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관학교 1기생으로 졸업하고 북경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무려 열일곱번의 체포와 투옥을 당했던 시대의 저항시인, 이육사!
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경북 안동 도산면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와 허형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서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었고 원삼(源三)이라고도 했으나 후에 활(活)로 개명했다.
-왕모산이 보이는 육사의 고향
육사는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육사가 살던 시절에 이 마을은 백여호가 살아가는 규모였던 모양이다.
-문학관 가는 길목의 퇴계 종택
"육사의 혈통을 보면 ,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요, 원촌 마을을 열어간 이구의 9대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고, 특히 보문의숙 초대 숙장을 맡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이 학교는 1909년 12월에 진성 이씨 문중을 중심으로 세워진 문중학교이며, 초등과정의 신식교육기관이었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요. 가장 많은 독립유공 포상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다. 이렇게 강직한 저항성이 퇴계 학통에서 나왔는데 , 그가 곧 퇴계의 후손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17세가 되는 1921년 영천군 화북면의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고, 처가 근처의 백학학원에서 공부했다. 1924년 4월 일본에 유학했으나, 1925년 1월 귀국하여 대구 조양회관에서 청년운동을 하며 중국을 드나들었다. 1926, 27년 중국 광동성의 중산대학에서 수학하며 혁명가들과 교유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경주 불국사에서 가족들과 함께 오른쪽 세 번째 앉은이가 육사, 맨왼쪽은 맏형
육사의 형제들은 그 우애(友愛)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장진홍의거(육사의 첫번 옥살이)로 감옥에 갇혔을 때 서로 책임을 떠맡으려 했고, 서울에서 시회를 열 때도 육사는 동생 원일, 원조와 함께 어울렸다. 이러한 형제애를 만들어 낸 바탕에는 어머니 허길의 가르침이 주효 했다 한다. 어머니는 일찍이 형제들이 너무 법도에 얽매이게 되면 우애를 해치게 되니 술과 담배를 함께 하라 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 허길과 육사의 형제들. (가운데 소년이 육사)
억울한 감옥살이 끝내고 『朝鮮日報』(1930. 1. 3)에 발표한 첫 시
말
흐트러진 갈기 후주군한 눈 밤송이 가튼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죽에 지친 말이여!
수긋한 목통 축-처진 꼬리 서리에 번쩍이는 네굽 오! 구름을 헷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말이여!
< 출전 : 『朝鮮日報』(1930. 1. 3) >
-육사의 여섯형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원촌리 집 -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고 없다.
-문학관내에 복원된 생가
맏형인 원기는 대구로 이사 후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문학평론가 이원조(李源朝)는 그의 3째 아우이다.
수몰된 집터 부근에 둥글둥글 청포도 시비가 쓸쓸히 추모객을 맞고 있다.
육사의 두번째 옥고는 이른바 '대구격문사건'에 연루된 체포였다.
이 거사는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과정에서 대구에서도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이어서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다. 그러다가 10월에 대구농림학교가 동맹휴학했고, 1931년 1월에는 대구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에 1930년 11월에 대구 거리에 일본을 배척하는 내용의 격문이 전봇대에 나붙고 거리에 뿌려지는 거사가 일어났다.
육사는 바로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동생 원일과 함께 체포되었고,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육사는 대구 격문사건으로 2개월간 옥고를 겪은 후 1931년에 다시 중국에 가서 김두봉과 만나고, 33년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상해에 들렀을 때, 그는 중국의 문호요 사상가인 루쉰(魯迅)과도 만났다.
이 해에 의열단에서 운영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그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밀양 출신인 윤세주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이육사의 민족해방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열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의열단은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1919년 11월에 중국 길림성의 파호문 밖에서 김원봉·윤세주 등 13명이 모여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일본경찰의 기록에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 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있다.
아래는 1934년 7월 안동경철서 보고내용이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당시 육사가 체포된 곳은 광화문 앞 본정에 자리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청이었다. 이 때 작성된 신원카드가 남아있어, 이를 통해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신분은 상민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의 키는 5척4촌5분인데 1척을 30.3cm 로 계산하면 165cm 이므로 당시의 보통 키에 해당한다.
3개월후인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난 육사는 경찰의 감시 속에서 시와 글을 써 발표하며 세월을 보내는 중, 건강도 악화되어 요양을 하기도 했다. 주로 신석초와 사귀며 여행을 하기도 했다. 신석초에 의하면 육사는 눈이 하얗게 내릴 때만 되면 중국엘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친지와친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1943년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북경으로 갔다.
그는 베이징에서 국내로 무기를 반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 계획을 세운 데에는 1940년대에 들어 국내에서도 독립군적인 조직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과 걸음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943년 7월에 그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마을인 원촌과 안동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다. 부인 안일양은 7월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보았다고 전한다.
20 여일동안 구금생활을 치르다가 "딸 옥비에게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딸의 볼을 얼굴에 대고,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그는20여일후베이징으로끌려갔다. 육사의마지막길이었다.
육사는 1944년 1월 16일베이징일본총영사관감옥에서순국하였다. 혁명이 들끓는 ‘대륙의 역사’에 온 몸을 투여하고자 했던 육사는 마침내 대륙에서 명(命)을 놓았던 것이다.
그유골이든상자를이귀례라는친구집에두었다. 순국후 9일지나 1944년 1월 25일에 동생 원창에게넘겨졌다. 유해는국내로옮겨져미아리공동묘지에안장되었다가, 1960년그의고향마을뒷산으로이장되었다.
안동시내를 벗어나 북쪽 방향으로 25km 올라가면 도산서원 입구가 있고, 여기에서 국도를 따라 언덕 하나를 넘으면 퇴계의 생가가 자리잡은 도산면 소재지 온혜에 이른다. 그 입구에 퇴계종가와 퇴계묘소 및 이육사 생가터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석이 서 있다.
-육사의 친필 원고
'육사는 문단의 어느 유파나 동인에 가담하여 작품활동을 한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짧은 전 생애를 통해서 오직 독립투쟁에 바쳐왔다는 사실이 그가 문단 생활에 전념할만큼 정신적 겨를이 없었다는 이유에서 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시와 일련의 작품들은 대륙을 내왕하면서 품었던 조국에 대한 무한한 향수 아니면, 조국광복에 대한 애타는 情懷의 체현일 것이다.' -김학동. 서강대교수
첫댓글 육사에 대하여 많은것을 알았습니다.그어머니의아들이군요 아버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