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갈이 하며
유병덕
2015harrison@.naver.com
모두 놓고 왔다. 퇴직하며 받은 화려한 호접란, 고급스러운 철골 소심 등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인사이동 때마다 지인이 보내온 귀한 화분도 마을경로당이나 회관으로 보냈다. 화분을 관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던 이가 화분 하나를 집으로 가져와서 얼떨결에 받아놓았다. 관엽식물이라 활기차게 뻗은 가지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한 촉촉한 잎이 보기 좋았다. 들며 나며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애지중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푸르고 싱싱하던 잎이 힘없이 처지고 누렇게 시들어간다.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처럼 애잔하다.
화분이 집안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서 내다 버리려고 들었다 놨다 하던 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푸릇푸릇한 움이 돋아난다. 구름 사이로 한 줄기의 빛을 보는듯했다. 순간 분갈이하려고 마음을 바꾸었다. 때를 놓친 것 같다. 흙이 단단하다. 개수대에 화분을 집어넣고 물을 가득 채웠다. 흙이 불면 화분에서 뿌리를 빼어낼 생각이었으나 뿌리가 얽히고설키어 빼낼 재간이 없다. 원뿌리에 곁뿌리가 엉겨있는 모습이 가관이다. 다 큰 자식이 부모 곁에 붙어있는 것처럼 볼썽사납다. 생각다 못해 예리한 칼로 묵은 뿌리를 솎아냈다. 그대로 두면 뿌리가 썩어서 죽을 것 같아서다. 화분을 깨끗이 닦고 마사토와 상토를 넣어 분갈이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뿌리가 새로 내리고 잎에서 생기가 돈다.
화분을 보며 잠시 회억에 잠긴다. 결혼할 무렵 친척이나 주변에서 자식을 많이 두라고 성화였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외롭게 보였나 보다. 옹색한 살림이라 하나만 두었다. 아들 숙제를 도우려고 산골짜기에 가서 개구리를 찾고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잡았다. 물놀이 하고 싶다고 하여 외국 출장길에 고무보트를 구해다가 동네 하천에 띄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이 변한 것 같다. 군대 다녀와서 대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집에 다 큰아들과 지내려니 불편하다.
아내의 미소가 왠지 수상쩍다. 하루가 다르게 화분 뿌리처럼 아들과 얽히고설키어 간다. 나이가 들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들이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다. 젊은이들의 삶이 팍팍하고 고단하여 그런지 모르겠다. 어려운 살림이나 내가 도와주어야 할듯하다. 나처럼 사글셋방에서 시작하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새집을 마련해줄 형편도 못 된다. 살던 집을 뜯어고쳐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엌과 화장실을 새롭게 꾸미고 창호와 바닥을 깔끔하게 만들어 놓은 채 아들만 두고 무작정 빠져나왔다.
한해가 지나지 않았다. 빈계산자락 농막 속에서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혼자 살던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처자를 소개하더니 이내 결혼 날짜를 잡는다. 엉겁결에 예식장에 가서 축하한다고 몇 마디하고 뒤돌아서니 손녀가 탄생했다. 후손에게 볕뉘가 비추는 듯하다. 천지조화 속이다. 뒤이어 손자가 태어났다. 하느님의 축복이라 생각하며 아들 내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인생길은 되돌아가는 길이 없다. 머지않아 산에 둥지를 틀 나이다. 분갈이도 때가 있듯 모든 게 때가 있다. 자칫 시대에 뒤떨어지면 노후의 삶이 고달플까 두렵다. 예전엔 대가족을 부러워했으나 요즘은 아닌 것 같다. 혼족이 늘어 나는 추세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낯선 세상이다. 부모와 자식 간뿐만 아니라 부부간에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 같다. 갑년이 지나며 혼자 사는 연습을 시작했다. 밥, 청소, 빨래….
어느덧 세월의 에움길에 몸을 실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둘 정리하는 중이다. 시간이 갈수록 편안함을 좇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수많은 이와 어울려 지내는 게 인생이라지만, 살다 보니 복잡하게 사는 것보다 단출하게 지내는 편이 낫다. 대학이나 관공서 강의뿐만 아니라 방송국의 모니터 활동마저 손들었다. 젊을 때는 화려한 저택이 좋아 보였으나 이제는 관리하기 어려워서 싫다. 비닐하우스 곁에 소박한 농막이 좋다.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이울어간다. 만감이 교차한다. 서녘 빈계산 마루에 초승달이 실눈처럼 매달려 있다. 초승달과 소곤대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큰집에 화려한 호접란과 고급스러운 철골 소심이 꽃을 활짝 피웠다. 놀라서 깨어보니 구겨진 꿈이다.
복잡한 마음이 맴돌다 멈추었다. 농막 한가운데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지난번 분갈이해 준 금전수가 해맑은 얼굴로 피식 웃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가 나온다. 천상에 계신 부모님이 후손을 보았다고 흐뭇해하실지 모른다.
첫댓글 보내 주신 수필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감사합니다.
청롱의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수필 잘 읽었습니다,
유병덕 수필가님 올해도 건필하시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