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승동교회는 신도수가 16명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교회였다.
이처럼 작았던 승동교회가 한국교회의 역사와 근현대사에 빠질 수 없게 된 것은 사무옐 무어가 사람으로도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천민이었던 백정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신분제 철폐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중략)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아버지를 위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치료비가 없던 박성춘을 치료해 줄 의사가 한 명도 없었다.
박봉출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을 백정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던 무어 목사를 찾아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신분제에 구애받지 않던 무어 목사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울며 매달리는 박봉출의
정성에 감동하여 당시 고종의 주치의로 있던 에비슨을 찾아가 박성춘을 치료해 주기를 부탁했다.
무어 목사의 간절한 부탁과 박봉출의 효심에 감동한 에비슨은 의료 가방을 가지고 냄새나고 누추한 박성춘의
집을 직접 찾아가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에비슨의 치료를 받아 살아난 박성춘은 자신을 인간으로 봐주고 생명을 살려준 무어 목사와 에비슨에게 깊은
감등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
백정이던 박성춘과 그의 자녀들이 승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자 승동교회를 다니던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정을 교회에 받아들이지 말 것을 무어 목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며,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날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백정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양반 출신의 신도들은
교회를 떠나 홍문수골교회를 새로 세웠고, 승동교회의 교세는 점차 약해져 갔다.
박성춘은 자신을 살리고 교회식구로 받아들인 일로 어려음을 겪는 교회를 위해 주변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그 결과 많은 백정들이 승동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승동교회를 백정 교회라 볼렀고, 교회는 늘
어난 신자로 다시 교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두 교회는 다시 합쳐 1905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교회 건물을 세우게 된다.
그 후 박성춘은 1911년 백정으로는 처음으로 장로가 되어 500년 간 이어져 온 신분제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
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 있던 박성춘을 살린 아들 박봉출은 에비슨이 콜레라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효과를 보고
의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이를 눈치 챈 에비슨은 영민하고 의지가 매우 강한 아이였던 박봉출에게 서양의학을 본
격적으로 가르쳤다. 에비슨의 도움으로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병원)에서 8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박봉출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이후 박서양으로 개명한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 일곱 명 중에 한 명이 된다.
이후 박봉출은 배움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간도에 숭신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독립운
동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참여하여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승동교회는 박성춘을 통해 백정을 차별하는 사회적 인식이 잘못임을 실천을 통해 알렸다. 박봉출을 통해서는
백정도 이 나라의 어엿한 국민으로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백정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필요하며, 지금보다 나은 세상올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승동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특별함을 갖고 있다.
〈유정호,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브런치북 『족집게 한국사』,
https://brunch. co. kr/@u842/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