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묵상 글 >
그리스도인의 행복
선과 평화를 전파하는 걸음은 행복합니다.
교회인 어머니의 마음을 소유하며 섬기는 자는 행복합니다.
신비로운 침묵 속에 온 세계를 향한 길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교회의 길을 들어보지 못하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는 하느님의 사신들은 행복합니다.
가정마다 사랑의 기쁜소식과 주님의 사랑을 가져다 주는 주님의 배달부는 행복합니다.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침묵 속에 설교하는 사제의 협력자는 행복합니다.
걸어가는 길 위에 겸손과 사랑과 결백함의 향기를 풍기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목동과 동방박사, 그리고 성전에서 또 제자들과 온 세상에 예수님을 주신 마리아를 본받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소유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아버지와 함께 고통과 기도와 활동을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길을 걷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나 너희와 함께 中에서>
++++++++++++++++++++++++++++++++++++++++++++++++++++++++
연중 제27주일 (군인 주일)
2012. 10. 7
마르코 10, 2 ~ 16
♠ 복음 연구
* 2~12절 : 모세가 이혼법을 반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혼을 찬성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부부일신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부득이 잠정적으로 그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7절은 창세기 1장 27절의 인용문,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드셨다고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했다. 마르코는 논쟁과 단절어를 연결하려고 제자교육 10절을 만들어 삽입했다.
* 13~16절 : 이 대목은 어린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상황어와 어린이처럼 처신해야만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단절어로 짜여 있다. 상황어에는 여러 어린이가 나오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데 아무런 조건도 없다. 그러나 단절어를 보면 누구든지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조건 아래 하느님 나라로 갈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들 차지라는 말씀은 그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차이이며,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되리라는 행복 선언문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한결같이 오늘의 못난이들에게 무조건 종말의 축복을 약속하는 희망의 말씀들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는 소외자들을 돌보시는 선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15절은 본시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 온 단절어인데, 어린이들은 빌어먹지 않고 받아먹는다. 그처럼 아예 하느님 나라를 벌어들일 생각은 말아야 한다. 바리사이 마냥 율법준수로 지금 공덕을 쌓아 장차 하느님 나라를 벌어들일 생각을 한다면 큰 잘못이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 하느님 통치, 곧 하느님은 오늘도 은혜롭게 오시므로 그 분을 맞이할 생각을 해야 한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께 돌아섬이요, 기댐이다. 지금 힘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면 장차 ‘힘차게 오는’
그 나라로 들어 갈 것이요, 지금 꼭꼭 숨어 계신 하느님을 모셔 들이면 장차 환히 드러나실 그 분께로 갈 것이다. 믿음의 차원에서 언제나 은총이 공덕보다 앞서고 은혜가 선행보다 앞서는 법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다. 그의 가르치심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때때로 사람들은 궁금한 점들에 대해 질문하였다. 본문의 경우에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하였다. 이것은 비난거리를 찾기 위한 질문이었다. 바리사이들은 배우려는 태도가 없는 자들이었다. 하느님의 아들이 와서 가르치시는 데도 그러하였다. 교만한 자들은 어떤 훌륭한 선생이 와서 가르쳐도 배우려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은 어떤 보잘것없는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인다.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심령은 매우 불쌍한 심령이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귀 기울여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모세는 사람이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을 허용하였다. 사람들은 완악하여 연약한 아내를 학대하고 그를 울게 하고 가슴에 못을 박으며 그를 버리기까지 한다. 사실, 아내를 구박하는 악한 남편을 생각하면 여자에게는 차라리 이혼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혼이라고 해서 구타를 당하고 마음과 육체적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 차라리 갈라서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혼에 대하여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반대됨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결혼한 남녀는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관계를 사람이 나눌 수 없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든지, 아내가 남편을 버리든지, 버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 상대를 사랑치 않는 것은 큰 악이다. 주께서는 이혼이 합당치 않음을 가르치시면서 그 근거로 최초의 결혼과 부부관계의 의미를 드셨다.
결혼은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라는 말은 부부관계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임을 보인다. 즉 부부는, 비록 서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난 관계일지라도, 친밀한 부모-자식 관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는 가장 진실하고 밀접한 사랑의 관계이어야 한다. 그 관계는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부부관계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되고 지켜져야 할 관계이다. 우리나라는 '시집온다'라는 말이 보편적인데반해 성서는 남자는 부모를 떠나 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이와 결혼하면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이와 결혼하면 역시 간음을 행함이다.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부부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아내를 두고’ 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 ‘그에게’라는 말인데, 그것은 본처보다 재혼한 상대를 가리킬 것이다. 잘못된 이혼에 근거한 재혼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
♠ 대화 방향 : ① 유다인들은 가족의 범위를 혈족이라 생각했다. 친척들이 모여사는 마을과 달리 오늘날은 같은 구역에 사는 천주교들의 공동체생활, 즉 소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이웃교우들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지요?
② 더 나아가서는 외인들과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혹시 그들이 가난하거나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 그들과 단절하고 지내는지요? 우리들의 가르침인 아나윔 정신과는 어떤 관계인지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 참고 문헌 : ▪ 성서 주해서 ▪ 마르코 주해서
++++++++++++++++++++++++++++++++++++++++++++++++++++++++++++++++
연중 제28주일
2012. 10. 14
마르코 10, 17 ~ 30
♠ 복음 연구
* 17~22절 : 예수님이 청년을 바라보시는 눈빛을 보라!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 온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 그리고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자선이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부족한 것 투성이인 우리는 청년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한가지뿐이었다.
* 23~30절 : 예수님은 나눔을 말씀하신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그대로 구원의 장애가 되는것은 아니다.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러나 재물에 사로잡힌 마음이 문제이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재물로 자선을 베푼다면 오히려 축복의 원인이 된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다. 재물만이 아니다. 재능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다. 그것에 노예가 되면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다. 청년은 순박했으며 계명에 충실했다. 하지만 재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재물을 모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재물을 있게 하신 주님의 힘을 모르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셨다. 나누는 자유로움을 체험한 뒤 만나자고 하신 것이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의 삶이 바뀔 수 있는 만남을 그는 놓치고 말았다.
재물에서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 보다. (2012, 5,10 연중8주일 복음묵상)
♠ 복음 요약 : 요한바오로 2세께서 언젠나 사용하신 말씀 “토투스 투우스 저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재물에 마음을 온전히 뺏기지 않고 우선순위를 주님께 둔다면 그에게는 재물의 축복은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 봉쇄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자들을 보면 언제나 그들을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아무런 수입이 없지만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시켜 빵을 보내주신 것 처럼 먹을 것 마실 것 을 주님께서 까마귀(은인들들을 통하여 채워 주신다.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뮬러라는 개신교신자가 있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주님께서 다 응답해 주셨다. 성녀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였다.
♠ 대화 방향 : ‘자선’의 체험에 대해 서로 나누어 보자.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2012. 10. 21
마태오 28, 16 ~ 20
♠ 복음 연구
* 16절 : 자살한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갈릴래아의 어느 산으로 갔다. 이방인들의 지역인 이곳은 구원의 빛이 비칠 것이라고 예언된 곳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산위에 나타나서 이 예언을 실현하셨다.
* 17절 : 산 위에서 예수님을 뵌 열한 제자 중에는 그분을 경배한 이들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첫째 부류의 제자들은 그분을 뵙고 절하며 부활하신 주님으로 받들어 모셨다. 그들과는 반대로, 둘째 부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같은 분이신지 의심했다.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뵙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을 떠야 하는데 그들은 아직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몇몇 제자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열 한 제자에게 사명을 내려 당신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증명하셨다..
* 18~20절 :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고, 온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주권에 참여하는 주님으로 제자들에게 임하셨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느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게 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으로서 모든 민족, 즉 이방인들과 유다인들 모두에게 세례를 주고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는 제자로 만들라고 열한 제자를 파견하셨다. 그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는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을 제외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으나, 부활하신 뒤에는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모든 민족’, 즉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다인 모두에게 선포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분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 하셨으나, 그들이 구원의 복음을 거절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열한 제자는 온 세상으로 나아가서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받는 이들은 하느님과 인격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복음선포를 돕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제자들과 함께 활동함으로써 그들의 사명수행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 계신다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부로부터 천상천하의 모든 권한을 물려받으셨다. 우주적 주권이 확립되셨음을 선언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다. 파견 사명은 모든 민족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또 받는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적 관계 즉 생명의 유대 관계를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시고 항상 나와 교회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힘이 되어 주실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나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심을 알고 느끼고 있는가? 그분의 현존을 느낄 때를 생각해 보자.
② 우리는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나는 교회 공동체 건설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 출판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사)
+++++++++++++++++++++++++++++++++++++++++++++++++++++++++++++
연중 제30주일
2012. 10. 28
마르코 10, 46ㄴ ~ 52
♠ 복음 연구
* 46절 :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열두 제자와 그 밖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 외에도 예루살렘을 순례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과 함께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리코에 잠깐 들렀다가 떠나실 때에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와 마주치게 된다. 당시 의술로는 여러 가지 눈병들을 거의 치료할 수 없었고, 앞을 못 보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거지가 되어 구걸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 47절 : ‘예수’ 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나자렛 사람 예수님’ 이라고 출신지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다윗의 자손’ 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인데, 바르티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뒤의 51절을 보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하는 말이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친다. 그가 베풀어달라고 외치는 ‘자비’ 는 그저 몇 푼의 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
* 48절 :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 이라는 칭호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제자들은 공공연하게 그런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든 사람들은 바르티매오에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조용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더욱 큰 소리로 외친다.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 그에게는 신앙의 시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소망과 믿음은 그 시험을 극복했다.
* 49절 :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소망과 믿음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게 하신다. 이제 군중들은 태도를 바꾸어서 ‘그분께서 너를 부르신다.’ 라고 예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된다. 사람들이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라고 격려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없었던 믿음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치유의 기적을 그들의 입을 빌어 암시하는 것이다.
* 50절 : 그런데 지금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고,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듣자 겉옷을 벗어던지고 예수님께 간다. 이것은 그가 그만큼 흥분했다는 뜻인데, 자기의 낡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51절 :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그의 믿음을 좀 더 강화시키고 그에게 직접 소원을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질문하신다. 그러자 눈먼 이는 시력 회복을 청한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의 원문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새번역 성경처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말이다. 즉 그의 시각장애가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후천적인 시각장애, 즉 시력이 있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선천적인 시각장애보다 더 절실할 것이다.
* 52절 : ‘가거라’ 라는 말은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라 라는 뜻일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은 5장 34절에서 하혈증을 앓던 여인에게도 하신 말씀인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다. 하혈증을 앓던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일이 먼저 있었지만, 바르티매오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믿음에 달려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동작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바르티매오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베푼 자비와 기적은 시력회복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시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결합할 수 있게 되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는데,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각오로 뒤따라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지만,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죽음의 길에 합류했다. 그의 믿음은 그의 눈을 뜨게 했고, 구원을 얻게 했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 대화 방향 : ① 내가 만약 바르티매오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 앞에서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생각해 봅시다.
②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의 삶에 힘이 되었거나 변화가 생긴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송영진 (모세) 신부 성경 해설
+++++++++++++++++++++++++++++++++++++++++++++++++++++++++++++
아나윔의 그림자들...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FB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성서형제회(FB) 창설자 최 바오로마리아(규업) 신부님께서 ‘아나윔을 실천’하시려고 머나먼 이국땅, 에콰도르에 선교사로 가셨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 곳 한국에는 아나윔 수도정신을 바탕으로 한 평신도단체를 만드셨습니다.
‘성서형제회(FB)’ 말입니다.
전주교구의 인준 등으로 인해 어느 정도 단체로서 기본 뿌리를 내린 듯합니다.
일 년에 몇 차례의 정기 행사와 피정 그리고 전국 봉사자 월례회를 갖기도 하고, 회원선서를 하기도 하여 짜임새있는 프로그램을 영위해 나가고 있어서 다른 단체보다는 좀 더 영성적인 활동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평신도들이 그 문제를 분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성서연구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늘상 강조하더라도 아나윔정신을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연결시켜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음이 다소 안타까울 뿐입니다
재속회라는 것이 국내에 들어온 몇몇 수도단체에서 활용하는 방법이지만, 실상 세속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평신도들이 수도자처럼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무릇 지난 하계연수회 장소였던 초남이 성지에서의 순교자 유항검 아구스팅님을 생각하면서, 온전히 이러한 삶을 실천하려고 하셨던 그 정신을 우리는 어찌 이어받아야 할지가...
지금은 박해시절도 아닌데 말입니다...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것이 이것은 아닌데...’ 하면서 참여하곤 한답니다.
++++++++++++++++++++++++++++++++++
<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2년 8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