구요, 즐거움의 원천이다. 역사의 새로운 국면에서는 대중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책이 필요했다." (214쪽)
내가 잠정적으로 찾은 해답은 이 문장들 사이 어딘가에 있다. 나는 여기서 책에 관한 두 가지 역설을 본다. 하나는 사람들이 풍족할 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울 때일수록 책을 찾는다는 역설, 다른 하나는 책이 유구불변 존재하는 진부한 매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늘 새롭게 등장하는 첨단 매체라는 역설. 책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이자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였고, 오직 그럴 때에만 책으로서의 가치를 얻었다.
▲ 1993년 <동아일보>에 실렸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광고. ⓒ민음사
책을 단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면, 나는 "모험"이 그에 가장 합당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책을 내는 것은 저자에게도 모험이고, 모든 출판사에게도 모험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읽는 한 명의 독자에게도 모험일 수밖에 없다. 책이 독자에게 새로운 모험을 무한히 제공하는 한 책의 가치는 영원할 수 있다. 만약 오늘날 책이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책이 다른 매체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모험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분야에 발을 디딜 때 쾌감을 느끼곤 했다. 새로 개척한 것이 각광을 받고 세상의 시선을 끌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런 기쁨을 얻는 일이라면 돈이 들어도 문제가 될 게 없었다." (159쪽)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박맹호 자서전 책>은 떨림과 흥분, 쾌감과 기쁨에 관한 책이다. 새로운 책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떨리고 흥분되고 쾌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기쁜 일인지를 온몸으로, 인생 전체로 전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 이 책 속에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세상과 끝없이 모험을 해온 한 사람의 지극한 즐거움이 담겨 있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책을 쓰고 만들고 읽기 위해서, 그로부터 나오는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런 지극한 즐거움이야말로 우리가 망각했던 것, 저자는 일상에 쫓겨, 편집자는 업무에 쫓겨, 독자는 생활에 쫓겨 잊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출판 위기론이니 산업 붕괴니 파국이니 하는 단어가 너무 익숙하고 출판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지극한 즐거움을 붙잡고 있는 것은 너무 낭만적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도 낭만도 아니고, 우리가 이미 경험해봐서 알고 있으나 그 경험과 다시 마주치기를 두려워하는 어떤 것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너무도 쉽게 현실 원칙에 양보해온 것은 아닌가.
<박맹호 자서전 책>은 자기 계발과 열정을 강요하는 성공 스토리도 아니고, 자기 개인의 고유한 체험담을 남들에게 자랑하는 허세 섞인 이야기도 아니다. 이 책 속에는 자신의 출판 방향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 새로운 책을 만들어낸 사람으로서의 경험과 체험, 책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다.
여기에는 같은 독자로서, 같은 편집자로서, 같은 한 사람의 출판인으로서 어떤 감정적, 정서적, 체험적 공유랄까, 어떤 보편적인 느낌이 존재한다. 그것은 출판인의 도덕이나 출판이 지켜야 할 어떤 가치 같은 뻔한 말들의 반복이 아니라, 출판인이 출판인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어떤 삶의 윤리, 우리를 책으로 추동하는 어떤 힘에 관한 것이다.
출판, 곧 "책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라는 말에는 이 일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돈벌이나 직업만이 아니라 나의 어떤 가치가 담겨 있는, 인생을 걸 만한, 삶을 바칠 만한 어떤 것이라는 희망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한 출판인의 삶을 통한 그에 관한 증명이라고 나는 느꼈고 또한 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화씨 451>(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서 주인공 몬태그의 입을 통해 예고한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몬태그의 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적 상황, 책을 불태우는 것이 일상화된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책이라는 이름으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남아 있는 한, 책은 여전히 당신의, 나의, 그리고 우리의 레종 데트르(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책 속에는 뭔가 우리들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들어 있어. 그 여자로 하여금 불타는 집 속에서도 빠져 나오지 않고 남아 있도록 만드는, 분명히 뭐가 있어. 그저 괜히 불타는 집에 남아 있었을 리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