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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18일 화요일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우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라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스승의 구실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듣고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고 실행하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가르침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유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환호하자, 나귀가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는 줄 알고 우쭐해하였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스승이나 선생, 또는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의도적으로라도 자신을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바로 겸손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스스로 겸손해야 할 때를 알아차렸다면, 그토록 오만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오만해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마태 18,4)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해지려는 태도는 다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만나기만 하면 강력한 경고 말씀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날 선 발언의 이유들은? 거룩함을 가장한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말과 실제 삶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이중성 때문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앞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덕에, 그리고 조금 나이가 든 덕에,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주로 하는 일이 허드렛일에다 수렵 활동이다 보니, 늘 입고 다니는 옷은 시장표 작업복이요 추리닝입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몇 년째 배수로에 켜켜이 쌓이고 또 쌓인 낙엽더미를 제거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 보니, 참 좋은 것이 많습니다. 넘어져도 크게 충격받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높은 데 있다가 급추락하는 사람들은 기본이 전치 8주인데, 낮은 데 있다 보니, 넘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즉시 일어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가난한 사람들, 절박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어린이들, 작은 이들, 낮은 이들은 대체로 교만하거나 위선적이지 않더군요. 그들의 삶은 그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기대치가 크지 않으니, 삶이 소박하고 겸손합니다.
반면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지도자들, 고위층 인사들의 언행을 보니 엄청나게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경향이 컸습니다.
어떻게든 높이 올라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봐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니 말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폴레옹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고는 보통 왕관을 씌우는 의식은 교황이 주례를 맡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자신이 모든 권력의 근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황제란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이룬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황제 즉위 후,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의 황제 권위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패배와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가 칭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그의 군은 대패했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엘바 섬으로 유배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기까지 가톨릭 신앙을 주장했지만, 자아를 누르지 못하는 그냥 종교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그 사람을 바로잡아주었던 예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본래 깊은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링컨은 오히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아갔고,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여러 번 실패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족의 죽음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으며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이후,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리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가 분열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링컨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은 그의 내면에 깊은 신앙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 기간 동안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들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의 무게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해지고, "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섭리를 정치적 결단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또 이같은 신앙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는 “하느님 아래 새로운 자유가 탄생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라는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링컨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위안이나 심리적 안정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때 도덕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링컨이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깊어진 관계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노예제 폐지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가장 앞장서서 적과 맞서는 용맹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지만,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점점 독재자의 모습을 띠었고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국민 영웅인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칭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모습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악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지에 대한 그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 때문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자아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선한 신을 믿고 지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되어갑니다. 사울 왕이 왕이 되고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자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겸손해진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부르시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불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불리셨고, 또 제자들을 “아이들아!”(요한 13,33: 21,5)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 겸손하셨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치가 바뀌더라도 그것들은 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섬기기에 자리에 따라 자기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인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양의 종교가 아닌 참으로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직 신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려는 존재기 때문에 자아를 누를 수 있는 분은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누르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신은 그 사람 안에서 아직 신은 아닙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4월 26일 토요일에 황창연 신부님이 ‘선교 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수녀님이 포스터를 2장 만들었습니다. 사목 회의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사목 위원들은 대부분 파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를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을 전공한 주일학교 선생님과 홍보분과장은 하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가 좋다고 했습니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신문 광고에서도 파란색 바탕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장 눈에는 파란색 바탕이 좋아 보이지만 홍보용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파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던 사목 위원들도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하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습니다. 구역을 나누는 것은 구역분과에서 하고, 사제관 신축은 건축 위원회에서 하고, 본당 설립 50주년 행사는 준비 위원회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사회는 다수결이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은 결코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길, 생명 또한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한 환경파괴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는 우주에 여러 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고,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소중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자원을 재활용하고,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켜야 할 의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고난받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지은 나를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결단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 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울 수 있다면,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핀다면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 프리그디아노(Frigdianus)
활동년도 : +588년?
신분 : 주교
지역 : 루카(Lucca)
같은 이름 : 프레디아노, 프리그디아누스
이탈리아에서 프레디아노(Frediano)라 불리는 성 프리그디아누스(또는 프리그디아노)는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지방 왕의 아들로서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순례하던 중에 루카를 지나다가 몬테 피사노(Monte Pisano)의 은둔소에 마음이 이끌려 스스로 정착하였다. 그가 주교로 간택된 이유는 그의 높은 성덕 때문이었다. 교황 요한 2세(Joannes II)까지 동원되어 은수생활을 중지하고 교회를 위해 더 많은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7년 동안 평화스럽게 주교직을 수행하던 중에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침략을 받고 주교좌가 불탔다. 그 후 그는 이를 재건하였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표시하였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이와 병자들을 직접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은수생활을 잊은 적이 없었고 기회가 오면 즉시 돌아갈 자세로 살았다. 그는 성직자로 살았으나 생활은 은수자의 엄격한 생활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대화집” 속에는 그에 의한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임종이 다가 온 줄 알아차린 그는 주변에 있던 자기 수도자들을 불러서 함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잠을 자는 듯 고요하게 운명하였다
성 에두아르도 (Edward)
활동년도 : 962-978년
신분 : 왕,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애드워드, 에두아르두스, 에드아르도, 에드아르두스, 에드와드, 에드워드, 에드워즈
영국의 평화 왕으로 불리는 에드가(Edgar)의 아들인 성 에두아르두스(Eduardus, 또는 에두아르도)는 962년에 태어났다. 에드가 왕이 죽었을 때 성 에두아르두스와 그의 이복동생 에텔레드(Aethelred)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그가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성 에두아르두스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양어머니 엘프리다(Elfrida)의 명령으로 도르셋셔(Dorcetshire)의 코프(Corfe)에서 무참하게 살해되어 웨어햄(Wareham)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성 에두아르두스는 그가 평소에 베푼 선정과 뛰어난 신앙심으로 인하여 성인으로 또 순교자로서 늘 공경을 받아왔다. 그는 단순한 생활을 했고 또 순교자에게 어울리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성 안셀모 (Anselm)
활동년도 : 1036-1086년
신분 : 주교
지역 : 루카(Lucca)
같은 이름 : 안셀름,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이탈리아 만투아(Mantua) 태생인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삼촌인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에 의하여 1073년 루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안셀무스는 즉시 황제의 서임권 논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헨리 4세 황제가 주는 주교직의 상징 접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는 클루니악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고, 그곳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로부터 소환 받은 그는 엄격한 생활이 결여된 사람들을 조정하는 일을 보았다.
1079년에 그는 카노사(Canossa)로 은퇴하여 마틸다 백작 부인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수도자 개혁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평신도 서임권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여 맹활약하였다. 그레고리우스의 사후 빅토르 3세(Victor III)가 그를 교황청 시찰자로 임명하여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여러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는 만투아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성덕과 성서 지식 그리고 해박한 학식은 높이 평가받는다.
성 살바토르 (Salvator)
활동년도 : 1520-1567년
신분 : 수사, 증거자
지역 : 오르타(Horta)
같은 이름 : 살바도르, 살바또르, 쌀바또르
오르타의 성 살바토르는 에스파냐 헤로나(Gerona) 교구의 산타 콜룸바(Santa Columba)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기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거리를 헤매다가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기료장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여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고자 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처음에는 수도원 부엌일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덕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토르토사(Tortosa)의 예수 마리아 은둔소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하였는데, 맹인과 벙어리 그리고 불구자들이 그에게 오면 항상 치유를 받는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는 항상 맨발로 다녔고, 매일 편태를 했으며, 길고 엄격한 단식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그는 특히 성모 마리아와 성 바오로(Paulus)에 대한 신심이 투철했으며, 수 차례에 걸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그는 4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으나,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1606년 2월 5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8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살바도르(Salvador)로도 불린다
성 치릴로(Cyril)
신분 : 주교, 교부, 교회학자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 315?-387년
같은이름 :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Maximus,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이던 아카키우스(Accacius)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키릴루스는 타르수스(Tarsus)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Seleukeia)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키릴루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를 팔레스티나(Palestina)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Nicaea)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키릴루스와 성 그레고리우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키릴루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사실 성 키릴루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24편의 강론으로 구성된 “예비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콘스탄틴 대제가 336년 예루살렘에 완공한 성묘 성당(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348년 사순과 부활시기에 한 강론으로 예비신자와 새 영세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명쾌한 지침서이자 교리 해설서이다.
또한 전례적으로도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성 키릴루스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그는 교황 비오 10세(Pius X, 1903-1914년 재위)에 의해(또는 1882/3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