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시조를 쓴다
-시어는 쉽게, 뜻은 깊게-
김영애
모든 일에 왕도가 없듯이 시작詩作을 잘하는 일에도 왕도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시조를 지으면서 나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가 정립해 준 文有三多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짓는 일」 만이 詩作의 바른길이라는 것을 지침으로 늘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시조를 짓는 시인들이 시조에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판단하여 시조에 접근하는 자세를 중시하고 나름대로 몇 가지를 고수하고 있다.
시조는 시이기 전에 문학이다. 문학의 목적은 독자들에게 순기능의 변화를 줄 의무가 있다. 그래서 시를 통해 사회고발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표현하는 것은 문학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통해 독자들이 자기를 반성하며 때로는 위로받고 희망을 느끼며 동질감을 느끼는 작품을 쓰는 것이 문학인이 할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한 소재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새롭고 특별한 것을 추구하기보다 가깝고 흔한 것에 눈길을 둔다.
시조는 정형시이다. 내용으로 시조의 품위를 갖추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먼저 외형을 갖추어야 시조라는 생각이고, 시조를 쓰려면 반드시 형식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이 있어서 나는 자수를 많이 벗어난 작품은 읽다가 멈추거나, 마음대로 자수를 줄여 고쳐 읽는 버릇이 있다. 다독이 詩作의 지름길이라지만 이런 작품은 많이 읽을수록 정형을 무너지게 하고, 시조 시인이 우리의 전통 시인 시조의 형식을 앞장서서 파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소견이다. 급변하는 시대라며 시조의 형식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만만치 않지만,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시조에 담는 내용이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조 시인은 시조의 형식을 후대에 바르게 전승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고 싶은 내용을 형식에 맞게 짜 넣는 일이 어려워서 밤을 새울 때도 있었고, 몇 날을 보낸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끝내 외형을 갖추지 못해 미완의 작품을 버리고 싶은 심경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어를 바꾸면서 마침내 형식을 갖춘 그 성취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의미를 살리며 힘들게 외형을 갖춘 작품을 보고 혼자 만족하는 기쁨은 정형 시조를 쓰면서 받는 보상일 거다.
시는 쉬워야 한다. 박재삼 시인께서는 시를 쓸 때 보기 쉽고, 알기 쉽고, 읽기 쉬워야 한다고 기고하신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글은 안된다고 하셨다. 절대 동감이다. 서양의 어느 시인은 자기가 쓴 시를 자기가 부리는 마부에게 먼저 읽게 하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때까지 쉽도록 수없이 퇴고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명심하고 있다. 마부가 없는 나는 시조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인 옆지기 한데 가끔 미리 보여주고 이해나 공감되는가를 살핀다. 시는 특수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쉬운 대중성이 있어야 한다. 앞뒤 어울림 없이 생뚱맞은 시어를 시어 자체가 멋있다고 앉히거나, 독자가 사전을 찾아야 뜻을 알 수 있는 어려운 시어를 쓰거나, 남이 쓰지 않는 특별한 시어를 찾기 위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재삼 시인께서 말씀하시는 『무슨 말을 했는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글』이 될 것이다. 친근하고 쉬운, 보편적인 말로 나만의 생각, 새로운 생각, 나만의 발견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시도 시조도 소설도 심지어 유행가 가사도 쉽게 쓴 작품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은 진리려니 하고 그렇게 쉽게 쓰는 시인이 되려고 한다.
「정형을 고수하며 정형시를 선택해 읽고 낮은 곳에서 소재를 찾아 희망적이고 여운이 긴 공감 주는 시를 쓰기 위해 쉬운 시어로 깊은 생각을 담으려 노력한다.」라고 요약하겠다. 왕도도 없지만, 완성도 없는 어려운 시조 짓는 일에 특별히 개발한 이론도 없이 선행자들이 역설한 이론 가운데 공감하는 내용을 신조로 삼고 시조를 짓는다고 세월을 보냈지만, 그 세월도 곁눈질해보면 짧기만 하고 쏟은 땀방울도 비교해보면 어림없어서 지금껏 절창 한 편 없는 처지가 무척 부끄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