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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가현골 어린이는 지날 거리 나무장사를 10여 일해서 번 돈으로
1박 2일 수학여행을 간다.
수학여행비는 1,500원이다.
1969년도 80kg 쌀 한 가마에 4,200원 하고, 짜장면 한 그릇에 40원이고,
라면 100g에 10원하고,
품삯은 남자가 200원 여자가 150원 하던 때다.
수학여행 갈 6학년 총 학생 수가 49명 중 15명이다.
수학여행은 가현골 아이들은 100% 간다.
이는 지날거리나무장사와 갈라산 나물장사 덕분이다.
말로만 듣던 신라의 서울, 경주 불국사로 간다.
기차 소리, 전깃불 구경 못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만 보고
자란 가현골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간다.
여학생은 춘자 혼자이고 남학생은 철수. 덕수. 순돌이 3명이었다.
순돌이는 갓밝이 아침을 먹고 돌가루 속 종이에 싼 김밥을 들고,
운산역 5시 19분 발인 중앙선 새벽 기차를 타러 갔다.
4월 봄이라지만,
갈라산 응달에는 눈이 남아있어 겨울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운산 장터에 지날거리나무장사 하던 추억을 되새기면서
운산역에 도착했다.
역대합실에는 삭풍에 쫓긴 겨울 나그네의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던
톱밥난로가 놓여 있었으나,
불빛 없는 톱밥 난로 혼자 쓸쓸히 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벽에 걸린 늙은 시계가 온 힘으로 추를 흔들어 4시를 알렸다.
선생님이 4시 30분까지 오라고 했는데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추워라’ 연신 토하는 춘자의 빨간 입술은 귀여웠다.
표 파는 아저씨가 있는 사무실에는 톱밥 타는 훈기가 역대합실에 약간은 뿌려진다.
어디를 가려는지 중절모자를 쓴 중년 아저씨가
벽에 걸린 늙은 시계를 쳐보다 말고
철로를 기웃거리는 몸짓으로 오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따리엔 귀한 무엇이 들었는지
오른손 왼손으로 무겁게 옮겨 들다가 힘에 겨운지 빈 의자에 올려놓는다.
살을 에는 추위에 중얼거리는
빈손을 비비며 난로로 가져가 불 소리를 가만히 엿듣는다.
4시 25분이 되니 교감선생님과 우리 선생님이 오시고,
마지막으로 복순이가 왔다.
교감선생님 훈시는,
“기차는 아주 위험하니, 기차가 정차하기 전에는 가까이 가지 마라.
기차가 달리는 힘에 어린이가 기차 속으로 끌려가 죽을 수도 있다.
기차가 완전히 정지하고,
‘선생님이 타라.’라고 할 때까지는
두 사람씩 손을 잡고 제자리에 서서 기다리기 바란다.
변소 갈 사람은 다녀오느라.“
교감 선생님 훈시를 듣고, 변소 갔다 와서
다시 줄을 서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개찰했다.
증기기관차가 막 없어지고 디젤기차로 바뀐 때이다.
긴 기적 소리와 함께 기차는 운산역을 떠났다.
철로 이음쇠를 덜커덕거리며 기차는 바쁘게 지나갔다.
기적 소리와 함께 굴속 암흑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급하게 변하는 차창 밖 낯선 풍경을 바라보던 순돌이는
어지러운 차 멀리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춘자도 옆 친구 봉숙이와 무엇인가를 웃음으로 속삭이다 잠이 들었다.
경주 불국사역에 내려서
선생님 지시대로 대합실 구석 자리에 줄을 지어 앉았다.
앉아있는데도 아직도 기차를 탄 것 같이 몸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많은 관광객이 앉아있는 우리를 보고
“너희들 어디서 왔니,” 하면
춘자가
“안동 원림국민학교에서 왔니 더”
“여기 수학여행 왔는 모양인데 너 부모님은 뭐 하는데?”
“농사짓니 더” 라고 춘자가 끝까지 대답한다.
다 듣고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선다.
또 다른 관광객이 같은 질문 하면,
우리 반을 대표해 춘자는 같은 답을 한다.
그 답을 들은 관광객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선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나름대로 수학여행이랍시고 입은 옷이지만
거지꼴을 면하지 못했다.
덕지덕지한 손등의 때 때문에 손이 틀어서 피가 나고,
콧구멍에는 누런 벌 새끼 두 마리가 들락거렸다.
몇 여학생 머리는 까치집을 철거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춘자는 코는 흘러도 머리에 까치집은 없었다.
대다수는 어린이는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만발했다.
어디를 보아도 촌닭 장터 온 격이다.
순돌이 반 어린이가 경주에 수학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경주 관광 온 사람들에게 또 하나 공짜 구경거리를 제공한 원숭이 꼴이 되었다.
벽걸이형 공중전화가 있어도
돈이 아까워서 전화 사용하지 않고 선생님이 직접 여관을 찾아가셨다.
한참 후에 오신 선생님께서 여기서 점심을 먹고 불국사를 구경하고
오후 3시에 여관에 간다고 하신다.
넉넉지 않은 돈으로 온 수학여행이다 보니,
가격이 저렴한 여관집을 얻어서 일어난 결과이다.
하는 수 없이 역대합실에서 싸간 김밥을 땟물이 꼬치지 흐르는 손도 씻지 않고
김밥을 집어 먹었다.
어매는 김 두 장에 밥 한 옥씨기를 쌌다.
주먹밥을 크게 두 덩어리를 만든 다음에 그 바깥을 김으로 도배한 것이다.
억지로 말하면 김밥은 김밥인데 도배 김밥이라고 하면 맞다.
한쪽을 먹으면 다른 한쪽 김이 터지면서
밥이 마구 떨어졌다. 떨어지는 밥을 두 손으로 뭉쳐서
주먹밥을 해 먹었다.
다른 집 아이들 김밥은 김 사이사이마다 밥이 얇게 고루고루 깔렸었다.
크기도 입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말았다.
순돌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깨끼였다.
김사이 사이로 어떻게 밥을 골고루 펴 넣었는지?
어매는 소풍을 갈 때도 도배 김밥을 싸준다.
김을 아끼려는지
아니면 김밥을 말 줄을 모르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똑똑한 어매가 김밥을 말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한 장의 김을 아끼려고 도배 김밥을 싸주는 것일 거야,
역대합실 바닥에 앉아 점심을 먹고 불국사로 갔다.
불국사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은,
불국사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현세(現世)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김대성이가 완공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나라에서 30여 년이나 걸려서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 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에 약 2,000칸이 있었다.
한 칸이 두 평이니, 건물이 4,000평이나 되었다 하니,….
가현골에 넘어있는 지장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이어서 다보탑과 석가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오후 3시가 되어서 여관집으로 갔다.
여학생 한 방, 남학생 한 방, 선생님 한 방 그렇게 방 셋을 얻었다.
여관집에서 주는 저녁밥에 쌀은 반 정도 섞인 밥인데, 양이 적었다.
저녁을 먹고 선생님 훈시가 있었다.
“바깥에 나갈 때는 둘 이상 조를 짜서 나가면서
여관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나가라.
만약 길을 잃으면, 주위 사람한테 여관 이름과 주소로 물어서 찾아오너라.
그래도 길을 못 찾을 때는
파출소를 찾아서 경찰관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하라.
그리고 애 또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살 어린이는 오늘 저넝에 사야 한다.
내일 아침 일찍 토함산에 올라가 일출을 보고
석굴암을 보고 내려와 아침을 먹고,
첨성대, 왕릉을 보고 여관집에 돌아와 점심 먹고 출발해서
안동 가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선생님 설명을 듣고 난 아이들은 근심 어린 눈으로 서로 쳐다볼 뿐이다.
여유 돈을 많이 가져온 아이가 200원 정도를 가져왔을 뿐인데,
무슨 돈으로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산단 말인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순돌이도 덕수와 철수하고 선물가게 몇 곳을 돌아보는데,
춘자하고 복순이가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서 포장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는 몰라도,
그 옆 가게에는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옷도 잘 입은 또래 아이들은 선물을 많이 샀다.
그 속에 배정숙도 있었으나, 춘자나 순돌은 만나지는 못했다.
선물 몇 가지 가격을 물어보니,
돈 200원으로는 부모님 선물 살 것은 없었다.
순돌과 덕수 철수는 그냥 여관방에 돌아왔다.
누군가 선물가게에서
아버지께 선물할 지팡이를 훔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아이들은 선물가게로 나가 복잡한 틈을 타 요령껏 선물을 훔쳐왔다.
순돌도 고모님을 줄 지팡이 하나를 훔쳐내고야 말았다.
훔칠 때는 친구들 따라 자신도 모르게 훔쳐서 여관방에 돌아왔다.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놈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순돌 자신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훔친 물건을 그 가게에 갖다 주어야겠다는 마음과 갖다 주면 안 된다는
두 마음이 옥신각신하는 싸움으로 순돌을 더욱 힘들게 했다.
만약 지팡이를 그 가게에 갖다 주면서 내가 훔친 것이라고 하면,
가게 주인아저씨가 너 말고 훔쳐 간 아이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른 아이가 훔친 선물을 빼앗길 것이 뻔하다.
아니 물건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경찰서에 붙잡혀 가서 징역을 가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할 짓이다.
선생님께 잘 이야기를 할까? 그것 또한 안 될 일이다.
내일 첨성대도 못 가고 선생님이 종일 우리를 벌씌울 것인데,
그보다 가게 주인아저씨가 하루를 마치고
계산하면 모자라는 것을 알고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온갖 생각에 천근만근 두근거리는 가슴을 쓰려 내렸다.
뛰는 새가슴에 안절부절은 멈추지 않았다.
순돌이는 지날거리나무장사를 해서 괜히 수학여행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도둑놈이 되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는
짓눌린 후회로 밤늦게 잠이 든 순돌은 악몽에 시달렸다.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 2시간을 걸어서 토함산에 올라갔다.
수학여행 오기 전에 토함산에서 보는
감포 바다 일출에 대한 선생님 설명은
“하늘과 바다가 닿은 곳, 바닷속에서 태양이 붉게 불타오르다가
과악제 하늘에 확 올라붙는다.”라고 하셨는데,
애석하게도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름 속으로 붉게 떠 있는 태양만 보았다.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은 김대성이 전세(前世) 부모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석굴암 부처님 이마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일본놈들이 뽑아서 자기 나라로 가지고 갔다.”라는 선생님의 설명만 들릴 뿐
두려움에 두근거리는 새가슴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석굴암은 국보 24호이자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토함산에서 내려와 아침을 먹고 다시 첨성대를 보러 갔다.
선생님 설명은
“첨성대가 신라 시대 천문대인데, 여기서 기상을 관측했다고 한다.
음력 일 년을 상징하는 벽돌 362개로 지었다고 한다.”라는 설명하시는데,
어제 훔친 지팡이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척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후회와 두려움에서 경주 수학여행을 마치고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오는데도 도둑질에 대한 두려움이 순돌이를 괴롭혔다.
가게 주인이 기차 문을 열고 들어오며 순돌 어깨를 낚아채며
“야, 이 도둑놈아!.” 하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아 겁에 질린 눈을 질끈 감고 잠이 들었다.
운산역에 도착하니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한밤중이었다.
수학여행 간 아이들을 마중 나온 부모님들로 역대합실을 가득 메워졌다.
역대합실에서 교감 선생님이 마중 나온 학부모님들에게
“우리 원림국민학교 어린이는 착해서 과자 하나 사 먹지 않고,
돈을 아껴서 부모님 드릴 작은 선물을 사왔습니다.
어머니 아버님들 우리 어린이들을 위해 손뼉 한번 크게 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늦은 밤길 조심해서 가시고,
학생들은 수학여행에서 너무 지쳤으니 내일은 학교를 하루 쉽니다.“
하신 다음에 우리 선생님은
“막카 조심해 가라. 고생 많았다. 여기서 해산을 한다. 반장”
반장 ”차렷 경례“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를 드리고 나서
삐삔 내로 부모님을 찾아갔다. 가현골에서도
순돌, 덕수, 철수, 춘자네 어매가 함께 남포등을 들고 마중을 나왔다.
고모님을 드릴 지팡이를 도둑질한 두려움 때문인지
몰라도 일박 2일이 몇 년보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순돌가 어매를 만나는 순간 안도의 한숨에
반가움까지 겹쳐 순간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이제는 가게 주인이 찾아와서
“야 도둑놈아” 하고 소리친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남포등이 어두운 밤을 갈라놓은 반대편으로 검은 긴 그림자를 따라
아슴푸레한 길을 따라 집으로 간다.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한 소쩍새가 전설에 시를 쓰는 이 길은
먼 조상 할배부터 아부지, 어매가 생명 끈을 이으려고
갈라산에서 장만한 장거리를 이고 지고 팔러 다니든 길이다.
또 이 길로 누이가 시집을 가고, 봉구 시야가 지장사 부목으로 갔다.
세상 모진 풍파에 온갖 비애가 젖은 길로
가현골 처녀 총각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오익을 갔지 않는가?
가현골 사람들의 쓰디쓴 아픔을 씹어 삼켜 준 길!
살아온 나날들에 눈물과 웃음이 석류나무같이
꼬불꼬불한 가현골 사람들의 긴 역사가 숨 쉬는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