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四君는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맹상군, 조나라 평원군, 초나라 춘신군, 위나라 신릉군을 일컫는 말로써 모두 각 나라의 공자(公子)로서, 왕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국정을 도왔으며 거대한 부를 축척했고 그 재력으로 바탕으로 수천 명의 식객들을 거느려 자신의 세력을 천하에 과시했다.
1.齊나라 맹상군(孟嘗君) 田文(?~BC 279?)
선왕의 서제인 아버지(전영)의 뒤를 이은 다음,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후하게 대접하여 그 명성과 실력을 과시하였다. 진(秦)나라 소왕의 초빙으로 갔다가 의심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좀도둑질과 닭울음소리를 잘 내는 식객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는데 이것이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다. 교토삼굴(狡兎三窟)과 풍환의 심오한 고사도 있다. 후일 제나라와 위(魏)나라의 재상을 역임하고 독립하여 제후가 되었다.
2.趙나라 평원군(平原君) 趙勝(?~BC 251?)
평원에 봉하여졌으므로 평원군이라 하였다. 조나라 혜문왕의 동생이며, 혜문왕 ·효성왕 시대(BC 298∼BC 245)에 3차례에 걸쳐 재상이 되었으며, 현명하고 붙임성이 있어 식객 3,000명을 먹였다고 한다. BC 257년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서울 한단을 포위 ·공격하자, 초(楚)나라의 춘신군 및 위(魏)나라의 신릉군 등의 원조를 받아 진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때의 식객 모수가 스스로를 천거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며, 백마비마론을 폈던 궤변가 공손룡도 평원군의 후대를 받은 식객이었다.
3.楚나라 춘신군(春申君) 黃歇(?~BC 238)
초나라 양왕에게 발탁되어 관계에 진출, 진(秦)나라의 소양왕을 설득하여 그의 공격을 막았으며, 그 후 초나라 태자 완과 더불어 볼모가 되어 진나라에 있다가 꾀를 내어 탈출하였다. 완이 즉위하자 헐은 재상에 올라 춘신군이라 칭했으며, 그 후 20여 년 간 권세를 휘두르며, 내치 ·외교로 강적 진과 대항했다. 식객 3,000명을 모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문화보호자로서 그가 살아 있을 때 순자도 초나라에 갔었다. 효열왕이 죽자, 권신 이원에 의해 그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4.魏나라 신릉군(信陵君) 無忌(?~BC 243)
BC 276년 위(魏)나라 공자 무기가 신릉군에 봉해졌다. 신릉군이 조나라의 위급 함을 구하기 위해, 임금의 병부를 훔쳐내어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사를 물리친 사건은 유명한 이야기다. 신릉군은 위소왕의 작은 아들이었고 안희왕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자 그를 신릉군에 봉했다. 신릉군은 덕이 있고 지혜가 있고 또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이문을 지키는 후영이란 늙은 문지기를 스승처럼 위했고, 백정인 주해를 귀한 손님처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